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이야기
1. 거짓말
90년대 후반 (교복을 입은 고등 학생이 성교를 하는 등의) 표현 수위가 높아 잠시 금서가 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던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로 만든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은 지금 보면 낡은 형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낡아 보이는 것은 이 영화보다 표현 수위가 훨씬 높은 포르노그라피를 아무런 제재나 검열없이 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닐 테다.
영화 속 J는 '자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드가 아니다. 단지 오르가즘을 위한 전희(前戱)로써 매를 사용한다'라고 말한다. J의 말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 사드의 자연 충동이라는 새디즘을 겪을 수 있는냐?라는 의문을 던지게 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성적 사도마조히즘이 자연이라는 '실재'(實在)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를 겪은 몸은 고대의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k)고 하듯이 때리고(맞고), 때리고(맞고), 때려도(맞아도) 그것으로는 자연에 이르지 못한다. 또한,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에서 아베가 이시다 성기를 결국 잘라 몸에 지니고 다닌 것에 비해 두 사람의 성애는 비교적 이성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오히려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J와 Y가 서로의 성적 욕망을 표현한 '말'(parole)이다. 더불어 회상 형식을 빌린 J의 내레이션도 영화의 한 축이 되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것 역시 '가상'(假象)에 가깝고, 깊고 깊은 구멍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그 말들이 닿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지조차 불분명하기는 성애와 마찬가지다. 아마도 '환상'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진리(자연)을 견디는 방식은 환상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마치 이 영화는 그 환상을 벗겨내려는 곳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양새를 갖춘 듯.
Episode1. 거짓말
97년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출판되었을 때 곧 금서가 될 것이라는 걸 예감했던지 한 선배가 시중에 책이 나오자 잽싸게 책을 구입, 십여권을 제본해 학과생들에게 돌린 적이 있었다. 과에 학생들이 다 돌려봤을 때즈음 왠일인지 그 선배가 '선물!'이라며 그 책을 나에게 주었다. 그런데, 표지에 제목도 없던 그 책을 내 책장에 꽂아 놓았었는데, 책이 없었진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당연히 오빠를 의심했고, 그 책을 찾느라 오빠 방을 뒤적이는 사이, 오빠 방에서 '빨간 테입' 두 개를 발견했었다.
"이후에 오빠가 자신의 방에 들어 왔었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2. 학생부군신위
박철수의 <산부인과>와 <학생부군신위>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극과 극의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마치 윤회처럼 회귀하면서 삶의 이면들을 자잘하게 켜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야단법석 피우며 과장스럽게 너스레를 떠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굳이 형제간의 동맹을 통해 부친을 죽이지 않더라도 한 가부장의 죽음은 형제들을 '집'(세속에서 세속)으로 불러들인다. 고향 집은 고향 집이 아니어도 좋다. 그곳이 고향이든, 도시의 거리든, 산부인과, 1930년대든, 50년대든 감독의 눈에는 같은 '세속'이라는 '풍경'으로 비친다.
'그러므로 문제는, 상장례는 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지를 묻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제 몸의 모든 구멍이 틀어막힌 채로 누워있는 시신의 지위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학생부군신위 연재글 中)라는 물음처럼 감독의 눈에 보이는 시신의 지위(온도)는 영도(零度)인 셈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영도가 온도를 재는 기점이 되듯, 고향으로 모인 이들은 각자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하게(당하게) 된다.
도시의 소시민적 영화 감독은 고향에서도 둘째에게 상주를 내주는 맏이일 뿐이며, 그의 첫 며느리나 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찌보면 삶의 일상성과 지속성은 이 영화처럼 희극도, 비극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상장례의 한 단면을 통해 삶의 '총체성'을 드러냈느냐라고 보는 것에는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즉흥 연기인 사회극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영화의 결말이 축제 이후 기존의 질서를 강건하게 하는 데에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극은 사회 생활의 '흐름'을 잠시 중단시키고 그 사회 집단으로 하여금 그 집단의 가치와 관련된 그 집단 자체의 행위를 인식케 하며, 때로는 그 여러 가치들의 진가를 의심하고 탐구하게까지 하는 것이다. 사회극은 반성적 과정들을 유도하고 내포하며, 이 반성성은 어떤 합당한 장소를 찾을 수 있는 문화적 틀을 생성한다.'(빅터 터너, 제의에서 연극으로152)
3. 넘버 3
세상에 조폭은 많고, 조폭 영화는 넘쳐난다. 폭력이 모방적으로 확산되듯이 조폭은 조폭 영화를 통해 새롭게 양산되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집단성을 지닌 학교에서 조폭 세계에 대한 모방은 빠르게 번진다. 특히, 남학생들은 학기 초기가 되면 일명 '다리 박기'를 통해 서열을 짓으며, 선배에게 줄을 서고, 집단 싸움이라도 벌어질 량이면 각자의 형님(선배)들을 부르기 바쁘고, 또한 선배들은 '가오(かお)'를 잡기 위해 자신의 후배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옹호하고 보호한다.
'군인'과 '스포츠맨'과 '성직자'와 더불어 '불한당'까지 우리 사회에서 집단적인 곳은 어디든 위계를 잡기 바쁘다. 불노동의 계급인 중세 귀족 역시 봉건제와 연동하듯이, 조폭 역시 자본주의 체계의 산물이다. 그러나, 연재글에서는 이런 조폭적인 위계를 '중세적인 것' 및 왈짜패와 대별한다. 오늘날 조폭은 '체계의 질서에 기생하면서 그 체계의 그늘진 곳을 역시 '체계적으로' 역이용한다.'(넘버3, 연재글 中) 또한 조폭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불량품, 노동을 거부하는 '룸펜프롤레타리아'(들뢰즈 맑스주의에서 인용)와도 구별되는데, 태주처럼 조폭은 '나와바리는 넓고 할 일은 많기' 때문이다.
바타이유의 논의처럼 금기(법)을 어김으로써 무노동의 세계인 축제를 즐기는 본연적인 충동이 인간에게는 있을 수 있다.(k) 그 어지러움 속에서 해방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조폭 영화의 결말이 늘 파국으로 치닿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해방이 금기로 인해 쾌락을 이루듯, '찰라' 속에서만 (비장)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첫댓글 제밌게 잘읽었습니다....힘내시고요..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