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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부산광역시 편을 시작한 지가 벌써 만 2년이 되어갈 만큼 시간은 참으로 빠르네요.
이젠 담주로 이 작업도 끝나고,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이 사전 작업을 한 지 7년째인데
그새 난 50이 되었군요.
그래도 이처럼 재미나는 글을 볼 수 있어서, 되돌아보니 행복했던 시간도 이따금 있었네요.
글이 좀 길지만, 샘들 틈날 때 함~~ 읽어보셔요.
[Mememto Mori, 복천동 11호분]
묘지는 볕바른 평평한 산정이었다. 묘혈(墓穴) 테두리는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돌로 만든 석곽이었다. 보습과 도끼를 맞은 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돌은 두루뭉술하였다. 인부들은 줄로 엮은 덩이쇠 조각을 깬 돌 위에 깔고 그 위로 갈대를 푸짐하게 깔았다. 시신의 머리맡에는 철재로 만든 비늘갑옷 목가리개, 팔뚝가리개 투구와 삼지창, 금동관을 놓았다.
묘혈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비늘 갑옷[札甲]에 닿아 있었다. 수백 개의 얇은 철판을 가죽으로 엮어 만든 찰갑은 용 비늘처럼 빛났다. 인부는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거나 뒤집힌 비늘을 손바닥으로 아래로 쓸어 간추렸다. 찰갑이야말로 참으로 진기하고도 아픔이 서린 껴묻거리였다. 경자년[400년] 난리 때 고구려 기병과 계림인들 입었던 갑옷이다.
껴묻거리를 만지는 인부들의 손놀림은 조심스러웠다. 갑옷을 시신의 머리맡에 두고 오른쪽 팔 옆에 긴 고리 자루 칼을 여러 자루 놓았다. 껴묻거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은 영생을 비는 거북이 항아리였다. 주인을 따라 죽으려는 충복과 하인들이 많았지만 세 명만 정하였다. 주인의 발치에 순장자를 누이고 석곽에 돌 뚜껑 넉 장을 차례차례 덮었다. 잔돌을 모두 추려 낸 봉분의 흙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그리고 봉분 위에 크고 문양이 고운 항아리를 깼다. 잠자는 사자(死者)의 영혼을 부르는 마지막 제식이었다.
부곽(副槨)은 목곽이었다. 주곽(主槨) 아래로 길게 파 놓은 부곽이었다. 인부들은 구덩이 바닥에 단단한 널을 다닥다닥 붙여 깔았다. 주곽처럼 줄로 엮은 덩이쇠를 널 위로 길게 펼치고 갈대를 넉넉하게 깔았다. 부곽의 주요 껴묻거리는 철제로, 판갑(板甲)과 말머리 가리개에 여러 말갖춤과 토기들이었다. 굽다리 받침 토기들을 옹기종기 놓았다. 쇠칼, 도끼, 창과 같은 쇠날과 길게 굽어 휘어진 재갈, 말안장, 말방울, 화살 통, 발걸이도 차례대로 놓았다. 귀중하고 값진 것을 사자 옆에 모두 껴묻어 주었으나 무덤이야말로 인생의 부박함과 덧없음의 흔적이었다.
부산의 신진 작가 이병순의 소설 속에는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의 압박 속에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한 가야 왕 비겸과 부왕의 시신 앞에서 결연한 각오를 다지는 아들 슬명이 등장한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그리고 그가 지키려고 하였던 그 땅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1600년이 지난 1980년 어느 날, 후세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무덤을 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부곽은 10호]로 명명하였다. 격동의 4~5세기를 온 몸으로 살아갔던 복천동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진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복천동 고분이 말하는 임나일본부의 진실]
죽음을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의식을 베푸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흔적이다. 이스라엘 카프제 동굴 유적에서는 중기 구석기 가족 또는 동료로 보이는 성인 여자와 아이를 의도적으로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성인 여성의 뒤꿈치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의 두 손이 인상적인 이 무덤은 소박하지만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그러다 구석기 말에 이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죽은 자를 위한 장식과 사후의 삶을 위한 부장품들을 함께 묻게 된다.
이러한 무덤 가운데 유독 흙이나 돌을 쌓아 올린 분구를 크기에 관계없이 고분이라 지칭한다. 우리 역사 초기의 지석묘·석관묘 같은 무덤의 등장이 계급과 국가의 탄생과 직결된다면, 삼국 시대 고분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웅변하는 기념비적 조형물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장수왕, 백제의 중흥 군주 무령왕, 신라를 진한의 패자로 올려놓은 군주들의 시대에 조영된 고분군은 ‘고분 시대’라 부를 만큼 그 시대의 국력과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역사의 산물이다.
그런데 삼국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도 이에 못지않은 고분이 남아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대가야의 땅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 아라가야의 고향 함안 말이산 고분군, 비사벌 가야가 있던 창녕의 교동 고분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분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고대사의 보고인 고분을 다수 보유한 가야사는 광복 이후 얼마 동안 교과서에 실리지도 못한 잊힌 역사였다. 일제 강점기 발굴된 가야의 고분은 발굴 보고서도 작성되지 않은 채 주요 유물이 일본으로 무단 방출되어 호사가들의 ‘컬렉션’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당시 가야 고분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방 유적 발굴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남한 경영론으로도 불린 임나일본부설은 가야의 또 다른 이름인 임나(任那)에 왜국의 신공 황후(神功皇后)가 369년 군사를 보내 정복한 이후 신라에게 빼앗기는 562년까지 왜 왕권의 통치 기구인 일본부가 통제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 한반도 남부에 고대 국가로 성장한 정치체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고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철기를 사용하는 후진 지역으로 결론지어야만 하였다.
그 결과 일제가 강조한 후진성과 타율성으로 가득 찬 고대 한반도 남부 지방에 관한 역사 인식은 광복 후에도 계승되어 가야라고 하면 누구나 왜와의 굴욕적인 대외관계를 떠올리게 되었고, 가야사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금기시하는 분야가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일제 총독부 관리 스스로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싹쓸이 식’ 도굴을 피한 가야의 고분들이 하나하나 발굴되면서 ‘신비의 왕국’ 가야사의 진실도 속속 드러나게 된다.
[‘하꼬방’이 지켜낸 부산의 고대사, 복천동 고분군]
광복 이후 가야 고분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70년대 부산과 김해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현재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져 200기가 넘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부산의 중심인 동래에 위치해 있으면서 물맛 좋은 우물인 옥샘[玉井]이 있다고 해서 복천동, 삼국 시대 거칠산국이 위치하였던 곳이라는 뜻에서 동래구 칠산동 일대에 밀집해 있는 무덤 떼를 말한다. 또 고분군 근처 법륜사 주변은 학이 알을 품은 둥지라는 뜻에서 학소대(鶴巢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재로 마안산(馬鞍山)[대포산·장대산]에 올라서 보면 고분군이 몸통이 되고 동래 읍성 서장대가 왼쪽, 동장대가 오른쪽 날개를 한 형상을 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구릉은 해발 고도 62m를 정점으로 하는 북쪽 구릉과 해발 고도 47m를 정점으로 하는 남쪽 구릉으로 나누어진다. 북쪽에는 10·11호, 21·22호, 35·36호, 31·32호분 등 5세기 분묘가, 남쪽에는 38, 56, 57호 등 4세기 분묘가 주를 이룬다. 또 구릉 남쪽의 법륜사 부근에서는 2세기 분묘가 확인되었으며, 동쪽의 내성초등학교 부지에서도 분묘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분포 상황으로 보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주 구릉을 중심으로 일대까지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동래구 복천동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순전히 6·25 전쟁과 ‘하꼬방’ 때문이었다. 지금도 남해 고속 도로에서 부산 시내를 바라보면 산중턱까지 올라간 주거지의 경계가 아슬아슬하면서도 인상적이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이 임자 없는 땅을 찾아 산기슭이나 심지어 산비탈 공동묘지 터에 터전을 잡으면서 만들어진 경관이다. 그리고 그 난리통에 건축 자재 하나 제대로 없이 말 그대로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1칸짜리 집들이 바로 하꼬방이다.
이런 처절한 삶에 대한 집착이 원래 삼한 시대 거칠산국의 옛터라고, 조선 시대 원님이 머물던 읍성이라고 그냥 칠 리 없었다. 무지막지한 판자촌의 난립은 부산의 경관뿐만 아니라 도시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였지만 1600년 전 부산의 역사 시대를 열었던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원래 모습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바로 이 하꼬방 덕분이었다.
1990년대 유적 정화 사업 이전만 하더라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일대는 구릉의 높은 곳을 제외하고는 주택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원래 피난민의 주거지였던 탓에 제대로 된 터파기 없이 지어진 허름한 주택이 고분군 위에서 보수와 증축을 계속하면서 오히려 고분의 도굴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계기는 바로 이런 판자촌을 철거하기 위한 택지 개발 공사이었다. 1969년 9월,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중장비가 마안산 자락의 경사면을 파헤치는 가운데 토기 조각들이 하나둘 발견되다 급기야 고분의 벽면이 무너지면서 유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동네 새마을 지도자의 발 빠른 신고 덕분에 문화재관리국의 발굴 지시도 예상보다 빨리 떨어졌다.
그러나 당시는 현장에서 동네 사람들이 흩어진 유물을 집어 가는 것을 수수방관할 정도로 발굴이나 보존 체계가 허술하였다. 무엇보다 비용이 문제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이루어진 부산 동삼동 패총에 인력과 예산이 집중되어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때 발굴 조사를 미루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평소 문화재 환수에 열정이 있던 동아대학교 정재환 총장의 과감한 지원이 있었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천년수 증발 사건과 말머리 모양 뿔잔]
당시 조사된 1호분은 할석(割席)을 반듯이 쌓아 네 벽을 만들고 거대한 덮개돌을 얹은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 금동관을 비롯하여 100여 장에 이르는 덩이쇠, 대검, 쇠 화살촉[鐵鏃] 등의 무기류와 마구류, 높이 107㎝에 이르는 대호(大壺), 등잔 모양 토기, 구멍 뚫린 토기 그리고 주둥이가 달린 것까지 많은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조사된 분묘는 1기에 불과하였지만 규모와 풍부한 부장품들로 부산 지역에도 가야의 정치체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계기가 된 긴급 발굴이었다.
현장 작업에 들어가기까지의 수많은 일화를 뒤로하고 시작된 발굴은 동네 주민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몰려온 타지 사람들 때문에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발굴 당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낙동강 하류 동쪽에서 발견된 가야계 고분군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만한 유물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1차 발굴에서 쏟아져 나온 철제 갑주(甲胄), 토기, 장신구 등은 연대나 제작 수준에서 일본의 것을 앞질렀다.
그런데 발굴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금관도 갑옷도 아닌 의외의 유물이었다. 지금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이국적인 1m 높이의 파수 고배(把手高杯)[손잡이가 달린 긴 잔]는 외형보다 거기에 고인 물 때문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갑작스런 노출로 기온차가 만든 결로 현상 때문에 생긴 물기가 ‘천년수’로 둔갑하기까지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고분의 나이만큼 무탈하게 오래 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무병장수의 신앙이 되어 삽시간에 사람들 사이로 펴져나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아침 잔 속의 물은 마치 증발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밖에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 가운데는 말머리 모양이 달린 뿔잔이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는 이름 그대로 둥근 원뿔형의 잔으로 말머리는 위를 향하여 입을 약간 벌리고 있다. 그 얼굴은 마치 웃는 듯한 인상이며 쫑긋한 귀와 긴 주둥이 등 매우 사실적인 모습이다. 뒤쪽에는 그릇을 안전하게 놓을 수 있도록 2개의 발이 달려 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리톤(Rhyton)[뿔잔]을 빼닮은 마두식각배는 동서 교류의 흔적을 간직한 한 채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 7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목숨 줄을 동방삭만큼이나 늘려 준다는 ‘천년수’가 이 각배에 담겨 있었다면 그 물을 마신 사람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탈해왕이 마실 각배에 든 물을 심부름꾼이 먼저 마시다 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발굴 조사는 주택 공사나 택지 조성 공사 중에 우연히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어 긴급 발굴이나 유물 수습을 위한 조사가 대부분이었다. 화려한 부장품을 소장한 지배자들의 무덤을 발굴하는 작업이었지만 실제 발굴단이 활동한 곳은 남의 집 마당, 부엌, 심지어는 공용 화장실 바닥이 대부분이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고분 발굴 조사라는 인식이 미미하였던 시절, 천년수 사건 같은 황당한 일도 있었지만 유적의 발견, 신고, 조사에 이르기까지 시민들과 공무원들의 협조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동네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이루어진 그 시절 발굴 조사는 재산권 행사 문제로 주민들과 갈등을 달고 사는 요즘의 도심지 발굴 현장을 돌아보면 말 그대로 ‘추억’으로 기억될 만하다.
[고대사 기네스, 부산을 뜨겁게 달구다]
1980년 동래구 복천동 구릉 전체를 평탄하게 만들어 연립 주택을 짓겠다는 주민 조합이 결성되고 관련 서류가 부산시에 접수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 소식은 1970년대 획기적인 발굴 성과를 인지하고 있던 부산시 문화재 담당관 임효택[현 동의대학교 명예 교수]의 귀에 먼저 들어갔다. 임효택은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오히려 조합원들을 설득한 끝에 10일간의 시굴 조사 허가를 얻어 내어 현장으로 달려갔다. 당시 공터로 남아 있던 북쪽 구릉에서 도굴되지 않은 무덤들이 확인되었고, 곧바로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에 착수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서 쏟아진 유물인 칠두령(七頭鈴), 철제 갑옷, 말 갑옷, 화살통 등은 연신 국내 최초이자 최고라는 타이틀을 갈아치우면서 조합원들의 불만과 원성도 환호와 열광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1983년 2기의 파괴된 37호 석곽묘와 38호분의 부곽에 대한 수습 조사 결과 부곽에서 와질제 오리 모양 토기, 청동제 칼자루[劍把], 양이부호(兩耳附壺) 등이 출토되면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조성 연대를 4세기 전반대로 소급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31·32호분에서 출토된 말 재갈은 당시 영남 지방에서 기마용 마구로는 최고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엇보다 기마용 마구의 부장은 5세기 고구려군의 남정(南征)과 그 결과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간 편년 체계가 불확실하던 가야 고분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사적 제273호로 지정되어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부산시는 고분군을 본격적으로 정화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인 학술 발굴 조사를 하였다.
1989~2008년 6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으로 명명된 184기[부산대학교 박물관·부산광역시립박물관·동아대학교 박물관 조사]와 칠산동 고분 1기, 학소대 고분 3기, 내성 유적 11기 등 총 198기가 발굴되었다. 이 외에도 위치만 확인하고 내부 조사를 하지 않은 유구도 수십 기에 달하며, 현 주택지 아래에도 수많은 분묘들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유구(遺構)가 구릉의 정상부에서 비탈면을 걸친 넓은 범위에 비교적 밀집된 전형적인 분묘 유적이다. 구릉의 정상부 주변에는 부곽이 딸린 대형 분이 입지하고, 구릉 비탈면 및 주변 지역에는 중·소형 분이 위치한다. 분묘는 대체로 구릉의 동남쪽에서 서남쪽으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축조되었다.
2세기 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으며, 특히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영되었다. 널무덤[木棺墓]에서 돌방무덤[石室墓]까지 묘제의 변화가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나고, 그에 따른 유물상의 변화도 뚜렷하여 당시의 시대 상황을 파악하기 아주 유용한 분묘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 발굴 이전까지 채집된 유물은 대개 소속 대학이나 지역 박물관으로 귀속되었지만, 복천동 고분군은 이런 관행을 깨고 발굴 지역에 박물관을 세우고 유적과 유물을 통합 관리하도록 배려한 최초의 사례로 이 또한 우리 고대사의 신기원이라 할 만한 사건이다.
[복천동 사람들이 오리를 ‘갑(甲)’으로 모신 사연]
인간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음은 단지 개인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매장 의례는 중요한 사회적 제도로 자리매김해 왔다. 따라서 부산 복천동 고분군 같은 분묘에는 당시 사람들이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어떠한 행위로써 죽음을 마무리하였는지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남아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기능성 토기 외에 집·배·수레·오리·말·거북 등의 형태를 닮은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중 오리 모양 토기가 가장 유명하다. 대부분의 가야 지역 고분군에서는 한 쌍의 오리 모양 토기가 출토되는데, 속은 텅 비어 있고 꼬리 부분에 돌출된 주입구가 있으며 등에는 원통형으로 솟아오른 구멍이 있어 물과 술 등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사용할 수 있다. 배 아래 부분에 굽다리가 부착되어 있어 안정감이 있고 머리는 어색하게도 닭 볏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가슴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 오리 모양 토기는 액체를 담고 따르는 토기 본래의 기능과 무관해 보인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東夷傳) 변한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者飛揚]. 우리 역사의 시작에서도 새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개자였다. 환웅이 새의 형상을 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나, 고구려의 씨름 고분에서처럼 죽은 영혼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새였다.
신라 건국 신화의 요람인 계림(鷄林)은 시림(始林)이라고도 쓴다. 그런데 가장 먼저 가축화되어 조류의 대명사가 된 닭이나 새롭다는 뜻의 시(始)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신라어 ‘벌’과 결합해 원래는 ‘새벌’이라 읽었을 것이다. 서라벌의 기원이 된 닭은 신라에서는 시계가 없던 시절 아침을 알리는 신령스러움과 다산과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가야에서는 ‘알’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한 나라의 시조가 된 것을 보면 우리 고대사에서 새는 신성한 동물로 숭배되었다.
고려 시대 연밥을 문 오리를 묘사한 청자 오리 연적이나 조선 시대 화조도에서 오리는 과거 시험에서의 갑(甲)[으뜸]인 장원급제를 상징하지만 원래 한자를 만들 때 오리가 새 중에 갑(鴨)이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귀향 후 하고 싶은 일이 친환경 오리 농업이었던 것처럼 오리는 곡식 대신 해충을 잡아먹어 풍요로운 수확을 도와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반도의 남쪽 끝을 무대로 살아가던 복천동 사람들에게 봄가을로 때가 되면 찾아오고 돌아가는 오리의 일생은 삶과 죽음의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유난히 살집 좋은 86호분 출토 오리 모양 토기는 술잔의 용도, 그러니까 제기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복천동 사람들의 바람이 우리의 짐작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인근 고분군에서는 아주 특색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신발 모양 토기가 그것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53호 무덤 부곽에서 발견된 이 토기는 나팔 모양의 다리 위에 가죽 끈 또는 짚 같은 것으로 코와 발을 감싸는 부분을 표현하였고, 신발 한쪽에는 굽이 달린 잔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요즘 여름철 샌들처럼 끈으로만 엮은 이 신발 모양 토기는 죽은 이의 사망 시점도 추정해 볼 수 있다. 450년 전 조선판 ‘사랑과 영혼’으로 전 세계를 울린 경상북도 안동의 ‘원이 엄마’가 먼저 간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나 그보다 1000년 전 복천동의 한여름쯤 사랑하는 가족 품을 떠난 망자를 위해 만든 물 빠짐 좋은 짚신은 시공간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울림이 있다.
한편 부산 복천동 고분군 35·36, 21·22, 11, 19호 무덤에서는 사람 뼈가 출토되었고, 흔적만 발견된 53호분도 있다. 22호분의 경우 피장자 1명의 뼈와 피장자 발치 아래 3명의 뼈가 발굴되었는데,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20세가량의 남자이고 두 명은 성인 여성이었다. 11호에서도 주인공의 발치 아래 3명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순장된 사람들이다. 순장당한 사람들은 고구려 동천왕의 추종자들처럼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매장 직전 강제적으로 삶을 마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가야 지역 고분에서는 대규모 순장 묘가 발견되기도 한다. ‘천년수’와 마찬가지로 옛 무덤에 대한 믿지 못할 구전 가운데 해질녘이면 큰 무덤 아래로 쌀 씻은 물이 흘러나온다는 등골 서늘한 괴담의 출처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들이 순장을 그저 ‘생매장’으로만 여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에서는 가슴을 울리는 사연을 담은 유물이, 다른 한편에서는 충격적인 매장 관행을 함께한 복천동 사람들의 분묘 제사는 고대인의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생전의 삶과 동일한 세상이 내세에도 이어진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후 순장과 같은 인신 공양은 불교 등의 영향으로 법으로 금지되면서 실제 사람 대신 토용(土俑)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토기, 곡식, 동물의 후장(厚葬)은 한참 후에도 계속되었고 빈(殯)[죽은 직후부터 매장까지의 의식]-장송 의례(葬送儀禮)[묘소로 나아가는 의식]-묘사(墓祀)[매장 완료 후 묘 앞에서 지내는 제사]와 같은 정성 가득한 고대적 장례 절차는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를 생활 의례로 받아들인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즉 조상의 안녕이 후대의 풍요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는 점에서 1600년 전 복천동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들은 여전히 하나의 내세관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전쟁의 시대, 그리고 복천동 사람들]
1980년대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한 도시 재개발의 열풍은 부산에도 밀어닥쳤다. 1호분의 발굴로 주춤하던 동래구 복천동에 연립 주택 조합이 결성되고 본격적으로 구릉 전체에 대한 개발 민원이 접수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10년 전과는 사뭇 달랐기에 제대로 된 사전 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3t에 달하는 덮개돌 여러 장과 그 틈새를 작은 돌로 채워 넣고 그 사이에 진흙이 발라진 대형 덧널무덤[木槨墓]가 온전히 밀봉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각각 10·11호분과 21·22호분으로 불린 이 무덤들의 발굴은 가야의 큰 고분들이 거의 도굴당한 상태에서 발견된 전례에 비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 11호분과 부곽인 10호분에서 출토된 5세기 유물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부산의 역사, 나아가서 한일 고대사의 판도를 뒤집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이 무덤의 진가는 무엇보다 철제 갑주와 마구류에 있었다. 무덤 주인공의 온 몸을 감쌌던 찰갑부터 목, 어깨, 정강이, 팔 어느 한 곳도 드러내지 않고 적과 대면할 수 있는 갑주와 얼굴 덮개부와 챙, 볼 가리개로 구성된 마면주(馬面冑)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3세기까지만 해도 복천동 사람들의 방어구는 이처럼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형태가 아니었다. 복천동 사람들이 기껏해야 가죽이나 나무판을 두른 판갑옷 정도로도 충분하던 무장 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야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연구자들은 한반도 북부와 중부에 비해 발전 속도가 느렸던 낙동강 연안 제국들이 주변 지역을 추월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력 발전과 대외 교역을 주도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철 생산지의 확보와 제작 기술에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번영의 뒤에서는 인구의 증가, 가경지의 확대와 자원 및 기술 노동력 확보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갈등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4세기 이후 전쟁의 양상은 고대 국가의 성립과 맞물리면서 주변 약소국에 대한 외유와 억압, 그리고 군사 정복을 통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정복지의 자원과 기술 등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복천동 사람들 역시 이러한 주변 정세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가운데 4세기 중·후반에 속하는 고분군에서는 중국 및 북방의 어떤 지역에서도 유례가 확인되지 않는 형태의 갑주가 등장한다. 반면 같은 시기의 다른 무덤에서는 만주 지안[集安] 그리고 환런[桓仁] 지역과 유사한 마구류와 고리 자루 큰 칼[環頭大刀]가 출토되었다. 4세기 중·후반 복천동 사람들은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빈번해지는 주변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북방 계통의 기마 무장을 유이민이나 교역을 통해 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무장 체계의 획기적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로는 최첨단의 북방 기술인 찰갑과 종장판주(縱長板胄)[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투구]가 한반도 최남단에서 먼저 출토되었다는 것은 특정 종족의 이주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4세기 초 고구려의 낙랑·대방을 축출한 즈음 벌어진 포상팔국과 가락국의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백제·가야·왜와 고구려·신라의 전쟁이라는 대외적 상황을 꼽을 수 있다. 어쨌든 4~5세기에 해당하는 시기 복천동 사람들은 후세 사람들이 갑주 백화점이라 부를 정도로 한반도 군사 전략과 전술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복천동 군사 전력의 핵심은 일명 ‘철기(鐵騎)’로 불리는 철갑옷으로 무장한 기병 집단으로 이들의 핵심 전력은 기수와 말의 체중, 스피드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작가 톨킨(J. R. R. Tolkien)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두 개의 탑」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점한 사루만의 보병 군단이 중무장한 로한의 기병대에게 패주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막 떠오르는 태양의 후광을 받아 번쩍이는 철갑옷과 방패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오크 군단은 경사면의 가속도까지 더한 기마대의 질주 앞에 수십 배가 넘는 병력이 무색할 정도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판타지 소설과 영화와 마찬가지로 노련한 기병대가 보유한 전술적 가치는 역사적으로도 여러 차례 증명되었다. 839년 대구에서 벌어진 장보고의 기병 3000과 민애왕이 급조한 10만의 농민군의 전투나 1126년 2월 중국 화베이[華北]에서 벌어진 송나라 보병 군단 2000명과 금나라 사신단 17명의 회전(會戰)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사회 특히 대보병전에서 기병의 출현은 확실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따라서 기병에 대한 대응 전략이 잘 갖추어진 북방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서는 아직 보병 전술도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복천동의 철기는 적어도 자국의 영토와 이권을 위협하는 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복천동의 지배자들은 신라의 왕족들과 달리 왕관이나 장신구가 아닌 자신이 입던 갑옷과 무구를 부장한 것을 자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주·무구·환두대도가 하위 무덤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시대에 보지 못한 전쟁이 다가올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였을까. 가야의 갑주 장식에 조상신을 의미하는 새의 깃털 장식이 있는 것을 보면 어떤 경우든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그런데 전쟁의 시대에 최고 권력자가 후계자에게 아니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하나로 압축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Si vis pacen para bellum].”
불안한 상상은 언제나 현실이 되듯이 4세기 말에 시작된 고구려의 남정은 낙동강 서쪽의 가야권 그리고 복천동 사람들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김해의 구야국의 일부 또는 동맹 관계에 있던 부산 지역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은 신라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가야의 흔적들은 지워지고 대신 ‘신라풍(新羅風)’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 문화의 영향은 토기·철기·장신구 등의 유물뿐만 아니라 무덤의 형태에까지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5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기존의 가야 토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그 대신에 신라 토기의 양이 증가한다. 표면의 색깔이 회백색 또는 회청색을 띠며 아가리와 몸통의 경계에 2줄의 돌대가 있고, 다리 끝 부분이 뭉툭한 굽다리 접시와 몸체가 깊고 둥근 굽다리 접시들은 모두 신라 토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이다. 신라 토기와 부산 지역 토기의 요소가 절충된 항아리 받침대도 등장한다. 토기 양식의 변화만 놓고 보면 이 시기 복천동은 외래문화의 유입 경로가 바뀌는 획기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격변의 시대가 복천동 사람들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외압에 의한 강요된 선택이었을까? 지금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질문이며 그 대답에 귀 기울이고 있다.
[부산의 고대사는 가야사일까? 신라사일까?]
고분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종합적인 문화 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덤 양식 자체도 그렇지만 그 속의 특정 유물들은 주인들의 신분과 외래문화의 전파 그리고 주변 지역과의 정치적 관계 등을 말해 준다. 그런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가야와 신라의 문화적 색채를 동시에 보여 주는 남다름이 있는데 4~5세기를 대상으로 앞 시기는 가야, 5세기 이후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신라 계통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정체성을 두고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가야사인가? 신라사인가? 아니면 독자 세력인가? 부산 동삼동 패총이 부산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가에 답해 주었다면,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이 땅에 고대 국가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삼국지』 위지 한전은 마한·진한·변한이라 불리던 한강 이남 지역 정치 세력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1~3세기 부산이 속한 변한·진한은 모두 24개 국(國)으로 낙동강 중·하류와 경상남도 해안에 퍼져 있었다. 『삼국지』만 놓고 보면 당시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주인공들이 세운 나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독로국(瀆盧國)이다.
같은 책에 “왜와 접하고 있다”라는 기록도 있고 독로라는 한자 표기의 고대 발음이 ‘독내’로 동래와 비슷하게 발음되기 때문이다. 또 독로의 ‘독’은 ‘탁한 냇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瀆流入海處]’이라는 뜻도 있는데 홍수로 범람한 수영강이 남해로 흘러드는 형국을 국명에 반영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꼭 이렇게만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먼저 명심할 것은 가야 시대에 동래라는 지명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삼국지』의 저자가 채록한 독로국의 존재 시점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만들어진 시기가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음에서도 부산만큼 일본에 인접해 있는 거제의 옛 지명인 상군(裳郡)의 ‘상’은 ‘두루[마]기’로 읽히는 글자이기 때문에 이 또한 독로에 근접한 발음이다.
하지만 한여름 수영강의 풍경을 랜드마크로 삼아 국명에 반영하였다는 견해는 자못 흥미롭다. 독로가 동래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독로가 말하고자 하는 ‘독(濁)’은 ‘거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로는 동래와 완전히 무관한 지명이 아닌 것인데, 황령산의 원래 이름 거칠산 역시 동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삼국지』가 말하는 ‘국’이라는 것은 후대의 국가와 동일시하기 어렵다. 영토의 넓이나 국민의 수, 권력의 강도 등 여러 면에서 아직은 작고 미숙한 존재였다. 예를 들어 구야국 같은 대국은 지금의 김해와 그 판도를 거의 같이하지만 부산 같은 경우 대국이 없는 만큼 여러 소국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 쪽 기록인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고대 부산의 지명이 여러 가지로 등장하는데 거칠산군(居柒山郡), 장산국(萇山國) 혹은 내산국(萊山國)이다. 거칠산은 지금의 황령산으로 고쳐 부르고 장산은 그대로 전하는데, ‘장’이나 ‘내’ 모두 풀이름이지만 모두 ‘거칠다’는 본성을 지닌다.
이름만 놓고 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어 보이는 이 나라들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문왕조에 신라 재상이 장산국[내산국]에 온천을 하러 온 기사가 있는데,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해운대 온천도 동래만큼 유명세를 누렸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장산국은 장산을 중심으로 한 해운대와 기장 일대에 자리 잡았던 소국으로 볼 수 있다. 4세기로 보이는 해운대구 반여동 고분군,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고분군, 철마면 고촌리 고분군을 만든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다.
『삼국지』가 전하는 부산 지역에서 유일한 국가 독로국은 아마도 부산 땅에 있던 소국들의 대표격으로 거칠산국과 장산국을 아우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부산의 최북단 수영강 상류를 끼고 있는 노포동 유적이 그 중심지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4~5m에 달하는 대형 묘광이 등장하고 와질 토기와 도질 토기 및 철제 무기와 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시기와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경주 조양동과 황성동 덧널무덤과 유사한 성격이 보이고 김해 양동리 후기 고분과 공통분모가 많아 딱히 신라계나 가야계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런 독로국이 4세기 이후 패권을 복천동에 내주면서 4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200년의 복천동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부산의 정체성은 외부적 영향에 크나큰 변화에 직면한 것으로 그려졌다. 우선 285년 모용 선비에 의한 부여국의 멸망과 옥저로의 피신 그리고 해로를 통해 유민들이 부산·김해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여계 북방 문화와 습속을 가진 집단이 낙동강 양안을 두고 정치적 연합을 이루였고 그 정점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은 도질 토기가 갑자기 출현하고 유목 민족의 습속인 순장이 시행되며 북방계 철제 갑주와 마구류가 등장하는 것은 부여계 주민의 남하로만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4세기 신라의 영향력은 이미 복천동 일대뿐만 아니라 부산·김해 지역까지 침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세력은 신라가 낙동강 교역망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성장시킨 집단으로 신라계 금동관이나 대도(大刀) 등은 모두 신라의 간접 지배에 따른 하사품으로 본다. 북방의 장례 풍습인 순장은 이미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유행하고 있었고, 그 양상은 오히려 신라와 유사하다고 한다.
양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긋다 보니 복천동 사람들의 최후를 설명하는 방식도 확연히 구분된다. 전자는 5세기 고구려 남정군의 타격으로 김해 지역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가 중단되고 가야의 주도권을 복천동 고분군 집단이 계승하다 점차 신라화되어 갔다고 본다. 반면 후자도 고구려 남정의 영향을 인정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다르다. 원래 신라계였던 복천동 사람들은 인근 양산과의 경쟁, 신라에 의해 이주된 사람들과 토착 세력 간의 견제, 토착민 사이의 갈등을 통해 세력을 잠식해 온 신라가 부산 지역을 자국의 군현으로 편입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들은 후학들의 이런 진지한 논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대 부산의 동향에 대해서는 무심한 듯 보인다. 같은 책 지리지가 남긴 것은 “부산의 중심지는 원래 이름이 거칠산군이던 동래군이며 동평현[현 부산진구 당감동 일대]과 기장군을 거느리고 있다”라는 한 줄 기사가 전부다.
4~5세기 김해, 고령 그리고 바다 건너 왜와 북방의 고구려 및 부여의 역사가 모이고 흩어졌던 이 땅과 복천동 사람들의 열정과 역동적인 삶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제대로 된 문자 자료가 떡 하니 햇빛을 보지 않는 한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남이가.” 짧지만 긴 여운을, 그리고 다정하면서도 위압적인 한 마디. 남성들의 연대감과 일체감을 확인하고 정치 또는 군사 동맹의 피아(彼我)를 명확하게 할 것을 강제하는 은유적 수사로 이만한 표현도 없을 듯하다. 이런 숨은 뜻 때문이지 1990년대 초반 대선 수세에 몰린 여당 인사가 부산 지역 단체장들을 모아 놓고 이 말 한 마디 잘못하였다가 파란을 불러오지 않았던가.
시간을 거슬러 1600년 전 복천동, 소설 속 선왕의 장례식에서도 이 같은 말들이 오가지 않았을까. 물론 지금처럼 일국의 대통령이 아닌 영남의 패권을 놓고 마주한 자리였지만 복천동 지배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경주와 김해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다급한 마음도 매한가지였으리라.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선 복천동의 새로운 지배자 슬명은 자신의 입만 바라보는 저들을 향해,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문을 열지 않았을까?
“만일 인생에 후회가 없다면 사는 게 얼마나 지루할까요?”
흔히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역사는 이야기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일부 역사가들이 ‘근본 없는 사극’이라 혹평한 텔레비전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남자 주인공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다시 찾은 관객이 몇 백만 명이던가. 막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세종대왕 역을 멋지게 소화한 배우 한석규는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국정도 사랑도 실패하지 않는, 위대한 대왕이 아닌 고뇌하는 인간미가 더 매력적인 새로운 영웅들에게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어릴 적 모자를 푹 눌러쓴 장발머리 박철순을 그냥 사랑한 나머지 프로 야구 OB[현 두산] 팬이 되었다. 그리고 부산에 이사 온 뒤로 롯데를 응원하며 살고 있지만, 마흔을 넘긴 소년의 영원한 로망은 ‘불사조’ 그분 한 분으로 족한 오래된 소년을 보았다. 어느 독재자가 프로 야구를 만들 때 ‘연고(緣故)’라는 함정을 쳐 놓았지만 한 어린이의 꿈마저 가둬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학도 박물관도 이제는 학교 과제가 되어 버린 역사책과 체험 학습을 저마다의 꿈과 희망 그리고 평생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바꾸어 가야 하지 않을까.
[참고 문헌]
복천박물관, 『고대 전사-고대 전사와 무기』(세한기획, 1999)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푸른역사, 2002)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복천동 고분군 이야기』(통천문화사, 2004)
복천박물관, 『선사~고대의 제사-풍요와 안녕의 기원』(세한기획, 2006)
조원영, 『가야, 그 끝나지 않은 신화』(혜안, 2008)
이영식,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지식산업사, 2009)
복천박물관, 『복천동 고분 문화-토기편』(세한기획, 2010)
조유전·이기환, 『고고학자 조유전과 이기환의 한국사 기행』(책문, 2010)
옥태권, 『말하는 유물-소설로 되살아난 부산의 유물들』(문학수첩, 2013)
첫댓글 저 읽어보고 갑니다 샘!! ㅎㅎ 쌩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