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건국 연대가 3국 중에서 가장 빠른게 맞나요?
( 성씨로 살펴보면 한국인은 신라인과 가야인의 후손이 매우 많습니다! )
“경주 월성이 삼국사기 기록 보다 250년이나 늦은 5세기 초에 완공되었으며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는 2021년 9월 8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서 생각하니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BC 37년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된데
비해 신라가 3국 중에 가장 앞선 BC 57년에 건국되었다는게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건국 시기와 고대국가 형성은 엄밀히 말하면 다를수도 있기 때문에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지만
발전이 늦어 고대국가 형성은 늦었다고 말할수 있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신라 왕실 후예인 경주김씨이기 때문에 신라를 높인 것은 아닐까요?
고려 중엽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는“고기(古記)” 와 “유적(遺蹟)” 에 중국 여러 사서에서 뽑아 편찬
하였다는데.... 본기나 지리 및 열전이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고 백제 기록이 부족하며 고조선과
가야, 동예, 옥저 및 삼한과 발해는 빠진데다가 또 신라는 3국 중에서 가장 먼저 건국된 것으로 나옵니다.
2천년전 당시는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인 중국이 한반도 바로 이웃에 있었으니... 평화적인
교류든 전쟁이든 접촉을 통해 한자와 음양오행설에 유교등 문화나 문명이 전해지는
것인데.... 지리적으로 고구려나 백제는 이점에서 유리하니 불교만 보더래도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小獸林王) 때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佛經)을 갖고 옵니다.
백제는 고구려 보다 12년 뒤인 384년 침류왕(枕流王) 때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와서 불교를
전하였으며 반면에 신라의 불교 전래는 백제 보다 143년이나 늦은 527년 법흥왕(法興王) 때 이차돈
(異次頓) 의 순교를 고비로 하여 공인되었으며 사신도 고구려와 백제는 일찍 중국과 교류했다고 봅니다.
신라는 오호16국 시대인 382년에 저족 부견이 세운 전진에 신라국왕 樓寒(누한, 마립간 내물왕? )이 사신
을 보냈다고 나오며 그 이후는 사신을 보낸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521년 양직공도 그림에 신라
사신이 보이는데 양나라는 502년에 건국된 나라로 신라 사신은 고구려나 백제 보다는 늦은가 합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와 백제는 바로 왕을 칭했지만.... 신라는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徐那)서라벌(徐羅我) · 서야(徐耶:徐耶我) · 서라(徐羅) · 서벌(徐我) 과 계림(鷄林)
등으로 불렸으며 칭호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을 거쳐 지증 마립간 4년인
503년에 국호를 "신라" 로 하고 칭호도 중국식인 "왕" 으로 바꾸며 율령반포도 가장 늦습니다.
이렇게 “발전이 늦은 신라가 삼국사기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된 것은 김부식
은 물론이고 당시 고려 조정에는 “신라인의 후손”이 많았고 고구려인의 후손이나
백제인의 후손은 적은데서 신라 위주로 서술된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고려때는 물론
이고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고구려나 백제 보다는 신라나 가야의 후손들이 훨씬 많습니다.
한국은 성씨가 3천개로 25만명이 넘는 30개 성씨는 숫자로는 1% 지만 인구수로 50%에 가까운 2,500만
에 달하니 신라계는 2위 밀양박씨 303만, 4위 경주김씨 173만, 5위 경주이씨 142만, 6위 경주최씨 98만,
8위 광산김씨 84만, 9위 파평윤씨 71만, 10위 청주한씨 64만에 11위 안동권씨 58만을 비롯해 12개
성씨 473만등 1,408만이고 가야계 는 1위 김해 김씨 412만에 허씨 33만이니 합치면 1,853만에 달합니다.
본관은 전라도지만 백제계라기 보다는 신라계라고 여겨지는 통일신라시대 사람 이한을 시조로
하는 3위 전주이씨 261만과 황해도 평산신씨등 2개 82만도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인
이 관리로 현지에 갔다가 귀향하지 않고 눌러앉아 토호가 된 것으로 보이니... 본래 신라인
의 후손이니 더하면 2,500만 중에 거의 2,200만에 달하며 고구려계는 7위 진주강씨 97만 입니다.
제주는 23위 제주고씨 32만이며 고려시대 사람이 시조는 20위 해주오씨 38만등 3개 94만이고
귀화한 중국인은 19위 남양홍씨 39만등 2개 성씨 69만이며 나머지 2,970개 성씨 본관이
2,600만인데.... 보다시피 백제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는 큰 성씨가 없고 고구려
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는 진주 강씨 등으로 적으니 각기 한국인의 10% 미만인가 합니다.
중국의 성씨는 2만 3천개고 일본은 108,000개이며 미국은 백만개인데 비해 한국의 성씨는 3천개
이지만 그중 상위 20개 성씨가 2,200만이고 30개 성씨로 넗히면 50%에 가까운 2,500만
으로 편중되었으며 더욱 金(김) 씨는 1,070만명이고 그중 김해 김씨는 412만명 인데,
인구 1억 3천만인 일본에서 1위 사토씨는 189만명에 불과하니 이는 메이지유신후
일본인들 중에 성이 없던 사람들은 친족들이 모여“새로운 성씨” 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봅니다?
큰 성씨중 백제계가 보이지 않는등 백제인의 후손이 적은 것은 660년 전쟁때 많이 죽었고 사비성
과 웅진성이 항복하니 왕족과 귀족이며 상류층등 성안에 거주하던 1만 3천명이 당나라로
잡혀갔으며... 이후 부흥전쟁에서 또 많이 죽었고 산 사람들은 후퇴하는 왜군을 따라
대거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며 또한 한반도에 남은 서민들은 원래 성이 없었기 때문 입니다.
백제 의자왕때 충신 성충과 흥수는 성이 없이 이름뿐이며 신라 대야성을 공격해 빼앗은 백제
장수 윤충에 신라 장수 검일, 모척, 죽죽, 용석이며 황산벌의 계백등도 성이 없이
이름뿐이었으니 신라 지배를 받게된 서민들이야 당연히 성씨가 없었는데, 우리
민족은 원래 성이 없었으니.... 주몽(朱蒙) 이나 비류, 온조등도 처음엔 이름뿐 이었습니다!
주몽은 해모수 아들이니 해(解)씨(삼국사기, 동사강목)인데 고구려 건국후는 고(高) 씨(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중국 사서) 니 훗날 붙여진 것으로... 당시는 추모(鄒牟 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 모두루)나 주몽(朱蒙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중국 사서)으로
불렸으며 또 삼국사기에는 중모(中牟)와 중해(衆解), 상해(象解), 삼국유사에 추몽
(鄒蒙), 일본서기에 중모(仲牟),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는 주배(朱背)와 도모(都慕)로도 기록합니다.
주몽의 이름 여러개인 이유는 고대에 우리민족은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훗날 이방인이자 침략자인 중국
에서 한자가 간헐적으로 들어오니 처음에는 문자라는 개념도 없었고 적국의 것이니 뜨악하고 꺼림칙
했지 싶은데.... 말로만 전해지던 주몽의 이름을 한자어로 옮기다 보니 무려 아홉개나 된 것 같습니다?
한자는 남의나라 외국의 글자니 피사로가 잉카제국 황제에게 양피지에 쓰인 성경을 건네자 냄새가 역해
내친 것 처럼 달갑지 않았다고 여겨지는데, 우리 말을 한자로 옮기니 가야도 가야(加耶·伽耶·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임나(任那), 한(韓) 10가지나 되지만 같은 뜻입니다.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기록을 보면... 백제 왕자 부여풍(扶餘豊)과 선광(善光)은 631년에 인질로
왜국에 보내졌는데 660년 백제가 망하고 도침과 복신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풍은 사이메이
여왕과 나카노에 왕자에게서 5천 왜군을 받아 백제로 나와 왕위”에 오르고 663년에 1천척
배에 2만 7천 왜군이 더 왔으나 백강(금강) 하구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으로 패해 일본으로 철수합니다.
“백제의 주류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했다. 이에 국인(國人)들이 말했다. ‘사태가 돌이킬수 없게 됐다. 백제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묘 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호례성 (弖禮城·
전남보성) 으로 가서 일본 장수들과 만나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 그리고 침복기성 (枕服岐城·
전남 강진) 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663년 9월 7일)
“일본의 수군 과 함께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와 국민들이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4일)
“이튿날 비로소 배가 출항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5일)
일본서기 가 전하는 백제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다음 백제 기사는 664년 3월에야 보입니다.“백제왕 선광왕(善光王) 등을 난파(難波· 나니하, 오오사카)
에 살게 했다. 별이 수도의 북쪽에 떨어졌다.” (『일본서기』), 663년 백제 왕위에 올랐던 부여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동생 부여용(선광 善光) 은 패주하는 왜군을 따라 다시 왜국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은 백제 유민 2000명에겐 땅도 주는등 선진 기술 이용하려 호의적인 대접을 햇으며 특히
백제 왕자 부여용(扶餘勇 선광) 에게‘백제왕’이라는 성씨 를 주니 그를 백제계
도래인의 지도자 로 인정한 것인데, 당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 의
도독으로 임명한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 에 맞세우려는 의도 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고구려인들도 일본으로 많이 이주했으니 속일본기에 사신으로 왔다 고국이 망하니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 앉은 고구려 왕손 약광왕자는 일왕(천황)에게서 고마오(高麗王) 라는 성씨를 하사 받아
고구려 유민 2천명을 모아 고려군의 군사(郡司)로 임명 되었다고 하며 若光(약광) 이
죽자 영혼을 모신 고마진자 高麗神社 가 세워졌고 48 대 손이 신관으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도쿄 이케부쿠로역에서 세이부 이케부쿠로선 기차를 타고 한노역 (飯能驛) 에 내려서 보통기차로 환승
하여 2정거장 고마에키(高麗驛 고려역) 에 내리면 도쿄 서북쪽 사이타마현(崎玉縣) 히다카(日高)시니
일본속의 고려(고구려) 마을 고마노사토(高麗鄕) 로 예전에는 고마(高麗 고려)군 이라고 불렸다는데
역 광장에는‘천하대장군’과‘지하여장군’이 반겨주며 안내판에는 한글도 보이니 제목이 ‘고향보도’ 입니다.
원래 고려시 였는데 일제 말기 "일본고려" 라는 뜻으로 일고시(日高市) 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 를 뜻합니다.‘고마진자 (高麗神社 고려신사)’ 에는 고종
황제 아드님이신 영친왕‘이은’공과‘방자여사’가 기념 식수한 나무 두그루가 서 있는데
2019년에 퇴위를 앞둔 일왕(천황) 아키히토 부부가 방문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2001년 생일 기자회견 때“개인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 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 이라고 속일본기
(續日本紀)에 쓰여 있는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 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하니 아사히신문을 제외한 일본
언론들은 놀라서 보도조차 못했는데 고려신사를 참배하고는 “1300년전 고구려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
이곳에 살면서 지어진 신사이니 우리나라(일본) 와 동아시아의 긴 교류의 역사를 생각했다.” 라 말했습니다.
고구려가 망하니 신라는 영토로 치면 20분지 1이고 인구로 치면 10분지 1인 황해도를 얻었을 뿐인데
망명하는 고구려인도 있고 또 그후 발해가 망하면서 넘어온 사람도 있으니 한 20% 정도는 받아
들였다고 보는데... 거란군이 당나라와 함께 평양을 공격했으니 전리품으로 고구려인과 말갈인
일부를 잡아가서 영주에 가두었다가 훗날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니 일부가 도망쳐서 발해를 세웁니다.
나머지 상당수 고구려인은 중국으로 끌려가서 수도 장안까지 데려가 우리가 저 지긋지긋한 꺼우리
들을 마침내 멸망시켰노라고 당나라 사람들에게 보이고는 그후 강남에 가두었는데 안사의난
혼란기에 일부는 남쪽으로 도망쳤으니 혹시 라후족, 이수족, 아카족과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고려 태조 왕건은 평양에 사람을 보내 목책을 치고 남쪽 사람들을 이주시킵니다.
고려사에 보면 왕건은...“평양 옛 도읍이 황폐한지 비록 오래이나 다행히 옛 터가 남아있다.
가시넝쿨이 무성한 탓에 여진들이 거기서 수렵을 하고 이를 핑계삼아 변방 고을들
을 침입하니 피해가 막심하다. 당연히 백성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해서 국가의 변방
을 튼튼히 하여 백세토록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고려사 권1 세가 태조 원년(918) 9월”
당나라는 수나라가 고구려 전쟁에서 패해서 망한데다가 당태종 조차도 패하는등 고구려와 오랜
싸움에서 중국 사람들이 많이 죽은지라 고구려인들이 너무나도 두려우니... 저대로 두면
훗날 중국이 혼란하면 다시 나라를 세울지도 모르니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중국
으로 모두 잡아간지라 고구려 수도 평양은 사람이 살지않는 황무지로 변했다는 얘기입니다.
전쟁터가 된 나라의 백성들은 전투에서는 물론이고 약탈당하고 굶어죽거나 질병으로 인해 많이
죽을수 밖에 없는데... 요행히 살아남은“고구려인이나 백제인들은 중국과 일본” 으로
떠났으니 한반도에는 “신라인이 주류”가 된지라 김부식의 고려때도 인구 구성이
그러하니 “삼국사기에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 된 것으로 기록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