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분의 글을 읽다가 "강아지 성도 고양이 신자"라는 책을 알게 됐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도 있겠지만 각각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는 두 저자가 각자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습성을 보면서 믿는 자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
나름 읽어보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저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있기에
며칠간 강아지의 행동과 습성을 보면서 제 신앙에
적용해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지금 저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유기견 센터에서 입양한 강아지인데 일반적으로 유기견 센터에 들어오는 강아지들은 십일간 공고를 통해 강아지 주인으로 하여금 찾아 가라고 합니다.
이 십일의 공고 기간이 지나면 보통 2주 정도
입양 사이트에 올려서 주인없는 강아지를 입양하라고 홍보를 합니다.
그리고 2주의 기간이 지나면 일부 강아지는
입양되기 전까지 임시로 보호해 준다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임시 보호자도 나타나지 않는 강아지들은 안락사를 시킵니다...
이런 면에 있어 우리 집에 입양된 강아지는 행운아라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유기견 센터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다 새 주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참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일이라는 날을 기대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던 자였습니다.
우리 집에 입양된 강아지는 우리가 자신을 입양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여러 유기견 센터에 올라오는 입양 공고문을 살펴보고 가족들이 함께 의논하며
거의 두 달 여라는 시간을 보낸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강아지가 유기견 센터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는
입양할 강아지를 찾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저를 구원하고 자녀로 삼으시고자
창세전부터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의논하고 계획하셨다가 하나님의 때에 성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저를 부르사 성령을 통해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에베소서 1장 4-5절).
저는 저를 향한 이런 놀라운 계획이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두 번째는 강아지들도 강아지마다 성격이 다 다른데, 우리 집 강아지는 거의 애교가 없습니다.
보통은 주인이 밖에 나갔다 집에 오면 꼬리를 치고 반갑게
맞아 주는 게 일반적인 모습인데,
이 강아지는 집에 사람이 없을 때 그럴 때 먼저 오는 식구는
좀 반겨 주지만, 사람이 집에 있을 경우에는 누운 채 꼬리만 두세 번 흔드는 정도로 애교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 뿐만이 아니라 두 아이들과 예전에는 강아지를 싫어 하였기에 입양을 반대했던 제 아내도 나갈 때나 집에 들어오면 먼저 가서 만져주며, 심지어는 강아지에게 애교까지 부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 옆이나 발 밑에 누워 있는 강아지의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사랑스럽다는 마음이 듭니다.
오죽하면 제 아내조차 "어디서 이런 예쁜 게 왔냐"라고 하면서 강아지를 예뻐하고 내가 너한테 재롱을 부릴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이 강아지를 예뻐하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애교가 많거나 집을 잘 지키거나 똑똑해서 주인의 말을 잘 듣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한가지 이유 그건은 우리 가족이 입양한 우리 집에 사는 강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나 같은 자를 사랑하고 예뻐한다고 하신 이유는 내가 잘 낫거나 예쁨 받을 뭔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나를 사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며 고백할 때마다 온 몸에
전율이 돋음을 느낍니다(로마서 5장 8-10절).
세 번째는 신기하게도 이 강아지가 시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도 밥 시간은 정확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하루에 두 번 밥을 주는데 아침에는 6시쯤 그리고 저녁에는 5시쯤 밥을 줍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거의 그 시간이 되면 밥 달라고 와서 갖은 애교를 부립니다.
특히 저녁때는 같이 있다가 저희도 깜빡 밥 줄 시간을 잊고 있을 때가 있는데 정말 신기하게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일어나서는
사람에게 와서 핥고 꼬리를 보이지 않을 만큼 흔들면서 두 발로 사람을 치고 난리를 칩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면 거의 5시에서 5시 십분 정도.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열정과 간절함을 갖고 대하고 있는가 반성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있는데
그럼에도 시간만 되면 밥을 달라고 요동치는 모습 속에...
매일 읽었던 말씀이고 벌써 수십 번 읽었기에 뭐 그리 새로운 게 있나 하면서 기대감이나 간절함 없이 성경을 읽던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시119편123절)
네 번째로 애교도 없고 잘 짖지도 않고 사나운 강아지를 만나도 싸우지도 않는 순둥이지만 질투심은 엄청 많습니다.
그렇기에 산책을 하다 만나는 강아지들의 행동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쿨하게 행동하다가도 제가 그 강아지를 쓰다듬거나 그 강아지가 내게 반갑다고 다가오면 상대 강아지의 크기와 상관없이 강하게 대들며 막아섭니다.
이는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강아지 장난감으로 강아지 인형이 있는데 제가 그 인형을 예쁘다고 쓰다듬거나 안고 있으면 저 멀리서 누워있다가도 와서는 제게서 그 강아지 인형을 뺏어가 물고 뜯고 난리를 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제 안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질투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청년 때 자주 형제들과 모여서 말씀을 나누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 읽기 같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함께 성경을 읽고 나누면서 함께 교제했던 형제들의 분별력과 깨달음에 종종 도전을 받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분별력과 지식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며
다음을 준비하면서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여러 자료들도 살펴보고 제 나름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도 오랜 시간 여러 형제들을 만나 교제를 하면서 제가 깨닫지 못한 말씀을 듣거나 아니면 그 형제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면 제 마음에 제가 말씀 연구를 게을리하고 있다는 자책감과 또 하나님의 간증이 없는 제 삶을 돌아보게 되며 간절함을 갖고 성령 충만을 구하며 제 삶에서 주님이 나타나기를 소원함으로 기도하며 또 말씀을 살펴보고 여러 책과 자료들을 갖고 연구하며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애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도전과 열정이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제 주변에 그런 형제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졌기 때문임을 생각하며 다시 형제들의
삶을 보면서 거룩한 질투심(?)이 회복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는 가끔 강아지와 장난감을 갖고 놀아 주거나
또는 쉬고 있는 강아지를 귀찮게 하면 드물기는
하지만 물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물린다고 해서 제가 아프다 할 정도는 아니고
물었다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강아지가 놀다가 실수든 아니면
자기가 싫다는 의사 표현을 한 거든 저를 물고 나서는 바로 와서 애교가 없는 녀석이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런 강아지를 보면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저 또한 믿음의 삶을 살면서 고의든 실수든 넘어짐이 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프게 하며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죄 가운데 넘어 졌을 때 어떤 때는 바로 주님께 나가기 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도 있고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등등의 이유로 바로 주님께 나가 내 죄를 고백하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 강아지처럼 실수든 고의든
바로 제게로 와 애교를 부림으로 다시 놀아주고
강아지와 저 사이에 어떤 막힘도 없듯이
저 역시 어떤 죄든 바로 주님께 나가 그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과 더욱 투명하고 깊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겠다고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요일 1장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