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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산티아고(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 김희경, 푸른숲, 2009년 간
* 왕복 비행기표 두장, 파리에서 생장피에드포르 기차표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
* 산티아고 가는 길이 한쪽 방향을 향해 800Km 가량을 걸어가는, 안전하고 단순한 길'이라는 점이었다.
* 비아나 마을 중앙의 산타 마리아 성당 옆을 지날 때 본 남자의 동상,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모델로 삼았다던 그 체사레 보르자가 맞다. 원래 스페인 혈통이고 15세기 이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해 산타 마리아 성당에 유해가 묻혀 있다고 한다.
* 삼십대에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뒤 극심한 우울증, 이혼, 아내와 누나 부모의 죽음을 차례로 겪은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고틀립(Daniel Gottlieb)은 <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폐증을 앓는 외손자 샘에게 이슬람 시인 루미의 시<여행자의 집>을 들려준다.
** 기쁨과 즐거움뿐 아니라 슬픔과 우울함, 비열함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찾아오더라도 그 모든 감정을 피하지 말고 "문밖까지 나가 웃으며 맞이하라"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선물에 아로새겨진 무늬들"이기 때문이다.
* 부르고스 대성당,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스페인 고딕 양식의 걸작, 부르고스에서 렝까지 약 200킬로미터가량 펼쳐지는 메세타 평원에서는 넓은 밀밭과 끝도 없는 지평선만 보인다.
* 여기서 걱정할 미래라곤 딱 세 개밖에 없잖아. 어디까지 걸어가고, 밥은 무얼 먹으며, 어디에서 잘 것인가. 삶이 실제로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겠어!
*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토니오 크뢰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섬세한 토니오가 불과 열네 살 때 개달은 가혹한 진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패배자라는 교훈을 미련한 나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뒤에서야 알아차렸다. ... 사랑을 보답 받지 못하는 고통으로 번민하던 토니오도 "사랑받는 것, 그것은 허영심을 채우려는, 구역질나는 만족감"일 뿐이며 "행복은 사랑하는 것"에 있다고 되뇌지 않았던가.
* 벨 훅스(Bell Hooks)가 <사랑의 모든 것>에서 들려준 것처럼 내가 나 자신에게도 주지 않는 사랑을 다른 사람이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 미국 수녀 조이스 럽의 카미노 순례기 <느긋하게 걸어라>
* 길을 잃으면 무조건 성당을 찾아가. 원래 가톨릭 순례자들이 걷던 길이라서 늘 성당 근처에 가면 숙소가 있거든.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빨리 걷는 사람은 혼자 걷고, 멀리 걷는 사람은 친구와 함께 걷는다'
* 카렌 암스트롱, <마음의 진보>, 신에 대한 관념은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신앙은 인생이 아무리 비극적으로 보여도 거기에는 궁극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뚜어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것도 결국은 그런 신념이었다.
* 역사가 2천 년이 넘는 레온은 카미노에서 거쳐온 대도시 중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
* "그럼 그 차에 배낭을 부치지 왜 짊어지고 가세요?"
" 그렇게 하면 마음이 불편해. 뭔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걷는 것 같아서. 딱 한 번 배낭을 차로 부친 적이 있는데 죄책감이 생기더라고."
* 이들에 비한다면, 몸이 부서져라 일하다 은퇴한 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하는 한국의 노년은 얼마나 쓸쓸한가.
* 라바나 --> 몰리나세카, 고도 100미터의 카미노에서 가장 높은 산, 쿠루수 데 페로, 대형 철 십자가, (돌멩이에 세례명, 혹은 소원 적어 쌓아 놓은 탑)
* 어느 책에서 읽었던 하와이 원주민들의 말.... 인생을 파도라고 생각하라고. 파도가 자신이 바다의 일부분이라는 걸 모른다면 바위에 부딪혀 개질까 봐 두렵고, 앞서 바위에 부딪혀 사라져버린 다른 파도의 죽음을 슬퍼할 테지만 바다의 일부분임을 깨닫는다면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고....
* 고통의 이유를 구하는 질문과의 싸움에서 나는 자주 패배하는 쪽이었지만, 크루스 데 페로에 남동생의 사진을 내려놓으면서 어렴풋하게 이제 한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고통에 대해 '왜'냐고 묻는 대신 선뜻 '예'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 조지는 천상의 비밀을 엿봐야만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매일 좋은 것을 발견하는 단순한 생활 안에서 믿음을 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더 어렵고 복잡한 걸 이해해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더 찾지도 않을 거야.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 내가 가장 동의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의 표현은 미국 우주비행사 에드워드 깁슨의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불가지론자, 모르는 게 옳다고 말하는 적극적인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 물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우주에 다녀온 뒤 신은 패턴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주에서는 만물에 질서가 부여되어 있고 모든 사물과 현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 즉 거기에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 예부터 인간은 그런 패턴의 배후에 인격적 존재를 상정하여 거기에 다양한 신의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 세상의 일부인 사람과 사물들, 그 조화안에서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그 연결 덕분에 덧없는 삶에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싶었다. 이날 크루스 데 페로를 지나오며 그런 믿음의 싹이 어렴풋하게 돋아난 것 같기도 했다.
* 이 날 몰리나세카까지 가는 길은 카미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다. 가파른 산길이지만 골곡이 큰 산등성이마다 갖가지 색으로 피어난 꽃들 덕분에 저절로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높은 산에 오를 때마다 나는 정복의 쾌감 대신 스스로가 한없이 왜소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좋았다.
* 산등성이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중 나를 위해 핀 꽃이 있으랴. 사람의 존재, 세상 모든 일과 무관하게 꽃은 피고 진다. 내가 거기 있건 말건 자연은 그저 그곳에 있다는 사실, 자연의 무심함을 자각할 때마다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 미국의 인디언들이 그렇게 대량 학살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건 하나가 망가질 때마다 다른 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온전성을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은 내게 원초적인 균형과 조화를 기억시켜준다.<정현경의 '현경과 엘리스의 神나는 연애>
* 비아프랑카의 산티아고 성당, 예전엔 산티아고까지 갈 수 없는 순례자가 이 성당의 문턱을 넘으면 순례를 마친 것을 인정해줬다고 한다.
* 유럽의 젤형 반창고인 콤피드, 물집이 생긴데는 붙이지 말 것, 붙이면 계속 물집이 생긴다.
* 오전 7시가 되자 카를로스가 적당한 크기로 틀어놓은 헨델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 덕분에 잠이 깼다.
* 산티아고, 성 야고보
* 갈리시아 지방(바람이 센 곳, 야고보 성인의 땅)에 들어서면 거대한 야고보상을 만난다.
*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총애를 받던 제자인 야고보는 포교를 위해 이베리아 반도에 왔는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예루살렘에 돌아간 야고보는 곧바로 붙잡혀 처형됐다.(사실)
** (전설의 시작) 사람들이 야고보 성인의 시신을 몰래 배에 태워 물에 띄웠고 천사들의 도움으로 이 배는 산티아고에서 8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해변가 피니스테레 남쪽 마을 페드론에 도착했다.
*** (여러 버전 중 좋아하는 ...) 어느 날 별빛이 그 배 위를 비췄고 기슭에 있던 말이 배를 발견했는데 그만 물에 빠진 거야. 그런데 물에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나면서 말을 구해줬대. 야고보 성인이 조개껍빌을 온몸에 붙이고 나타났거든. 그래서 조개껍질이 야고보 성인의 상징이 된 거래.
**** 그 마을의 영주는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자기 관할에 두는 걸 꺼림칙하게 여겨 황소가 이끄는 마차에 태워 마부도 없이 떠나보냈다. 마차는 지금의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어느 장소엔가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혔다. 다시 8백 년이 지난 어느 날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있는 곳을 별빛이 비췄고 이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도시를 세우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mpostela)라는 이름을 붙였다.
***** 콤포스텔라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이래.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길 은하수 길이라고 불러. 별들의 길이라고.
* 이슬람의 지배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려 싸웠던 기독교인들에게 야고보는 스페인을 보호하고 무슬림을 처단하는 전사로서 기독교인들을 단결시키는 상징적 영웅이었다. 산티아고에 다가갈수록 야고보 성인이 전사로 묘사된 동상이 늘어나는 것도 그래서라고 했다.
* 미국에서 활동하는 종교학자 현경,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 종교학자가 '믿음'도 '영생'도 아니고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 했던 게 신선하게 들렸던 기억이 난다.
*** 현경은 개인적으로 가장 잘 듣는 스트레스 처방은 '아름다움을 들이마시는 것(Drinking Beauty)이라고 들려준다. 이 방법을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에게 배웠다고 한다. 인디언들이 학살과 파괴 속에서도 자신들의 온전성을 기억한 방법은 하나의 아룸다움이 파괴될 때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서였다. 구전되어온 옛이야기 역시 현실의 고난을 헤쳐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온전성을 기억하도록 돕는 아름다움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에.
*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종종 치밀어 오르는 고해의 충동 때문일까. 한국 순례자들보다 낯선 외국인과 낯선언어로 이야기할 때 더 쉽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은 카미노를 '세라피 루트(Theraphy Route)'라고 부른다더니, 이것도 카미노가 은연중 보여주는 경이 중의 하나인 걸까. 어쨌든 그렇게 내가 속한 현실에서 무겁게만 느껴지던 일들을 낯선 사람들과 서로 털어놓고 나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 안에서 버둥대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묘한 연대감 같은 게 뭉클 피어났다.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는 시간의 횡포에 대해 웃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 비틀스 <네게 필요한 건 사랑뿐 All You Need Is Love>
* 갈리시아의 오 세브레이 마을, 로마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
* 사모스(Samos)의 거대한 수도원은 부부 순교자에게 헌정된 수도원이다. 2층 복도의 성경 장면들을 그려 넣은 대형 벽화들이 사람들을 맞았다.
* 파울로 코엘료는 이 길을 걷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의 일생을 바꿔놓은 길 위에서 30일 가량을 보냈건만 내 인생은 그다지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벼락같은 깨달음의 순간도 없었다.
* 카미노에선 종종 어떤 강력한 목표에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 노란 화살표 덕분에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명확했다. 일상에서도 그런 화살표를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랫동안 노란 화살표처럼 갈 길을 알려주는 지침이 내 인생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처음부터 노란 화살표를 입에 물고 태어난 듯 자신의 길에 대해 단호한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왜 나한텐 그런 게 없을까.
**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다. 미친 듯(狂) 몰두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지에 미치지(及)못한다는 말이다.
* 고마워. 아!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노란 화살표 없이 어떻게 살지?
* 등산화가 춤을 멈추기를 거부하는 동화 속 빨간 굳처럼 느껴졌다.
*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짜 증거' 때문에 마비된 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두려움이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한 신호기제로 신경에 장착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내 미천한 경험으론, 정말 두려운 일은 아무런 전조 없이 찿아왔다. 멀쩡하고 평온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동생을 잃었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 막연한 두려움은 죽음을 막아주기는커녕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게 삶을 가로막는 것이 아닐까. 일상에서 문제가 되는 건 수체적 대상이 있는 두려움보다 그런 막연한 불안일 것이다.
** 평소 겁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는데 내 엉터리 관찰에 따르면,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까지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할수록,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일수록,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며 일이 잘못되면 오래 후회하는 완벽주의자들일수록 막연한 불안에 시달리는 겁쟁이들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내가 갖고 싶은 용기는 매사를 원하는 대로 통제하려는 강박을 버리고 삶에서 우연의 여지를 열어두는 태도였다. 예기치 않은 일에 더 많은 여지를 허용하면서 살아가기, 실수를 저지르거나 일이 잘못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래도 어디까지 한번 가보겠다고 하는 마음, 내가 갖고 싶은 용기는 그런 거였다. 카미노에서도 그런 태도를 배우고 싶었다.
* 아뇨. 독일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속담이 있어요. 오늘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죠.
** 마농이 경쾌하게 말을 받았다. "쯧쯧, 그래서 독일 사람들이 죽어라 일만 하잖니. 프랑스어엔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서둘지 말라'는 속담이 있어. 그런데 오늘은 우리 모두 '미친 짓'하는 날이니까 독일 모두로 그냥 가자고.
* 천 년이 넘도록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카미노를 걸었으니 이 길이 우리에게 줄 영적인 에너지가 있을 것
*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확신범'의 얼굴을 한 사람은 없었다. 하긴, 확신에 찬 사람은 한 달씩 여길 걸으러 올 것 같지도 않다. 모두들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자기 길을 걷고 있다.
*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 중요한 것은 성장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일밖에 없을 것 같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꼭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 꾸준히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 그것 말고 어떤 다른 희망이 가능하겠는가.
* ‘워커스 하이(Walker's High)’는 마라토너들이 경험하는 절정감을 일컫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에 빗대어 내가 만든 말이다. 3년 전 쯤 달리기를 한동안 취미로 삼아 하프 마라톤을 뛰어본 적이 있다. 달리기 시작하는 초반에는 숨이 턱에 닿을 듯 힘들고 무거운 다리로 고통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반환점을 돌아 한참 달리다 보면 어느덧 숨이 가쁜 느낌과 다리의 통증이 의식 속에서 사라지고 온전히 달리는 행위만 남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짧은 순간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에고와 집착을 버리고 공허와 터무니 없는 기쁨, 더 큰 힘과의 조화 속으로 내달리는 듯한 느낌에 황홀했다.(삽입)
** ...... 어쨌든 카미노를 걸으면서 그때와 비슷한 순간을 몇 번 경험했다. 반복적인 보행의 리듬에 맞춰 오래 걷다 보면 다리의 뻐근함, 발의 통증, 배낭의 무게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지워질 때가 있다.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과 온 신경이 순수한 진공 상태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 내 안의 텅 빈 공간, 어떠한 생각도 없이 잠시나마 자아의 하찮은 주장을 몰아낼 수 있는 마음속의 공간과 마주하는 순간, 오래 지속되진 않았지만 그걸 알아차릴 때마다 여행의 목적을 완수한 듯 뿌듯해졌다.(삽입)
* 에리카는 카미노를 걷는 게 올해가 벌써 다섯 번째다. 가족이 모두 세상을 떠나 혼자 남았는데 외로워서 친구를 사귀러 카미노에 계속 온다고 했다. “내 평생 열정을 쏟은 대상이 딱 두 가지인데 그게 오페라와 카미노야.”...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걸을 수 있는 한 계속 카미노에 올 것이라고 했다.
* 한동안 MSN 메신저의 대화명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였다.
** 돌이 제자리로 떨어지는 반복이 무한히 거듭되더라도 던지기를 멈추지 않기, 낯설고 가혹한 고통 앞에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운명이 달라지기를 지금도, 앞으로도 바라지 않으며 되레 그것이 다시 한 번 반복되기를 지금도, 앞으로도 바라지 않으며 되레 그것이 다시 한 번 반복되기를 흔쾌히 소망하기. 그것이 니체가 말한 ‘운명애’다.
*** 지키지도 못할 허세 같아 금세 대화명을 바꿔버렸지만, 지금 여기선 그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니체가 던진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던져보았다.
**** 악령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치자. “네가 지금 살아왔던 삶을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이란 없고 모든 고통과 쾌락, 탄식이 같은 순서로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지만 ‘아니’라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 내가 존경하는 한 친구가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네 마음속의 검은 양이 밉다고 해서 자꾸 죽이려들지 마, 관심의 먹이를 주어 키우는 것밖에 안 된단다.” 결핍과 실수만 바라보는 자책의 눈길을 거두라는 충고였다.
* 나 자신을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지 않을까.
** 인생에서 유일한 문제는 부족하고 못난 나 자신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 단 하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언젠가 사람의 뇌에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는 심리적 면역체계에 대한 설명을 읽고 인간 종족의 일원인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의 뇌는 이미 벌어진 일들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거다.
*** 심리적 면역체계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가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도록 돕는’ 멋진 시스템이다. 심리적 면역체계라는 정돈 도구를 장착한 뇌는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저질러버린 일보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그러니 그냥 저질러야 했다. 뭐가 잘못된들 어떻단 말인가. 심리적 면역체계가 시간이 흐르면 실패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도록 도와줄텐데.
* 산티아고 바로 직전 마을인 몬테 델 고소(Monte del Gozo)까지만 가겠다고 한다.
* 산티아고에 ‘입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오전 중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해 12시 정각에 열리는 미사에 참석하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 금세 몬테 델 고소가 나타났다. 언덕에 올라서니 산티아고 대성당의 뾰쪽한 첨탑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 전날 에리카가 여기서 1.5킬로미터만 더 가면 시설이 아주 좋은 알베르게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 그가 알려준 알베르게는 ‘아쿠아리오’라는 곳이다.(버스정류장 가까운 곳, 여기서 자고 버스로 대성당으로?)
* 해변 끝 마을인 피니스테레(3, 4일 더 걸어야)
* “이름도 모르지만 길에서 당신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어요. 움직이는 화살표처럼 느껴져서..... 내게 걸을 힘을 줘서 고마워요.” 카미노에서 이제껏 들은 최상의 작별 인사였다.
* 지금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애써 쫓아가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계속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 오른쪽 옆에선 커플로 보이는 순례자가 서로를 오래 끌어안고 서 있다.
* 파울로 코엘료가 그랬잖아. 이 길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길이라고. 정말 모두를 위한 길이야. 그렇지 않니?
* 짐을 푹고 성당의 12시 미사에 갔는데 늦게 도착해 자리가 없다.
* 예전엔 이름을 불러주었다던데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런지 국적을 불렀다. “도스 코레아노”라는 말이 들렸다.
* 열 명의 사제가 함께 집전하는 미사는 장엄했다. 내내 무덤덤했는데 뭔가 벅찬 기운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성찬의 전례 후 영성체를 하러 나갈 땐 그 기운이 마침내 눈물로 터졌다. 여기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도가 절로 흘러나왔다.
* 오래 기다려온 목표에 도달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훌쩍였다. 나도 울고 산드라도 울었다.
* 중앙 제단의 대형 야고보 동상 뒤로 난 작은 계단을 올라 야고보 성인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고 뒤통수에 입을 맞추는 의식을 따라 했다. 길의 끝에서 야고보가 도착을 승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니, 거꾸로 이 남자가 이곳에서 우리가 다가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 여행으로 뭘 얻었는지는 여행이 끝나고도 시간이 한참 지나야 알게되는 것 같아.
* 다들 얼큰하게 취해 ‘바 투어’를 하자면서 아이리시 바에 몰려갔다.
* 카미노가 나한테는 바이러스 같아. 사람들을 만나는 게 가장 좋지. 힘이 남아 있다면 내년에도 다시 걸으러 올 거야.
* 탐험을 멈춰선 안 되네
그 탐험의 끝에서 우리는
출발했던 곳에 도달할 테지
그리고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될 테지
(T.S. 엘리엇 ‘네 개의 사중주’)
* 스페인에도 땅끝 마을이 있다. 산티아고 서쪽의 바닷가 마을 피니스테레였다. 지명 자체가 ‘땅끝’이라는 뜻이다. 물리적인 ‘끝’까지 가기 위해 산티아고에서 이곳까지 3,4일 더 걷는 사람들도 많다.
* 해변에서 솟아오른 언덕 등성이엔 개나리를 닮은 노란 꽃들이 점표화처럼 피었다.
* 이곳엔 ‘0.0킬로미터’라고 적혀 있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길의 끝.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이제 끝이야. 네가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 잘 생각해보렴’하고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 동네 주민이라도 되는 양 뒷짐을 지고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다 저녁미사에 참석하러 작은 성당으로 향했다.
* 정면에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상 대신 한 손에 지구본을 들고 다른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예수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 주기도문도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멜로디에 맞춰 불렀는데 이제껏 들어본 성가 중 가장 아름다웠다.
* 내 신발이 ‘난 걷고 싶어!’하고 외치는 것만 같아.
* 피니스테레의 바위 위 등산화 모양의 조각
* 여행이 끝나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파라도르에 묵어보라. ... 199유로인 방값을 139유로로 깎았다. 그래 봤자 1박이 거의 30만원 꼴이다. 카미노에서 한 달 치 숙박료와 맞먹는다.
* 바르셀로나 근교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에서 그 유명한 성가대의 합창을 들을 때도 마음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난 이런 걸 겪었다구’ 하는 기분이었지만, 알아주거나 공감할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게 귀환한 정복자 같았다. 산악열차를 타고 돌산 위의 수도원을 다녀오던 길에 바닥에서 노란 화살표를 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란 화살표는 스페인의 길거리에 흔한 방향 표지에 불과했다.
* 안달루시아 지방에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위치한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를 오가며 3주 넘게 머물렀다.
* 이 아름다운 도시들이 자아내는 공기는 한 달 넘게 걸었던 스페인 북쪽 지역과 전혀 달랐다. 북쪽의 산티아고가 이베리아 반도를 8백 년간 지배해온 이슬람교도를 몰아낸 기독교인들의 상징적 ‘구심’이었다면, 남쪽의 그라나다는 반도에서 추방당한 무슬림들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승리자의 영광과 위풍당당함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것과 달리,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는 패배한 왕족의 한숨이 미세한 장식마다 배어 있는 듯했다.
* 코르도바의 메스키타(Mezquita) 사원을 보았을 대 느꼈던 놀라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대형 이슬람 모스크였던 메스키타 사원 안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예배당이 들어앉아 있다. 이 지역을 점령한 스페인의 가를로스 5세는 모스크를 헐어내는 대신 그 안에 예배당을 짓도록 했다. 그이 입장에선 모스크가 ‘악의 무리’의 성전이었을 텐데도 이를 허무는 대신 그 안에 예배당을 지은 선택이 어쩐지 종교보다 큰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처럼 느껴진다.
** 당시 카를로스 5세는 거의 완성된 예배당을 보고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던 자리에 고작 그렇게 평범한 기둥밖에 세우지 못하느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수백 년이 흘러 이곳을 찾은 여행자의 눈엔 평범한 예배당이 모스크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이슬람의 둥근 기둥과 붉은 장식은 기독교의 하얀 대리석 장식과 기막히게 어울렸다.
* 우리는 얼마나 다르면서 또 얼마나 같은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무늬들이 뒤섞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떠돌면서도 계속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 그라나다에 머문 일주일 동안 매일 저녁 알바이신(Albaicin) 지구의 골목길을 뱅뱅 돌아 사크로몬테(Sacromonte) 언덕까지 걸어 올라가서 집시의 바인 ‘로스 파롤레스’에 들렀다. 테라스에 앉으면 건너편 산 위의 알함브라 궁전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저녁 식사를 한 뒤 그곳에서 와인을 마시며 해가 질 때까지 미국 소설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의 <알함브라>를 읽는 것이 내 일과였다.
*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는 건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체험”이라고 들려주었다. 육체적인 경험과 내적인 경험이 현실 안에서 공명할 때라야 겪을 수 있는, 살아 있음의 황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은 어떤 순간에 현존하는 그런 경험뿐이라는 거였다.
* 오랫동안 나는 “하나의 문이 닫히면 신은 다른 문을 열어놓는다”던 헬렌 켈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면전에서 문이 쾅쾅 닫히듯 하나의 관계가 끝나고 기회가 사라질 때면 주변이 컴컴하게만 느껴졌다.
* 닫힌 문 앞을 떠나 내 몫으로 주어진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고 나면 늘 어떤 문은 열려 있다. ..... 열린 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눈앞에서 닫힌 문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도도, 가이드북도 없는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가끔 앞날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 툭하면 발목을 접질렸던 장소가 주로 평탄한 길이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전진하며 올라가는 길에선 아무리 힘들더라도 다리를 다치는 일은 없었다.
** 내가 ‘사실’로 겪어 아는 것은 내가 걷는 길의 아름다움뿐이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상상으로 내가 아는 길의 선물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을, 내게 벌어진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이 길의 굽이굽이에 숨겨져 있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세상엔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누구도 갈 수 없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고 믿는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완벽해 보이는 운명을 흉내 내려 안달하지 않고 나 자신의 불완전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 카미노를 걸었다고 해서, 어떤 대단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저절로 달라지진 않는다. 우리는 다만 변화하기로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을까. 대개의 변화는 늘 느리게, 알아차리기 힘들게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속도였다.
*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만의 페이스 따르기, 차이를 웃으면서 받아들이기,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하기를 카미노의 교훈으로 꼽았다.
* 마농은 1년 뒤 남편과 함께 다시 카미노를 걸을 예정이라고 한다.
* 나는 단순한 도보 여행자로 출발했지만 점차 순례자로 변모 했어..... 어쩌면 삶을 순례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 그동안 자기 파괴적인 자아상과 맞서 싸우느라 에너지를 소모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정화되고 겁이 없던 스스로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나는 나쁜 사람이고 건강한 관계를 맺기가 불가능하다는 낡은 믿음을 버렸어. 다시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명상 훈련도 하는 중이야.
* 더 이상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 내겐 중요한 교훈이야. 내 안으로 더 들어가서 내면에서 더 많은 평화를 찾아야 할 필요를 느껴.
* 어쩌면 카미노가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카미노는 촉매 이상의 역할이 아니었을 것이다.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결국 자신의 힘일 테니까.
*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모험적인 여행을 통해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화와 전설 속의 영웅은 이미 우리 모두의 안에 있으면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어떤 가능성, 힘의 상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모험을 완성하려면 귀환 이후 환멸스러운 일상에 직면하고도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 오래된 마음의 습관에서 빠져 나오는 변화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 모댱이다. 중요한 것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 상실감에 다시 무릎이 푹푹 꺾일 대면 크루스 데 페로를 웃으며 거니는 남동생을 상상한다. 작은 일에 쉽게 감동하고 태평스러웠던 스스로를 되살리려 노력한다. 드러난 겉모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남에게 나를 어떻게 설명할까 대신 나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생각하려 애를 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