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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공파의 보학 제정 발의
1.우리 감사공파세보 편찬은 수단 편집이 완료되어 1차 교정쇄 분을 현재 족보제본을 수임한 회상사에서 수정 작업 중에 있는바 최근 인터넷 검색 중 족보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이 많이 있어 우리종중의 보학 초안 구상을 아래와 같이 만들어보았으나 불초는 노쇠하여 완성치 못하고 이일을 참판공파 김동윤 부회장 에게 위임코자하는바 동윤씨께서 어렵고 괴로운 일 일지라도 종중을 위하는 대의에서 수임하시어 우리 종중의 보학을 나름대로 정립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2. 본안 완성에는 많은 시일이 소요 될 것으로 추정되는바 많은 賢宗님 께서 惠諒熟考 하시어 좋은 高見을 본 카페에 올려주시면 위 동윤씨 하시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오니 고견을 많이 제언하여주시기 바랍니다.
3. 본안 작성은 종중의 화합단결발전과 후세교육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2014.12.24.
불초 용욱 근배
監司公派 宗中의 譜學 ............................... (초안구상)
(제1편 일반적 보학 제2편 선조에 대한 보학 으로 대별하고 우선 1편 작성하고 후일 2편 작성한다)
第一篇 一般的 譜學
1. 보첩(譜牒)의 기원(起源) 그..... 1
중엽의 의종(毅宗)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1. 보첩(譜牒)의 기원(起源)
족보는 옛날 중국 왕실계통의 제왕년표(帝王年表)를 기술한 것으로부터 비롯되며 한(漢)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새로 설치하고 후보인물의 내력과 그 선대의 업적등을 기록하여 비치한 것이 사가(私家)에서 족보를 갖게 된 것이다.
그 후 위(魏)나라와 진(晉)나라를 거처 남북조(南北朝 : 420~589)시대에 비로소 학문으로써 보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체로 고려 그 효시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朝鮮) 성종(成宗)초기에 비로소 족보를 체계화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간된 족보는 1423년(세종5년)의 문화류씨(文化柳氏) 영락보(永樂譜)인데 서문(序文)만 전할뿐 현존하지 않는다. 그 후 1476년(성종7년)에 발간된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는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에 희귀고본으로 진장(진藏)되어 있으며 1562년(명종17년)에 발간된 문화류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는 내외 자손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현존하고 있다.
우리 풍양조씨의 족보는 1731년(영조 7년) 신해년(辛亥年)에 처음 만들어저 신해보(辛亥譜)라 일컬으며 3권으로 되어 있다.
1, 보첩(譜牒)의 기원(起源) 그..... 2
보첩은 원래 중국의 6조(六朝) 오(吳),동진(東晉),송(宋),제(齊), 양(梁),진(陳) 시대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북송(北宋)의 대문장가인 삼소(三蘇)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 소식(蘇軾),소철(蘇轍)에 의해서 만들어진 족보는 그 편제와 규모가 매우 우수하여 그 후부터 족보를 편찬하는 사람이 대개 이를 표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보(蘇譜)라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엽부터 족보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전해진 것은 없고 단지 역대 왕실에 세보(世譜)가 있을 뿐이며 사대부(士大夫)의 집에 가승(家乘)이 마련되어 왔다. 가장 체계를 갖춘 족보는 성화보인데 서거정(徐居正)의 찬(撰)으로 되어 있다.
보첩은 한 종족의 역사이며 생활사인 동시에 혈통을 실증하는 귀중한 문헌으로서 동족(同族)의 여부와 소목(昭穆)의 서열(序列) 및 촌수(寸數) 분별에 지극히 필요하다.
보첩(譜牒)의 기원(起源) 그.....3
보첩은 중국의 6조시대(六朝時代)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실에 관한 계통,
즉 제왕연표(帝王年表)를 기술한 것이다. 일반가문에서도 보첩을 갖게 된 것은
한(漢)나라 때 관직
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선대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처음이다.
그 뒤 위(魏) – 진(晉) - 남북조(南北朝) - 수(隨) 나라로 내려오는 동안
학문으로서 보학(譜學)을 연구하게 되었고 북송의 대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해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 편찬의 표본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우리의 족보는 고려 제18대왕 의종(毅宗;1146년-1170년)때 김관의
(金寬毅)가 편찬한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 뒤 족보를 체계적인 형태로 갖춘 것은 조선 제9대왕 성종(成宗) 7년
(서기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이고 지금과 같이
혈족 전부를 망라한 족보는 조선 제13대왕 명종(明宗; 1545년-1567년)때
편찬된 문화유씨보(文化柳氏譜)라고 하며 지금까지 전해 온다.
따라서 우리 박씨와 같이 특별한 가계 즉 왕계(王系) 이외는 1천년 이상의
족보를 기록 보존해 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譜牒(보첩)의 意義(의의)
譜牒이란 한 種族의 系統을 父系중심으로 알기 쉽게 體系的으로 나타낸 책으로, 同一血族
의 源流를 밝히고 그 血統을 尊重하며 家統의 繼承을 名譽로 삼는 한 집안의 歷史책이다***
2, 보첩(譜牒)의 종류(種類)
(1) 족보(族譜)
족보라 함은 모든 보첩을 통틀어 지칭하는 대명사(代名詞)이기도 하며 동일씨족의 관향(貫鄕)을 중심으로 시조(始祖)이하 세계(世系)의 계통을 수록하여 동족의 발원(發源)에 대한 사적(史蹟)을 상세히 수록하여 종족의 근원을 밝히고 자랑스런 선조의 행적(行蹟)과 동족간의 소목(昭穆)을 알려 화애돈목(和愛敦睦)함을 목적으로 편수(編修)한 보첩을 말한다.
(2) 대동보(大同譜)
대동보란 득성조(得姓祖) 또는 비조(鼻祖)의 후계 중시조(中始祖)마다 분관(分貫)하여 각관시조(各貫始祖)로 한 씨족간에 대동(大同)하여 합보(合譜)한 족보를 말한다.한 성씨의 시조이하 동계혈족(同系血族)의 동족간에 분파된 파계(派系)를 한데 모아 대동하여 집대성(集大成)한 것이며 각파의 분파조(分派祖)는 시조로부터 몇 세손(世孫)이며 어느 대에서 분파되어 파조(派祖)가 되었는가를 한눈에 볼수있도록 계통을 체계적으로 수록한것을 말한다.동족이면 누구나 전체가 수록 되어야 대동보(大同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3) 파보(派譜)
파보는 동일선계(同一先系)의 시조이하 분파된 해당 파계만을 수록하여 동일파계의 동족은 빠짐없이 수록함으로써 대동보 보다 파보가 간편하고 자세하여 더 소중하다고 할수 있다.
(4)세보(世譜)
각 파의 계보로서 파보와는 달리 상계를 밝히고 분파 경로 및 각 파간의 계통과 각 파조의 내력 등을 넣는 것이 다르다. 여러 파가 모여 공동의 상계를 만들기 때문에 세보를 모두 모으면 대동보가 되며, 각자는 자신의 파보만 소장할 수 있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세지(世誌)라고도 하여, 한 종파(宗派) 이상이 동보(同譜) · 합보(合譜)로 편찬하거나 어느 한 파속(派屬)만을 수록한다.
(5) 가승보(家乘譜)
가승이란 시조이하 중조,파조를 거쳐 본인에 이르기까지 직계존속만을 수록한 가첩(家牒)을 말한다.
가승(家乘)의 수록 내용을 참고하면 본인의 고조부(高祖父) 이하는 전부 수록하여 재종(再從),삼종(三從) 형제 자매까지 수록하고 고조부 이상은 직계선조만을 수록한다.전례에 대동보는 종가(宗家)에 한질 모시고 이하는 가승으로 수록하여 집집마다 계보로서 자녀의 교육용으로 보존하였다.
(6) 계보(系譜)
계보는 다른 가첩류와 달리 시조이하 동족간의 계통(系統)과 소목(昭穆)을 밝히기 위하여 명(名),휘(諱),자(字)만을 수록한 계열도를 말한다.시조이하 분파된 각 파조까지 수록한 분파계열도 또는 파조이하 본인까지 수록한 것을 계열도라 한다.
(7) 세계보(世系譜)*******거의 쓰지않는 새로운 용어
(6) 항 계보와 동
(참고...세계는 대대로 이어가는 계통을 말한다. 1920년 발간한 養世系譜 가 있음)
(8)내외보(內外譜)
인아보(姻亞譜)라고도 한다. 내보와 외보로 나뉘며, 내보에 나타나는 역대 조상의 배우자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배우자 씨족의 시조로부터 그 배우자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내보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기성황씨내외보》가 있으며, 《은진송씨외보》 · 《고령김씨외보》처럼 외가 계보만으로 구성된 외보도 있다.
(9)만성보(萬姓譜)
모든 성씨들을 망라한 족보로 유력 가문의 계보를 중심으로 편찬된다. 만성대동보라고도 부르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집성한 족보의 사전 구실을 한다.
3. 보첩(譜牒)의 형태(形態)
보첩은 전통적인 보첩이나 오늘날의 보첩이나 하나같이 형태가 일치하지 않아 정설이 없다. 다만 널리 퍼진 전통적인 형태로서 종보(縱譜)와 횡간보(橫間譜)가 있다.
횡간보는 5대를 1첩(疊)으로 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며, 지면은 주로 6칸식으로 꾸민다. 요즘에는 일고여덟 칸으로 꾸미는 방식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불편하다는 지적이 있다.
4. 신분제(身分制)와 족보(族譜)
역대 왕과 왕족의 계보를 체계화한 최초의 문헌은 신라 말기의 최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으로, 일본 사이타마 현의 고마 씨(高麗氏) 집안에는 고구려 왕족의 계보를 적은 《고마 씨 계도》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는 초기부터 왕실의 실록과 함께, 고려 태조의 세계를 기록한 《성원록(聖原錄)》이 있었다고 전하며, 문종 이래로 고려의 왕실이나 귀족들도 가계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합하여 정리하고 기록해두는 기관을 따로 두지는 않았다. 고려의 귀족 가문은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각자의 가계를 기록하고 보존해 온 정도였고,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사대부가에서는 가승(家乘)이 전해 내려왔다.
본격적인 한국의 족보는 의종(懿宗) 때 검교군기감을 역임했던 김관의(金寬毅)가 개인이 보관하던 문서 등을 수집하고 정리한 《편년통록》과 함께 고려 왕실의 계통을 정리하여 기술한 《왕대종록》이 한국 족보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12년(1412년) 《선원록》과 《종친록》이 제작되고 종실 내부에서의 적서 구별을 위해 《국조보첩》, 《당대선원록》. 《열성팔고조도》 등과 외척, 부마들을 수록한 《돈녕보첩》을 편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 5년(1679년) 선조의 친손자였던 낭원군 간이 역대 왕의 세계와 내외 자손들을 모아 편집한 《선원보략》을 바쳤고, 이듬해 숙종 6년(1680년) 선원록 이정청과 교정청을 설치하여 《선원계보기략》을 작성하게 했다. 《선원계보기략》은 태조부터 현종까지의 《선원록》을 기초로 새로 작성한 왕실 세보로서 이후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보간되었으며, 이후 별도로 설치된 교정청이 《선원록》의 수정 업무를 맡아보다가 1757년부터는 종부시에서 해당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고, 고종 원년(1864년)에 종부시가 종친부에 합쳐진 뒤에는 종친부에서 업무를 맡아 행했다.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 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고 그 구성원들은 왕공족 대우를 받았던 일제 시대에는 《선원보》가 아니라 《왕공족보》라는 이름으로 순종 황제가 죽고 3년상을 마친 1931년부터 편찬을 시작해 1933년 완성되었는데, 대한제국기의 황실 족보를 일제하의 이왕가 수준에 맞는 족보로 바꾸고 수정하는 작업이었고 이전의 선원보와는 형식도 수록 내용도 달랐을 뿐 아니라,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현존하는 한국의 족보 대부분은 조선 시대 양반층에서 작성된 족보이다. 남송의 성리학과 농업 기술이 2세기 이상의 시차를 두고 조선에 퍼진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사대부들이 남송의 사대부들처럼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고려 및 그 이전 시기와 관련한 서적들을 동원하여 족보를 작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고증에 근거한 것부터 전혀 허구적인 것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대동보로서 체계가 잡힌 족보는 조선 성종 7년(1476년)에 안동 권씨가 발간한 《성화보》(成化譜)이고, 오늘날과 같이 혈족 전부를 망라한 족보는 조선 명종 때 편찬한 《문화유씨보》(文化柳氏譜)이나,[6] 현재 전하지 않는다.
조선의 양반 대부분은 고려의 향리층으로, 과거 시험 등을 통해 향리직을 벗어나 중앙 조정에 관료로서 출사하여 양반이 된 자들이었다. 이를 탈향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집안 전체가 향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족보 작성이 시작된 초, 중기까지는 지방의 향리 신분이 동등하게 한 족보에 실리기도 했지만, 후기에 이르면 향리와 양반의 신분 격차가 벌어져 양반의 족보에서 향리들의 계보가 사라지게 되었다.
초창기 족보 작성의 근거가 된 문헌들로는 고려의 《명위보》와 조선 초의 양성지가 지은 《해동성씨록》과 작자 미상의 《백가보략》 등이 있었다. 족보 작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만큼 족보를 연구하는 보학자들의 이름도 등장하였는데, 17세기 중엽에 활약한 《동국제성보》(2권)의 저자 정시술과 후반에 활약한 《성원총록》의 저자 임경창,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활동했던 실학자로서도 유명한 이덕무도 《벌열통고》(4권)의 저자로서 보학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양반 가문들이 모여 합동으로 제작한 종합보는 《진신보》(2권 2책, 필사본) 또는 진신세보라고도 불리는 서적이 현존하고 있으며, 각 성씨의 유명 인물을 정점으로 8세 손, 혹은 10세 손까지의 계보를 모아 만들었다. 문무반의 구별에 따라 《문보》(5권 5책)와 《무보》(2책, 삼반팔세보)가 있었고, 음서로 벼슬한 자들의 《음보》(2권 2책)와 《사마보》도 있었다. 양반 족보에서 떨어져 나온 향리파는 자신들만의 별도의 족보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동래의 호장(戶長)층이었던 동래 정씨들이 작성한 《호장보》와 함께 대표적인 것이 《연조귀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족보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다가 19세기 또는 구한말에 대동보를 꾸미면서 다시 본 족보로 합치거나 향리로서의 이력을 뺀 별도의 독자적인 족보를 만들기도 하였다.
단순히 생물학적 혈연만을 기록한 족보 외에도 정치적 · 사회적인 관계, 특히 붕당정치가 행해지던 조선 후기의 경우 집안의 당파 내력을 계통화하여 기록한 당적보(黨籍譜)가 존재했으며, 집안의 위세를 내세우기 위해 집안별로 배출한 당대 명사와 현인들의 계보를 중심으로 간추린 명현세보(名賢世譜)와 성현세보(聖賢世譜)가 제작되기도 했다. 일정 지역의 유력 성씨들의 계보를 모아 놓은 향보(鄕譜)도 있는데 해당 지역의 폐쇄성과 더불어 지역 향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꼽히고 있다.
대부분 잡과로서 등용되어 역관이나 기술직을 맡았던 조선의 중인들은 세습직이 아님에도 사실상 직책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역관 이창현은 대표적인 중인 집안의 족보를 종합하여 《성원록(姓原錄)》(10책)을 편찬하였고, 도화서에 속한 화원들의 계보를 기록한 오세창의 《화사양가보략》과 《필원화가보》(24장)도 있는데 《필원화가보》의 경우는 족보라기보다 화원의 계보에 가깝다. 충주 지씨의 분파로 천문지리의 대가를 배출한 어느 집안의 경우, 지광한(池光翰, 1695년~1756년)이 영조 26년(1750년)에 간행한 《지씨홍사》가 있는데, 지나친 역사 소급으로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주요 중인 집안의 계보를 모은 《팔세보》라는 족보도 있다.
이색적으로 환관의 집안에서 족보를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내시보》라 하였다. 일제 시대에 작성된 《양세계보(養世系譜)》(1920년)와 《연양군세계》가 남아 있으며, 필사본이다. 이 경우 환관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양자를 통해 내시직을 세습하여 세계를 내려오면서 양자의 성도 그대로 유지하고 본관도 적어서 계출을 밝힌 점이 특징이다. 양반이나 중인이 아닌 신분으로 계보를 남긴 사회층은 노비였다. 노비가 만든 것이 아니라 노비를 관리하는 자들이 만든 것으로, 전라남도 장성군의 필암서원 소장 문서 가운데 《노비보》가 남아있다. 18세기경 필암서원에 소속된 노비들의 인적 사항을 적은 계보는 모계로 이어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의 신분 관련 법률에서 종모법(從母法)을 택했던 사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본 항 학문적 연구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니 삭제 하여도 가 할 듯합니다.)
5.족보(族譜)의 주요내용
족보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재(登載)된다.
(1)
(2)
(3)
6.족보의 간행과정
7.족보 보는 방법
8.족보에 많이 쓰는용어
득성조
선계와 세계
세와대
명자 휘자
항렬과 항렬자
사손과 봉사손
후사와 양자
서출
종가
소종가
종회 대종회 지역종회 화수회 파종회 가문 문중 종중 문장 종손 위토
논란
사료적가치
참고자료
9. 監司公派譜刱始續修來歷
끝
첫댓글 경주 김씨 감사공파 세보 편찬 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보학에 무지한 저에게 우리 종중 감사공파의 보학을 정립하는 지대한 사업을 위임하시어 무한 감사를 표합니다.
위원장님의 지도 조언을 성실하게 받아 자료를 면밀하게 조사 검토하고 정확하게 정리하여 보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양시 덕양구 토당동
叅議公 諱 升慶 16世孫 東潤 올림
*수임하시니 감사하옵고 훌륭한 작품이 이루어 질것으로 확신합니다. 조급히 하지마시고 천천히 자료를 수집 연구 검토하여 작성 하시되 추후 계획하시는 감사공파 종회지 2호에 등재하시면 종사에 길이 남는 우리 종중의 귀한 보학 자료가 될 것인바 사명감을 가지시고 더욱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