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효의 야생초 산행-천관산
억새 눈부시게 날리는, 가을입니다
장흥 천관산 2007-10-18 09:30:00
높고 푸른 하늘, 살갗에 와 닫는 상쾌한 바람,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 남쪽으로 기우며 짧아져 가는 햇살만으로도 가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찬바람에 사각사각 노래하며 일렁이는 하얀 억새와 울긋불긋 단풍 소식이 더해지면 가을도 깊어 절정에 이른다.
등산하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유난히 잦았던 가을비 탓에 한 동한 미뤄왔던 산행을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단풍소식이 전해지며 북에서 남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서는 고운빛깔을 찾아 너도나도 나선다. 단풍소식보다 한 발 앞서 전해오는 억새를 찾는 발길이 앞섰다.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
야생초산행도 농익은 가을빛깔을 찾아 천관산으로 향했다. 천관산(天冠山 723m)은 전라남도 장흥군 바닷가에 위치한 산으로 1998년 전라남도에서 도립공원로 지정하였다. 천관산에는 천주봉·관음봉·선재봉·돛대봉·갈대봉·아기바위·사자바위·부처바위·남근바위 등 수많은 기암과 기봉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이다. 그 모습이 마치 천자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천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가을이면 주봉인 연대봉에서 대장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일대에는 억새가 하얗게 일렁이며 장관을 연출한다. 억새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주능선으로 남쪽바닷바람이 불어와 안개라도 걸치는 날이면 이 세상 땅이 아닌 것처럼 신비감을 준다. 이곳 사람들은 만물상을 하고 있는 크고 작은 바위와 특히 가을 억새가 유명한 천관산을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곱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새색시같은 ‘알며느리밥풀’
야생초산행은 천관산도립공원 주차장을 출발하여 장천재를 거쳐 신선봉~금강굴~환희대~억새군락지~연대봉~양근암~장안사~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기산행을 택했다. 새벽에 부지런을 떤 산행이라 주차장이 평일 산행처럼 한가하다. 진달래·철쭉·억새 등 널리 알려진 볼거리로 유명한 산을 때맞춰 찾을 때는 서두르는 것이 좋다. 천관산도 매년 10월이면 아름다움이 정점에 이르는 억새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라 붐비는 시간을 피해 새벽 산행을 택했다.
등산로 입구에 심어 놓은 은목서가 진한 향기를 쏟아내며 반긴다. 향기가 너무나 짙어 오직 두 그루뿐인데도 한참을 따라오며 유혹한다. 진한 향기에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다리를 건너 장천재로 향했다. 입구에는 동백나무군락이 자리하고 있다. 여름내 잘 여문 열매가 터지며 커다란 씨앗을 물었고 가지 끝으로는 다가올 겨울 추위가 가기 전에 터트릴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장천재를 지난 길은 작은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건너편 기슭으로 이어진다. 선인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로 가파른 길이다. 소나무가 많은 메마른 등산로 주변에는 다른 식물은 없고 유난히 붉은 ‘알며느리밥풀’만이 하얀 밥풀을 두개씩 물고 있을 뿐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는 다른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 소나무가 다른 식물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해물질을 내놓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송이가 있는 곳에는 ‘알며느리밥풀’과 같은 현삼과의 며느리밥풀이 많다고 한다. 반듯이 며느리밥풀이 사는 곳에 송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송이가 나는 오래된 소나무 숲속에서도 며느리밥풀은 자란다. 여러 종류의 며느리밥풀 중에서도 늦게까지 꽃이 피는 ‘알며느리밥풀’이 더 예쁘다. 전설처럼 ‘알며느리밥풀’은 채 뜸이 덜든 여문 밥알을 물고선 새색시를 떠올리게 한다.
#하얀수염처럼 빛나는 억새
신선봉으로 오르는 구절초가 드문드문 자리한 바위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 즐겁다. 신선봉에 올라야 천관산을 일부라도 볼 수 있다. 곳곳에 자리한 기암괴석과 억새가 너울거리는 부드러운 주능선을 멀리서나마 바라다 보이기 때문이다.
금강굴이 있는 종봉과 구정봉도 멀리서 볼 때는 그저 그런 바위로 보이던 것이 다가서니 무척 크고 웅장하다. 여섯 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눈높이로 웅장한 바위를 나란히 서서 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 바위를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밖에 없다. 대장봉에 올라야 만물상을 하고 선 원근의 크고 작은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대장봉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펑퍼짐한 능선에는 나무 한그루 없는 억새밭이다. 매년 이맘때면 하얗게 반짝거리는 여기 억새를 보러 수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흔히 사람들은 이즈음 하얗게 빛나는 ‘억새’를 보고 억새꽃이 한창 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수염처럼 나풀거리는 억새꽃은 바람에 날려 보낼 씨앗에 털을 촘촘히 매달고 있는 열매다. ‘억새’ 꽃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 꽃대를 내밀어 꽃잎도 없는 꽃차례에 암술과 노란 꽃밥이 달린다. 사람들은 갈색과 자줏빛이 어우러진 꽃이 핀 ‘억새’를 보고 아직 꽃이 덜 피었다고 하고, 꽃이 지고 결실을 맺어야 꽃이 핀 것으로 여긴다. 토심이 깊고 기름진 곳에서 잘 자라는 ‘억새’는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다 자라면 사람 키를 넘기도 하는 ‘억새’ 잎은 가장자리에 난 작고 날카로운 톱니 때문에 잘못 만지면 손을 베이기도 한다. ‘억새’라는 식물의 이름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잎과 억센 줄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 같다.
#가을을 알리는 야생초들
억새군락이 끝나는 곳에 천관산의 최고봉 연대봉이 있다. 연대봉은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한라산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하산을 봉황봉 방향으로 잡았다. 비스듬하게 시작되는 능선 주변에는 구절초·산부추·미역취·개쑥부쟁이·산박하·‘층꽃나무’ 등 가을 꽃들이 한창이다. 하얀 구절초는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피어 억새와 함께 가을을 알리고 있다. 무리를 지은 ‘층꽃나무’는 메마른 바위 겉에서 남보라색 꽃을 한창 뽐내고 있다. 풀같이 보이는 ‘층꽃나무’는 다 자라야 무릎높이까지 자라는 키 작은 떨기나무다. 꽃은 잎겨드랑이 위로 작은 꽃들이 무더기로 층을 이루어 돌려 핀다. 마편초과인 ‘층꽃나무’라는 식물의 이름도 꽃이 피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꽃에서 내뿜는 향기가 아름다운 '층꽃나무‘의 털이 보송보송한 잎은 비단처럼 부드럽다.
양근암을 지나면 경사가 급해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올라오는 사람도 늘어 등산로가 붐빌 정도다. 서둘러 산을 오른 판단이 옳은 것 같다. 장안사부근에 이르자 차나무에 꽃이 한창이다. 차나무 꽃은 아직 덜 여문 열매와 함께 달려있다. 그래서 차나무를 실화상봉수라 하든가. 곧이어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고 은목서의 진한 향기를 다시 맡게 되니 등산도 끝이다. 천관산 등산에 걸리는 시간은 휴식시간을 감안하드라도 4~5시간이며 충분하다.
◇찾아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순천 IC > 일반도로 벌교·보성방향 > 2번국도 체육관사거리 > 2번국도 장흥 > 23번국도 천관산
/농협중앙회 하동군지부장
▲사진설명=억새가 활짝 핀 천관산을 오르다보면 유난히 붉은 '알며느리밥풀'(위 사진 왼쪽)과 '층꽃나무'(오른쪽)도 만날 수 있다. 아래는 천관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