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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어떤 나라인가? - 동서양의 만남이 있는 곳
로마, 비잔틴(동로마),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귀중한 역사적, 문화적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고도 콘스탄티노풀, 기원전과 후에 걸쳐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로서 주요 무역항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쇼핑을 위해 다녀갈 정도로 융성했던 고대도시 에페스(Ephesus), 호머의 일리어드(The Iliad of Homeros)의 무대였던 트로이(Troy), 지하도시와 암굴교회로 유명한 카파도키아(Cappadocia), 그리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도시들은 세계적인 관광지다. 나라로 성장될 것이다. 세계의 반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했고, 18세기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자연의 축복 받은 선물이요, 역사적 유적을 동시에 간직한 곳이 이스탄불 말고 또 있겠는가!"하고 극찬한 이 도시는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선으로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 있으며 물의 화환이 도시의 경계선이 되고 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어 물의 화환에 둘러 싸여 있는 도시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수도로서 약 1500년간 영화를 누려왔고, 두 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문명이 서로 맞닿은 도시이다. 콘스탄티노풀이라 불리게 되고, 1453년 돌궐족인 오스만투르크가 정복하여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이라 부르게 되었다. 터키는 내가 95년도에 처음 방문하고 이번이 3번 되나 봅니다. 그래선지 공항에 내려도 전혀 날설지 않고 옆동내 온 기분이네요.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누님과 매형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근사한 레스토랑에 3일전부터 예약을 해두었으니 삭사 하러 가잖다. 보스포러 해엽을 보트가 마중나와 아시아 싸이드로 이동을 하여 정말 멋있고 아름다운 식당에서 와인과 요리를 먹을수 있었다. 보트 유람중....(어제 저녁을 먹었던 레스토랑)
이 사원의 실내장식에 푸른색의 이즈닉 타일(21,043개)을 사용하여 분위기가 푸른색이 감도는 것 같다 하여 영어로 블루모스크이지만 실제 이름은 술탄 아흐멧 자미이다. 자미(camii)는 사원 즉 모스크라는 터키어이다. 이 사원은 술탄 아흐멧 1세가 20세 때 소피아 성당과 버금가는 이슬람 사원을 지을 목적으로 메흐멧 아아 (Mehmet Aga-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에게 명하여 1609-1616년 사이에 건축하였다. 그러나 537년에 완공한 소피아 성당의 건축 기술에는 못 미치지만 이스탄불에서는 가장 큰 사원이다. 본당의 규모는 51.65m X 53.40m 이며 돔의 직경은 22.40m, 바닥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43m이다. 술탄들은 종교적인 중요한 의식을 이 사원에서 가졌고, 메카로 떠나는 성지순례의 출발점이 되었다. 술탄들의 사원은 미나래를 4개 세울 수 있었는데 이 사원의 특징 중에 하나가 첨탑(미나래)이 6개라는 점이다. 술탄 아흐멧은 비록 규모는 소피아를 당할 수 없지만 미나래만은 금으로 장식하고 싶었다. 탑들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관계자들을 불러 자기의 생각을 알렸다. 그리고 성지순례로 메카를 향해 떠났다. 술탄의 명을 받은 건축, 종교 관계자들은 사원 건축비만도 어려운데 탑을 황금으로 장식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묘안을 낸 것이 황금은 터키어로 <알튼>, 여섯의 숫자는 <알트> 이므로 당시 술탄이 탑을 알트로 만들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섯 개의 탑을 세운 것이다. 사원 전체에는 260개의 창문이 있고 벽을 장식한 아랍문자들은 쿠란에서 인용한 것이거나, 모하메드가 남긴 말들이다. 동남쪽을 제외한 3면에 갤러리가 있는데 이곳은 여자들과 종교적인 회의가 있을 때에 사용된다. 아직까지도 이슬람 사원으로서 많은 신자들이 찾고 있다.
톱카프 궁전 / Topikpi palace
약 70만 평방미터 넓이에 5Km의 성벽으로 둘려 싸여 있는 이 오스만 제국의 궁전은 바티칸 궁전 보다 크고 모나코 公國의 거의 절반이나 된다.
궁전이 들어서기 전에는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비잔틴 제국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위치해 있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황제) Mehmet 2세가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한 후 현 이스탄불 대학 위치에 첫번째 궁전을 세웠으나 이 젊은 술탄은 골든혼, 보스포러스해협, 마르마라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이 천혜의 절경을 잊지 못해 1459년 현재의 자리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완공 1465년) 이 톱카프 궁전은 술탄 압둘 메짓트가 "돌마바흐체궁전" 을 지은 후 옮겨가기 전(1839년)까지 공식적인 왕의 저택이었다.
이 궁전은 보석 궁전이라 불릴 정도로 순금 250Kg으로 만든 옥좌, 순금 48Kg으로 만든 금 촛대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값지고 진귀한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는 보석 전시관, 한 점에 천만 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도자기도 소장하고 있는 도자기 전시관, 서예품, 무기 그리고 종교관 등 필적할 수 없이 훌륭한 것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3개의 궁정과 하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번째 궁정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무기고, 빵공장, 저장창고, 궁전 경비병들의 숙소 등이 있었던 지역이며 현재는 일부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입구 왼쪽 편에 성소피아보다 훨씬 오래된 성 이레네 성당 건물이 남아있다.
두번째 궁정의 문은 예절의 문이라 불리며 이 문의 모양이 동화적으로 만들어져 미국의 디즈니랜드에서 이 문을 본떠서 똑같은 모양의 문을 세워서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절의 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두 번째 길은 궁중의 부엌으로 이르는 길인데 현재 이 부엌들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10,700여 개)를 가진 도자기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왕실 부엌은 유명한 건축가 시난의 작품이며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는 700명 이상의 부엌 종사원들이 이 주방에서 일했다고 한다.
예절의 문에서 네 번째 길은 Divan으로 통해 지는데 디반은 각료회의을 열던 곳으로 회교장관 사무실과 공공기록 사무실 등 두 개의 방으로 되어있다. 회의 진행 중에 황제는 회교장관 사무실 뒤에 나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회의내용을 경청하고 회의 시간동안 스파이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탑을 세워 감시하게 했다.
이 Divan에서는 외국인을 영접하는데도 사용했다. 디반 옆의 건물에는 무기 저장고이며 옛날엔 왕들의 보석이 저장되어 있었다.
세번째 길을 따라가면 세번째 궁정의 대문인 지복문에 이르게 되고 이 문에서 황제들의 즉위식이 있었고 지복문을 지나 들어가면 사신 접견실이 있는데 황제는 황금과 에메랄드로 장식된 옥좌에 앉아서 사신을 맞이 하였다. 사신 접견시에 이 건물의 입구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흘려서 술탄(황제)과 사신이 대화하는 것을 아무도 엿들을 수 없도록 했다.
세번째 궁정 동쪽편으로 오스만 제국 당시에 사용되었던 보석 전시실이 있는데 영화 TOPKAPI에 등장한 바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검(손잡이에 3개의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힌), 3,260그람이나 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에메랄드,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큰 86카랏트나 되는 스푼 모양의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이아몬드 장식품, 황금, 진주, 루비 들의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다.
세번째 궁정 서쪽 편에 종교관이 있는데 여기에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의 유품(인장, 치아, 수염털, 족적, 그의 무덤의 흙 등)과 이슬람교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블랙스톤 황금커버,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요셉의 모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골든 혼(Golden Horn),
즉 금각만은 아름다운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해의 바닷물이 서로 만나 섞이는 지점에서 내륙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이 '골든 혼'이 유럽쪽 이스탄불을 고대 왕국이 있었던 구 이스탄불과 신시가지가 있는 신 이스탄불로 나뉘고 있다.
보스포르스 해협의 뿔처럼 뻗어져 나온 '골든 혼'에 석양 무렵이면 햇볕이 수면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변하므로 고대로부터 황금뿔 만, 즉 '골든 혼'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이 만의 길이는 12km 에 이르고 수심은 40m, 최대 폭이 800m로서 자연항구로서도 각광을 받았다. 이 '골든 혼'의 둑을 따라서 예로부터 예쁜 궁전, 성당, 별장들이 들어섰었고 지금은 나무그늘이 지는 분수대와 잔디밭이 나들이를 즐기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때에 비잔틴 제국의 함대를 정면으로 상대할 힘이 없어 배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서 '골든 혼'에 띄워서 후방으로부터 비잔틴 해군을 기습한 소위 '배를 산으로 끌고 올라간 전사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이 만에 갈라타 다리, 아타투르크 다리, 할리치 다리가 건설되어 구 이스탄불과 신 이스탄불을 연결시키고 있으며 큰 배가 드나들 때는 갈라타 다리, 아타투르크 다리가 들려져서 배가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다.
'골든 혼'의 입구에, 구 이스탄불 시가지 쪽에 있는 시르케지 기차역은 1883년 ~ 1977년까지 이스탄불 ~ 파리간 특급열차가 운행되었으며 '기차들의 왕', '왕들의 기차'라 불렸고, 또한 추리소설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으로 유명한 'Simplon - Orient Express(오리엔트 특급)'의 종착역으로 유명하다
성소피아성당 : 아담이 태어난 이 후 지금까지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전무후무한 성전을 지으리라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된 이 성당은 약 1000년 동안 콘스탄티노풀의 대 성당으로 사용되었고 비잔틴제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의 최고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의 정복으로 약 5세기 동안 아야 소피아 자미(Aya Sofia Camii)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이스탄불 왕실의 모스크 중 첫 번째로 꼽혔으며, 터키 공화국 초기까지 모스크로 사용되었으나 1935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AD 532년 2월 23일)는 전무후무한 성전을 짓기 위하여 당대에 유명한 트랄레스의 건축가 안데미우스 와 밀레투스(밀레도)의 기하학자 이시도루스를 임명하고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황제가 직접 측량에 나서기도 하면서 매일 100명의 기술자와 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5년(537년 12월 27일)만에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약 천년간 세상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준공식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너무나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보다 더 훌륭한 성진을 지었소! "하고 외쳤다 한다. 그 후 잦은 지진으로 계속 위협을 받고 손상되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건물이다.
1204년 엔리쿠스 단달로(Henricus dandalo)가 이끈 제4차 십자군 원정대의 콘스탄티노풀의 점령으로 소피아 성당은 철저히 유린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게 되었다. 사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 당했을 때 만해도 양초나 기름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이 성당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미술사에도 큰 몫을 하는데 모스크로 사용하면서 우상을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 때문에 모든 인물상이나 그림은 제거되고 따라서 벽과 아취에 있던 모자이크 들도두꺼운 회칠 속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감추게 된다.
1847년 스위스의 건축가 풋사티(Fossaati)가 건물을 보수하는 중 감추어져 있는 모자이크들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다시 석회석으로 덮어져야만 했다.
이 성당은 내랑, 외랑 합친 총 면적은 7,570평방미터(약 2,290평), 본당의 커다란 도움은 지상에서의 높이가 56m, 직경은 동서가 31m, 남북이 32m로서 중앙의 도움은 4개의 작은 아취가 바쳐주고, 이 아취들은 다시 4개의 튼튼한 기둥이 바치고 있디. 40개의 창문은 중앙 도움을 띠 모양으로 두르고 있어 실내의 조명을 밝게 해주는 동시에 도움 자체의 무게도 경감시켜준다. 중앙 도움 천정에 아랍어로 된 코란 귀절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성당이 모스크로 개조된 후 19세기경에 쓰여진 것이다.
중앙 본당의 양쪽 편에 있는 녹색 기둥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에페스의 아르테미스(달의여신) 신전에서 4귀퉁이에 2개씩 서 있는 8개의 붉은 기둥은 바알백(Baalbek)의 헬리오스(Helios-태양신)신전에서 가져왔다. 이 기둥들의 꼭대기 머리는 코린트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그의 아내 데오도라 칭호인 "바실레우스"와 "아우구스타"의 인장이 각각 모노그램 되어 있고,
마치 강한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아칸서스 나뭇잎이 코린트 양식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중앙 바닥의 오른쪽으로 녹색, 붉은색의 대리석 석판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는데, 소위 오푸스 알렉산드리움(Opus Alexandrium)라고 불리는 이 중앙 원은 당시 왕이 앉아서 예베를 드린 곳으로 왕이 앉은 의자에서 발을 내린 부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성소피아 성당은 대단한 성전이었다. 이곳에서 비잔틴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훗날 오스만 제국 시 추가로 설치된 시설물에 왼쪽의 격자 窓으로 되어 이는 술탄의 예배실, 중앙 정면에 움푹 들어가게 만든 미흐랍은 이슬람교리에 따라 사우디의 메카를 향해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표시해 놓은 것 이다. 본당의 8개 기둥 위에 커다란 나무 원판에 초록색 바탕의 금색글씨로 하나님(알라), 예언자(모하메드), 그리고 이슬람 초기의 칼리프(후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2층은 원래 초기에는 여성들만의 예배 장소였는데, 나중에는 황제의 가족들을 위한 예배장소 및 비잔틴 고위 성직자들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11세기 이후 만들어진 모자이크들을 볼 수 있다.
성소피아의 세라핌 160년 만에 황금마스크를 벗다 2009년 7월24일 금요일-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 중에 하나인 성 소피아 천정에서 드디어 160년 동안 얼굴을 덮었던 황금색의 덮개를 떼어내고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슬람식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 성당을 복원시키면서 천정에 날개 가운데에 있는 이것이 절대 손상되지 않게 잘 회 속에 가려지게 하라고 했다. 10일간의 작업 끝에 여기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한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 진답니다. 세계에서 유명한 유람선이 3척이나 이스탄불항에 관광하러 왔네요. 내일은 시내 관광지가 몹시 붑빌것 같에요 3척에서 관광객이 모두 나온다면 어마 어마 할것입니다. 돌마바흐체궁전 돌마바흐체는 “채워진 정원”이란 뜻이다. 이 궁전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연하여 1843-1856년 사이에 Abdul MecitⅠ세가 르네상스 스타일로 세웠다. 이 궁전은 1876년까지 근세 오스만제국의 공식적인 왕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이 궁전의 손님으로 다녀간 사람은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유지니, 오스트리아 왕 후란즈 죠세프, 독일 왕 빌헬름 2세, 영국의 왕자 에드워드 8세, 페르시아 왕 Reza Pahlavi, 이라크의 왕 파이잘, 아프가니스탄 왕 에마눌라였고, 또한 이곳은 중요한 관리의 영접 장소였다. 앙카라로 옮겨가자 이 궁전에서 공식행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에 57세의 일기로 이 궁전에서 죽었다. 보스포러스쪽에서 보면 왼쪽 편에 공공빌딩, 왕좌가 있는 홀은 가운데 부분에 그리고 하렘 (여자궁전)은 오른쪽에 있다.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그리고 280개의 화병, 156개의 시계,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보헤미안, 베니스, 불란서의 바카라 크리스탈, 영국제 크리스탈로 된 36개의 샹들리에 수많은 핸드 메이드 카펫이 있으며 6개의 발코니와 6개의 목욕탕이 있다.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금 14톤과 은 40톤이 사용되었다. 이 궁전의 건축 경비는 당시 500만 금화(현재 화폐로 약5억 달러)를 사용했으며, 궁전 내부의 기둥이나 천정들의 거의 대부분에 목재가 사용되었다. 대사들의 접견실엔 대형 실크 카펫이 있고, 바닥에 깔려있는 곰 가죽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우스 2세가 선물한 것이다. 왕실의 홀(메인)은 돔의 높이가 36m에 이르고 오케스트라 관람석이 있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4.5톤 무게의 회색빛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750개의 촛대가 있으며, 세계 최대의 샹들리에로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2세가 선물한 것이다. 위사진은 17년전에 돌마바흐체 궁전 안에서 찰영했던것이며,내부는 찰영금지구역입니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경계선이 되며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마르마라(Marmara)바다와 흑해를 연결하는 이 해협의 길이는 31Km에 달하며 넓은 폭은 4Km, 좁은 폭은 800m이다. 평균 수심은 40m, 가장 깊은 곳은 100m로서 해협의 물은 역류하고 있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 신이 어느 날 '이오' 요정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눈치를 챈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가 나타나자 제우스는 놀라 그만 이오를 동물인 소로 만들어 버렸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소를 보고 "이 소가 누구의 것이요?" 하고 헤라가 묻자 제우스는 시치미를 때고 "나도 잘 모르는 일이요" 그러자 헤라가 "그럼 이 소를 내가 가져가겠소"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헤라는 눈이 100개 달린 [마르고스]란 괴물을 시켜 감시하도록 했다. 밤낮으로 50개의 눈을 감고 뜨면서 감시를 하니 제우스의 마음은 착잡하여 헤르메스(제우스의 손자)를 전령으로 보내어 마르고스를 죽이도록 했다. 헤르메스는 괴물을 죽이고 그 눈을 빼서 공작새를 만들었다. 헤라는 분하여 두 번째 괴물을 보내는데 소로 변한 이오는 괴물에 쫓기어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으로 도망 다니다 바다를 건너 이집트까지 가게 되었다. 이 때 소가 바다를 건넜다 하여 이 해협을 보스포러스라 한다. 제우스는 이오가 너무 불쌍하여 헤라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원래의 모습인 요정으로 바꾸어 주었다. 보스포러스 다리 - THE BOSPHORUS BRIDGE 다리의 길이는 1,074m / 수면에서의 다리 높이는 65m / 다리의 탑 높이는 100m / 설계는 영국, 건축은 독일에서 하였으며 3년의 공사 기간을 걸쳐 완공했다. 건축비는 당시의 시가로 115,000만불 (당시 1$=10 T.L) 이 들었다. 초당 45m 강풍에도 견디게 설계되었으며 건축하기 전 모든 예상되는 천재지변에 대비하여 제일 안전도 높은 다리로 이스탄불의 명물이 되었다. 당시의 시가로 250,000만불(당시 1$=600 TL) 공사비가 들었다. 다리의 길이는 1,090m / 앵커리지 길이는 1,150m / 바다 수면에서의 다리 높이는 64m / 다리의 탑 높이는 107m / 4차선과 인도가 있으나 보스포러스 다리와 마찬 가지로 사람은 통행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위스키다르 / Uskudar
위스크다르는 이스탄불 아시아지역의 구시가지구입니다. 우리에게는 6.25때 참전했던 터키병들 이 즐겨 불러 유행했던 민요 ‘위스크달라’ 때문에 더욱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그 말 때문에 우리들은 “위스키 달라 소주 달라 맥주도 달라” 라며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위스크달라 머나먼 길 찾아갔더니 세상에서 제일 가는 이상한 나라 이것저것 보고 듣고 정말 놀랬어
" 위스키다라 머나 먼 길 찾아왔더니… 위스키 달라 맥주 달라 아무거나주세요….."
우리나라 50년대 후반에서부터 30년간이나 유행했던 잊을 수 없는 이 노랫가락을 우리는 이스탄불의 한 부분에서 만나게 된다.
이곡의 내용은 우리의 아리랑과 마찬가지로 떠나는 님에 대한 아쉬움 입니다.
이 나라의 민요로서 아직까지도 애창되는 "위스키다라 기데리켄 알드다 비르 야아물- 위스키다라 갈 때에 비를 맞았네" 로 시작하여 그 당시(오스만제국)의 관리를 사모하는 처녀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노래로 읊은 것이다.
아시아쪽에 위치한 위스키다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반사되는 햇빛이 도시를 황금으로 빛나게 하여 일명 "황금의 市"라 불렀다.
소아시아의 모든 도로가 여기서 끝나 소위 아시아의 땅 끝인 이곳을 오스만 제국의 왕들은 모스크와 대상들의 숙소로 장식했고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아쪽 메카 참배 객들은 매년 그들의 순례 여행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요즈음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출퇴근 배들이 5분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고, 아시아쪽으로 떠나는 기차의 시발점이 되고 있으며 실크로드의 소아시아 지방의 종점이기도 했다.
비잔틴 제국 당시 (451년..마르키아누스 황제) 제 4차 종교회의가 칼케톤 지역에서 열렸는데 바로 지금의 위스키다르의 기차역 부분이 칼케톤이다. 의제는 유명한 유디케스의 단성론(單性論)이다.
위스크다르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스탄불의 아시아쪽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의 이름이다. 예전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여기까지 온 동방의 물물이 이곳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간 말하자면 실크로드의 최종지역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기가 머나먼 길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서쪽 유럽쪽의 이스탄불 구시가지(유적지가 있는 곳)를 바라보면 동산에 올려져 있는 도시와 유적들과, 모스크의 첨탑들을 볼 수 있어 장관을 이룬단다. 만약 석양이 드리워진다면 아마 환상적인 경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탄불을 가장 아름다운 시각에서 보기 위해서는 꼭 위스크다르를 들려서 이곳에서 이스탄불 도시를 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다.
루멜리히사르
1452년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메흐멧 2세에 의해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위한 전초기지로 루멜리 히사르(城)가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과 4개월 만에 남북으로 250미터, 동서로 130미터의 성채를 완성한 것이다. 전체가 요새화 한 이 튼튼한 성은 3개의 큰 탑과 13개의 조그마한 탑들로 구성 되어있다. 3개의 큰 탑은 병사들의 겨울 본부였다. 성은 3개의 탑들을 연결하는 성벽으로 되어있다. 고위 관리인 회교 장관들이 이 공사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세 개의 성채는 각각 건설한 회교장관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12각형으로 된 할릴 파샤 탑은 가장 해안에 가깝게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루자 파샤 탑은 높이가 33미터에 직경이 24미터나 된다. 자아노스 파샤 탑은 왼쪽에 위치해 있으며 바다로부터 높이가 57미터이다. 공중에서 보면 성채의 모습이 아랍 글자로 술탄 메흐멧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그의 우선적인 공격대상이 콘스탄티노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공격이 교황 및 유럽의 국가들을 자극하여 종교전쟁을 초래하지 않을까한 우려였다. 그러나 지중해와 유럽의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실크로드의 마지막 관문인 보스포러스해협의 통행권 장악을 위해 루멜리 히사르의 축조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성의 축조 소식이 전해지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사절을 보내어 성채의 축조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며, 그 조건으로 비잔틴에 인질로 있는 오르한 왕자의 인질 금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메흐멧 2세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루멜리 성채에 쇠사슬을 걸어 이 해협을 지나가는 상선들에 위협을 가했다. 이로써 비잔틴 제국에 경제적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선박의 진입을 봉쇄하였다. 그리고 로마 교황과 유럽 각국에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단지 제노아로부터 1,500여명의 지원군이 파병되었을 뿐이다. 사기가 저하된 비잔틴 군대가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453년 5월29일 결국은 천년을 지켜온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므로 서 세계에서 가장 긴 제국으로서 기록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위치하여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성의 중심에 위치해 있던 옛날 병사들의 모스크 장소에 요즈음은 야외무대가 만들어져 여름동안 연극이나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할릴파샤 탑 안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쇠사슬, 대포 등이 남아있다
갈라타탑 오늘날 보이는 탑은 원래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세워졌던 것을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재건 되었으며,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갈라타 탑이라 부른다.
1446년 탑의 상층부가 추가 건축되었으며 제노아 상인들의 해상 감시 탑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오스만제국 시는 감옥이나 화재 감시 탑으로도 사용하였다. 이 탑은 총 9층 61m, 탑의 발코니는 해발 140m 높이이다.
17세기 인류 최초로 아흐멧 첼래비(Ahmet celebi)이라는 사람이 두 날개 달린 비행물체를 이용하여 이 탑에서 아시아 쪽 위스키다르까지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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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일 좋은 곳, 맛있는 음식으로 진한 여행하신 두 분 참 행복하시겠습니다. 이번 쉐링때 바쁘신 관계로 참석못하신 방장님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뵈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