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백년만에 되살아난 태평성대의 꿈 (백제금동대향로, 국보287호)
충남 부여군의 부여읍내에서 논산시 방향으로 약 4km를 가면 좌측에 왕릉이 위치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잘 가꾸어진 너른 잔디밭과 소나무 그늘로 인해 줄곧 소풍장소로 애용되던 곳이다. 사신도(좌 청룡,우 백호, 남 주작, 북 현무)가 벽에 그려져 있는 동하총 등 7기의 왕릉이 있는데 이중 맨 위쪽의 능에 올라가 보면, 풍수상 배산 임수와 좌청룡은 되는데 현재 부여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우백호가 허해 백제가 일찍 멸망하지 않았나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이곳에는 백제 시대 능의 변천사를 축소해 만들어 놓을 모형관등을 만들고 시설을 확충하는 와중에 내방객의 증가로 부설 주차 공간이 필요 했다. 이에 능산리 고분군(사적14호)의 서쪽에 있고, 사비도성을 방어하기위한 외곽성인 나성(사적58호)의 동쪽 사이에 있는 천수답 논을 주차장으로 전용하기위해 그냥 깎아서 주차장을 만들려 했으나 당시 부여박물관장이던 신광섭(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장) 관장은 부여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토기 파편 등이 나오는 등 정황을 잘 알았기에 지표조사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지표조사를 하던 중 건물터가 발견되어 부여박물관에서 ‘92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건물터를 발굴해 보니, 초대형 제5건물터(길이38m,너비18m)를 중심으로 금속 유리제품을 만들던 공방터인 제3건물지등 7개의 건물터와 백제 가람의 전형인 일탑 일금당식을 잘 보여주는 남북일직선상의 금당지, 목탑지, 중문지 등의 가람배치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단다.
발굴된 중요유물로는 ‘95년 목탑지의 심초석에서 창왕명(昌王銘)의 화강암으로된 사리감⁽¹⁾(국보288호)이 출토되어 이 건물지의 성격이 백제왕실관련 원찰(願刹)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였고, 특히 ’93년 10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며 제3건물지에서 나온 백제금동대향로(국보287호)는 말로만 전해지던 백제의 사상과 우수한 문화 및 공예기술의 수준을 온 세상에 유감없이 보여 주는 사례가 되었다.
2005년8월26일 오후 점심을 같이하며 들은 정양모 당시 국립 중앙박물관장의 회고에 의하면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익일 새벽 1시에 신광섭 국립부여박물관 관장의 전화가 왔단다. ‘관장님 국보급이 나왔습니다. 전화로는 보고 드릴 수 없고 빨리 와 주십시오’ 이에 정양모 관장은 아침 일찍 눈내린 길을 뚫고 부여에 와서 보니 과연 국보 중의 상국보급이라 국보급 발굴에 대한 국보급 문화재에 대한 예우도 있고 하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발표하는 것보다는 장관께 보고하여 장관이 브리핑하여 언론에 발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조간신문과 석간신문의 송고 시간 줄다리기 때문에 오후 1시에 언론에 발표하기로 하고 기자들을 불렀단다.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관장은 제시간에 도착하였는데 장관이 도착하지를 않아 금동대향로를 오픈 하지 않고 있었는데 조선일보의 모 기자가 신광섭 부여국립박물관장의 멱살을 잡으며 기사 송고 마감 시간을 언급하여 할 수 없이 공개를 하였단다. 잠시 후 장관이 왔으나 기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취재에만 열심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조용중이라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내 ‘이문학회’ 동기인데 그즈음 학회에 와서 ‘재환아 내가 요즘 백제금동대향로 귀신이 씌였나 봐, 내가 찾기만 하면 전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자꾸만 나와’ 이를 정관장께 전하니 정관장 말씀이 ‘조용중씨가 열심히 공부하니까 나온 것이야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전거는 이론의 여지는 약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논리가 아주 정연해 특히 연화화생 사상은 조용중씨의 공로야. 결혼식 때 내가 주례를 서 주기도 했거든?’ ‘네 저는 조용중이의 논문 내용을 인용하여 백제금동대향로 전도사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외형을 보면, 향로 전체 높이 64cm, 최대지름 19cm, 뚜껑과 몸체로 되어 있고, 뚜껑부는 12cm의 봉황 손잡이와 산과 인물17명과 동물상 56마리가 조각 되어 있고, 몸체는 연잎 모양에 각종 인물2명과 26마리의 동물형상이 부조되어 있는 몸 본체와 22cm의 5조룡이 3발을 딛고 입으로 불을 뿜듯이 불 대신 연꽃을 뿜어내는 형상의 몸 받침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의 향로는 크기가 20cm~25cm 정도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향로를 놓고 차리는 제사상을 상상해 보면, 보통 가로 1.5m~2m 세로90cm~1m 정도의 큼직한 상이 상상이 된다.
그렇다면 높이 64cm의 향로를 놓고 차리는 제사상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커야한단 말인가? 도저히 개인이 사사로이 감당할 수 있는 상차림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 당연한 유추이므로 왕실에서나 쓰였던 기물로 추정될 수 있다.
이 향로의 제조 공정을 보면, 우선 밀납과 송진의 반죽으로 봉황과 용 등 향로의 모양을 만들고 향로에 돌출된 인물과 동물상들은 별도의 밀납으로 만들어 부착한 다음 밀납의 안팎에 섬세한 문양을 고압의 쇳물에도 견디며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섬세한 점토를 배합한 진흙을 붓 등으로 여러 차례 겹으로 바른다. 거푸집의 점토가 마르면 열을 가해 밀납이 완전히 녹아 나오게 한다. 이것이 실납법이다. 그리고 밀납이 빠져 나온 공간에 청동 주물을 부어 몇일간 식힌 다음 거푸집을 깨서 향로를 완성한다. 이후 인물 동물등의 물상을 정교하게 가공한 후에 금가루와 수은을 갠 다음 이를 한지에 싸서 짜내게 되면 아말감을 얻게 된다. 이를 청동향로의 표면에 골고루 바르고 열을 가하면 수은은 모두 날아가고 금분만 표면에 남게 된다. 이를 단단한 쇠로 문질러 금 광택을 내면 금도금 향로가 완성된다.⁽²⁾
현대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복제품을 만든다고 3차원 스케닝 기술 등을 다 동원하여도 원형만큼의 비례가 나오지 않는 것은 백제 당시의 금속재료공학과 공예기술 정도가 얼마나 앞섰던가를 여실히 방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관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문화재 복원 시 실제 크기보다 2센티미터 작게 만들도록 하셨단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복제품인지 구분이 안가기 때문에 문화재법상 같은 크기로는 못한단다. 그리고 홍대 미대를 졸업한 조백(1956~) 이란 금속공예가가 발굴 후 보존처리중인 기간 동안 아크릴박스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며 작업하여 치수 확인 작업 등이 어려운 상황에서 꼬박 3개월에 걸쳐 복제품을 완성을 하였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사상적으로 살펴보면, 극양(+)을 의미하는 봉황이 목에 여의주를 끼고, 발에는 고주몽의 탄생설화와 연결되는 알을 딛고 선 형상으로 백제가 사비(부여의 옛이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남부여’로 바꾼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며, 받침대는 극음(-)을 상징하는 5조룡( 발톱이 5개인 용)⁽³⁾이 세발로 구조적인 안정감을 만들었고, 5마리의 원앙과 연기 구멍이 2줄로 5개씩 난 것, 피리 비파 소 현금 북을 연주하는 5명의 악사, 5단으로 5개의 산봉우리씩 배치한 뚜껑부는 ‘음양오행사상’을 충분히 나타냈다고 할 것이다.
불교에는 연화화생사상이 있는데 이는 연꽃으로부터 만물이 생성된다는 내용이다. 이 향로의 받침대로 활용된 용의 입에서는 불 대신 연꽃이 피어난 형상으로 되어 있으며 연잎마다 각종 인물 동물 및 수중생물이나 물가에 사는 생물들이 양각되어 있다.
뚜껑부의 산에는 낚시하는 사람, 지팡이를 짚은 사람, 머리를 감는 사람, 말 탄 사람, 말타고 활시위 당기는 사람, 코끼릴 탄 사람 등 17명과 36마리의 동물이 양각되어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즉 향로 자체가 ‘음양 오행사상’ ‘노장사상’ ‘불교의 연화화생사상‘ 등을 다 아우르고, 이를 종합하여 수중세계부터 지상세계 그리고 신선들이 사는 천상의 세계까지 우주의 삼라만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산해경에 보면 ‘태평성대가 되면 봉황이 저절로 날아와 음악소리를 내며 스스로 춤을 춘다’라는 구절이 있다. 향로의 본래 기능은 향을 피우는 것이다. 향을 피우고 뚜껑을 닫으면 10개의 구멍에서 향이 피어오르는데 이 때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이 구름 속에서 춤을 추는 형상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5명의 악사가 음악을 연주하는 형상이니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향을 피우는 순간 산해경에서 말하는 ‘태평성대가 되면 봉황이 저절로 날아와 음악소리를 내며 스스로 춤을 춘다’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던지 사상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상을 형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백제는 그 당시 통용되던 불교와 음양오행사상 및 신선사상 등을 압축하여 문자가 아닌 예술품으로 형상화한 백제 공예의 진수인 ‘백제금동대향로’를 1400년이 지나도 전혀 퇴색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국가의 패망과 함께 땅에 묻혀 이루지 못한 태평성대의 꿈을....
2005년 8월 28일 윤재환(尹財煥)
이메일 jaewhanyoon@korea.com
(1)‘백제창왕13년태세재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의 간략한 내용은 ‘백제 창왕(위덕왕-성왕의 아들) 13년(567년)에 공주가 공양한 사리’라는 것으로 서체는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과 같은 필체로 고졸한 맛이 있는 음각이다.
(2)백제금동대향로에 관한 연구, 조용중, 미술자료65호 p3 ,국립중앙박물관 2000년
(3)용의 발톱이 5개인 것은 주변 세력을 의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자주권을 소유한 세력으로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낼 수 있을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형상이다.
첫댓글 창왕사리감의 글씨와 무령왕릉 매지권이 같은 필체라면 동일인이 썼던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