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신계지의 중심인 샤틴에 위치한 도풍산에 도풍사라는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사원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기독교의 성지가 되어 있다. 영국의 여왕이 이 산 전체를 라이헬트 선교사(1877-1952)를 기념하며 기독교 선교를 위해 스칸디나비아 미션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 산에는 루터란 신학교가 있다. 이 신학교는 동남아 불교권과 이슬람권 선교지에서 온 수많은 신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 신학교와 주변 건축물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일반 서구 신학교와는 달리 이곳 건물들은 중국 남방의 한 불교 사원으로 보일 정도로 전통적인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울러 흰 색 벽에 기와 지붕이 산세와 어우러져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라이헬트 선교사가 의뢰해서 요하네스 프립 몰러(Johannes Prip-Moller)라는 덴마크 건축가가 디자인한 것이다. 이러한 신학교 건물 건축 뒤에는 아시아권의 문화 속에 피어나는 복음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이 학교의 교육 이념은 그 산 위에 우뚝 세워진 큰 십자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십자가는 연꽃 위에 피어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 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일, 이것이 바로 이 신학교가 바라보는 아시아 선교의 실체를 상징화한 것이다. 원래 불교 사원이 위치하던 장소가 기독교의 성지로 바뀐 것이야말로 진흙 속에 아름다운 연꽃이 자라는 것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 연꽃 위에 피어난 십자가는 모든 질곡과 아픔과 죄의 문제를 수용해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복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도풍산의 불교 사원이 기독교 성지로 바뀌는 중심에는 노르웨이 출신의 루터란 선교사 칼 라이헬트가 있었다. 그는 1904년 중국 하남성에 선교사로 파견된 이래 지속적으로 불교도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다. 그의 글을 보면 그가 그는 불교의 표현 방식뿐 아니라 문화적인 상징이 어떻게 실체에 대해서 해석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볼 수 있다. 1930년에 홍콩으로 사역지를 옮긴 그는 도풍산을 근거로 해서 그곳에서 승려들과 같이 생활했다. 그는 불교 승려의 복장을 하고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경전을 배우고 또 성경에 대해서 가르치는 일과를 시작했다.
이 일은 당시 중국인과 분리된 선교사 주거 지역에서 살면서 하루의 정해진 시간 동안만 중국인들과 사역을 했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눈에는 이상한 행위였다. 급기야 몇 차례에 걸쳐 노르웨이의 루터란 선교부로부터 세 차례나 호출을 받고 파문 당할 위기를 넘어야 했다. 그의 사역은 오랜 시간 아무런 열매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전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선교부로부터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불교도들과 사역한지 어언 32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도풍사 내의 70여명의 승려들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는 결실이 맺히게 되었다. 절 전체가 변화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1926년에서 36년까지 그가 세례를 준 숫자는 총 82명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개종된 숫자로만 선교의 성공을 본다면 라이헬트의 사역은 실패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역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결과 도풍사의 대웅전은 예배를 위한 채플이 되고 승려가 자던 방은 게스트 하우스가 되었고 수양회와 각종 집회와 기독교 박물관으로 변모된 것이다.
유럽의 교회에서 보는 희랍화된 모습의 성화와는 달리 이곳에서 보이는 성화는 수묵화와 같은 동양화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가 중국 전통과 삶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들 모두 중국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주변 풍경은 중국의 산수를 빼 닮은 것이었다.
라이헬트는 기독교의 진리를 불교도들에게 설명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기독교가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온전하게 완성해 줄 수 있는 길로써 설명해 냈다. 그는 계속해서 직접 불교도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을 도풍산으로 초대해서 불교도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제시하곤 했다. 그 결과 약 1200여명의 불교 승려들이 개종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 들어온 서구 선교사들이 모두 자신의 문화에 대한 우월감 속에서와 자기 방식을 현지인들에게 주입하고자 했을 때 라이헬트는 당시 선교사들의 관심 밖에 위치했던 불교 승려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살며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진리에 대해서 먼저 배우고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들의 사고 방식에 맞춰서 그들과 복음을 가지고 대화했던 것이다. 그는 1946년에 노르웨이로 은퇴했지만 결국 다시 홍콩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그의 사역을 도풍산에서 그가 죽은 해인 1952년까지 멈추지 않았다.
도풍산의 산책로를 따라서 길을 가다보면 작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나온다. 그 벽에 작은 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성경구절이 있다. 그 안에 들어가서 뒤돌아 서면 문 위에 중국의 국부인 손문의 글이 나온다. 자신의 소원은 자신의 민족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위대한 국부 손문의 성장 배경에는 광동성과 홍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을 품고 좁은 길을 간 선교사들의 노고와 눈물과 중보가 있었다. 그 좁은 길을 걸었던 결과가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한 손문이라는 중국이 가장 존경하는 리더의 모범으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에 대해서 자신이 없을 때 물질이나 우리가 가진 매력적인 것들을 내세울 때가 있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선교를 위한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보다도 그런 주변적인 것들에 의존적이 될 때 문제가 생긴다.
몽골에서 보면 이단들은 선교할 때 돈을 내세우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작년에 통일교에서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몽골 정치의 핵심부인 수흐바타르 광장 한 복판에서 평화통일 대행진을 벌였다. 몰몬에서는 큰 돈을 들여서 여러 개의 교당을 지었다. 대체로 보면 이단들이 선교에 돈을 아끼지 않고 쓰는 것을 본다. 그들이 돈을 주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는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심지어는 교회가 그런 방식에 대해서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자칫 재정적인 힘이 있으면 더 활발하게 사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부러워하게 되기 쉽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돈을 받고 그곳에 가는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경우를 본다. “돈을 주는 데는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 것 같아요. 나는 그냥 돈이 필요해서 가줄 뿐이지요.”
돈을 받고 이단들의 교회로 가는 그들도 무엇이 진짜인지는 아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스스로 알고 있다. 우리는 이단과 돈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와 그것을 현지에서 담아내는 삶의 모습이 실은 관건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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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 | |
첫댓글 아~이런 엄청난 일도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