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이야기가 나오면서 의녀에 대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죠. 중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한류를 막으려는 음모였는지 저질 드라마 1위로 올리면서 논란이 되었다가 얼마 전에 순위를 삭제했다고 들었습니다. 드라마에 보면 의녀는 남자 의원을 보좌하는 간호사 같은 정도로만 나옵니다만 실상 의녀의 신분은 천민인 기생 이었습니다.
의녀는 양방(兩房)기생이라고 부르는데 내의원 혜민서 소속의 약방기생과 상의원(尙衣院)의 침선비(針饍婢)인 상방(尙房) 기생 둘로 나뉘어 지죠. 혜민서에서는 주로 민간 의료와 약초 및 약물을 담당하고 있었고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이나 궁중의 재물 등을 관리하는 부서로 침선비는 이 중에서 바느질을 전문으로 하는 기녀를 말하는 것이었죠.
이 의녀가 처음 나온 것은 태종 6년 (1406)년 입니다. 당시 반가의 부인들이 병에 걸렸음에도 남자 의원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 하여 치료를 받지 않아 사망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났죠. 그래서 검교한성부 지제생원사(檢校漢城府知濟生院事) 허도(許道)의 의견을 받아 들여 태종이 재생원(濟生院)에 설치를 명하였던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만들어 놨는데 그것을 담당하려고 하는 여성이 없었습니다. 좀 있는 집안의 여자들은 남녀가 유별한데 나다니다가는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하지 않으려 했고 보통의 백성들은 고름짜고 피 닦는 험한 일이라 하여 회피했죠. 그래서 일단 관청에 소속된 관기들을 대상으로 의녀를 선발했습니다.
일단 선출된 의녀들은 재생원에서 의학서적과 약방문을 읽기 위한 읽고 쓰기 교육을 시킵니다. 그리고 진맥 잡는 방법과 침술 그리고 출산에 관련된 기술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글을 배웠으니 만큼 사회 분위기에 따라 유교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논어와 맹자, 중용과 대학 등을 배웠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신분과 상관없이 배우지 못하거나 않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학식이 많은 여성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남녀가 유별하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녀들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남성 의원의 보조일을 하고 부녀의 진찰시에는 방 밖에 의원이 동석하여 의녀가 그 중간에서 병증의 상태와 외형적 형태등을 일일이 고했고 의원은 그러한 정보를 듣고 약을 처방했죠. 하지만 몸을 보아야 하는 여성의 부스럼과 출산은 의녀만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내의원 의녀는 다른 의녀나 기생들과는 달리 특별한 복장을 허락 받았는데 이 의녀들은 예복으로 녹의홍삼을 입고 허리에 침통을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누가 봐도 의녀인 것을 바로 알 수 있도록 말이죠. (남자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이들은 궁중이나 대관의 집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천민의 신분으로 고관의 첩이 되어 신분상승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천민 계층에서는 꽤나 대단한 특권 이었죠.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천민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상의원 침선비들은 일반적으로 왕실 사람들과 고관대작들을 접대 하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일반 접객 보다는 훨씬 고급스러운 상황일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사실 그래도 처음에는 그저 접대 정도만 할 뿐이었고 의녀의 일이 더 비중이 있기도 했습니다만 이같은 상황은 연산군 시절이 되면서 확 바뀌어 버립니다.
연산군은 의녀들이 그냥 두기가 아깝다고 하여 의녀들에게 기생들과 똑같이 가무와 악기 연주를 가르치고 연회가 있으면 일반 기생들과 똑같이 참석해 음악과 춤을 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연산군 때에는 연회가 엄청나게 많다보니 의녀들은 정작 자신의 일인 환자의 진료보다 연회에 더 많이 불려가는 이상한 상황도 발생했죠. 거기다가 의녀의 경우 일반 기생처럼 춤과 노래도 가능하고 악기도 다루고 거기다 학식까지 있어서 인기가 있다보니 꽤나 골치아픈 상황도 많이 발생했죠. (고급 인력인 의녀가 남의 집 첩으로 들어간다던가 아예 기생화 되어 버린다던가)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의녀들을 다시 원래의 직분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행해 졌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고급 스러운 기녀를 봤으니 다른 기녀가 눈에나 들어오나라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의녀는 이후 구한말 까지 의료와 연회를 왔다갔다 하는 이상한 위치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죠.
참고로 세종때에는 지방에도 의녀를 두고 치료를 했는데 이를 위해 지방에서는 어린 관기 중 영특한 아이들을 선발하여 한양으로 올려 보낸 후 상당기간 제생원에 두고 의녀의 기술과 학문을 가르쳐 다시 본래의 지방으로 되돌려 보내 지방의 부녀자들을 치료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가 워낙에 인기가 있어서 가려졌지만 실상 의녀들은 많은 학식을 가진 상황에서 신분제 사회의 그늘에 가려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신분은 천민이고 때로는 기생 취급을 받으면서 차라리 무식하면 속이라도 편할 것인데 아는 것도 많아 고민도 많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을까요?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저 대장금이라는 의녀가 있었다는 정도였지 드라마의 내용처럼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