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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여러 가지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은혜였습니다. 동시에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왜 너는, 네가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너의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니? 너는 더 이상 기적이 없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니?”였습니다. 그는 당황했습니다. “하나님! 그것은요....”라고 머뭇거렸습니다. “저는 기적은 기도한 사람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분명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들이 우연이라고, 제 노력의 대가라고 치부할 수 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있어요. 하나님께서도 아주 잘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허물과 죄도 많잖아요. 거기다 연약하기까지 하잖아요. 그런 제가 분명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멋진 일들을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고백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엉뚱하게 하나님이 아니라 제가 한 일이라고 오해 할 수도 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챌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늘 그러듯이 제가 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 사람들이 저보고 뭐라고 하는 것은 아무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셨던 일들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정말 죽을 만큼 싫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있어요. 저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일단락되거나 끝맺음된 완전한 이야기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하나님을 자랑했다가 어쩔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세상에 빠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잠시 대답을 멈추었습니다. 다시 “물론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가장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믿어요. 약한 저를 통해서도 스스로 영광 받으시리라는 사실도 믿어요. 아님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영광 받으실 수도 있을 거고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저를 욕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이제까지 저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까지 욕을 먹을까봐 두려워요.”라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대단히 신중했습니다. 지극히 신앙적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 우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역력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참, 너는 별 걱정도 다 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은 당신이 알아서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자랑하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우리는 두 귀로 들었습니다...선조들이 살던 시대, 그 옛날에 당신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전해 들었습니다. 손수 (가나안) 여러 민족들을 몰아내시어 선조들을 뿌리박게 하시고 여러 부족을 짓부수시어 그들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시44:1-2)라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을 열방 가운데서 구별하셨습니다. 당신의 성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친히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에 전적으로 관여하셨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뿌리를 박게 하셨습니다. 늘 당신만의 놀라운 방법으로 각종 전투에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여리고 전투, 기드온 때의 전투, 미스바(사무엘) 전투, 아람(엘리사)과의 전투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얻은 승리는 늘 그랬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또 “주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시44:4)라고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왕 되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선지자는 “온 나라의 왕이시여,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존경을 받으시기에 마땅한 분이십니다. 세계 모든 민족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고 나라마다 왕도 많지만 주와 같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렘10:7)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왕이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완벽한 왕이십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재판관이시자, 입법자이시며,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돌보며 구원해 주실 것이다.”(사33:22)라는 선지자의 외침대로, 이스라엘의 재판장이십니다. 입법자이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가시적인 세계는 물론 불가시적인 세계까지 총망라하여 통치하십니다. 만유의 주이십니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아빠이십니다. 우리의 삶 전부를 책임져 주십니다. 시인은 또 “오직 주 만이 우리의 적군들을 이기게 하시며, 주 만이 우리 원수들을 부끄럽게 만드십니다.”(시44:7)라고 자랑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대적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나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시3:1), “우리의 싸움은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두운 세력들과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엡6:12)라는 말씀에 따르면, 우리 대적은 의외로 많습니다. 가장 강력한 대적은 외적이지 않습니다. 영적입니다. 내적입니다. 가장 큰 원수는 우리 자신입니다. 마치 골리앗 같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해 주소서. 내 원수들의 턱뼈를 부숴뜨리고 악한 사람들의 이를 부러뜨려 주소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들에게 내려 주소서.”(시3:7-8)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큰 확신 속에서 “여호와는 여러분을 모든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보호하십니다.”(시121:7)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시8:31b)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1)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즐거워하느니라.”는 “환호성을 지르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자랑하다.” 등의 뜻입니다. 가장 좋은 번역은 “자랑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3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일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게 하십니다.
반면, 11절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 선물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마음을 집중시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환호성을 지릅니다.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실제로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마음을 다해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여라.”(시103:1)라고 외쳤습니다. “나는 언제나 여호와를 찬양하겠습니다. 내 입술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으로 여호와를 자랑할 것입니다.”(시34:1-2a)라고, 자신은 하나님 한 분만 자랑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여, 즐겁게 여호와를 노래하십시오. 정직한 사람들은 마땅히 그를 찬양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의 영광을 노래합시다. 그의 이름을 함께 찬양합시다.”(시33:1, 34:4)라고 독려했습니다.
마리아 역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나의 구주 하나님을 기뻐합니다.”(눅1:46b-47)라고 고백했습니다. 시인과 사도와 마리아에게 있어서 하나님 한 분만 자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필연적 귀추歸趨였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자신의 허물과 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심으로 이루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 때문에 환호성을 지르며,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유하여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들의 단 하나 뿐인 유일한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복들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환호성을 지를 수 있겠습니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반드시 발견될 수밖에 없는 표지標識라고 할 수 있는 환호성과 기쁨과 즐거움과 자랑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항상, 범사에,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에서도,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절망 속에서도,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서도 이제까지 놀라운 복들을 부어주신 하나님 때문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혹 그렇게 할 수 없다면, ①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해 주시는 믿음 하나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끼리 영광 받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는 일에는 힘을 쓰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요5:44)라는 주님의 지적대로, 여전히 자신의 행위와 노력과 선행 등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구제하고 선을 행하고 기도한 이유는 하나같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 하나만 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② 또 바리새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공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해서 자신들의 의義가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허락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인가를 보충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구원과 관련해서 자신의 공로를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의 밖으로 밀어냅니다.
“성령 안에서 살기 시작하다가 이제 와서 다시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다니 여러분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갈3:3)라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③ 또 자신의 허물과 죄를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허물과 죄는 더럽습니다. 추합니다. 파렴치합니다. 혐오스럽습니다.
치를 떨며 증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존재들이 어떻게 그런 허물과 죄들을 가지고 있을까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절대절망입니다. 소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셨습니다. “완전성과 충족성과 전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입니다. 사도가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4:25)라고 외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불과 열한 절(1-11)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아홉 번이나 반복해서 소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계22:13)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시작과 끝이십니다. 모든 존재와 일과 상황과 조건 등,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 아십니다. 뜻하신 모든 일을 다 이루십니다. 또 하나님의 성품은 완벽합니다. 절대로 쉼을 용납하지 못하십니다. 한 번 시작한 일을 불완전한 상태로 버려두지 못하십니다. 반드시 신실함을 요구합니다.
분명합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곧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두셨다면 결코 아무렇게나 방치해 둘 수 없으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는 사도의 가르침대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결코 중도에 그만두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반드시 함께 하시며 이루십니다. 이는 가정이 아닙니다. 선포입니다. 확신입니다. 믿음입니다.
그래서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믿음, 값진 믿음은 약속을 알고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본다. 불가능은 생각지도 않고 그 모든 것이 결단코 이루어지리라고 외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붙잡습니다.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롬4:18)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모든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붙잡았습니다.
무無를 유有로, 없음空을 있음滿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과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붙잡아야할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입니다.”(롬5:10)라는 논리는 절대로 무너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상징하는 구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상징하는 무지개를 가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나 아무것도 아니나(허물과 죄로 인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파렴치한 죄인이 분명하나) 당신 모든 것 되시니(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거룩한 보혈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기에 충분하니, 우리를 영원한 저주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니) 나 날마다 교훈 받으리.(나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붙잡으리.)”Johaan Casper Lavater라고 노래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떤 가능성도 없는 자기 자신에서만 멈추지 말고, 비참함과 실패와 절망의 땅과 진흙구덩이에만 머물러 있지만 말고, 완벽한 구원을 이루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갈6:14a)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오직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 자랑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소개되어 있습니다. 초나라의 장왕이 밤에 왕궁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모든 문무백관들이 모였습니다. 순간,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연회석에 켜놓은 촛불들을 한꺼번에 다 꺼버렸습니다. 그때 중신 한 사람이 후비의 가슴을 더듬었습니다. 깜짝 놀란 후비는 자기 가슴을 더듬은 중신의 갓끈을 뜯어냈습니다. 떨며 더듬더듬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왕이시여, 불이 꺼진 틈에 어떤 놈이 제 가슴을 더듬었습니다. 그 놈의 갓끈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사실을 고했습니다. 왕에게 갓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대들은 지금 당장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갓끈을 끊으시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불을 밝힌 다음 모두 다 확인했습니다.
하나같이 갓끈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후비의 가슴을 더듬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왕이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단기필마로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왕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후비에게 갓끈을 뜯겼던 바로 그 신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려준 왕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왕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도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적지를 향해 말을 달려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존심을 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혹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해서 자아성취, 자아만족, 자아실현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기 계발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반드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의와 수고와 공로를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억울한 누명을 쓴 요셉은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왕을 섬기다 옥에 들어온 두 관원장이 비범한 꿈을 꾸고 고민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때 그는,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 말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창40:8b)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한 사람은 복권되고, 한 사람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후, 2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완전히 잊혀 졌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복권된 관원장은 그때 비로소 요셉을 기억했습니다. 바로에게 추천했습니다. 곧 요셉을 옥에서 불러올린 바로는 “나는 네가 꿈 이야기를 들으면 잘 푼다고 들었다.”(창41:15b)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이 지체 없이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왕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창41:16b)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순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자랑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 된 거지를 보았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3:6)라고 외쳤습니다. 앉은뱅이는 곧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람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행3:12b-13a, 16a)라고 외쳤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초대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탁월한 능력과 신학과 신구약을 꿰뚫어보는 해박한 성경 지식은 물론 삼천 층까지도 경험했던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만 자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만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던 모세는 백성들이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얼굴에 수건을 둘렀습니다. 이렇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 자랑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공로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무엘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사울은 자신이 아니라 사무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공격을 받은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룻밤에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이셨습니다.
산헤립은 부하장수에 의해 죽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병에 걸렸던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십오 년이나 더 살게 해주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룬다. 그 증거를 나 여호와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 아하스의 해시계에 비친 그림자가 십 도 뒤로 물러갈 것이니 해도 내려갔던 데서 십 도 올라갈 것이다.”(사38:7b-8)라는 말씀에 따르면, 해시계의 그림자가 십도나 뒤로 물러가는 특별한 증거도 보여주셨습니다. 형통까지 선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소식은 바벨론에 전해 졌습니다.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예물도 보내왔습니다. 되어 진 일들에 대해서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에 있는 은과 금과 향료와 향유와 무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 주었다.”(사39:2)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죽을병에 걸렸던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기는커녕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부와 능력과 군사력과 정치적 위업을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너의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오늘까지 너의 조상이 저장하여 놓은 모든 보물이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겨 갈 것이다....너에게서 태어날 아들 가운데서 더러는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다.”(사39:6-7)라는 저주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약 100년 후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자랑하며 보여주었던 모든 금은패물은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후손들은 환관으로 끌려가는 수모까지 당했습니다. 헛된 자랑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b-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직 당신 한 분만 자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허물과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아들을 희생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복들의 유일한 원천이십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바로 그 하나님 한 분만 자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바로 그 하나님 때문에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은혜, 기뻐할 수 있는 은혜, 즐거워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참된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