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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예조 참의 대산 이공 묘갈명(通政大夫禮曹參議大山李公墓碣銘)
금상 5년인 신축년(1781, 정조 5) 12월 9일에 대산(大山) 선생 이공(李公)께서 안동(安東) 소호리(蘇湖里)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영남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산 선생이 복이 없으시니, 그야말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는 것이구나.”라고 하고, 영남 선비들은 서로 마주 보고서 곡을 하며 “현자께서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앞으로 누구를 존숭한단 말인가.”라고 하고, 조정 관료들은 모두 탄식하며 “재능을 다 쓰지 못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을 무엇으로 권면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장례를 지낼 때, 와서 참석한 사림이 1200여 명이나 되었고, 물러나서 공의 언행을 개인적으로 저술한 사람들은 제자 70명이 공자를 따른 것처럼 감복하였다. 살아서는 우리 유학의 중임을 맡고 죽어서는 우리 유학의 운명과 관계된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다.
아, 거룩하여라.
공은 영종 을묘년(1735, 영조 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또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5세로 명망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이전에 공은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 밀암(密菴) 이재(李栽) 선생께 학문을 배웠는데, 개연히 속학(俗學)은 힘쓸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벼슬길에 나설 때는 부귀영화를 지푸라기처럼 여기고서 도학에 마음 쏟아, 몸은 옷의 무게를 못 견딜 듯 약했으나 도에 증진하는 용기는 맹분(孟賁)조차도 빼앗지 못할 정도였고,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이치를 분석하는 정밀함은 세세한 것조차도 놓치지 않을 정도였으며, 차라리 성인을 배워서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하나의 장점으로 명성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3, 4십 년 초야에 있는 동안 하루도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잠시도 존양성찰의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일상의 윤리에 삼가는 마음을 다하여 문로(門路)가 확실해졌고, 조금씩 쌓아 나가는 데 힘써 단계가 정돈되니, 체용(體用)이 모두 갖추어져 도학에 편안히 거처하고 도학에 깊이 의지하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억지로 조심하려 했던 것이 부드러워지고 고달팠던 것이 쾌활해져서 그 덕이 겉으로 드러나 분명하게 덕을 완성하였으니, 이는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사림이 누구나 하는 말이고, 사림의 말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다.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본래 별개가 아니니 공이 수신한 것을 천하와 국가에 확장했다면 어디든 알맞지 않았겠는가마는, 하늘이 태평성세를 원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공이 벼슬할 적에 조정에서는 승문원 정자, 별검, 전적, 예조와 병조의 낭청을 지내고, 지방에서는 연원 찰방(連原察訪) 및 연일(延日)과 강령(康翎) 두 곳의 현감에 제수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연원에서는 반년 만에 관직을 버리고서 돌아왔고, 연일에서는 다스린 지 2년 만에 어떤 일로 인해 체직되었고 강령에는 부임하지 않았다. 영묘께서 일찍이 공을 등용하고자 하여 누차 연석에서 자문하셨으나 미처 등용하지는 못하였다.
금상께서 등극하신 1년 정유년(1777)에 사간원 정언에 특별히 제수하였다가 이윽고 또 대신(大臣)이 이구동성으로 천거하자 병조 참지에 특별히 제수하였고, 예조 참의로 옮겨 제수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신축년(1781)에 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상이 동궁에 계실 적에 이미 공이 유림의 일인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즉위하시고서 친히 발탁하여 몇 년 동안에 세 번이나 차관의 자리에 옮겼다. 반드시 한번은 조정에 초빙하여 문치 교화를 빛내고자 하였기에, 친히 옥음을 내려서 꼭 한번은 만나고 싶다 타이르기도 하고, 연신(筵臣)들에게 글을 써서 출사를 권장하라 명을 내리기도 하였으니, 대개 자리를 비워 놓고 현자를 고대하는 생각이 지극했던 것이다.
공은 시의를 헤아리고 의리를 가늠하여 느긋하게 정해 놓은 계획이 있었으나, 집에만 있고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은 신하 된 본분으로 감히 편안하지 못한 것이라 여겨 출발했다가 돌아온 적이 두 번이었다.
이에 “몸은 이미 출사할 수 없으니, 말씀을 올려 군주를 섬기는 것도 옛사람들의 도리이다.”라고 하고는 아홉 조목의 상소를 올리니, 첫 번째는 뜻을 세움[立志], 두 번째는 진리를 구현함[明理], 세 번째는 공경하는 마음을 지님[居敬], 네 번째는 하늘의 덕을 본받음[體天], 다섯 번째는 간언을 수용함[納諫], 여섯 번째는 학문에 전념함[典學], 일곱 번째는 인재 등용[用人], 여덟 번째는 백성에 대한 사랑[愛民], 아홉 번째는 검약을 숭상함[尙儉]이다.
앞의 다섯 조목에서는 군주의 덕을 논하고 뒤의 네 조목에서는 정치 강령을 논하였다. 마지막에는 일흔에 벼슬을 그만두는 도리에 대해 말하면서 사직을 청하고 시골에 묻혀 생을 마감하기를 바랐다. 상소문이 도착하자 상이 빨리 들이라 명하고서 한참 탄식하시다가 “아홉 조목의 만언(萬言)은 한마디 한마디에 진정성과 간절함이 있으니, 이를 좌우명으로 대신하여 반성할 거리로 삼고자 하노라.”라는 비답을 내렸다.
대개 공이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자라서 실천하여 사람들이 날마다 볼 수 있게 했던 것은 연원 찰방으로 있을 때 지조를 지키며 자기를 단속한 것과 연일 현감으로 있을 때 어진 정치를 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킨 것뿐이었는데 이는 아주 은미한 것이다. 오직 아홉 조목의 상소에 제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바탕과 우리 유학의 체용의 학문이 분명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공에게는 학문의 정력이 깃들어 있는 것인데, 결국은 그리하겠다는 성군의 대답만을 받았을 뿐이다.
얼마 지나 병이 났는데, 그 병이 위중해지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들여 윗도리와 띠를 몸에 걸쳐 놓으라 말씀하시고서 “그대들은 착실하게 공부하기 바란다.”라고 하고, 또 “도학은 일상적인 것이나, 일상적인 것 안에 원래 묘리가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동생 광정(光靖)에게는 “상황에 따라 잘 헤쳐 나가고 후학들을 면려해 다오.”라고 하였다.
또 육촌 동생인 사정(師靖)에게는 “자제들은 본분에 따르도록 가르쳐서 유가(儒家)의 기상을 잃지 않도록 해 다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편안하게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이다. 이듬해인 임인년(1782) 3월에 안동부 북쪽 학가산(鶴駕山) 밑의 사향(巳向) 언덕에 장례 지냈다.
공은 탁월한 품행으로 말하자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에 도리를 다하고 상중에서는 애통한 마음을 다하고 예를 다하였으며, 지은 글로 말하자면 《약중편(約中篇)》은 정(情)이 활활 타올라 성(性)이 상할까 염려한 글이고 《제양록(制養錄)》은 외면을 단속하여 내면을 편안하게 하려는 글이다.
지경(持敬)은 평소 공부의 요점이라 생각하여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을 지어서 천명을 따르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기(理氣)는 급한 순간에도 몰입해야 할 곳이라 여겨 《이기휘편(理氣彙編)》을 지어서 이기의 선후 관계, 이의 온전한 상태와 기의 불완전한 상태, 이는 같으나 기는 다른 상태와 기는 같으나 이는 다른 상태, 이기가 서로 합쳐진 경우와 떨어진 경우에 대해 밝혀 놓았다.
《주자어류(朱子語類)》와 퇴계(退溪)의 편지는 분량이 방대해 자세하게 보기가 어려우므로 그중 요점을 추려 책을 만듦으로써 학습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발(理發)이나 기발(氣發)의 학설 같은 경우는 주자와 퇴계의 정론(定論)이 있었는데, 후대에 담론하는 자들은 곧 이 때문에 붕당이 갈렸다.
공은 이와 기가 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본디 이와 기가 섞이지 않는 곳이 있고 나눌 수 없는 곳 안에 또한 나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으며, 성현의 말씀은 뭉뚱그려 말한 것이 있지만 때로는 또한 구분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뭉뚱그려 말한 곳은 하나로 보고 구분하여 말한 곳은 구분해 보아야 한다고 여겼기에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친구들과 문답한 글 및 논저한 각 문체가 또한 약간 권이 있다.
대개 공은 타고난 자질이 남다른 데다 노력이 또한 지극하여 무릇 묘리를 깨달으면 바로 빨리 기록하였으니, 모두 주자와 퇴계를 본받고 우리 유학을 돕는 것이었다. 사방의 학자들이 먼길을 힘들게 걸어와 경전을 가지고서 토론을 벌이니 문 앞에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공은 제자들의 재능에 따라 정성스레 인도하며 오직 마음 씀씀이를 깨우쳐 주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힘썼다. 공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영남 학자 중에 언행이 공손하고 외관이 단아한 사람들은 물어보지 않아도 대산공의 문인임을 알 수 있다.
공의 휘는 상정(象靖)이고 자는 경문(景文)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과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은 문장과 절조 있는 행실이 천하에 알려졌으니, 공은 그분들의 후손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몇 대를 지나 대사간 이윤번(李允蕃)에 이르러서 깨끗한 절조로 이름이 드러났다.
이홍조(李弘祚)라는 분은 현감 벼슬을 하였고 호는 수은(睡隱)이니 공에게는 4대조이다. 광해군이 패륜을 저지르자 온 가족을 데리고서 조령을 넘어 외씨(外氏)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에게 의지하여 사니, 자손들이 마침내 안동 사람이 되었다. 증조는 휘가 효제(孝濟)이고 할아버지는 휘가 석관(碩觀)이며 아버지는 휘가 태화(泰和)로 모두 은덕(隱德)이 있어서 향리에서 존경을 받았다.
어머니는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밀암 이재의 따님이다. 밀암은 가정의 가르침을 받고서 남방에서 도학에 앞장섰고, 부인은 법도 있는 가문에서 나고 자라서 현명한 데다 행실을 갖추었다. 숙종 신묘년(1711, 숙종37)에 공을 낳았다. 4, 5세가 되자 아무리 놀이 같은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의리로써 가르치니, 공은 이미 능히 두려워하여 경계할 줄 알았다.
공의 아내는 숙부인에 추증된 장수 황씨(長水黃氏)로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처사 황혼(黃混)의 따님이다. 공이 깨끗한 행실을 지키고 육성하는 데 내조를 많이 받았다. 공보다 14년 일찍 죽었다. 외아들인 완(埦)은 문과에 급제하고 별검 벼슬을 하였으며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영운(永運)은 약관에 진사가 되어 사림들의 인망을 많이 얻었다. 차남은 영진(永進)이고 삼남은 영원(永遠)이다. 딸은 진사 유회문(柳晦文)에게 시집갔다. 막내딸은 어리다.
옛날 정이천(程伊川) 선생이 “명도(明道)의 장례에 문인과 벗이 글을 지었는데, 그의 도학에 대해 쓴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각각 자기가 아는 것을 써서 같지 않았으나 ‘맹자 이후로 성인의 도를 전한 사람은 명도 한 사람뿐이다.’라고 한 것은 같았다.”라고 하였다. 이제 공의 벗과 문인이 쓴 제문(祭文)과 개인적으로 언행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니, 칭송하고 앙모하는 말은 사연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도산(陶山)의 적전(嫡傳)을 물려받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아, 옛날에 “명도 선생은 맹자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던 말이 지금 진실로 불변의 정론임을 아니, 후대의 사람들이 지금 시대를 보고서 공이 도산의 적전임을 아는 것이 반드시 오늘의 우리가 옛날 일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 이에 명(銘)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성인 멀어지고 말씀 묻혔으나 / 聖遠言湮
그 사상은 책에 담겼네 / 道寄方冊
정자와 주자 이후로는 / 洛閩之後
퇴계 선생이 넓혔노라 / 陶山廓之
누가 그분을 사숙했나 / 誰其私淑
공이 남쪽에 계셨노라 / 公在南服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 黃甲之擢
내 즐거움은 아니었네 / 匪我所樂
내가 가진 이 몸과 마음 / 我有身心
지키고 보존하고 삼가서 / 操存整飭
자나 깨나 경 공부 하며 / 寤寐持敬
연못가에 선 듯 조심했네 / 翼翼臨淵
임금께선 그대 이리 오라 / 王曰汝來
그대만이 어진 학자라시며 / 汝惟儒賢
산천이 반짝반짝 빛나도록 / 山耀谷輝
은혜로운 교지 내려왔다네 / 恩旨自天
공은 말했네, 신은 미련하여 / 公曰臣駑
초야에서의 삶이 어울립니다 / 分合林泉
아홉 가지 조목의 정치 강령 / 九條治法
신이 드릴 말씀은 이뿐입니다 / 臣言止是
살아서 사람들 감동시킴도 / 生而感發
퇴계 선생과 매우 비슷했고 / 陶山孔邇
죽어서 사람들 찬탄케 함도 / 歿而贊歎
퇴계 선생과 흡사하였다네 / 陶山是似
이 세상을 돌아다보니 / 睠顧斯世
실마리 무너져 막막해라 / 墜緖茫茫
힘쓰시게 우리 당이여 / 勉哉吾黨
이 명문을 보시게 / 視此銘章
<끝>
[註解]
[주01] 이재(李栽) : 1657~173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로, 영남학파를 이끌고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주02] 차라리 …… 않았다 : 여대림(呂大臨)이 지은 〈명도애사(明道哀辭)〉의 구절로, 《근사록(近思錄)》 권14 〈총론성현(總論聖賢)〉
에 나온다.
[주03] 연원 찰방(連原察訪) : 대본에는 ‘連源察訪’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충주목(忠州牧)〉에
근거하여 ‘源’을 ‘原’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04]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 대본에는 ‘敬齋箴集解’로 되어 있다. 이상정(李象靖)의 〈경재잠집설서(敬齋箴集說序)〉에 근거하여
‘解’를 ‘說’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750년 주희의 〈경재잠(敬齋箴)〉을 앞에 제시한 다음에 여러 선비의 경(敬)에 대한 설을 모
아서 각 장(章)마다 서로 같은 부류를 덧붙이면서 다시 곳곳에서 필요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주05] 이기휘편(理氣彙編) : 이상정이 이기(理氣)에 대한 어휘를 모아서 풀이한 책이다. 이기총론(理氣總論), 이기이합(理氣離合), 이
기선후(理氣先後), 이기동이(理氣同異), 이기편전(理氣偏全), 이기동정(理氣動靜), 이기선악(理氣善惡), 이기승부(理氣勝負),
이기체용(理氣體用), 이기유무(理氣有無), 이기허실(理氣虛實), 이기분합(理氣分合), 이기미현(理氣微顯)으로 구성되어 있고,
설명마다 정자와 주희 및 송나라 학자들의 학설과 이황의 이기설을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혀 놓았다.
[주06] 주자어류(朱子語類)와 …… 만듦으로써 : 이상정이 《주자어류》 권8~13 〈학(學)〉과 권113~121의 〈주자(朱子)〉에서 학문에 대
한 핵심을 뽑아 만든 책은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로 모두 4권이고, 퇴계의 글에서 편지글을 뽑아 만든 책은 《퇴도서절요(退陶
書節要)》로 모두 10권이다.
《주자어절요》는 주자학의 집약적 인식에 노력하면서 위학론(爲學論)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퇴도서절요》는 퇴계의
절실한 학문 세계를 집약해서 보여 준다. 《금장태, 退溪學派와 理철학의 전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83쪽》
번암집 제51권 / 묘갈명(墓碣銘)
ⓒ한국고전번역원 | 김정기 이유찬 정문채 (공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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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政大夫禮曹參議大山李公墓碣銘.
五年辛丑之十二月九日。大山先生李公卒於安東蘓湖之里第。嶺之民涕洟曰。大山無福。實斯民無福。嶺之士相嚮而哭曰。哲人亡矣。吾儕將安所宗仰。朝之薦紳先生咸咨嗟曰。才不究用。世何以勸。及至葬。士林來會者。千有二百餘人。退而有私述其言行者。其悅服若七十子之服孔子。生而任吾道之重。死而關斯文之運。斯可以驗矣。嗚呼盛哉。公當英宗乙卯。中司馬。俄又捷大科。時年二十五。聲望冠一世。先是。公自幼少。受業外大父密庵李先生。慨然知俗學非所務。及釋褐。芥視榮利。潛心此學。體若不勝衣。而進道之勇。孟賁莫奪。言若不出口。而析理之精。蚕絲不遺。寧學聖人而未至。不欲以一善成名。以故林下三四十年。無一日不讀孔孟程朱之書。無一息或輟存養省察之工。致謹乎日用彝倫而門路端的。用力於銖積寸攀而堦級齊整。體具用備。居安資深。逮夫晩歲。矜持者和順。辛苦者快活。面背睟盎。儼然成德。此非一人之言。士林所共言也。非士林之言。國人之所共知也。天德王道。本無二致。使公修之身者。推之天下國家。何適不宜。而其如天不欲平治。何哉。其仕也內則槐院正字,別檢,典籍,禮兵二曹郞。外則連源察訪,延日,康翎二知縣而已。而連居半年棄歸。延治二載因事遞康不赴。英廟嘗欲晉用公。屢詢筵席而未及用也。今上御極之元年丁酉。特除司諫院正言。已又因大臣交口薦達。特除兵曹參知。移禮曹參議辭不赴。辛丑。又拜刑曹參議。上在銅闈。已知公爲儒林第一人。及卽位親拔擢。數年之間。三遷佐貳。必欲一致之朝。以賁飾文治。或親降玉音。諭之以必欲一見。或命筵臣貽書勸起。葢側席之思至矣。公量時度義。綽有定計。以在家無變動。爲臣分所不敢安。則旣發言旋者再矣。乃曰身旣不可進。以言事君。亦古人之道。陳九條䟽。一立志二明理三居敬四體天五納諫六典學七用人八愛民九尙儉。上五條。論君德也。下四條。論治體也。末乃言七十致事之義。乞賜骸骨。畢命田野。䟽至。上命促入。嗟歎者久。賜批曰。九條萬言。言言眞切。庸替座右之銘。要作觀省之資。葢公之幼學壯行。使人日可見者。惟連郵之氷蘗律己。延邑之治化浹民。然此塵糠也。惟九條䟽。帝王出治之本。吾儒體用之學。粲然斯備。在公未始非精力所萃。而畢竟得聖主曰兪而已。居頃之疾作。及其革。召門弟子入。命加上衣拖帶。謂曰。願諸公着實用工耳。又曰。此事只是平常。平常中自有妙處。謂弟光靖曰。隨分收拾。勉進後學。又謂從祖弟師靖曰。敎子弟以依本分。不失儒家氣味。翼日怡然而逝。享年七十一。粤明年壬寅三月。葬于府北鶴駕山下巳向之原。公以其至行。則居家而孝友盡倫。居喪而致哀盡禮。以其修辭則約中篇。憂情熾而性鑿也。制養錄。欲制外而安內也。持敬爲平日用工之要。則作敬齋箴集解。以資顧諟。理氣爲造次沈潛之所。則作彙編。以明其先後偏全同異分合。朱子語類。退陶書編。袠浩穰難於究觀。則節其要成書。以便誦習。至若四七理發氣發之說。有朱退定論。而後來談者便以是分朋。公以爲理與氣不相離處。自有不相雜者。不可分中。亦有不可不分者。聖賢之言。有渾淪言。時亦有分開說處。渾淪處作渾淪看。分開處作分開看。於是作四七說。所與知舊問答與論著各體。又有若干卷。葢公資稟旣異上力又到。凡有妙契。從以疾書。皆所以祖述朱退。羽翼斯道者也。四方學者。有百里重繭。執經問難。戶屨日盈。公各隨其材。諄諄誘掖。一以開明心術變化氣質爲務。公雖歿。嶺儒之言貌謙恭。瞻視端重者。不問尙可知爲大山公門人也。公諱象靖。字景文。韓山人。文孝公穀。文靖公穡。文章節行聞天下。公其裔也。入國朝。數傳至大司諫允蕃。以淸節顯。有弘祚官縣監號睡隱。於公四世也。當光海斁倫。盡室踰大嶺。依外氏西厓柳先生居焉。子孫遂爲安東人。曾祖諱孝濟。祖諱碩觀。考諱泰和。俱有隱德。爲鄕里重。妣載寧李氏。密庵諱栽之女。密庵服庭訓。倡道南方。夫人生長法門賢有行。以肅宗辛卯生公。方四五歲。雖嬉戲微事。必敎以義。公已能惕然知戒。公配贈淑夫人長水黃氏。翼成公喜之後。處士混之女。公之淸修保養。得內助爲多。先公十四年卒。有一子埦文科別檢。生三男二女。男長永運弱冠成進士。蔚有士望。次永進,永遠。女適進士柳晦文。季幼。昔程伊川先生曰。明道之葬。門人朋友爲文。以述其道學者甚衆。各用其所知。葢不同也。而以爲孟子之後傳聖人之道者一人而已。是則同。今以公知舊門人祭告之文及私錄言行者觀之。稱述慕仰之辭不一其說。而其曰得陶山嫡傳。無異辭也。嗚呼。昔之稱明道以孟子後一人者。今知爲的確不易之論。則以後而視今。知公之爲陶山嫡傳者。必當如今之視昔。是爲銘。銘曰。
聖遠言湮。道寄方冊。洛閩之後。陶山廓之。誰其私淑。公在南服。黃甲之擢。匪我所樂。我有身心。操存整飭。寤寐持敬。
翼翼臨淵。王曰汝來。汝惟儒賢。山耀谷輝。恩旨自天。公曰臣駑。分合林泉。九條治法。臣言止是。生而感發。陶山孔邇。
歿而贊歎。陶山是似。睠顧斯世。墜緖茫茫。勉哉吾黨。視此銘章。<끝>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一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