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회남에게 쓴 김유정의 마지막 편지
必承 前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병을 위하야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 삼십 마리를 고와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드렸다.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기다리마.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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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은 벗 안회남에게 마치 유언 같은 마지막 편지를 쓰고 열하루만인 1937년 3월 29일 스물아홉의 나이로 경기도 광주 그의 누나집에서 타계했습니다.)

안회남(안필승)
안회남(安懷南), 7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도 근현대 문단의 그늘에 가려졌던 작가, 왠지 낯설기만 한 이름이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봅시다. 본명 安必承, 신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安國善)의 獨子라면... 김유정과 휘문고보 동기동창, 작품을 공유할 정도로 막역했던 우정, 폐결핵과 치루로 병든 김유정을 임종 무렵까지 안팍으로 챙겨주었던 유일한 친구. 아무튼 안회남을 알려면 김유정이 나와야 하고 김유정을 이야기하자면 안회남이 필요합니다.
'에이, 문학엔 관심없어!'
'그러게, 별종이야, 여기가 뭐 문학 사이튼가!'
'그냥 둬, 원래 잘난 체를 잘 하니까 그렇게 살다 가게 내버려 둬!'
'아냐, 6학년 시원찮은 눈으로 자판기를 찍어대는 성의로 봐서 조금만 더 읽어보자구.'
만약에 안회남 작가가 허거참님의 고모부님이라면, 이제 관심이 좀 가실테지요. 그래요, 허거참님의 부친은 소설가 안회남의 처남이십니다. 또 아동문학가 '현덕'은 허거참님 외사촌의 외삼촌이십니다. 1세기 전에 한국문단의 주축을 이끌었던 작가들의 자료가 점점 사라져가는 근래에 그 시대 흔적의 명맥을 보고 느낀다는 것, 이런 기분은 아시는 분만 느낄테지요.
아래 글은 안회남이 1937년 5월 잡지 <백광>에 쓴 '성서와 단장'이란 수필에 나오는 글입니다.
성서와 단장
유정군이 신병 더하야 광주 그의 매부댁으로 떠나든 전날밤 나는 그를 위하야 돈을 좀 맨들까 하고, 돌아다녔다.
처음 한 영리한 동무에게 가서는 완곡하게 거절을 당하였다. 둘째 번에는 내가 용기가 부족하야 참아 말을 못내였다.
본정통으로 내려오다가 유정군의 족하인 영수군을 만났다. 병자를 위하야 약품과 지리가미 등을 산 모양이었다.
"자근 아버지께서 구약전서를 한 권 사오라시는 데 없어요"
유정군이 성서를 읽고 싶어하는데 대하야 나는 까닭 몰으게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하면 소년시대에 유정과 나와는 둘이서 나의 선친 구약전서를 팔어 갖이고는 활동사진을 구경한 일이 있다.)
[중략]
나의 처남인 동만군에게 졸라서 겨우 십원을 맨들었다. 이튼날 아침 유정군에게 주었다. 그는 받어 보드니
"그럼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지-"
옆에 앉어 있는 현덕 씨에게 말을 하였다. 그러나 경성서 광주까지 소위 '대절'하여서는 십오원이나 들음으로 할 수 없이 불편한 승합 자동차로 떠났다.
치루로 쇠약하여지고 폐병으로 신음하며 있는 그는 사람 많고 딱딱한 좌석이 참을 수 없이 고통인 모양이였다. 나의 태도는 죽어가는 동무를 그냥 옆에서 추관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자책되였다. 그는 나와 요만죠만 친구가 않이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그를 보나 문학적으로 그를 보나 유정군은 진실로 착하고 청렴한 사람이요 천재의 작가이다. 나는 이러다가 정말 일평생을 두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하는 일을 저질으고 마는 것이나 않인가 염여하고 번민하였다. 누어서 성서를 읽고 있을 동무를 떠내여 보낸 후 나는 멀거니 자동차의 뒤만 바라보고 섰었다.
수년간이나 읽어버리고 말엇든 단장을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집어보고 싶은 말할 수 없이 쓸슬한 생각이 들었다.*
(굵게 쓴 부분의 '동字만字'님이 허거참님의 춘부장님이십니다. 또 '현덕'은 허거참님의 외삼촌의 처남입니다. 가능한 한 현재의 맞춤법으로 고쳤습니다만 더러 원문의 맛을 살린 부분도 잇습니다.)
안회남은 1909년생으로 유정보다 한 살 아래지만 휘문 시절 한 학년 같은 반이었습니다. 김유정과는 유난히 친하여 안회남의 내외종간인 朴秀鎬와 함께 'YCK'라는 하모니카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1929년엔 단성사 개관 기념일에 김유정이 독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학창시절 그들 셋은 체조에도 취미가 있어 '마이루 줏뎅(공중회전)을 연습하고 하교길 허기 때엔 재동 호떡집에서 접선하여 주린 배를 달래곤 했습니다.
취직을 하기 전 어느날 안회남은 술생각이 간절하여 김유정의 책을 팔아 술을 마시자고 제안을 하나 거절당하는데 이 때문에 1940년 단편 '동쪽 길을 걸으며'에서 깊은 사과를 합니다. 이미 김유정이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 안회남의 마음 속엔 늘 체기처럼 걸린 가슴 아픈 추억이었겠지요.
안회남은 1927년 휘문을 자퇴하고 호구지책으로 <개벽>과 <제일선>지에 근무하며 꾸준한 습작을 통하여,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발(髮)'이 입선되어 등단합니다. 이 무렵 안회남은 평소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김유정에게 소설을 쓰도록 권유합니다.
김유정은 당시 명창 박록주를 짝사랑하다가 퇴짜를 맞고 고향인 춘천 실레로 내려와 막걸리로 시름을 달래며 세월을 죽였지요. 그까짓 화류계 여자가 뭐길래, 하며 속절없이 들병이 여자와 몸을 섞다가 정신이 들면 그가 만든 야학당 '금병의숙'을 몸으로 때웠습니다.

[김유정이 짝사랑한 박록주/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출생. 12세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유성준(劉成俊)·김정문(金正文)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5호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
김유정은 안회남의 채근에 못 이겨 금병의숙을 조카에게 맡기고 서울로 돌아옵니다. 작품 때문이었지요. 안회남은 이미 1933년 3월에 유정의 작품 '산골 나그네'를 <제1선>지에, 8월에 탈고한 '총각과 맹꽁이'를 <신여성>지 9월호에 기고토록 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안회남은 유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추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를, 조선중앙일보에 '노다지'를 출품시킵니다. 결과는 '소낙비'가 1등 당선, '노다지'가 가작으로 입선하는 쾌거였습니다.
그해 1월 20일 황금정 아서원(지금의 을지로1가).
신춘문예 1등 당선 축하회가 열립니다. 아서원 요리집에 나타난 그날의 주인공 김유정은 허겁지겁 음식부터 해치웁니다. 안회남이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었으나 그간 굶기를 밥먹 듯했던 유정은 그야말로 祝賀式은 食後式였지요. 이 모양을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同病相憐의 이상(李箱)이었습니다. 김유정은 그간 지면으로만 만났던 紙上의 이단아인 李箱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납니다.
또 그해 6월 3일에는 청요리집 백합원에서 <조선문단>사가 주최하는 문예좌담회에 안회남과 함께 초청을 받았는데 실은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멀은 안회남과 유정은 그날도 술과 안주나 실컨 먹자며 작당을 했지요.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그 자리엔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좌중을 메웠는데 그 유명한 '물논쟁'을 임화와 벌였던 김남천, 평론가 김환태와 이헌구, 농민작가 이무영, 경성의 모파상 이태준, 시어의 달인 정지용, 김광섭, 여류작가 이선희, <조선문단>의 방인근, 함대훈, 서항석, 이하윤, 이석훈 등 말로만 듣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대거 참석해 있었습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날은 체면을 지킨 채 너비아니 한 접씨로 座談食은 면했지요.
아무튼 이 해에 '금 따는 공밭'을 <개벽>에, 불후의 명작 '봄봄'을 <조광>에 발표하며 중견작가로 자리잡는데 이 모두가 친구 안회남의 적극적인 도움과 조언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좌로부터 김유정, 둘째 누이 김유영, 조카 김영수]
李箱은 1934년 초부터 구인회에 들어있었는데 김유정에게 반한 나머지 좌장 이태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5년 가을에 김유정을 적극적으로 구인회에 끌어들였습니다. 당시 이상은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을 구본웅의 인쇄소인 창문사에서 공짜로 편집, 조판하고 있었는데 김유정은 1936년 초에 박록주와의 못다한 사랑의 쓰디쓴 이야기를 '두꺼비'라는 제목을 달아 이상에게 보냈습니다. 이상은 사소설로 안회남은 신변소설이 전문이라 김유정도 처음으로 그의 주변 이야기를 썼었습니다.
사랑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에디프스(?)콤플랙스에 젖은 김유정은 1936년 여름 '여성'지의 청탁으로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는데 그 옆의 지면에 `어떠한 남편을 맞이할까`라는 박봉자의 것이 함께 실립니다. 그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김유정 글 일부- 나와 똑같이 우울한 그리고 나와 똑같이 피를 토하는 그런
여성이 있다면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초가 삼간 짓고
한 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많이도 바라지 않습니다.
단 사흘만 깨끗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박봉자 글 일부- 요새 와서는 혹 조용한 틈을 타게되면 장래의 내 남편을 눈앞에
그려보는 일도 있지요. 문학가는 세상을 잘 알고 사람을 잘
압니다. 세계를 돌아 다녀보지 않아도 능히 거기의 정서, 풍경,
풍속 또 그 사람의 사상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박봉자는 당시 정지용과 '시문학' 동인지를 이끌었던 박용철의 누이 동생이었지요. 김유정은 박록주에게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모성을 찾았듯 이번엔 박봉자에게 모정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야속한 박봉자는 서른 통이 넘는 김유정의 편지에 한 통의 답장도 없이 그해 가을 결혼을 해버립니다. 그것도 같은 구인회원인 평론가 김환태에게로. 도대체 뭐 되는 일이 없었지요.
그즈음 결혼한 안회남은 유정의 연이은 실연과 악화된 건강을 걱정하며 신변소설 '성서와 단장', '동쪽 길을 걸으며' 등에서 절실했던 그 상황을 표현합니다.
1974년 박봉자는 <문학사상>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김유정의 편지는 30여 통 받았다. 오빠의 손에 의해 먼저 피봉이 찢긴 다음 내가 읽었다. 지금 여성들은 다르겠지만 당시는 아무리 신여성이라 하더라도 김유정같은 뜨거운 구애에는 침묵을 지킬 도리밖에 더 있었겠는가?'
당시 조선일보 기자이면서 평론가이기도 했던 김문집은 훗날 '김유정의 비련을 공개 비판함'(1968년)이란 글에서 이렇게 씁니다.
[...몇 개월 동안에 30여 통에 이른 김유정의 편지 쓰기는 영혼을 담보로 한, 구원의 글쓰기로 이어진다. 기대와 절망이 엇갈리는 고통 속에 이어진 답장 없는 글쓰기는 이미 박록주를 향했던 병적 집착의, 대책 없는 열정의 문자가 아니었다. 작가로서의 성숙한 영혼으로, `작품을 쓸 때의 그 동기`를 가지고 녹여낸 김유정의 인생이었다. 충심으로 기다렸지만 회답은 없었다. 박봉자는 일본 유학 중 하숙집 주인 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낳고 귀국한 스물 일곱 동갑의 문학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식을 올린다.
박봉자의 약혼을 안 유정은 그날부터 공중에 쌓은 연애를 일조에 파괴하는 동시에 생명을 조각한 편지를 중지했다함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한 가지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진실로 중지한 그날부터 유정은 술로써 이내 청춘을 불사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김유정은 1936년 3월에 발간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엔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김상용 박태원 이상 백석 등의 전문 글쟁이들과 나란히 지면을 장식합니다. 비록 창간호로 단명한 동인지이지만 구인회 기관지로서의 '시와 소설'은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한국문단사의 소중한 자료로써 후학들의 국문학 텍스트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이 세상을 뜨자 안회남은 한동안 공황상태로 지냅니다. 1939년에 그간의 <안회남 단편집>을 내고 3년 후 소설집 <탁류를 헤치고>, 다음해에 단편집 <풍속>, 1944년 소설집 <대지는 부른다> 를 내고는 징용으로 규슈(九州) 탄광으로 끌려갔다가 8.15 광복을 맞습니다. 그후 좌익인 조선문학건설본부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북으로 가 <민주조선> 문화부장이 됩니다.
6.25 전쟁이 나자 안회남은 1950년 여름에 먼저 월북한 이태준과 함께 종군작가로 서울에 나타나는데 이때 구보 박태원도 함께 북으로 갔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저항운동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깔고있는 좌익 공산주의가 아니면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가 조직적일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지식인치고 좌익이 아닌 문학가는 별로 없었습니다. 안회남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본격적 활동은 광복 후부터였는데 지금처럼 괴리된 이념이 아니라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독립의 정치투쟁을 근간으로 하는 좌익의 원론을 신봉했습니다.
김유정의 문학자료는 처음엔 조카 김영수가 간직하다가 그후 안회남이 보관하게 되는데 그의 김유정에 대한 우정으로 짐작컨데 북한 어딘가에 반드시 소중하게 봉인되었을 것입니다. 이제와서 세월의 속성이 질곡의 시대를 품은 한숨의 시절 한 쪽을 붙잡는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마는, 그 시절을 구차한 변명없이 온몸으로 감당한 문단의 사유를 앎도 한 후학인 이 사람의 사는 방식이라 치부하겠습니다.
안회남과 김유정, 1930년대, 여러 사조가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그들 이삼십 代의 내면 풍경에 저는 웬지 일일이 알싸하기만 합니다. 그들의 행간에 멈추어 들으면, 내조국 山河에 동맥처럼 굵은 혈기의 포효 저편에 사나이들의 숨어 우는 사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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