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계속된다(The World Goes on)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 박현주 역/ 알마 간
[목차]
1부 말하다
서 있는 헤맴
속도에 관하여
잊고 싶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무리 늦어도, 토리노에서는
세계는 계속된다
보편적 테세우스
모두 다 해서 100명의 사람
헤라클레이토스의 길 위가 아니라
2부 이야기하다
구룡주 교차로
언젠가 381고속도로에서
죄르지 페허의 헨리크 몰나르
은행가들
한 방울의 물
숲의 내리막길
청구서
저 가가린
장애물 이론
축복 없는 장소를 걸으며
이스탄불의 백조
3부 작별을 고하다
나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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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헤맴>
* 나는 이곳을 떠나야만 하니, 이곳은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는 곳, 남을 가치가 없는 곳이기에, 이것은 참기 어렵고 차갑고 슬프며 황량하고 치명적인 무게를 지녔으므로 내가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곳이기에,...그는 거기 시간이 끝나는 바로 그때까지 서 있어야 하니, 그곳이 그의 집이기에, 그곳이 정확히 그가 태어난 곳이기에, 그리고 거기가 언젠가 그가 죽어야 할 곳이기에, 거기 집에서, 모든 것이 차갑고 슬픈 곳에서.
<잊고싶다>
* 아니,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그저 어떻게든 유지해 나가면서 계속할 뿐이다. 무언가는 계속되고, 무언가는 살아남는다. 우리는 여전히 예술 작품을 생산하지만, 이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도 않고, 희망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우리는 우리의 환멸을 무시해 봤자 쓸모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선언하고, 좀 더 고상한 목표를 향해, 더 높은 힘을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의 시도는 수치스럽게도 계속 실패하고 만다. 헛되이 우리는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자연은 이를 원치 않는다. 신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소용없고, 신도 이를 원치 않는다. 어쨌든 아무리 원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오직 역사에 대해서만, 인간 조건에 대해서만, 본질상 오로지 기분 좋게 자극하는 적절한 불변의 특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늦어도, 토리노에서는>
* 결국 니체의 집주인이 그를 집으로 데려가고, 이틀 동안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말없이 소파에 누워있다가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무터, 이히 빈 둠[어머니, 나는 멍청해요]"),
* 수천 가지 방향에서 동료 인간들이 우리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동안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며 공감으로 가득한 침묵을 유지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공감이 그 자체로 적절하다고, 그리고 또 다가오는 이들에게도 적절할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일은 그러할 것이다…… 아니면 10년 후에라도…… 30년 후에라도.
아무리 늦어도, 토리노에서는.
<세계는 계속된다>
* 바로 그때 갑작스레 끔찍한 공포가 서서히 내게로 기어들기 시작하니,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점점 커져간다는 것 만은 느낄 수 있었고, 잠시동안 이런 공포는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존재하면서 커져가기만 했으며,....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나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로 인해 초조해지는데,...그런데도 나는 감각을 잃은 채로 창가 옆에 그저 앉아 있기만 했는데, 바깥에서는 이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데도, 그때 갑작스럽게 내 귀는 삐걱대는 소음을 인식하는데, 저 멀리에서 둔중한 사슬이 철컥거리듯이, 또, 내 귀는 약간 득득 긁는 소리도 인식하는데, 단단히 묶어놓은 밧줄이 서서히 풀려나가듯이, 내가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삐걱대는 소리와 이 무섭게 긁어대는 소리뿐,
<모두 다 해서>
* 우리는 무언가 말해지기라도 한다면 그 말에 아주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 그 말은 한 번, 오직 딱 한 번만 말해질 테니까.
<구룡주 교차로>
*그는 구름 높이, 대략 1만 미터 고도에서 시속 900킬로미터의 속도로 북북서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눈이 멀 것같이 푸른 하늘,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희망을 향해서.
<저 가가린>
*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지구를 떠나고 싶을 뿐이다, 이 욕망은 아무리 황당하다고 해도, 너무나 강해서, 마치 치명적 감염처럼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내 영혼을 썩히고, 나를 따고 들어온다,...이전에도 없긴 마찬가지였으니까,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내게는 이전에도 아무것도 없었고, 나중에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인생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는 않다,
<나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 나는 여기 모든 것에서부터 떠납니다: 골짜기, 언덕, 길, 그리고 정원의 어치 새들, 나는 여기 술통과 사제, 하늘과 땅, 봄과 가을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 출구 경로, 부엌의 저녁, 마지막 연인의 눈길, 부르르 몸이 떨리던 모든 도시행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 땅 위에 떨어지는 짙은 황혼, 중력, 희망, 매혹, 평온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 사랑하는 이들과 내게 가까웠던 이들을, 나를 감동 시켰던 모든 것, 내게 충격을 주었던 모든 것, 나를 매혹 시키고 고양 시켰던 모든 것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에 고귀한 이들, 자애로운 이들, 유쾌한 이들, 악마적으로 아름다운 이들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에 새로 돋는 새순, 모든 탄생과 존재를 두고 떠납니다, 나는 여기에 주문, 불가사의, 거리로 인한 도취, 무한한 끈기, 영원을 두고 떠납니다: 여기에 나는 이 땅과 이 별을 두고 갑니다,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앞으로 올 일을 이미 들여다보았기에,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읽고 발췌한 날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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