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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5. 2. 28. 19:48
항일 독립운동의 아버지 이상설.
▲국립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재단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재단은 이상설, 이위종열사, 홍범도장군, 유관순열사 등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후손이 없거나 유해마저 찾을 길이 없는 순국선열 117위 및 정인보, 조소앙 등 6.25 당시 납북된 독립유공자 16위 등 총 133위의 순국열사의 위패를 봉안해두고 있다
이 재단은 1775년 8월 15일 광복 제3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후손이 없는 선열의 재단 건립위원회(대표 이은상) ’에서 묘소도 없고 후손도 끊어진 선열의 위폐를 안치하고자 국고보조를 받아서 건립하였다.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슬래브조 단층으로 가로 19.6m, 세로 4m, 높이 4.5m, 내부면적 85.14㎡이다 위패는 3층 계단에 모셔져있으며 중앙에는 선열을 추모하기 위한 제단과 향로가 설치되어있고, 후면 벽에는 피리를 불면서 승천하는 선녀상이 입체벽화로 장식되어 있다(현충원 홈페이지)
▲국립 서울현충원
이상설은 평생 너무나 완벽할 정도로 깨끗했고, 선사(仙師)와도 같이 단정했다. 또한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일컬을 정도로 부사존장(父師尊長)을 경모하며, 연하를 사랑하고 생양부모(生養父母)에 극진한 봉양은 남촌의 효자로 칭송되었다.
“임종의 순간에 내린 이상설의 눈물 유언”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1917. 3. 2)-
그의 임종을 지킨,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 조완구(趙琬九), 이민복(李敏馥), 등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한 후, 그 유골 조차 가루로 만들어, 날려 버리고, 그의 유고와 유품 일체를 모아, 남김없이 불살라 버렸다. 하여 그의 무덤은 없다.
▲이상설선생 유허비(러시아 연해주 수이푼강변)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연해주 우수리스크 발해 성터가 바라다 보이는 강가에 '이상설의 유허비'를 세웠다.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탄생해 1917년 연해주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다.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 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중 순국하다.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유허비문에서-
▲이상설 생가 유형 : 충청북도 정문화재(기념물 제77호)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산직마을) 생가와 그 옆에 세운 이상설 동상이다.
이상설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는 1894년 조선 마지막 과거 문과에 급제한다.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수 있는 학자' 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유학에 능통했다.
이상설은 신구(新舊) 학문과 영불일로어(英佛日露語)에 능통했다. 심지어는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수학책을 펴내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26세에 성균관 관장이 됐다. 이때 수학과 과학을 성균관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이상설관장이다.
『이사람(李相卨)의 포부는 매우 크며 세계대세에 밝고 동양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이범윤(李範允과 같은 인물 만인(萬人)을 모아도 이상설(李相卨) 한사람에 못 미칠 것이다.(중략) 수차 만나서 그 인물을 보니 기량(器量)이 크고 사리(事理)통하는 대인물(大人物)로서 대신(大臣)의 그릇됨이 부족함이 없더라.(중략)
세계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여 교육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이 사람일 것이다. 또한 동양평화주의를 가진 점에 있어서 이 사람과 같이 초절한 마음과 뜻을 갖춘 사람은 참으로 희귀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1879년(고종 16) -1910년)-
또 학문에 견식이 높고 뛰어난 정치력으로 각종 모임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이회영, 이시영, 여준 등과 죽마고우로 함께 어울리며 공부했다. 특히 이상설이 이회영보다 세 살 아래이나 지기(志氣)가 서로 맞아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처럼 지냈다.
1905년 의정부참찬 이상설은 을사늑약의 체결을 막기 위해 회의장문을 밀치고 들어가려 했으나 일본헌병의 제지로 회의조차 참석 못한다. 이에 이상설은 고종에게 사직(社稷)과 함께 할 각오로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거듭 올린다.
또 종로 거리로 나가 군중을 상대로 민영환의 순국자결을 알리는 가두연설을 한 후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쳐 자살을 시도하는 등 말 그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민족최초의 근대교육의 요람 만주 용정의 서전서숙(瑞甸書塾)
▲헤이그 특사 이상설선생이 1906년 8월 만주에 최초로 항일민족학교를 사재(私財)로 설립
하여 전액 무상 교육을 실시한 서전서숙 옛 위치를 알리는 비석 입니다.(오늘날 중국 길림성 용정실험소학교)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 후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1906년 4월 18일 양부(養父) 이용우의 제사를 지낸 후 망명길에 나선다. 이관직은 이때의 이상설의 망명 행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상설은 만리절역(萬里絶域 :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홀로 떠나면서도 웃는 얼굴로 이회영 등 지우(知友) 들과 이별하고 인천항에 이르러 중국인 상선에 올라 상해로 잠항(潛航 : 배에 숨어서 바다를 건넘)하여 거기서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용정촌에 안착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이상설은 만주 용두레마을에 국외 민족교육운동의 효시인 《서전서숙》을 세운다.
신학문과 함께 항일민족교육을 시킨 서전서숙은 바로 독립군양성소나 다름없었다. 이듬해 1907년 이상설은 만국평화회의의 밀사로 임명되어 네델란드 헤이그로 떠난다. 이상설이 헤이그로 떠난 뒤 일제의 방해로 서전서숙은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명동학교ㆍ광성학교 ㆍ창동학교 등이 잇달아 세워지며 북간도 일대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이 등불처럼 일어났다.
▲진천 숭렬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산직마을)
▲이상설 사당
▲숭렬사 이상설선생 숭모비 비각
(보재 이상설선생의 행적을 담고 있는데, 비문은 이은상, 비명은 이범석이 짓고 글씨는 이상복이 썼다.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단의 정사(正使)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가 헤이그특사를 위칭(僞稱)했다고 하여 궐석재판으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禪位)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후 더 이상 고국에 돌아갈 수가 없던 이상설은, 1908년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서 개최하는 애국동지대표회의에 연해주 대표로 참석한다. 이 애국동지대표대회에서는 한인군사훈련 양성소 설립을 결정한다.
이때 무장항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은 1909년 6월 미국 네브라스카주의 한인 농장과 이듬해 헤이스팅스(Hastings)대학 내에 미주 최초의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우게 되는데 이상설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1909년에 연해주로 돌아온 이상설은 뜻을 같이 한 이승희와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미주에서 보내온 돈 등으로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蜜山) 부근의 땅을 사서 1백여 가구의 교포를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 독립기지를 건설한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통합전선 구축에 앞장서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10년에는 의병들을 하나로 모아 ‘13도의군’을 창설하고 경술국치로 일제에 나라가 강점되자 블라디보스톡에서 성명회(聲明會)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이어 1911년에는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중요인물을 망라한 권업회(勸業會)를 결성하고, 1913년에는 한일병합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해 그 수반인 정통령(正統領)에 취임한다.
또 1915년에는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된다. 이상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국제정세의 변화로 뜻을 이루지 못한 체 병을 얻어 1917년 47세라는 한창 나이에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이국 낯선 땅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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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설에 대한 인물평
●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조선 말기의 문신·대문장가. 1852(철종 3)-1898(광무 2).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은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의 나이 25세떼 그에께 보낸 편지에서 그를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로 촉망된다고 말한 구절이 있다. 『진실로 足下(李相卨)의 뒷날에 대성하고 창무할것을 막을수가 없었으니, 이는 곧 율곡의 도(道)가 행(行)함이다. 그것은 나라의 부강이고 백성의 복지이며 선비의 영화라 어찌 구구히 足下(李相卨)에게만 다행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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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보(鄭寅普)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 1893년(고종 30. 05. 06-1950)
정인보(鄭寅普)는 이상설(李相卨)의 학문세계를 다음과 같이 짐약적으로 표현했다. 『문장은 경교(鯨鮫 : 고래, 상어)를 넘어뜨릴 만하고, 성리(性理)는 근굴(根窟)을 뚫었다. 깊은 생각은 역학과 수학에 궁달 하였고, 정치와 법률에 통하였다.
의약(醫藥)에는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고, 역사 지리에도 더욱 연구가 깊었다. 외국어 정도는 오히려 얕은데 속하여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 하였다. 러시아 학문에 통하였으니 톨스토이와도 사귀(점교 : 漸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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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문(大韓每日申報)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창간의 일인인 베셀(Ernest T. Bethel)이 쓴 글로 추정되는 기사에서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다음과 같이 신. 구학문을 겸비한 한국의 제일가는 학자로 평가했다.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造詣)가 심히 깊어 동서 학문을 거의 다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연구하므로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 ․ 법률 ․ 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
이로 말미암아 성명과 칭찬이 자심하여 한인(韓人)의 여론이 모두 말하기를, 이분이 만약 조정의 윗자리에 앉으면 문명의 정치를 가히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또한 외국인으로 한국에 온 이는 다 익히 들은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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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돈(權五惇)/독립운동가·한학자. 1901년-1984년
『…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선생도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도 의지(意志)로나 지모로나 당당한 지도자이시지만 그 두 분은 처음부터 합심(合心)이 되지 않았다. 그 두 분은 오직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선생이 생존해 계시어야 그 두 팔과 같은 활동을 하실 수 있던 것이다.
만일 보재 선생이라는 뇌두(腦頭)가 없다면 그 두 팔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실로 머나먼 북쪽나라 하바로프스크에 수많은 동지(同志)들이 모여든 것은 오직 보재 선생이 계심으로 하여서 선생의 지도로 광복의 대업을 성취시켜 볼까 함이었는데 이제 선생이 영원히 가시었으니 다시 누구를 바라고 이 거대한 대업을 이룩할 것이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