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의 본질(本質)을 파악하라. 늘 듣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차별화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 경영진이 회사의 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제록스는 ‘좋은 복사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의 효율을 올리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생각했고 사무기기 종합업체로 성장했다. 소니는 소비자에게 ‘즐거움’을 파는 것을 업으로 생각했고 영화와 음악, 게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이처럼 회사가 업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회사의 발전방향에 많은 영향을 준다.
코카콜라의 전 회장인 로베르토 고이주에타(Roberto Goizueta)는 시장을 단순히 탄산음료시장에 한정하지 않았다. “코카콜라의 경쟁상대는 다른 탄산음료가 아니라 모든 음료수다. 모든 음료수와 경쟁했을 때 우리의 시장점유율은 40%가 아니라 3%밖에 되지 않는다.” 시장을 넓게 정의한 코카콜라는 사업을 다른 음료시장까지 넓혀서 새로운 매출을 창출했고 현재 비탄산음료 부문에서 매출과 이익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내고 있다.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업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서 위기를 극복한 사례도 있다. 할리데이비슨은 다른 모터사이클업체들의 등장과 자동차의 보편화로 사업이 위기에 처하자 자기들의 사업을 ‘운송수단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하며 차별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앞에서 업종 정의와 관련한 사례를 4개나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개념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을까. 국내 사례는 없을까. 한국 기업의 사례를 통해 업의 본질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명우 박사는 1977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24년간 근무하면서 주로 해외영업을 담당한 마케팅 전문가다. 미국의 가전사업을 총괄하는 부문장으로 활약했다. 그의 저서 <적의 칼로 싸워라(문학동네, 2013)>에서는 컴퓨터 판매업의 ‘업(業)의 본질’을 ‘생선 장사’로 밝히고 있다. 1990년 여름 삼성전자 영국법인에서 가전제품을 위주로 영업하던 이명우 박사는 컴퓨터와 정보통신제품의 유럽판매 책임자(독일 주재)로 발령을 받았다. 가전을 담당하던 사람이 정보통신 제품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지 3년째로 컴퓨터사업을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컴퓨터 부문의 해외 사업은 아직 준비단계였다. 막중한 책임을 안게 된 이명우 박사는 유럽 총괄법인 설립과 유통망 확보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해 겨울 가장 큰 위기가 발생한다. 해외사업장을 순방하며 프랑크푸르트의 유럽사업장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이 “가전 하던 사람이 여기 왜 있어요?”라고 질문한 것이다. 가전과 컴퓨터는 일견 비슷한 제품같지만 이 회장은 엄연히 다른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가전부문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단순히 자리만 옮겨 가전제품과 똑같은 방식으로 컴퓨터를 판매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당장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요. 그리고 외부에서 최고의 전문가를 데려오도록 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만약 이 마지막 질문이 없었다면 이명우 박사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대답은 이렇게 이어진다.
“한 6개월 정도 일하다 보니 제가 이전에 하던 가전제품 영업이 건어물 장사라면 새로 시작한 컴퓨터 영업은 생선 장사쯤 된다는 감을 익힌 것 같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생선 장사를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가전과 컴퓨터 정보통신을 각각 건어물과 생선 장사에 비유한 것이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컴퓨터 영업을 생선 장사에 비유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새롭게 태동하던 컴퓨터시장은 기존의 다른 어떤 제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삼성전자의 유럽법인이 설립됨과 동시에 286컴퓨터의 판매목표가 할당됐는데 판매하기까지 생산6주와 창고입고 6주 등 총 12주가 소요됐다. 막상 제품이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286컴퓨터를 팔 수 없었다. 유럽 각지의 거래처들에서는 고객들이 새로 출시된 386컴퓨터를 찾으니 286컴퓨터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해당 내용을 본사에 보고했더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시장이 바뀌어서 그런 것이라며 다시 만들어 보내겠다고 했다. 12주 뒤 386컴퓨터가 도착했지만 시장은 또다시 변해 있었다. 불과 3개월 사이에 386보다 성능이 좋은 컴퓨터가 새로운 표준이 돼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시장이 바뀌는 셈이었다. 컴퓨터사업에서는 무엇보다 제품의 ‘신선도’가 중요했다. 이명우 박사는 신선도가 사업 성공의 주요 키워드라는 점에서 컴퓨터와 생선 장사가 같다고 본 것이다.
이에 더해 이명우 박사가 컴퓨터 사업을 생선 장사에 비유한 것은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품이나 사업의 특성에 따라 판매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건어물은 비교적 유통기간이 길어서 가격이 낮을 때는 그냥 보관하고 있다가 명절이나 성수기에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다. 하지만 생선은 싱싱할 때 바로 팔지 않으면 제값 받기가 어렵다. 신선하게 유통하기 위한 운송방법과 보관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배경으로 가전과 컴퓨터가 제품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건어물과 생선의 판매처럼 그 성공요인은 다르다는 것을‘업(業)’의 개념과 연결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것은 취임 초기부터 업의 개념을 설파한 이건희 회장의 말과도 상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