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밴쿠버 문인협회 신춘문예 입선작
은혼식날에
김봉림
결혼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커다란 삼치를 사 놓고 가셨다. 도마 위에 몇 번 올려놓았지만 싱싱하고 말간 놈이 자꾸만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토막을 낼 수 없어 며칠을 냉장고에 두었다. 놀러 온 친구와 머리에 까만 비닐봉지를 씌우고 잘라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25년... 하루에도 아마 몇 천 마리쯤의 생선살을 뼈로부터 분리해 댄다. 난 생선공장에서 포를 뜨는 기술자이다.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는지라 어찌하면 더 많은 살을 짧은 시간에 잘라 낼 수 있을까 나름대로 머리도 굴린다.
눈? 나를 쳐다보고 말고도 없다. 이놈은 싱싱하니 좀 단단한 칼이 필요하겠고 저놈은 한물갔으니 좀 부드러운 칼이 좋겠고.. 이 정도다.
학교 동기동창인 남편과는 워낙 죽이 잘 맞는지라 그간 세 나라를 바꾸며 세월을 보냈다. 결혼하고 오년 쯤 지난 후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자고 세 살 네 살 꼬마를 데리고 남쪽 끝 나라로 떠났다.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언어에도 아랑곳 않고 무식이 용감하다고 했나, 정비공장 자리에 시멘트를 깔고 그로서리를 셑압(set-up)했다.
아리비아 숫자 옆에 그 나라말을 토를 달아 계산기 위에 붙이고 사전을 찾아가며 시작한 첫 장사.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그 나라 사람들 성품 덕인지 그럭저럭 살아졌다.
극장 매표소 맨 앞에 선 사람과 줄 끝에선 사람이 내는 값이 다르고, 슈퍼 들어갈 때 본 값이 나올 때 올라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를 신기해하면서도 그냥 살아가고 있었다. 동네 순찰하는 경찰이 가게 앞 트럭에 놔둔 우리 집 두 꼬마들과 한 두 시간씩 놀아주기도 하는 그런 나라. 빨래를 거꾸로 너는 나라, 자전거 앞에 짐을 싣는 나라, 그런 이상한 나라의 이상함이 점점 당연으로 받아질 무렵, 캐나다 다녀온 남편이 아이들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짐을 싸자고 했다. 달랑 가방 8개만 싣고 이곳으로 왔다.
첫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 녀석의 눈이 퉁퉁 부었다. “영어를 영원히 못 배우는 사람도 있어? 선생님들이 한국말도 스페인어도 안 쓰는데 어떻게 영어를 배우겠어..”
도저히 영어가 배워질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이 태산인가 보다. 하여간 다시 겁 없이 두 녀석을 아파트에 놓아둔 채 남편과 밤일을 떠났었다. 뉘엿뉘엿 해질녘 일 가는 우리라 꽁지에 대고 아파트 발코니에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땐 미안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 일을 생가하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 하루는 일 끝나고 집에 가니 한 냄비 가득 있던 김치찌게가 몽땅 없어졌다. 낮에 딸아이 친구들이 놀다간지라 냄새 때문에 버린 것 같아 내심 괴씸해 딸을 불렀다. 아이가 친구들에게 밥 한 공기 위에 김치찌개를 한 국자 씩 떠서 줘 먹였단다. 속하고는 달리 냄새나는 것을 어찌 아이들에게 주었냐니까.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주었으면 나쁜 일이지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친구들에게 준 것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그 후 그때 애들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한 지금까지 가끔씩 김치를 얻어간다.
아이들은 이렇게 서서히 그리고 당당히 자리를 잡아갔고 우리 또한 영어 못하는 부끄러움을 뻔뻔함이나 눈치로 채우며 이 나라를 퍽이나 사랑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다른 모습인 로키산맥 산자락이 마치 내게 주신 조물주의 선물인 것 같아 황송해 하기도 했고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임에 동감하기도 한다.
영어를 영원히 못 배울까 겁내던 아들 녀석의 제일 편한 말이 영어가 되었고, 두 아이들 이름 앞에 몇 년 후면 닥터가 붙게 되었고 작년엔 아들아이가 22살 나이에 또 하나의 축복인 예쁘고, 착한 며느리를 선물했다.
죽이 잘 맞는 내 남편과 나는 몇 년 후엔 살림을 숟가락 두 개, 밥그릇 두 개 정도로 줄이고 몇 년이고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팔다리가 부어서 구부릴 수 없을 만큼 일한 날도 있었고 사천 몇 백날을 하루 열 서너 시간씩 휴일 없이 가게 속에서 보낸 내 남편의 인내의 세월이 있었지만 우리의 25년은 엄청 은혜롭고 신나는 날들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은혼식은 따로 기념하기도 전에 벌써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