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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성령과 믿는 이의 영
오늘날 믿는 이들은 사람의 영의 존재와 영의 기능에 대한 지식이 가장 결여되어 있다. 사람에게 생각과 감정과 의지 외에 영이라는 것이 있음을 아는 믿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사람에게 영이 있다는 말을 들은 후에도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 혹은 의지를 영으로 착각하거나 기묘하게도 자기의 영이 어디에 소재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이러한 우매함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믿는 이가 하나님과 동역할 줄 모르고 자기를 어떻게 다스릴 줄 모르며 어떻게 사탄과 싸워야 할지를 모른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영의 일이 요구된다.
믿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속에 생각하는 사상과 지식과 상상, 감정 속에 느낌과 애정과 애호, 의지 속에 뜻과 의견과 결단이 있다는 것 외에 또 영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 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보다 더 깊은 것이다. 믿는 이들은 자신에게 영이 있다는 것과 이 영의 지각과 일과 능력이 어떠하며 영이 활동하는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오직 이렇게 해야만 믿는 이가 육체의 혼이나 몸을 좇아 행하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할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영과 혼이 혼합되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강하고 힘센 혼의 지각을 가질 뿐, 죽어 있는 영의 존재성을 모른다. 이러한 우매함이 죄인 될 때부터 믿는 이가 된 후까지 계속된다. 이러므로 믿는 이가 영의 생명과 ‘육체에 속한 것’을 이긴 체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영을 좇아 행하지만 때로는 혼을 좇아 행하게 된다. 이들은 영의 요구를 모르고 어떻게 영을 해방하고 어떻게 영을 보양하며 영에게 어떤 지각이 있으며 이 지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그들은 영의 생명을 속박하고 혼의 천연적인 생명이 변함없이 활동하는 이것을 믿는 이의 생활 원칙으로 삼는다. 이 심각성은 매우 중대하다. 이것은 일반 믿는 이의 상상을 초월한다. 더 높고 깊은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충성스러운 믿는 이들은 죄악을 이긴 체험을 가진 후에도 영의 일을 모르므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생각으로써 ‘영성과 성경적인 지식’을 추구하고 감정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구하며, 그들의 몸 안에서 일종의 타오르는 느낌을 추구하고 자기의 의지의 힘을 좇아 결심하고 행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믿는 이를 미혹하여 자신(혼)의 체험을 중시하고 자기의 신령함을 따라갈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의 자아(혼)의 생명을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자라게 한다. 그는 주관적으로 그의 체험이 영적으로 견고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 영적인 노정에서 참되게 진보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성령과 성경의 가르침대로 점진적으로 영의 기능과 일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2권)
사람의 거듭남
죄인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위로부터 영의 거듭남이 필요한가? 이는 사람이 타락한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영이기에 영의 거듭남 곧 새 영을 영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탄은 타락한 영이고 인간도 타락한 영이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육신이 있다. 사탄의 타락은 인류의 타락 이전에 있었다. 사탄의 타락에서 우리는 인간의 타락을 알 수 있다. 사탄은 하나의 영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직접 교통하도록 그를 지으셨다. 그러나 사탄은 타락하여 어두움의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어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덕성에서 끊어진 자가 되었다. 그럴지라도 사탄은 그의 타락으로 인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잃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사탄처럼 타락하였고 어두움 속에 떨어졌고 하나님에게서 끊어졌다. 그럴지라도 사람의 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영은 이미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서 교통할 수 없고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해석으로 말한다면 사람의 영은 이미 죽은 것이다. 범죄한 천사장의 영이 영원히 존재하듯 범죄한 사람의 영도 영원히 존재한다. 단지 인간에게는 육신이 있고 그의 타락은 그로 육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창 6:3). 이 세상의 어떤 종교나 도덕도, 어떤 문화와 율법도 타락한 인간의 영을 개선할 수 없다. 인간이 육체의 위치에 떨어졌으므로 어떤 것도 그로 다시 ‘영’이 되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거듭남―영의 거듭남―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오직 피를 흘리시고 우리 죄를 정결케 하며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죄인이 주 예수를 믿을 때에 그는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창조되지 않은 그분 자신의 생명을 죄인에게 주어 그(죄인)의 영을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죄인이 거듭나는 이것은 영 안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사람 속에서 시작되고 중심에서 둘레로 확산된다. 이것은 밖에서 안으로 일하는 사탄의 방법과 다르다. 하나님의 목적은 먼저 사람의 어두워진 영 곧, 본래 그분의 생명을 영접하고 그분과 교통하도록 정해진 부분에 생명을 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그런 다음 그 안에서부터 사람의 혼과 몸에까지 일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은 한 면으로는 사람으로 새 영을 얻게 하고, 다른 면에서는 그의 낡아진 영을 살린다. 에스겔 36장 26절에서 거듭남을 말할 때에 “(내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요한복음 3장 6절은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한다. 이 두 구절에서 말한 ‘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가리켜 말한다. 이는 이 ‘영’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거듭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벧후 1:4), “범죄치 못한다”(요일 3:9). 비록 본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이 살아났지만 여전히 더럽혀질 수 있으므로(고후 7:1) 거룩히 분별될 필요가 있다(살전 5:23).
하나님의 생명(혹은 ‘영’이라고 칭함)이 우리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올 때 곧 죽고 혼미케 된 우리의 영을 살렸다. 본래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으나”(엡 4:18) 이제는 다시 살아났다. 이러므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고 말한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영의 사망이고, 거듭날 때 우리가 얻은 것은 죽었던 영의 되살아남이다. 또한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것을 얻었을 뿐 아니라 더욱 아담에게 없었던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새 영을 얻었다.
이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개선하려는 것이나 선행을 권장하는 것이나 소위 부흥회, 회개 등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어찌하였든 사람의 행위는 결코 자신의 영을 살릴 수 없고 ‘새 영’을 얻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은 것을 아무리 개선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죽은 것이다. 낡은 것을 아무리 수리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낡은 것이다. 하늘로부터 새 생명을 얻지 않는 한, 사람이 아무리 부지런히 종교를 연구하고 도덕성을 실천해도 그의 영을 살릴 수 없고 새롭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새 영만이 사람의 낡아진 영을 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새 영을 영접하지 않고 자기 영을 살리려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롬 8:9)이기 때문에 믿는 이로 자칭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신이 거듭났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뛰어난 생명을 얻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 아버지의 자녀이면서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모순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말할 때에 성경은 수차 ‘영생’이라고 했다. 이 ‘생명’은 원문에서 ‘조에(zoe)’로서 더 높은 생명 혹은 영의 생명이라는 뜻이다.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믿을 때에 거듭나서 이 영생을 얻게 된다. 영생은 어떤 기능이 있는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영생은 믿는 이가 나중에 누리기 위한 어떤 축복만이 아니라 영성상의 일종의 기능이다. 영생이 없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주 예수를 알 수도 없다. 이렇게 직감적으로 주님을 아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한 후에서야 얻을 수 있다. 바로 사람 속에 있는 이 하나님의 생명이 나중에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으로 발육하고 성장하게 한다.
거듭난 후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은 바로 이 영으로 말미암아 옛 창조에 속한 것을 제해버리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일은 다 이 영 안에 포함되어 있다.
성령과 거듭남
거듭날 때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으로써 살아나게 된다. 이 일을 능동적으로 행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사람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받게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분은 먼저 사람들이 주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사람의 마음을 예비하신다. 십자가의 일은 주 예수님께서 이루셨지만 이 일을 죄인의 마음에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일과의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십자가이고, 이미 성취된 것을 다시 사람 속에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사람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십자가이고, 사람에게 체험을 주는 것은 성령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실’을 이루는 것은 십자가이고, 사람에게 체험을 갖게 하는 것은 성령이다. 십자가의 일은 죄인이 구원받을 가능성을 갖게 하는 지위를 만들어 주고 구원을 이루어 준다. 성령의 일은 십자가로 창조하고 이룬 것을 죄인에게 나타내 보임으로써 그것들을 얻고 소유하게 한다. 성령은 단독적으로 일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일한다. 십자가가 없다면 성령은 일할 근거가 없다.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면 십자가의 일 또한 죽은 것이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효과가 있었다 할지라도,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비록 모든 구원을 이룬 것은 십자가이지만 그 이루신 것을 얻도록 사람에게 직접 일하는 것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거듭남이 성령의 일이라고 말한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8절에서 주 예수님은 또한 거듭남이 ‘성령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하셨다. 믿는 이의 거듭남은 성령이, 십자가의 일을 그들 안에 더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그들의 영 안에 더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의 집행자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자”이다(갈 5:25, 원문 참조). 만일 사람들의 이해가 두뇌에 의한 것이며 성령께서 그의 영 안에서 그를 거듭나게 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이해한 것은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인간의 지혜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며 단지 혼에 자극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은 사람의 믿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이는 그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믿은 사람(롬 10:9-10)만이 구원을 받고 거듭날 수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거듭날 때 성령은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할 뿐 아니라 또 한 단계의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날부터 성령께서 그들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사람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이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에스겔 36장은 믿는 이들이 새 영을 얻는 것과 성령을 얻는 것을 같이 두었다.
“(내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 또 내 신(영)을 너희 속에 두어”(26-27절).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이것은 믿는 이가 새 영을 얻는 것으로써 그의 영이 새롭게 되고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얻은 즉시 이어서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고”라고 했다. 이것은 성령이, 새롭게 된 사람의 영 속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거듭날 때 믿는 이들은 새 영을 얻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의 안에 내주하는 (인격이 있는) 성령을 얻은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믿는 이들이 자기가 얻은 영이 새 영인 것을 모르듯, 그가 새 영을 얻을 때에 또한 성령께서 그의 안에 내주하게 되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령은 결코 믿는 이가 거듭난 지 수년 후 그가 부흥되거나 추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가 거듭날 때에 인격체로서 그의 안에 단지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거하신다.
사도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고 말한다. 여기서 ‘분노케 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근심은 성령의 사랑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근심’은 ‘떠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구속의 날까지’ ‘우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우리 속에 계시기’(요 14:17) 때문이다. 거듭난 믿는 이라면 성령은 항구적으로 그의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모든 믿는 이의 속에 있는 성령의 상태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 속에서 성령은 근심하고 어떤 사람 속에서는 기뻐한다.
우리는 반드시 거듭남과 믿는 이들 안에 성령께서 거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새 영이 없다면 성령은 거할 곳이 없게 된다. 심판된 세상 안에서 거룩한 비둘기는 거할 곳이 없다. 새 창조가 발견되어야 비로소 성령은 거주할 수 있다(창 8장 참조). 거듭남이 없다면 성령께서 믿는 이 안에 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거듭남은 불가피한 것이다. 믿는 이가 거듭났다면 그는 새 영을 받은 동시에 영구적으로 그의 안에 거하도록 성령을 영접한 것이다. 새 영을 얻음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영원히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듯 성령의 내주하심도 또한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다.
믿는 이가 자신이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은 것을 아는 것은 보기 드물고 아주 귀한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은 즉시 성령께서 그의 인도하심과 생명의 능력과 범사의 주로서 그의 안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더 적다. 많은 갓 거듭난 믿는 이의 진보가 늦고 자라지 못하는 이유를 이 점으로 추론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인도자의 우매함 때문이거나 아니면 믿는 이 자신의 불신과 충성스럽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만일 주님의 종들이, ‘성령께서 사람 속에 거하는 교리는 신령한 믿는 이를 위한 것이다’라는 의견을 버리지 않는 한, 사람들을 영적인 위치로 인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에 성령께서 이루신 일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알도록 인도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로 새 성품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라고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약속의 나중 부분은 앞 부분과 동일하게 아름답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약속은 우리가 새 영을 얻는다는 약속 뒤에 바로 이어진다. 물론 성령께서 믿는 이가 죄를 깨닫고 주님을 얻고 생명을 얻도록 하시지만 이것은 성령께서 믿는 이 안에 거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믿는 이들 안에 거하는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을 나타내는 이것은 은혜 시대의 한 가지 특별한 영광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영을 그분의 자녀에게 주셨다. 지금은 그들이 믿음과 충성으로써 이 사실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할 때이다. 부활의 날과 오순절은 이미 지나갔다. 성령의 강림하심도 이미 이루어졌다. 만일 믿는 이들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일만 알고 성령의 ‘내주하심’의 진실성을 모른다면 그는 구약에 있는 사람과 별 다른 것이 없다. 부활의 날과 오순절날의 반대편에 거하는 믿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설령 믿는 이의 우매함으로 그들의 체험이 하나님의 약속의 첫 부분을 넘어서지 못하고, 아직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떻게 인격체로서 자기 속에 거하시는 줄 모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거듭나고 성령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성전이 되었다. 만일 그가 기꺼이 믿음으로써 하반절의 약속을 취한다면 그 약속은 상반절의 약속과 같이 영광스럽게 그에게 응해질 것이다. 만일 믿는 이가 단지 거듭나고 새 영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그는 그가 얻을 수 있는 강하고 기쁨에 찬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된다. 만일 믿는 이가 성령께서 그의 안에 내주하시는 비밀과 이 약속을 모른다면 그는 주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축복을 얻기가 어렵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그가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거듭날 때에 하나님께서 단지 그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의 주로서 인격적으로 성령께서 그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길에서 그는 끝없는 진보를 가질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고 신실하다면 그의 영이 새롭게 된 날에 그는 성령께서 그의 안에 거하시는 체험을 갖게 된다. 믿는 이들이 거듭난 후에 성령은 신령한 단계로 그를 안내하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 안에서 그를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도록 늘 그의 안에 거하고 계신다. 그러나 믿는 이가 성령의 지위를 모르고 그분의 내주하심을 멸시하고서 임의로 행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믿는 이는 마땅히 이러한 빛 비춤 안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거룩한 임하심을 존경하며, 그분의 역사를 허락하며 그분을 존중하고 사랑함으로 그분 앞에서 조금도 스스로 주장하지 않고, 두렵고 떠는 마음으로 그와 이렇게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를 높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게 살기 원한다면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은 이미 우리 영 안에 계신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서 안에서부터 밖으로 일하시도록 허락하는가에 달렸다.
성령과 사람의 영
우리는 사람이 거듭날 때에 성령께서 이미 믿는 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일을 깨닫기 위해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하자.
우리는 거듭남의 참 뜻이 외적인 변화가 아니고 혼과 몸이 어떤 자극을 받는 것도 아니라 영에 생명을 얻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거듭남은 사람의 영 안에 발생한 새로운 일이다. 거듭남은 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영이 살아날 수 있는 이유는 새 생명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새 영을 얻을 때에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신다는 것이다. 에스겔 36장 26절과 27절에 두 개의 ‘너희 속에 두고’가 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이 사람의 영임을 알려 준다.
우리는 사람의 온 전체가 성전 같다는 것을 본 바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여기서 사도의 뜻은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것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거함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비록 성전 전체가 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이지만, 하나님께서 실지로 거하신 곳은 지성소이다. 성소와 바깥뜰은 지성소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하심에 따라 활동할 뿐이다. 우리의 영은 지성소로 예표된다. 이 비유로 본다면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매우 확실한 사실이다.
거하시는 분과 거하는 처소는 그 성질이 동일하다. 거듭난 후에 사람의 거듭난 영 외에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그리고 육신 모두 성령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기에 부적합하다. 그분은 건축자이시며 또한 거주자이시다. 그분이 건축을 마치기 전에 그분은 결코 그 안에 거주하실 수 없다. 그분의 건축은 그분의 거주하심을 위한 것이다. 그분은 그분이 건축한 곳에서만 거하실 수 있다.
우리는 전에 거룩한 관유가 사람의 육체 위에 부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또한 거듭나기 전에 사람의 모든 부분을 그것이 어떤 부분에 속했든 성경은 통틀어서 ‘육체’로 보신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로 보건대 성령은 사람의 육체 속에 거할 수 없다. 이 말은 성령께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혹은 육신 안에 거하실 수 없다는 뜻이다. 혼의 각 부분뿐 아니라 육신의 각 부분 안에도 성령은 거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영이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영 안에는 거하지 않으신다. 거룩한 관유는 육체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듯 성령도 ‘육체’의 어떤 부분 속에도 거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육체와 다른 관계가 없고 오직 다투는 관계가 있을 뿐이다(갈 5:17). 그러므로 사람 속에 육체와 구분된 어떤 것이 있지 않은 한, 성령은 결코 사람 속에 거할 길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영의 거듭남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성령께서 육체와의 다른 새 영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믿는 이가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이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관보다 더 깊은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임을 모른다면, 그는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찾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외면적인―즉 영을 떠나서 혼이나 육신 안에 혹은 육신의 바깥에서―어떤 인도하심을 바라는 것이 곧 속임당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성령은 우리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영 안에서 그분의 일을 볼 수 있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바랄 수 있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향한 것이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분―우리의 보혜사는 우리 영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하심 또한 거기로부터 나온다. 만일 우리가 영을 떠나서 꿈과 이상과 어떤 음성이나 감정을 추구한다면 속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많은 믿는 이는 자신이 평안한지, 은혜를 받고 진보했는지를 보기 위하여 자주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의견을 주목한다. 이것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에게 큰 해가 된다. 이것은 믿는 이가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돌려 자기를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안으로 돌이키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전자와 다른 믿음의 가장 큰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그의 영 안에서 거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다. 믿는 이는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는 결코 자기의 내적인 사정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둠 속에 있는 자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께서 거하시는 새 영을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두운 휘장 뒤에 계시면서 사람으로 믿고 경외하라고 하고 자신을 보이지 않게 하듯,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는 것도 역시 혼과 몸으로써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참된 영에 속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것이다. 이러한 생명은 생각 속의 많은 사상과 이상이 아니고 감정 안의 많은 불탐과 즐거움과 기쁜 느낌도 아니며, 육신이 돌발적으로 밖에서부터 온 어떤 능력에 의해 충동되거나 부딪히거나 만진 바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속인 영 안에서부터 발한 생명이다.
참된 영적인 생활은 생각보다 더욱 깊고 느낌보다도 깊으며 육신의 지각보다 더욱 깊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참된 영을 좇아 행함은 가장 깊은 속에 있는 영의 활동을 깨닫고 그것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 안에 어떤 특이한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 느낌보다 더 깊지 못하다면 이러한 체험들은 모두 영적인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람의 영에서 성령의 일로 인한 결과만이 영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외에 기타 모든 것은 일종의 사상이나 감정에 불과하다. 영적인 생활에는 믿음이 요구된다.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마음이나 혼이 아님―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한다. 사람의 영은 사람이 성령과 동역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거듭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는 우리의 영이 살아났고 우리 영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은 바로 거듭나고 새롭게 된 영이다. 그분은 사람의 영 안에 있으나 사람의 영과 구별되는 성령이시다. 그분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비고
우리는 화합본(和合本)성경(한국 개역판과 동등함―역자 주)에서 언급된 어떤 부분의 영이 성령이고 어떤 부분의 영이 사람의 영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성경 역자의 말에 의하면 원어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없고 ‘영’이라는 단어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이므로 이러한 뜻을 가진 ‘영’이라는 단어 앞에는 ‘성’을 추가하여 성령을 뜻한다고 표시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는 자주 ‘영’이라는 단어 앞에 ‘성:’자가 추가된 것을 볼 수 있다. ‘성’ 옆에 ‘:’표는 무슨 뜻인가? 화합본 성경 처음 몇 페이지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단어이든 그 단어 옆에 ‘:’표가 있는 것은 원어에서 그 단어가 없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를 추가한 것은 원어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성:령’이라고 한 곳은 원어에서 ‘성’자가 없고 다만 ‘영’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 ‘성’자는 성경 역자가 추가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단어, 모든 문장이 하나님의 영감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많은 부분에서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다만 ‘영’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부분은 그분이 말씀하신 부분과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은 명확히 ‘성령’이라고 했는데 왜 어떤 부분(성경 역자에 의하면 분명 성령을 가리킴)에서는 ‘영’이라고만 했는가? ‘영’이라고만 한 많은 부분이 성령을 가리킴을 우리가 안다. 예로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등이다. 그러나 많은 성경 구절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부분을 ‘영’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1913년 캐나다에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월간지에서 플러스트라는 사람이 성령에 대해 강론한 여섯 메시지를 수록하였다. 그 내용은 모두 원어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하면서 성경에서의 성령의 여러 가지 용법을 말해 주었다. 뒷부분에서 그는 성경의 앞뒤 문장을 상관하지 않고 모든 ‘영’이라는 단어를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기묘하다. 이 큰 제목에 있어서 학문도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신약을 쓸 때에 특히 ‘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대문자로 써야 할지 소문자로 써야 할지를 표시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어 성경에서 ‘영’을 대문자로 쓴 곳은 모두 성경 역자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신약 성경의 전문가들은 어떤 곳의 영을 대문자로 써야 할지 어떤 곳을 소문자로 써야 할지에 대해 의견이 서로 다르다.” 대문자로 쓴 영(Spirit)은 성령을 가리키고 소문자로 쓴 영(spirit)은 성령이 아닌 성령 외의 영을 가리킨다. 그중의 하나가 사람의 영이다. 이 말을 들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가? 원어에서 ‘영’이라고만 한 곳은 그 ‘영’이 성령을 가리키는지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고 원문의 정관사도 보아야만 어떤 부분에서 말하는 ‘영’이라는 단어가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필요로는 신약에서 ‘영’이라는 단어에 ‘성’자를 추가한 것은 역자의 해석일 뿐 번역한 것이 아님을 알면 된다. 이런 부분을 만날 때 우리가 감히 그것이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는 사람의 영을 겸하여 말한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에서 우리는 성령과 믿는 이의 거듭난 영이 얼마나 분리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성령은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릴 수 있도록 믿는 이의 영 안에 일하기 때문에 성경 어떤 곳에서는 성령을 사람의 영과 함께 언급하였다. 사람의 주인은 영이다. 그러나 영은 단독적으로 주인이 되지 않고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므로 함께 주인이 된다. 사람이 성령과 동역하는 부분은 바로 영이다. 성령께서 사람 속에 일하시는 부분도 역시 영 안에서이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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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과 성령에 대한 글은 워치만 니의 것이 내용이 깊다고 생각합니다..KJV를 보면 대문자 Spirit 과 소문자 spirit 으로 일일이 구분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모두 앞에 부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the Spirit은 성령을, the spirit은 사람의 영을 지칭합니다..이것과는 구별되게, 부정관사 a 가 붙어서 a spirit이라는 것도 있습니다..개역성경에는 이것이 귀신,,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눅 9:39).
the Holy Ghost도 물론 성령입니다..KJV의 경우 요일 5:7에 이 단어가 사용이 되었고 5:8에는 소문자 the spirit가 나옵니다..8절의 이 단어가 앞의 7절의 Holy Ghost를 받아서 그 성령 혹은 그 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저는 이것을 앞의 7절과는 관계없이, 그냥 사람의 영,,의 뜻으로 쓰였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개역성경에는 이것저것 짬뽕이 되어 있어서 확인이 어렵습니다.
영에 속한사람을 읽어 본지도 참오래 되었습니다..처음 이책을 읽기 시작 했을때 매일 매일 주님을 따르는 일을 배워 보겠다고 경험이 되지 않으면 진도를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영영 진도를 나갈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할수 없이 체험은 뒤로 미루고 책을 먼저 읽어 나갈수 밖에 없었지요..이책이 쓰여진 목적은 사람들에게 신령한 길을 찾도록 하는데 있지 않고 신령한 길을 알고 싶어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으로 기억합니다..서문에 보면 이책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달리 이해 되지도 않고 깨달을수도 없다고 되어있습니다..그래서 어떤부분은 이해가 가고 또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더군요..
로마서에 " 내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7:22)라는 말씀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기 까지는 수십년이 지나가버렸습니다.우리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기도 하고, "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엡3:16) 라고 하십니다..이렇게 성경은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나눕니다..또다른곳은 바울이 "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그사람의 영은 속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이 무엇이며 영적인 것이 무었인지를 알아야 영을 따라 사는것이 가능한줄로 압니다..
우리의 마음과 온존재를 주님께로 향한 그러한 생활이 신령한 생활을 행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옛사람에게서 완전히 해방되어 온전히 새사람으로 들어 가도록 하는것이라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것, 곧 거듭나는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이세상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주님의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을것입니다..이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서 자라나서 밖으로 나오려면 옥합처럼 깨뜨려 져야 할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향기가 나지 않는이유는 순전한 나드기름이 흘러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체험들과 곤란과 환경들이 다 우리를 위한것임을 알아야 할것입니다.주님께서 우리 겉사람을 헐어 버리기 위해서 안배하신 것들이기 때문 입니다..그러나 문제는 약간의 괴로움, 약간의 좌절이 너무 크게 느껴질뿐더러 그럴때 마다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더군요..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을 알아갈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음에도 저는 모든시간을 구속하여 그분을 붙잡는것이 힘이 들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가장 힘이 드는것은 뒤에 있는것은 잊어 버리고 전진하는것입니다.하지만 다만 이보배로운분을 사랑하며 절망치 않는것은 성령의 역사는 멈춘적도 없고, 멈추지 않으리라 바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워치만 니의 글에는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워치만 니 시절에는 성경공부하기도 요즘만큼 쉽지가 않았을 텐데, 대단한 열성과 탐구심으로 깊은 영성과 대단한 식견을 가지게 된 분으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경건 서적에 너무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역시 우리에게는 성경이 더 값어치가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남이 잘 소화해 놓은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나중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많습니다..저의 지론은 성경10, 경건서적 1의 비율 정도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성경을 여러 번 읽고 거기 있는 주석만 읽어도 많은 공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워치만 니의 글은 좀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자칫 그분의 사상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이것은 별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봅니다..성경이 주식이라면 워치만 니의 글 같은 경건서적은 어쩌다 먹는 간식이나 팥빙수 정도로 생각하고 싶습니다..소화가 자칫 잘못되면 어느 한쪽에서 뒤틀릴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저도 그런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소위 신앙서적이란 저자의 생각이나 사상이 정상적이지 않으면 많이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워치만니는 자기 경험을 얘기할때도 거의 연약한 모습, 실수했던거, 등등...참 솔직하게 자신을 고백 해놓았습니다..저는 그분의 책을 좀 오랫동안 많이 읽어다면 읽은편입니다만...그사상에 빠져들기 보다는 절로 성경을 들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적으로 발전하고 싶은 소망이 있을것입니다..그렇다면 그책의 저자가 자신을 드러내는지 주님을 드러내는지를 분별할수 있을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겸손히 행하기를 배우고 또한 지도자의 역활을 너무 열을 다해 이행하려던 나머지 사람앞에서 경솔하게 나서지 않기를 배우자.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말에 들을 준비태세가 된것을 보고도 조금도 자기 만족에 들떠서는 안된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주께 나아가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말에 지대한 관심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우리의 확신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자신을 너무 믿어서는 안된다..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실수 하기 쉬운 사람들이다..자신만만 할수록 탈선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주관주의의 위험성을 말하면서 우리의 보호아래 맡겨진 사람들을 다스리려 해서도 안되고 다만 주님으로 부터 맡은 임무를 성실히 이행만 해야 한다는것과 다른사람들에게 메세지를 받아 들이도록 강요하면 안된다고 설명한 워치만니의 말입니다..
저도 성경 한권이면 충분하다는 믿음을 갖고 잇습니다. 성경외의 다른 책들은 어디까지나 보충교재로 쓰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워치만 니의 책들에 관해서는 한국교회가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 이 카페에서도 더욱 공부하여 내놓으면 좋겠습니다. 두분 다 매우 깊이 있게 공부하셨음을 보게 되어 좋습니다. 워치만 니의 책을 볼 때 조금 주의할 점은 영혼육 구분을 너무 많이 하는 점이 있는데 그에 치중하다 보면 매사를 자꾸만 그렇게만 구분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빼고는 전반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영과 혼에 관련하여 돋보이던 해석은 고전 2:14절의 육에 속한 사람을 혼적인 사람으로 번역한 대목입니다. 킹제임스는 자연적인 사람으로 번역했습니다만, 원어는 푸쉬케 이므로 워치만 니의 지적이 맞습니다. 그리고 Holy Ghost 란 말은 오늘날 영어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Ghost 란 영이 가시적 형상을 입고 나타났을 때 고스트라 합니다. 성령은 Holy Spirit 일 뿐이지요. 이점은 뉴킹에서 바로잡아졌습니다.
실은 영과 혼이라는 것은 아주 긴밀하게 붙어 있으며 상호작용하는 것이지요..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신앙생활도 더 깊이 할 수 있는 유리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
저는 워치만니의 책을 읽음으로서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였고, 다시 워치만 니의 책을 끊음으로서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되실까요? 제가 영적으로 성장한 점은 교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령을 좇아 사는 삶, 영과 혼과 육의 구분, 등을 많이 생각해볼 수 있던 점이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워치만니의 책을 끊어버린 것은 형제모임 안에 들어와서 수많은 형제모임의 책들을 읽음으로서, 성경에 좀더 직접 다가가는 계기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전도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성경으로 더 직접적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워치만니가 분별하고 해석한 바를 공부하기 보다는 그것을 매주일의 성만찬
이라는 것을 통해 실행하고, 침례 예식을 통해서 바닥에 깔아줍니다. 또 강력한 형제모임의 복수 장로체제, 형제호칭, 문자적 순종 등을 통해서 실천함으로 영과 혼의 구분에 치중하거나 그것을 연구할 필요가 없게 해줍니다.
여기 회원님들은 각자가 자기의 은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은사란 대단한 것이 아니고, 여기에 성경번역에 관해 상당한 일가견을 갖고 계신 분은 바로 그것이 은사입니다. 또 형제모임에서 분별해낸 신약교회의 모임진리를 잘 아시는 분은 그것을 전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워치만 니에 관해 많이 아시는 분은 그에 관하여 계속 공부할만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나중에 전문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칭찬 뿐만아니라, 문제점 지적도 포함할 것입니다. 또 미국의 여러 설교가들에 대한 분별을 전문적으로 추구할 수 있습니다. 또 음악에 대한 평론도 다른 성도들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런 평론을 할만큼 전문적이 되지 못하며 잘 아는 분이 분별해서 설명해주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회와 컬럼버스 기사단에 관한 전문가도 필요하고 그 분별은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현황에 관하여 주목하며 그 진전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필요하며, 교황청의 동향과 그들의 종교통합 진전상황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이렇듯이 공부하고 주목할 분야들은 엄청많습니다. 그것을 주님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잘 분별해냈을때는 크게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침례,매주일의 성만찬,복수 장로제도, 형제호칭,목사권위가 없음,문자적 순종, 교회에서의 남성들의 주도함... 아주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특히 한국분들이 있는 형제교회가 근처에 있다면 좋겠습니다...
형제교회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타나서 형제모임이라고 할것 같아서 제가 먼저.....^^
형제교회, 형제모임이라는 것은 남들이 붙여준 이름이지요..정작 그들은 그냥 무슨무슨 교회로 불리길 좋아합니다..그러나 형제모임이 세대주의 사상, 특히 세대주의 종말론을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환난전 휴거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부분만 빼면 형제모임은 아주 훌륭한 모임입니다.
ㅎㅎ 형제교회가 아니고 형제모임이군요~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완벽한 사람은 없는게 당연한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