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독자들 곁으로 돌아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독서“일기”에서 “독서”일기로 큰 방점의 위치를 이동시킨 이번 책은 기존의 독서일기와 차별성을 두는 구성과 편집으로 그간 서서히 확장되고 변화된 장정일의 독서 스펙트럼과 주제의식을 명쾌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기존의 독서일기가 독서와 무관한 일상의 이야기를 포함한, 거의 매일 쓰인 전형적인 일기형식이었던 반면,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저자 개인의 일상은 거의 완전히 배제한 채 책읽기의 방법이나 주제 등에 온전히 할애한다.
“읽은 책이 세상이며, 읽기의 방식이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책읽기라는 행위가 책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세속적인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왜 그 책을 읽는지 세 가지 이상의 동기를 가질 것, 좋은 책과 나쁜 책을 볼 줄 아는 자신만의 시각 갖기 등 장정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창적인 책읽기를 통해 베스트셀러에 대한 비판, 안타깝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최근의 책들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읽은 책이 세상이며, ‘읽기’의 방식이 ‘삶’의 방식이다
이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 사이로 난 길이다.
장정일이 돌아왔다
2009년 말 10여 년 만에 소설 『구월의 이틀』을 발표한 장정일이 이번에는 4년여 만에 『독서일기』로 돌아왔다. 각종 지면에 글을 기고한 것에 비해 단행본 출간이 뜸했던 장정일은 이번 독서일기를 시작으로 신작 소설과 에세이집(정치 및 음악 관련)을 잇달아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책에 대한 책은 하나의 장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혼자 읽기에 버거운 고전에 대한 가이드북에서부터 이별이나 우울함 등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독서를 권하는 책까지, 또 저자의 독서 탐닉을 과시하는 책에서부터 자신을 형성해 온 정치적?지적 이력을 책으로 설명하는 책까지….
어떤 경우든 무슨 책을 읽는지를 살피는 일은 타인의 삶을 엿보는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취향, 정치적 입장, 감식안 등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독서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자, 읽어 온 책은 그 사람의 세상인 것이다. 대중의 큰 관심을 끌게 한 책에 관한 책의 첫 번째 사례 가운데 하나가 1993년에 나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1권이다. 17년간 독서일기를 써온 만큼 그간의 독서일기의 변화와 차이는 정확히 작가 장정일의 생각과 관심의 차이를 반영한다.
새로운 독서일기
이전의 독서일기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의 가장 큰 차이는 독서“일기”에서 “독서”일기로 큰 방점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독서일기가 독서와 무관한 일상의 이야기를 포함한, 거의 매일 쓰인 전형적인 일기형식이었던 반면,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저자 개인의 일상은 거의 완전히 배제한 채 책읽기의 방법, 주제 등에 온전히 할애한다. 이는 책의 편제에서도 큰 차이로 드러난다. 이전의 ‘독서일기’가 일기답게 날짜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던 데 반해, 『빌린 책…』은 읽은 책의 성격와 주제에 따라 묶여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읽은 책과 읽는 방식의 차이다. 예전에 비해 문학의 비율이 확연히 줄고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이 다수를 차지한다. 책을 읽는 까닭이 책 속에서 위안을 찾고 책에 탐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 세상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세속적 삶에 참여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 사이로 난 길이다. (11쪽, ‘작가의 말’ 가운데)
읽기의 방식이 삶의 방식이다
첫 부분은 ‘책에 관한 책’에 대한 독후감이다. 저자는, 책 문화는 광고 전단지 같은 인쇄 문화와는 구분된다고 말하며 책읽기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국내에서도 고양이 빌딩의 작가로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기 과시에 가까운 다독술과 속독술을 비판하며, “300쪽짜리 책을 10여 분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허세 속에는, 사고의 숙성을 본질로 하는 ‘책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48쪽)고 말한다. 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서는 “완독 여부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권은 아니”지만 “복거일이나 고종석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책을 온전히 읽은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라고 새삼 강조한다. 책을 더 넓은 스펙트럼 속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 권고가 새삼스럽게 들리는 까닭은 책과 독서를 무용한 일 또는 세상을 등지고 도를 닦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천박한 실용주의의 풍토 때문이다.
독서만이 경험을 극복할 수 있다
장정일의 유머와 매서움은 최근의 정치 상황을 독서를 통해 비틀고 비판할 때 빛을 발한다. 저자는 책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 시대 최악의 경험론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을 빠뜨리지 않았다. 1995년에 발간된 이명박의 『신화는 없다』에서 장정일은, 이명박이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떤 스승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먼저 살핀다. “책과 스승은 한 사람의 인격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뼈대”이기 때문인데, 전문가의 견해를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라며 일축해 버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그를 만든 책과 스승이 빠져 있다. “해본 것만 아는” 그래서 자신의 경험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반지성주의와 경험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박 대통령 본인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입으로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라고 말했던 것조차 까마득히 잊었으니 말이다.
현대건설 회장 시절, 이명박의 둘째 딸이 같은 동네에 사는 검사 딸과 함께 그 집 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 차가 교통 법규를 위반했을 때 “우리 아빠, 검사예요”라는 한 마디에 교통 경찰관이 그냥 봐주었다. 그날 저녁, 둘째 딸은 “검사 집 차라며 봐달라고 하는 사람이나 봐주는 사람이나 둘 다 잘못이다”면서 “나 내일부터 그 친구네 차 안 타”라고 했다는데, 그게 보기에 참 좋았더란다. (123쪽)
책끼리 관계 맺음
저자는 책을 따로 떨어진 개별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서로 관계를 주고받는 일련의 책과 함께 읽으라고 권한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글(98~105쪽)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 글은 외설과 예술 그리고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를 교차해서 엮은 탁월한 비평이다.
저자는 영화로 만들어져 큰 화제를 일으킨 『더 리더』를 통해 독자들이 미성년 소년?소녀의 성 약취에 대해 이중 기준을 적용한다고 꼬집는다. 또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외설을 피해 가는 처방을 정확히 지적한다(99쪽). 나아가 이 소설(또는 영화)을 미성년 소년과 중년 여성의 연애담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악의 평범성의 테제(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로 확장한 뒤 장정일은, 슐링크가 악의 “평범성”을 지나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한다(102쪽). 그리고 악의 평범성을 강조하는 장치이자 이 소설의 핵인 ‘문맹’에 주목하며 저자는 『유니스의 비밀』 『잔혹과 매혹』 『하녀들』로 독서를 재차 확장한다. “『더 리더』의 한나 슈미츠가 완벽하게 보여준 직업적 성실과 외부세계에 대한 무관심”의 비밀은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문맹은 문맹자에게 자기방어에 열중하는 자폐증을 선사하고 세상을 무관심하게 보도록 이끄는 대신, 문맹자에게 두 가지 덕목을 베푼다. 하나는 자기가 맡은 바의 직분과 과업에 혼신을 바치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나 상사(고용주 또는 상관)가 부여한 규칙과 명령에 성실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작가는 “글은 우리 혈관 속에서 피처럼 흐른다. 그것은 모든 말 속에 파고든다. 지시와 묵종의 관계에서와 달리, 대화에서 인쇄된 글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읽을거리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문맹은 대화로 통하는 길과 창을 막는다. 그것이 막히면 나와 사회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심이 마비된 도덕적 문맹이 되고 만다. (107~108쪽)
한국은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이다. 하지만 문맹이 단순히 그을 읽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자기가 한 말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오해였다”를 연발하고 일상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단어를 사용하는 정치인들 역시 문맹이 아닌가? 저자는 그렇다고 책에 빠져 사는 먹물, 활자 중독의 폐해 역시 눈감지 않는다.
“나쁜 책”을 권해도 무방한 시절은 없다
작가는 “내가 왜 이 책을 읽는지 세 가지 이상의 동기를 가져야 한다”라며 첫 장을 시작하는데,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볼 줄 아는 자신만의 시각을 갖기를 권하며 국방부 불온서적에서 국립중앙도서관 권장도서, 각종 매체의 휴가철 추천도서까지 적절한 기준 없이 권하는 책들에 관해 비판한다. 계절이(시절이) 어떻든, 함부로 ‘나쁜 책’을 권하지 말란 대목에서는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언급한 책들 이외에도 100만 부 돌파를 선전하는 『엄마를 부탁해』부터 정말 좋은 책인데 판매가 저조해 안타까운 『황천의 개』, 문화사 관련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88만원 세대』 『삼성을 생각한다』 등 83권의 책에 대한 74꼭지의 독후감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