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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효사 원문보기 글쓴이: 원효
나옹혜근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 재고찰
辛 奎 卓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Ⅰ. 머리말
Ⅱ. 법통의 계보에 대한 평가
Ⅲ. 선 사상에 대한 평가
Ⅳ. 나옹의 선 사상에 대한 재 고찰
1. 조계종의 법통의 계보에서 본 나옹
2. 남종선의 사상사적 계보에서 본 나옹
3. 고려 말의 선종 사조에서 본 나옹
Ⅴ. 맺음말
<논문 요약>
한국에서는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에 대한 많은 논문과 저서가 연구 보고되어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위와 같은 사실을 필자 자신의 논문을 비롯하여 다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분석적으로 조사하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필자는 나옹 선사에 대하여 새로운 측면에서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런 반성적 비평을 통하여, 필자는 이 논문에서 그의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나옹 선사는 기본적으로는 당 나라에서 시작한 ‘南宗禪’ 전통을 수용하지만, 직접적 영향은 元 나라의 선 불교계에서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원 나라에서 유행하던 ‘無字話頭’에 특별하게 주목하는 禪 수행을 수용하면서도, 당시 고려의 불교계에 이미 유행하고 있던 다양한 ‘話頭’를 參究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한다. 그 중요한 변화란, 조선시대의 중기 이전에는 다양한 화두를 참선하는 ‘看話’ 수행이 지속되었지만 중기를 거치면서 부터는 그런 화두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오직 ‘無字話頭’에만 집중하는 參禪으로 이행하는 변화가 일어나는 점이다. 懶翁禪師는 바로 이런 변화의 과도기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은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나 혹은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5) 선사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옹혜근의 선 사상은 태고보우를 중흥시조로 하는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의 계보와 사승관계를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선 사상은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이 추구하는 선 사상과는 매우 밀접하다.
주제어: 나옹혜근, 남종선, 무자화두, 조계종, 간화선.
Ⅰ. 머리말
선종을 표방하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은 正法의 전수라는 차원에서 ‘법통의 계보’ 문제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법통의 계보’ 문제는 ‘南宗禪’에 유독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히 수행자 자신의 깨달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수행의 자기반성 차원’에서 부단히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이런 ‘법통의 계보’ 문제가 어떤 특정한 한 종교집단의 자기 정체성 내지는 정통성과 관련하여 제기 된 것은 해방 후 1950년대, 소위 ‘정화불사’가 일어나면서부터였다. 당시 소위 ‘비구’ 측에서는 ‘보조 법통설’을 내세우면서 ‘태고 법통설’을 엄밀하게 말하면 ‘태고 중흥조설’을 부인하기 시작하였다. 1]
1]보조-태고의 법통에 관한 대립적 문제 제기는 이능화 스님이 ?조선불교통사?(상)에서 조계종의 성립과 관련하여 보조지눌에 주목하자, 즉각적으로 퇴경 권상로 스님이 ?불교?지를 통하여 비판하면서 표면에 떠올랐다. 그러나 이 당시는 적어도 ‘세력 다툼’ 차원에서 제기된 논쟁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에 이종욱 스님을 대표로 한 조계종을 조선총독부에 등록을 하면서 다시 본격화되었다.
당시에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하여 총독부에 등록을 마쳤는데, 이에 대하여 평시 ‘보조 법통설’을 생각하고 있었던 불화(이재렬)스님이 뜻을 담아 저술을 마치고 출판하려 했으나 총독부의 허가를 얻지 못해 그만 둔 일이 있었다. 물론 이 경우도 ‘세력 다툼’ 차원에서 제기된 논쟁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정화불사’가 시작되면서 ‘비구’ 측에서 ‘보조 법통설’을 내세우자 이불화 스님이 그 이론적 제공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는 보조-태고의 문제는 ‘세력 다툼’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여한 학자나 스님들이 당사자 본인에게 그런 ‘세력 다툼’과는 무관하다하더라도, 이 시기가 되어서는 법통의 문제는 ‘세력 다툼’과 연루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법운거사 이종익 교수가 ‘보조 법통설’에 가세하면서 그 후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이 종단 등록을 하면서 ‘보조 법통설’이 명문화되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보조 법통설’에는 서울대의 최병헌 교수가 가세하고, ‘태고 법통설’은 건국대의 이영무 교수와 동국대의 김영태 교수 등이 지켜갔다. 이 와중에 백련암의 성철 스님이 보조 선사의 점수설을 비판하고 다시 ‘태고 법통설’과 돈오무심설을 주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누가 보더라도 당시 교단의 ‘세력 다툼’ 차원에서 제기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는, 표면적으로 ‘식육’과 ‘대처’의 문제로 불거진 불교 교단의 ‘세력 다툼’은, 그것을 ‘정화’(대한불교 조계종 측)라고 평가하던 아니면 ‘법란’(한국불교 태고종 측)으로 평가하던 소강상태를 지나 서로를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그런 비본질적인 ‘세력 다툼’ 차원의 종조 논쟁이 아닌, 그야말로 ‘수행의 자기반성 차원’에서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2]가 속한 ‘법통 계보’에 관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한편, 국내외에서 禪 불교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는 ‘禪’이라는 문자 앞에 사람 이름이나 책 이름을 붙여서, 소위 ‘화엄선’이니, ‘능엄선’이니, ‘능가선’이니, ‘임제선’이니, ‘조동선’이니, ‘달마선’이니, ‘마조선’이니 하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禪’이라는 용어 대신 ‘禪風’을 넣어서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편의상 이렇게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각 인물이면 인물, 각 경전이면 경전의 사상을 밝혀내는 일을 먼저 한 다음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명칭만 그럴듯할 뿐 정작 각각의 내용을 구별하기 어렵다.
본 논문에서 다루는 나옹혜근의 선사상을 평가하는 용어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임제선풍’ 내지는 ‘임제선’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용어 사용은 위에서 지적한 비평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그런 명칭 사용법을 보류하고, 그의 선 사상을 ‘남종선’이라는 사상사적인 맥락 위에서 기존의 연구를 종합하고 비평하는 동시에, 나옹의 선 사상과 선종사적 위치를 재고찰해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唐代에서 발생하여 송-원-명을 거치면서 변천된 ‘남종선’과, 그런 변천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조선-일제강점기 거치면서 내적으로 전승되어 오늘날에 도달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선 불교적인 전통을 재고찰하려고 한다.
2]나옹혜근 선사는 영해부(寧海府; 오늘날의 경북 영덕군 영해면) 사람인 아서구(牙瑞具; 膳官令 벼슬을 지냈음)와 靈山郡 사람인 鄭씨 사이에 1320년 1월 15일에 출생한다.
20세에 출가하여 여러 곳에서 수행을 했고, 그의 나이 23세가 되던 해인 1344년에 회암사에 들어가 4년간 참선 정진을 한 뒤 1347년(28세)에 見性의 경지를 체험한다. 그 후 29세가 되던 1348년에 원 나라의 수도에 있는 法源寺에서 지공을 만나고, 다시 1350년(31세)에는 평산처림을 만나 선 문답을 나누고 그로부터 전법의 표시로 법의와 불자와 전법게를 받는다.
1353년(34세)과 1357년(38세)에는 각각 다시 지공을 만난다. 그리고 1358년(39세)에 귀국한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옮겨 살면서 많은 교화를 한다. 나옹 선사가 원 나라 遊學 길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남종선의 수행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임제 계통’의 선승이다. 물론 지공의 경우는 인도의 계보를 전하고 있지만, 그 전법의 게송을 분석해 보면 지공은 당시 인도에서 유행하는 불교의 전통 위에 있지 않고 중국의 남종선의 전통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Ⅱ. 법통의 계보에 대한 평가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가 속한 ‘법통의 계보’에 관한 문제는, 해방 후에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 과정에서 학계의 민감한 쟁점으로 부상된다. 이 문제를 처음 제시한 연구자는 불교사학을 전공한 허흥식 교수였다. 이하에서는 허 교수의 문제제기를 고려말과 조선 초에 형성된 선종의 법통의 문제와 관련지어가면서, 나옹 선사의 ‘법통의 계보’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종법제가 민간에게까지 널리 퍼지면서 소위 반가에서는 族譜를 출판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 성종 연간 (재위; 1469-1494)에 만들어진 안동 권씨의 ?成化譜?를 비롯한 몇몇 문중의 족보를 제외하고는 거의 임진왜란(1592-1598) 이후에 만들어진다.
이런 풍조는 임란의 병화에 소실된 보책을 정비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문중의식의 확산과 관계가 있다. 풍양 조 씨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이 필사한 ?氏族源流?의 발견으로 우리는 저간의 소식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족보는 자기 존재의 근거이기도 했다. 이것 없이는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세속을 떠난 승가에서도 이런 풍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승가의 족보가 바로 사암채영(獅巖采永) 선사가 英祖 40년(1764년)에 만든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이다. 이 책에서 그는 西域-中華-海東에 이르는 역대 선사들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西域과 中華는 차치하고 海東의 경우, 그 중에서도 고려 말의 선종의 계보를 볼 것 같으면, 임제종 중에서도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 이하,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25) 이하, 급암종신(及菴宗信; 생몰연대미상)의 문하에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과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이라는 두 제자가 있는데, 그 중 평산처림은 고려의 나옹혜근(1320-1376)을 제자로 두고, 석옥청공은 고려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제자로 둔다. 그런데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에 의하면 태고보우를 해동 조계종의 起世祖로 삼고, 그 이하를 태고1세, 태고2세 등등으로 표기하여 繼代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법통’에 관한 계보는 어느 시기에 형성되는가? 이 문제는 황인규 교수가 ?태고 보우의 수제자 환암 혼수? 3]라는 논문 속에서 학계에서 그간 연구된 성과를 잘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태고보우 선사를 해동 임제종의 종조로 받드는 의식은 편양언기(鞭洋彦機; 1581-1644)에게서 구체화 된다. 사명 대사의 문도 대표인 松月 선사가 자기네 스승을 추모하기 위하여 雲水菴에 사명 대사의 影子堂을 짓고는, 당시의 고승인 편양 선사에게 그 記文을 청하자, 그는 거기에 응하여 이렇게 적는다.
"우리 동방의 太古 和尙은 중국에 들어가 石屋 禪師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그것을 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小隱(龜谷)에게 전하고, 소은은 正心(碧溪)에게 전하고, 정심은 碧松에게 전하고, 벽송은 芙蓉에게 전하고, 부용은 登階(西山)에게 전하고, 등계는 鐘峯(四溟)에게 전하였는데, 이 八世 가운데서 등계가 미친 듯한 파도를 되돌려 기울어져 가는 기강을 바로잡는 힘이 되었다. " 4]
이 기문은 편양 선사가 1625년에 찬한 것인데, 인조 8년(1630년)에 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지은 ?淸虛堂文集?의 ?서?와 月沙 이정구(李廷龜; 1581-1644)가 지은 ?國一都大禪師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에도 이런 법통 의식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청허당의 증법손이 되는 월저도안(月渚道安; 1638-1715) 선사가 지은 ?佛祖宗派之圖?(1688년)에도 이런 법통 의식이 이어지고, 다시 월저 선사의 5세손인 사암채영 선사가 지은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1764년)에도 이런 법통 의식은 이어진다. 그 후 세월이 다시 200 여 년이 흘러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던 예천 용문사의 안진호 강백은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가 출간된 이후에 출가한 승려들의 행적을 제방으로 조사하여 출판하려 했으나, 결국은 유고가 되었다. 이 유고를 통도사의 耕雲炯埈 스님이 1983년에 ?增補佛祖源流?(전4책; 원문 영인본1책/증보본 2책/색인1책, 서울: 불교출판사)라고 이름 지어 세상에 내놓는다.5]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 이능화 스님이 ‘보조 종조설’을 제기하기 전 까지는 특별히 ‘태고 종조설’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던 듯하다. 일제강점기와 ‘정화불사’를 거치면서 법통설에 대한 많은 논쟁들이 있었지만 본 논문의 핵심 주제와 무관하므로 이 정도에 그치고 다시 고려 말로 돌아가 보자.
태고보우 선사를 임제 선사의 18세 법손인 석옥청공 선사에 연결하여 계대를 명기한 것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물론 태고보우 선사 자신이 스스로 임제의 선법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사자 전승의 사실은 ?태고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은, 태고보우 선사는 그의 나이 47세(1347년)가 되던 해 7월 당시 원 나라의 조주 땅에 있는 운무산 天湖庵에서 석옥청공을 만나 서로의 禪旨를 확인하기 이전에도, 그는 이미 남종선에 대한 이해와 수행의 경지가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황은 당시 원 나라에 유학한 백운경한 선사나 나옹혜근 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석옥청공과 태고보우와의 만남은 고려와 元 나라라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도 ‘남종선’에서 그 중에서도 ‘임제 계통의 선’ 6]이라는 맥락에서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같았었음을 확인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물론 태고보우 선사에게 있어서는 그 만남을 통하여 ‘임제 계통의 선’의 계보 위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 자신의 선 수행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뒷날 태고의 문손임을 자임하는 이들의 경우도 역시 소위 ‘법통’이라는 계보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수행의 좌표를 삼으려했던 것이다.
한편 이와는 달리 ‘나옹 중흥조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나옹 중흥조설’은 闊海 鄭晃震의 ?朝鮮佛敎의 嗣法系統?(?(新)佛敎? 제5호, 1937년 7월)에서 표면적으로 제기되었고, 다시 허흥식 교수의 ?指空의 思想과 繼承者?(?겨례문화? 제2호, 1988년)에서 재론되었다. 이 논의의 핵심에는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의 스승이 누구이냐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3]황인규, ?고려 후기?조선초 불교사 연구?, 서울: 혜안, 2003년, 399-402쪽.
4]鞭洋彦機, ?蓬萊山雲水菴鐘峯影堂記? ?鞭洋堂集? 권2. (황인규의 위의 책 400쪽에서 재인용.)
5]이 책의 출판에 즈음하여 그 서문에서 봉선사의 운허스님은 이렇게 감회를 적고 있다. “이제 耕雲長老의 이 佛事는 近來에 드물게 보는 成事로 現在의 各宗스님들의 傳法系統을 一目瞭然하게 敍錄하였으니 진실로 斯界의 拱璧이 아닐 수 없다.”(月雲 編, ?耘虛禪師語文集?, 서울: 동국역경원, 1989, 138쪽.)
6]여기에서 필자가 ‘임제 계통의 선’이라고 특별히 표기하는 것은, 이것은 임제의현(?-864) 자신의 선과, 그 이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전개된 선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중국이나 일본 한국 등지의 현재 학계에서는 ‘임제선’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학술적 용어는 못된다. ?임제록?에 담긴 선 사상이 ‘임제선’이라고 오해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현재 통용되는 통행본은 북송 宣和2년(1120)의 刊本을 祖本으로 하여 重刊한 것이다. 비록 ‘重刊’이라고는 하지만 ‘覆刻’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시 이미 출간된 ?경덕전등록? ?사가어록? ?천성광등록?을 재료로 삼아 채집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간’을 담당했던 복건성의 원각종연 선사는 ?조당집?(952년)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임제의 언행에 관한 문자적인 기록은 ?조당집?의 기사가 最古이다. 아무튼 원각종연 선사가 ?임제록?을 중간을 하면서 당시에 까지 내려왔던 ‘임제 계통의 선’ 사상의 축적을 그 책 속에 반영시킨다. 961년에 제작된 ?종경록?과 ?조당집? 등을 토대로 ‘임제 선사 자신의 선’ 사상이 무엇이었는가를 엄밀하게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임제 사후에 그의 제자들의 존경심 속에서 전개된 ‘임제 계통의 선’ 사상을 비교하며 그 역사적 추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허 교수의 설에 따르면 7], 나옹혜근의 계승자는 원래 환암혼수였는데, 무학자초가 王師가 되면서, 지공-나옹-무학, 이렇게 자신을 포함하여 ‘三和尙’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환암혼수를 배제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나옹혜근의 추방과 독살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처하고 무학자초에 의하여 보복당한 환암혼수를 제외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나옹혜근이 조계종의 중흥조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나옹의 법통을 환암혼수가 계승하고 그것이 계속해 내려와서 서산-사명으로 이어지는 법통 계보가 인정되는 것이다. 허 교수가 이렇게 주장하는 논거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나옹혜근(1320-1367)의 행장에서 보여주듯이, 나옹과 동갑인 환암혼수(1320-1392)는 나옹에게 금란가사 등의 신표를 받은 사실도 있고, 뿐만 아니라 환암혼수가 ?나옹화상어록?의 교정을 보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또한 나옹혜근이 공민왕 19년(1370년)에 양주 회암사에서 工夫選을 열었을 때에 환암혼수만이 유일하게 인가를 받았던 점을 들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역사 기록에서 환암과 나옹혜근과의 관계가 보이는데, 허 교수는 이런 내용들을 근거로 ‘나옹 중흥조설’을 제기하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환암혼수의 사승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황인규 교수는 ?태고보우의 수제자 환암혼수?라는 제목을 걸고 면밀한 사료 분석을 하면서8],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고 있다.
"그런데 나옹혜근의 행장에 의하면, 그는 혜근과 교류하면서 신표를 받기는 하였으나 이는 당시 指空의 대표적 계승자인 혜근의 명성 때문에 비롯된 일에 불과하고 혜근의 법을 이었다고 볼 수 없다.
여기서 山門 中心에서 문도 중심으로 법을 사사하는 전통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선사상은 초기에 蒙山德異의 선풍을 계승한 息影庵의 선풍을 계승하였으나 후반부에 이르러 석옥청공의 임제선풍을 계승한 태고보우의 선풍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 9]
필자는 기본적으로는 황 교수의 입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아 이렇게 인용은 했지만, 그렇다고 의문점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태고보우를 해동 임제종의 기세조로 比定한 사건은 위에서도 보았듯이 1625년의 편양언기의 일이다. 1625년 경이 되면 ‘태고 중흥조설’은 임제종의 종통 계승 의식과 결부되어 확고해진다. 그렇다면 실제로 백운경한(1298-1374), 태고보우(1301-1382), 나옹혜근(1320-1376), 환암혼수(1320-1392) 등이 활동했던 당시, 그리고 좀 더 내려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활동했던 무학자초(1327-1405) 당시에 과연 불교 교단 공동체 속에서 선종의 법통 의식은 과연 어떤 양상으로 존재했느냐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태고보우를 기원으로 하는 법통 의식은 태고 사후 200 여년이 지나서 확립되었다. 그러면 태고 당시에는 어떤 법통 의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에는 조선 시대의 불교 탄압과 또 조선 초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무학의 계승자들은 적어도 문헌적으로 전승되지 않았다 10] 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여말-선초의 불교 역사, 그 중에서도 승려들의 계보에 대한 역사는 밝혀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러니 이런 단절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허 교수의 ‘나옹 중흥조설’은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허 교수가 이런 ‘나옹 중흥조설’을 제기할 수 있는 데에는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지공-나옹-무학으로 이어지는 소위 ‘삼대화상’이라는 법통의식이 11] 무게를 보태준다. 필자가 ‘나옹 중흥조설’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편양언기 선사가 1625년에 표출한 태고보우를 기세조로 하는 임제 법통설도 역시 당시 승가의 계보를 복구하려는 의식의 일환에서 생성된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황 교수가 무학의 계승자로 珍山을 발굴하고, 진산과 나옹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도 이런 단절을 복원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7]허흥식, ?제7장 조계종의 기원과 법통?, ?한국중세불교사연구』서울: 일조각, 1994년, 394-395쪽.
8]황인규, ?고려 후기?조선초 불교사 연구?, 서울: 혜안, 2003년, 397-406쪽.
9]황인규, 위의 책, pp.305-406.
10]물론 함허기화(涵虛己和; 1376-1433)가 있다고는 하지만, 황인규 교수의 연구대로 기화가 大師兄이라고 존경했던 심지허융 진산(心地虛融 珍山; ?-1472)을 무학의 대표적 계승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산은 실제로 나옹에게 직접 인가를 받고 또 무학에게 사사를 받았다. 사실 기화는 무학의 만년인 1397에 비로서 무학의 제자가 되고 나서 1404년 봄에서 1405년 무학이 입적할 때 까지 모셨을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황인규 교수의 ?무학자초의 문도와 그 대표적인 계승자?, ?삼대화상연구논문집? 제3집, 서울: 도서출판 불천, 2001년을 참조하기 바람. 이 논문은 황인규의 저서인 ?고려 후기?조선초 불교사 연구?(서울: 혜안, 2003년)에 재수록 된다.
11]지공-나옹-무악으로 이어지는 ‘삼대화상’에 관한 계보의식이 어느 시기에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형성되었는지는 규명해 보아야 한다. 이런 계보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조선 후기 이래 출현하는 ?梵音集?을 비롯한 각종 의식집에서이다. (서종범, ?나옹선풍과 조선불교?, ?한국불교문화사상사; 가산 지관스님 화갑기념논총 ?상, 서울: 1992년) 따라서 나옹 선사 당시에 이런 ‘삼대화상’이라는 계보 의식이 당시의 불교 공동체에 전국적으로 확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나옹 자신에게는 있었다.
나옹혜근을 어떻게 하든지 해동 임제종의 법통 계보 속에서 자리 매기려는 점에서는 두 교수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면에는 역사의 단절을 메워보려는 ‘학자적인 탐구 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闊海 鄭晃震이 제기한 ‘나옹 중흥조설’의 이면에는 ‘민족적 자주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본의 조동종 법통과는 다른 조선 불교의 독자적 계보를 임제종의 법통 속에서 모색하려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들은 1625년 편양언기 선사에 의해 제시된 ‘태고 중흥조설’이 ‘수행자적 求道 의식’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상에서 한국불교의 중흥조와 관련하여 ‘태고 중흥조설’과 ‘나옹 중흥조설’ 그리고 ‘보조 중흥조설’이 대두되게 된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역시 기본적으로 ‘태고 중흥조설’이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옹 중흥조설’의 경우는 고려 말 당시 불교계의 정황을 고려한 ‘학자적 탐구 의식’의 발상으로서 당시 나옹의 위상을 다시 주목하게 하는 성과를 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보조 중흥조설’의 경우는 해방 이후의 한국불교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학자적 탐구 의식’도 아니고, ‘민족적 자주 의식’도 아니고, ‘수행자적 구도 의식’에서 나온 것도 아닌 소위 ‘세력 다툼’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재 한국불교의 승려들 사이에 통용되는 ‘법통의 계보’ 는 그것이 ‘태고 중흥조설’이든 ‘나옹 중흥조설’이든 ‘보조 중흥조설’이든 모두 ‘남종선’ 중에서도 ‘임제 계통의 선’의 계보에 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의 수행이야 별문에 붙이더라도 소위 족보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것을 문제 삼는 당사자들의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통의 계보’에 관한 문제도 역시 그렇다.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 당국에 등록된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자신들의 ‘법통의 계보’를 중국 ‘남종선’의 계보에 맥을 대고 있다. 물론 ‘남종선’의 계보 중에서도 임제계통에 계보를 대고 있다. 12]
이 과정에서 그들은 ‘태고 중흥조설’과 ‘보조 중흥조설’을 봉합해놓고서는, 創宗한 지 40 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그 봉합을 “종단 분열상황을 화합의 차원에서 마무리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봉합한 것이지, 거기에는 철학적 내지는 종교적 그리고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그들 스스로도 말하듯이 “대한불교 조계종은 선종 중심의 선 수행 가풍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한국불교 전반을 아우르는 선교통합(禪敎統合)의 회통불교적 전통에서 그 특색을 맞추었던 것” 13] 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선과 교를 봉합시켜 교단의 정체성은 더욱 엉키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교단의 일부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임제의 선 사상 내지는 간화선에서 정립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화엄교학’의 계보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선 ‘남종선’의 계보와 사상을 분석 정리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계보의 측면에서 보면 현 조계종(태고종 포함)은 태고보우 선사가 起世祖이고, 환암혼수 부터가 태고 1世가 된다. 이렇게 되면 나옹혜근 선사는 계보 상으로는 현재 한국불교의 승려들과는 적어도 ‘법통의 계보’ 상에서는 서로 관계 지을 수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 나옹혜근 선사가 비록 ‘남종선’의 ‘법통의 계보’에서는 조선시대의 승려들과 관계 지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신라에서 고려로 그리고 조선으로 다시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 조계종의 일부 승려들의 수행 속에 이어지는 ‘남종선’의 ‘사상의 계보’에는 분명히 한 흐름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학계에 보고된 연구 성과만으로는 나옹혜근 선사가 ‘남종선’의 ‘사상의 계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12]1962년 4월 14일 문교부에 등록을 필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 제1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本宗은 大韓佛敎曹溪宗이라고 한다. 본종은 신라 道義國師가 創樹한 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普照國師의 重闡을 거쳐 太古 普愚國師의 諸宗包攝으로서 曹溪宗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綿綿不絶한 것이다.” 제6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본종은 신라 헌덕왕 5년에 조계 혜능대사의 曾法孫 西堂 智藏禪師에게서 心印을 받은 道義國師를 宗祖로 하고, 고려의 普照國師의 重闡로 하여 이하 淸虛와 浮休 兩法脈을 계계승승한다.”
이렇게 ‘普照國師의 重闡’설과 ‘太古 普愚國師의 重興祖’설을 봉합하는 것에 대하여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에서 발행한 ?조계종사-근현대편?(2005년 초판2쇄, 223쪽.)에서는 “보조국사를 중천조(重闡祖), 보우국사를 중흥조(中興祖)로 삼아 조계의 법맥이 조선시대를 거쳐 당대까지 도도하게 흘러내리고 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보조국사와 보우국사를 종조로 삼아 대립하고 있던 종단 분열상황을 화합의 차원에서 마무리하였다.” 고딕과 밑줄은 필자가 붙인 것임.
그리고 참고로 ‘한국불교태고종’은 1970년 5월에 정부 당국에 등록한다.
13]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편, ?조계종사-근현대편?, 서울: 조계종출판사, 2005년 초판2쇄, 223쪽.
Ⅲ. 선 사상에 대한 평가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에 대해서는 해동화엄종주라고 불리우는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 후손인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1870-1948) 스님이 일찍이 ?朝鮮佛敎叢報? 제13호에 ?楊州天寶山遊記?(1918년)를 발표하면서부터, 그리고 허흥식 교수의 각종 연구를 거치면서, 또 최근에는 이철헌 박사의 ?나옹 혜근의 연구?(동국대 대학원, 1996년)와 김창숙 박사(효탄 스님)의 ?나옹 혜근의 선사상 연구?(동국대대학원, 1998년)가 학위논문으로 제출되면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는 황인규 교수의 ?고려 후기?조선초 불교사 연구?(서울: 혜안, 2003년)와 조명제 교수의 ?高麗後期 看話禪 硏究?(서울: 혜안, 2004년)가 출판되어 나옹 선사의 선 사상에 대한 사상사적인 평가도 속속 보고되었다.
본 장에서 필자는 이상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Ⅰ. 머리말> 부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나옹 선사의 사상을 ‘남종선’이라는 계보 속에서 철학적 내지는 사상사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해보려고 한다.
먼저 나옹의 선 사상에 대하여 어떤 평을 내리는지를 보기로 하자.
중앙승가대 교수인 서종범 스님은 1994년에 ?나옹선풍과 조선불교?라는 논문을 통하여 나옹혜근 선사의 사상을 밝혀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논문에서 스님은 나옹 선사의 ‘선풍’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나옹의 선풍은 고준하고 엄격하다.
……… 또한 나옹의 선풍은 興福과 神機의 선풍이다. 지공선사로 부터 ‘三山兩水의 사이에 머물라’는 수기를 받고 회암사에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였다. 이는 중생을 위해 福田을 개설하는 흥복의 선풍이다.
……… 나옹은 여러 가지로 신기의 면모를 보인다.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 신비한 감응은 나옹 선풍의 한 특색이다. 홍건적이 쳐들어 왔을 때에, 나옹은 의연히 처신했고, 열반할 때에도 신비한 기연을 나타냈다. " 14]
종범 스님은 나옹의 ‘선풍’을 (1)엄격 고준, (2)興復, (3)神機로 정리하고 있는데, 분명 나옹의 사상 속에 분명 이런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분석으로 여타의 선사들과 나옹을 구별해 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특징은 종교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지도자들에게는 모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1996년에 필자는 ?나옹화상의 선 사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나옹의 선 사상을 ‘임제종풍의 계승자’로서 자리 매기면서 그의 선 사상을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 바 있다. 15]
첫째는 자기 확신으로서, 자기가 바로 부처라는 확신을 갖으라는 것이다.
둘째는 주체적인 표현의 강조로서, 자신의 체험을 남의 흉내 내지 말고 자신만의 언어로 표출해 내라는 것이다.
셋째는 선 수행에 있어서 화두를 참구하라는 것이다.
당시 필자는 나옹의 선 사상을 이렇게 분석하면서 동시에, ‘남종선’의 철학적 이념을 ‘진여 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과 ‘돈오무심사상’이라고 분석해낸 바 있다. 즉, 필자는 ‘남종선’의 지평 위에서 나옹의 선 사상을 자리 매겼던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입장은 그 후 김창숙 교수(효탄 스님)의 저서에도 수용된다. 16]
그런데, ‘진여 연기론’와 ‘돈오무심사상’에 입각하여 나옹의 선사상을 분석한 필자의 이런 입장은 이덕진 교수가 1999년에 발표한 ?나옹혜근의 연기설 연구?에 다시 등장한다. 17]
그리고 2001년에 발표된 이창구 박사의 ?나옹 선의 실천 체계?에서는 위의 서종범 스님의 설과 함께 필자의 설을 수용하면서, 18] 그것의 의미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선 수행은 마음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둘째로, 나옹은 선 수행을 목적이 아니라 방편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나옹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선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넷째로, 나옹은 철저한 자기 점검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옹 선에는 당시의 문제의식과 실존적 고뇌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19]고 한다.
14]서종범, ?나옹선풍과 조선불교?, ?가산 이지관 화갑기념논총; 한국불교문화사상?, 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년.
15]신규탁, ?나옹화상의 선사상?, ?삼대화상연구논문집? 제1집, 서울: 불천, 1996년.
16]김창숙(효탄 스님), ?高麗末 懶翁의 禪思想 硏究?, 서울: 민족사, 1999년, 110-119쪽.
17]이덕진, ?나옹혜근의 연기설 연구?, ?삼대화상연구논문집? 제2집, 서울: 불천, 1999년, 245-258쪽.
18]이창구, ?나옹 선의 실천체계?, ?삼대화상연구논문집? 제3집, 서울: 불천, 2001년, 122쪽
19]이창구, 위의 논문, 122-124쪽.
그런데 당시 필자는 임제의현(?-864) 선사와 나옹혜근(1320-1376) 선사 사이에는 약 500년 이라는 엄청난 시대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었다. 게다가 두 선사 간의 사상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데에 급급하여 ‘임제종풍’이라는 애매한(ambiguity)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한 데에는 필자 나름의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 간극을 간과한 것에 대한 변명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당시까지만 해도 선을 철학적으로 언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 반대하는 필자로서는 나옹의 선 사상의 특징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임제 선사 자신은 간화선을 한 적이 없었고, 또 임제 선사 자신은 주체적인 표현을 강조했지만 그의 이런 생각을 詩 내지는 文學 장르를 빌어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이점을 무시하고 두 선사의 사상을 동일시한 것은 비판되어야 한다.
필자의 이런 반성은 본 논문의 주6)에서 피력한 것과 같은 연장선 상에 나온 것으로, 이에 대한 재 평가는 본 논문의 <Ⅳ. 나옹의 선 사상에 대한 재고찰> 부분에서 제시할 것이다.
1999년에 김창숙 교수(효탄 스님)가 출간한 ?高麗末 懶翁의 禪思想 硏究?가 실상은 나옹의 선 사상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효탄 스님은 이 책에서 ?懶翁禪의 확립?이라는 節을 만들어 일곱 가지 측면에서 ‘나옹선’의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일곱이란, (1) 자기확신, (2) 주체적인 표현의 강조 (3) 자기의 본래성을 높이 평가, (4) 공적영지 내지는 진여본성에 부합하려는 노력의 강조, (5) 돈오사상, (6) 탈격한 자기만의 선의 세계 구축, (7) 세상을 일깨우는 경세의식 등이다.
한편, 효탄 스님은 위의 책의 제4장에서 다시 나옹 선사상의 특색을 네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가) 첫째는 여러 선종 종풍의 수용하는 특징이다. 이 특징에 대해서 효탄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옹혜근은 入元하기 전에 그는 국내에서 여러 선종의 가풍을 충분히 접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선의 가풍은 중국과는 달리 여러 종파의 선사상을 넓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임제종, 법안종, 위앙종 등의 가풍이 들어왔으나 따로 국내에 종파를 세운 적은 없었다. 이러한 가풍 역시 혜근에게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의 어록과 가송을 검토해 보면 조동종을 비롯하여 법안종, 위앙종 등이 선풍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정토신앙, 문수신앙, 관음신앙에 대해서도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20]
(나) 둘째는 禪-敎, 禪-密, 禪-戒를 융섭하는 특징이다. 이 특징에 대해서 효탄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혜근의 경우, 어록 편찬자의 고의적인 누락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지눌과 보우와는 달리 간경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가송 등의 시어를 통해 간화선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좀 더 자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華嚴法界의 아름다움을 성취하고 있다. " 21]
"혜근이 그의 법사인 지공의 저술과 소의경전 등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은 틀림없으며, 또 식암이 신인종에 출가했으나 혜근을 좇은 사실 등으로 미루어 혜근 역시 밀교를 수용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 22]
"이러한 것으로 볼 때에 지공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혜근의 경우에는 선-계일여를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 23]
20] 김창숙(효탄 스님), ?高麗末 懶翁의 禪思想 硏究?, 서울: 민족사, 1999년, 127쪽.
21]위의 책, 136쪽
22]위의 책, 142쪽.
23]위의 책, 144쪽
(다) 셋째는 정토사상을 수용하는 특징이다. 이 특징에 대해서 효탄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혜근 역시 이러한 당시의 흐름을 반영하듯 그의 저서에서 정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의 정토관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록과 가송에 실려 있는 對靈小參 법문과, ?答妹氏書?, ?示永昌大君?, ?示李尙書?, ?示諸念佛人?8수, 그리고 따로 전하는 ?僧元歌?, ?西往歌?가 전부라 할 수 있다. 이 자료를 기초로 하여 혜근의 정토관을 무념염불, 유정정토관, 칭명염불, 관상염불, 영가 법어를 통한 정토 수용으로 나누어 검토하기로 한다. "24]
24]위의 책, 155쪽.
(라) 넷째는 歌辭文學을 전개하는 특징을 꼽고 있다. 25]
이상은 효탄 스님이 나옹 선사의 선 사상에 대한 연구 분석의 결과이다. 그런데 위의 (1)에서 (5)까지는 필자가 1996년에 발표한 위의 논문에서 밝힌 입장과 같은 것으로, 이 역시 필자가 위에서 반성적 자기 비판을 한 방식과 똑같은 이유에서 효탄 스님의 이 주장 역시 현재로서는 수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6)은 주체성 확립을 내세워 스승조차도 뛰어넘을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결국은 (2)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리고 (7)은 세상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것인데 이것은 유독 나옹만의 특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5]위의 책, 174-182쪽.
한편, (가), (나), (다), (라)의 네 가지 특징 중 (가)와 (라)의 특징은 나옹의 선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특히 임제 자신의 선인 ‘임제선’과 임제의 제자들의 존경심 속에서 전개된 ‘임제 계통의 선’을 구별하려는 필자에게 있어는 더울 그렇다. 그러나 (나)와 (다)의 경우는 현재로서는 문헌적 근거가 더 나오기를 기다려야 정당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1999년에 이덕진 교수가 발표한 ?나옹혜근의 연기설 연구?에서는 나옹혜근의 선 사상을 ‘화엄 연기설’과 ‘돈오무심’이라는 두 축으로 해명을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화엄 연기설’을 다시 ‘진여연기설’과 ‘법계연기설’로 나누어서 ?나옹화상어록?에 실린 내용들을 분석 배치하고 있다. 이 논문은 ‘보조지눌의 性起說과의 관계를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어있듯이, 보조와의 관계에 주목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교수 자신도 밝혔듯이 “혜근은 ?화엄경?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의 선 사상을 피력한 적은 없다.” 그러면서도 이 교수는 나옹의 선 사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상기한 글들에서 우리는 그의 선사상이 정통화엄의 법계연기설에서 비롯된 事事無碍, 理事無碍를 그 기본 토대로 한다는 것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즉 혜근의 세계관은 화엄의 사사무애, 이사무애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 26]
진여(또는 법계)연기설에 입각해서 나옹혜근의 선 사상의 분석을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필자도 그랬듯이, 왜 가능하냐 하면 그것은 나옹의 선 사상을 연구자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혜근의 세계관은 화엄의 사사무애, 이사무애관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과연 평할 수 있을까? 나옹의 세계관이 화엄의 사사무애 내지는 이사무애관이라면 굳이 그를 선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옹은 어느 면으로 보나 돈오무심을 강조하는 ‘남종선’의 계보에 서 있다.
한편, 이 교수는 나옹의 선 사상을 ‘돈오무심’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런 분석은 필자도 그렇게 했으니 위와 같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좋다. 그런데 ‘법계연기설의 존재론적 자기증명: 돈오무심’이라고 논문의 節 제목을 달아서 ‘법계연기설의 존재론적 자기증명’과 ‘돈오무심’을 연결하는 것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비록 이 교수가 “혜근은 상기한 본체론적인 자연관을 토대로 하여 그의 깨침의 이론을 전개한다. 혜근은 ‘단박에 온몸을 던져버려서’ 지금 여기서 당장 빛을 돌이켜 한번 보면, 누구나 본지풍광을 단박에 밟을 수 있다고 한다. 27] 라고 설명을 붙이지만, 남종선의 핵심 중의 하나인 ‘돈오’ 사상을 ‘존재론’ 내지는 ‘본체론’ 또는 ‘우주적 이성’의 ‘자기증명’과 연결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법계연기설’이라는 용어와 ‘존재론’이라는 용어 사이를 ‘의’라는 접속사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좀 더 상세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수법장이나 청량징관 등 화엄의 교학자들이 말하는 ‘法界’는 ‘一心’과 그 ‘일심’ 위에 펼쳐지는 일체의 사유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28] 굳이 말하자면 인식론 혹은 심성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26]이덕진, ?나옹혜근의 연기설 연구 -보조지눌의 性起說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삼대화상연구논문집? 제2집, 서울: 불천, 1999년, 252쪽.
27]이덕진, ?나옹혜근의 연기설 연구 -보조지눌의 性起說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삼대화상연구논문집? 제2집, 서울: 불천, 1999년, 256쪽.
28]이 문제에 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문에서 분석한 바 있다. ?고대 한중교류의 일고찰 -고려의 義天과 절강의 淨源-?, ?동양철학? 제27집, 서울: 한국동양철학회, 2007년. ; ?한국 조계종의 전통 부활을 위한 제안 -‘華嚴敎學’을 중심으로-?, ?사자산 법흥사 21세기의 지평과 전망』최연식 외 9인저, 영월: 사자산 법흥사, 2007년. ; ?불교측에서 제기한 道家 비판 -길장, 징관, 종밀을 중심으로?, ?동양철학? 제28집, 서울: 한국동양철학회, 2008년.
이상은 철학 내지는 불교학을 연구하는 연구자 사이에서 나옹혜근 선사의 선 사상에 관해 평가한 것을 살펴 본 것이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학 연구자 사이에도 나옹혜근 선사가 언급되고 있다. 역사학 방면에서 나옹을 연구한 대표적 학자는 허흥식 교수이다. 1990년 한 해에 두 번에 걸쳐 발표된 허 교수의 논문은 이 분야의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공을 세웠다. 29] 그런데 역사학자답게 사상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허 교수의 이런 연구 성과는 다음에서 검토하는 유영숙 박사를 비롯하여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수용되고 발전된다.
1993년에 유영숙 박사가 학위 청구논문으로 제시한 ?고려후기 선종사 연구?(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도 <나옹의 법계와 선사상>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나옹의 선 사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우선 유 박사는 나옹을 조계종 사굴산문 출신으로 보고, “나옹은 사굴산문의 선풍에 이미 훈습되어 있다가 어느 날 돈오를 체득하고는 좀 더 깊고 새로운 선지를 얻기 위해 入元한 것” 30]이라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사굴산문의 선풍’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다음의 인용문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듯이 황룡파 및 양기파를 통해서 수입된 臨濟禪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臨濟禪의 수용은 이미 고려 중기부터 보이고 있다. 고려의 선승들이 임제종의 황룡파 및 양기파와 교유했음은 고려 중기의 자료에서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즉 李資賢, 慧照國師, 大鑑國師 坦然은 임제종 황룡파의 介諶, 戒環 등이 주석한 ?능엄경?을 깊이 인식하면서 임제종과의 교유가 어느 정도 있었다. 또한 지눌이 양기파 宗?의 영향을 받아 간화선을 진작시켰으며, 慧諶은 이를 더욱 확대시켰다. 혜심의 법손인 圓明國師 ?鑑(1274-1338)은 역시 양기파에 속하는 鐵山瓊을 남중국에서 만나 그를 초청해서 함께 귀국하기도 했다. 이러한 임제승들과의 왕래는 고려 말에 이르면 보우, 나옹, 백운으로 이어지면서 직접 元에 가서 임제선의 본령을 접하려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
나옹혜근이 원 나라에 遊學하기 전에 이미 ‘사굴산문의 선풍’을 익히고 있었던 점에 주목한 유 박사의 안목은 사상사를 연구하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유 박사의 말대로 고려 땅에는 당시 임제종의 황룡파와 양기파 계통의 선이 전래되어 있었고, 당시 고려의 선승들과 지식인들이 이 분야에 상당한 수준의 이해가 있었다. 이런 先 이해가 토대가 되어 당시 고려의 선승들은 원 나라에 가서 자신들의 기량을 한껏 펼 수 있었고, 원 나라의 선승들과 대등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나이 차이로 인해서 스승의 예를 표한 것이지, 요즈음 외국에 유학 가서 새 지식을 습득하고 양성해 오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당시의 入元僧 모두가 그랬다. 나옹혜근이 그랬고, 태고보우가 그랬고, 백운경한이 그랬고, 화엄종의 설산천희가 그랬고, 무학자초가 그랬다.
이렇게 당시의 麗-元의 선종 관계를 이해한 유 박사는 나옹의 선 사상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돈오를 얻기 위해서 간화선 수행할 것을 주장했고, 둘째는 화두를 다양하게 제시했고, 셋째는 無生戒를 受持하여 無漏法身을 성취할 것을 고취했다는 것이다. 31] 지공화상의 무생계와 관련하어 나옹의 선 사상에 미친 영향을 거론한 것은 박호남 교수가 처음이다. 32] 박 교수의 이런 연구보고는 그 후 허 교수의 연구를 거치면서 지공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역사학계에서는 최근 황인규 교수와 조명제 교수가 무게 있는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다. 황 교수는 “나옹혜근은 平山處林의 임제선풍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梵僧 지공의 선풍도 수용했다.” 33]고 선 사상에 관해서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선승들의 사승 관계 및 당시 사원의 기능 등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29] 허흥식, ?나옹의 사상과 계승자, 상/하)?, ?한국학보?제58집/59집, 서울: 일지사, 1990년 봄/여름.
30]유영숙, ?고려후기 선종사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1993년, 133쪽.
31]위의 논문, 136-138쪽
32]朴虎男, ?檜巖寺 和尙 懶翁의 無生戒 考察?, ?畿田文化硏究? 제16집, 인천교육대학 기전문화연구소, 1987년.
33]황인규, ?고려 후기?조선초 불교사 연구?, 서울: 혜안, 2003년, 333쪽.
한편, 2004년 조명제 교수가 내놓은 ?고려후기 간화선 연구?는 이 분야 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조 교수는 역사학적인 자료 분석과 선 불교의 사상적 분석이 어떻게 상호 결합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매우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 교수가 기본적으로는 고려 말에는 간화선이 유행되었다고 본 것은 기존의 설과 별반 다름은 없지만, 그러나 그런 결론을 이끌어 내기까지의 분석은 남다르다. 특히 그가 ‘동아시아 선종사’라는 視座에서 고려 말의 선종계를 연구한 것과, 그리고 고려 말 선종계에서 간행한 禪籍에 주목하여 사상적 동향을 분석한 것 등은 이 분야의 연구를 새 차원에서 한 단계 향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는 나옹과 관련된 부분만 보기로 한다.
"가령 그의 ?工夫十節目?이 몽산의 ?無字十節目?을 본딴 것이며, 몽산의 ?休休庵主坐禪文?을 중시하는 것도 몽산의 사상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는 깨달은 후에 원에 들어가, 1350년 4월 休休庵에서 여름 안거를 지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나옹의 경우 指空이나 平山處林의 법맥을 계승한 사실에 대해서만 주로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가 몽산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던 것이다. " 34]
" 아울러 나옹이 기본적으로 중시한 화두가 ‘무자’화두와 함께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인데, 이를 통해 ?선요?를 중시한 면을 볼 수 있다. 또한 나옹이 화두를 참구할 때 결정신을 강조하는 면모는 ?선요?에서 강조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 35]
이렇게 조 교수는 몽산의 ?蒙山法語?와 고봉원묘의 ?禪要?가 당시 고려 선 불교계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면서 나옹의 선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 동안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고려 말의 선 불교 상황을 언급할 때에, ‘법통의 계보’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다 보니, 나옹혜근이 원 나라에 가서 평산처림과 만난 것이나, 태고보우가 원 나라에 가서 석옥청공을 만난 것에만 주목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 교수는 출발점이 남달랐다. 그의 이런 ‘남다름’은 이미 이 분야 연구자의 중요한 시각으로 등장하고 있다.
34]조명제, ?고려후기 간화선 연구?, 서울: 혜안, 2004년, 178쪽.
35]위의 책, 180쪽.
Ⅳ. 나옹의 선 사상에 대한 재고찰
이상에서 필자는 나옹혜근에 대하여 기존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이제 부터 본 장에서는 위의 검토를 바탕으로, 먼저 나옹혜근의 선 사상을 대한불교 조계종의 ‘법통의 계보’적인 측면에서 재 평가해보고, 다음으로 그의 선 사상을 ‘남종선’이라는 선종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재 고찰해보기로 한다.
1. 조계종의 법통의 계보에서 본 나옹
먼저, 그의 선 사상을 대한불교 조계종의 ‘법통의 계보’적인 측면에서 재 평가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평가의 문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가 사용한 ‘조계종의 입장’이라는 용어 문제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일단은 우리는 ‘조계종’의 종헌에서 ‘조계종의 입장’을 찾을 수 있다.
조계종의 종헌은 본 논문의 주12)에서 보다시피, ‘법통의 계보’와 ‘사상의 계보’가 명시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조계종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즉, ‘조계종’은
(1) 조계혜능의 ‘남종선’을 전수받은 道義國師를 宗祖로 한다. 그리고
(2) 신라의 도의국사가 개창한 迦智山門의 전통은 고려 시대의 보조지눌 선사에 의해서 다시 천양되었다. 그리고
(3) 고려 말에 이르러 太古普愚 國師가 ‘남종선’을 계승한 당시의 여러 禪宗諸門을 포섭했다 36]
(4) 그리고 태고의 법맥이 계속 이어져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 淸虛와 浮休 兩法脈으로 이어졌다.
36]조계종 종헌에 나오는 “諸宗包攝”을 “‘남종선’을 계승한 당시의 여러 禪宗諸門을 포섭”이라고 필자가 해석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는 설이 있다.
이영무 교수는 “諸宗包攝”을 선과 교를 모두 포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이 교수의 입장을 따르지 않은 것은 태고보우 선사의 사상 속에는 화엄종의 법성사상이나 법상종의 유식사상이나, 천태종의 교관겸수 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화엄경?이나 ?유식론?이나 ?법화경?의 문구를 간혹 인용한 것을 근거로 태고보우가 교학 사상을 포섭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조계종의 입장’을 (1), (2), (3), (4)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조계종의 입장’에서 나옹 선사의 ‘법통의 계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문제 해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위의 (1)-(4)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를 보아야한다.
(1)의 입장에 대해서는 학계가 공감하고 있다. 신라의 도의 국사와 당 나라의 서당지장 선사와 관계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음으로 (4)의 입장도, 비록 그런 역사 의식이 1625년경에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학계에 수용되고 있다. 그리고 환암혼수의 스승을 태고보우로 보느냐 나옹혜근으로 보느냐에 대한 의론은 있지만, 태고 쪽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문제는 (2)와 (3)의 입장이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는 (2)와 (3)의 입장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 여부를 따지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하에서 그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언급하는 정도로 그친다.
(2)의 말대로라면 도의 국사가 ‘남종선을 계승했으니 보조지눌 선사도 자연 ‘남종선’을 계승했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런가? 보조 선사에게는 ‘남종선’ 계통의 사상도 있기는 하지만, 보조 선사는 이통현의 화엄사상을 수용하고 있고, 규봉종밀의 선-교 일치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당말-오대를 거치면서 송대 이후가 되면 ‘남종선’의 계보에 속하는 대다수의 선승들은 규봉종밀과 이통현의 사상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2)의 주장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법통의 계보’로는 보조지눌이 가지산문인지는 몰라도 ‘사상의 계보’로는 다른 ‘정통’ 가지산문 선승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3)의 문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각종 이념적 정치적 변혁으로 인하여 교종은 교종대로, 선종은 선종대로 각 전통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인 측면에서 하나로 포섭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고 법통설’은 적어도 문헌적으로는 1625 이후 부터 비로소 확인되기 때문에 ‘조계종의 입장’에서 말하는 ‘諸宗包攝’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고증하기에는 현재로서는 역부족이다. 그러면 이상의 검토를 통하여, ‘조계종의 입장’에서 나옹 선사가 속한 ‘법통의 계보’를 둘러싼 논의들에 대해여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조계종의 입장’ 중 (1)의 입장에서 보면 나옹혜근은 조계종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2)의 입장은 앞에서도 분석했듯이 여타의 (1), (3), (4)와 비교하여 모순 충돌하기 때문에, 게다가 그것은 1950년대에 ‘세력 다툼’ 차원에 끼어 든 입장이므로 論外로 해야 할 것이다. 다음 (3)의 입장에서 보면 나옹의 선 사상은 태고의 선 사상에 포섭되어 37] 현재의 조계종에 ‘법통의 계보’나 ‘사상의 계보’로 전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은 ‘법통의 계보’ 측면에서 나옹혜근의 위상을 자리 매겨 본 것이다. 그런데 ‘법통의 계보’ 의식은 유교적인 宗法制가 사회적으로 확립되고 거기에다가 本貫制度가 결합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대륙의 경우는 당 나라 중엽을 거쳐 송대에 이르러 확산되고, 한반도의 경우는 고려 중엽에 시작된다. 이것은 性理學의 ‘道統說’ 확산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조계종의 ‘법통의 계보’를 고려 말 이상으로 소급하여 올라가는 것은 사료적인 어려움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데, 현재 당면한 조계종의 자기 정체성 정립이라는 문제를 감안하면 ‘사상의 계보’를 추적하는 것이 보다 역사적이고 현실적일 수 있다. 이하에서는 ‘사상의 계보’에서 볼 때에 나옹혜근의 선 사상의 위상을 어떻게 자리 매길 수 있고 또 그의 사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기로 한다.
37]태고와 나옹의 생몰연대를 보면, 태고는 1301년에 태어나 1382년에 입적하는데, 나옹은 태고보다 20년 뒤인 1320년에 태어나서 1376년에 암살되니 태고보다 6년 먼저 세상을 뜬다.
2. 남종선의 사상사적 계보에서 본 나옹
나옹 선사의 선 사상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Ⅲ. 선 사상에 대한 평가>에서 거론 한 기존의 연구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문제들은 거의 거론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위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에 따르면, 나옹혜근의 선 사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즉, 나옹의 선 사상의 근본 이념은, ‘남종선’이 모두 그렇듯이, ‘진여 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과 ‘돈오무심사상’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 속에는 역사적으로 ‘임제 계통의 선’을 수행하는 선사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인, 각자가 바로 부처라는 사상과, 자신의 체험을 남의 흉내 내지 않고 자신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사상이 들어있다. 그리고 다양한 화두를 제시하면서 화두를 ‘看’하라고 주장하는 소위 ‘간화선’ 사상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의 선 사상에 영향을 준 인물들로는 중국의 경우는 임제종 계통의 평산처림과 몽산덕이와 고봉원묘가 있고, 인도 출신인 지공 선사가 있다. 이들은 모두 원 나라에서 활동하던 선승들인데, 평산처림으로 부터는 ‘법통의 계보’를 전수 받았고, 몽산덕이로 부터는 ‘無字話頭’ 참구와 본분종사에 의한 점검의 중요성을 배웠고, 고봉원묘에게는 大信心, 大憤心, 大疑情의 정신을 배웠고, 지공에게는 ‘無生戒’의 受持를 통한 無心 38]사상을 배웠다. 한편 국내에서는 당시 고려에 전래된 조동종을 비롯하여 법안종, 위앙종 계통 등의 禪 思潮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토신앙, 문수신앙, 관음신앙에 까지 이르는 폭 넓은 사상을 수용하면서 게다가 사굴산파의 선까지 익혔다.
끝으로 선사의 풍격을 볼 것 같으면, 엄격 고준하고, 興福을 시켰고, 神奇한 행동을 보였고, 탈격한 자기만의 선의 세계를 구축하였고, 세상을 일깨우는 경세의식이 가지고 있었고, 歌辭文學적으로도 상당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이 현재 한국의 학계에서 나옹 선사의 선사상에 대하여 내리고 있는 평가들이다. 나옹 선사의 선 사상을 알 수 있는 제한된 문헌 속에서 나올만한 이야기는 거의 다 나왔다. 여기에서 필자가 관심 갖는 것은 ‘남종선’의 역사 속에서 나옹의 선 사상을 어떻게 자리매길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이하에서는 이 문제를 검토하기로 하자.
38]指空의 無心 사상은 그의 저서로 알려진 ?西天佛祖宗派傳法旨要? 속에 전한다. 연세대 도서관 귀중본실에 있는 이 책을 해제하면서 필자는 그의 無生戒와 無心 사상을 분석한 바 있다. 신규탁, ??西天佛祖宗派傳法旨要? 해제?, ?연세대 중앙도서관 소장 고서해제 Ⅶ?,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평민사, 2007년, 443-448쪽.
나옹혜근의 선 사상에 대하여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간화선’을 했고 또 ‘임제의 선’을 계승했다고 한다. 이런 두 이야기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큰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모순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임제 선사 자신은 ‘간화선’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간화선’을 한 나옹혜근이 ‘임제의 선’을 계승했다는 말이 가능할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뒷날 ‘간화선’을 하는 선사들의 화두의 소재거리로 당 나라 시대에 활동했던 선사들의 대화가 사용되지만, 그렇더라도 정작 당나라 시대에 활동하던 선사들은 간화선을 한 바 없다. 그러면서도 宋代에 ‘간화선’을 하는 선승들은 자신들이 선배들을 계승했다하니, 필자에게는 이것이 모순으로 비춰진다. 이하에서는 이 모순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그런 해결의 바탕 위에서 나옹의 선 사상을 평가해 보기로 한다.
당대 선과 송대 선의 괴리에 대한 필자의 궁금함은 오래되었다. 중국의 선 문헌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을 시작하던 1988년부터 唐代의 선과 宋代의 선에는 너무도 ‘화두를 드는냐 안 드느냐’를 기준으로 아주 크게 다른 것을 알았지만, 그 차이를 해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2000년도에 원효학회에서, 당말-오대에 활동했던 운문문언(雲門文偃; 865-949)의 선 사상을 문헌적 분석과 철학적 논증을 시도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데, 39] 이 과정에서 ?雲門廣錄?에 와서야 비로소 선배 선사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제자들을 지도하는 방식이 등장하는 흔적을 밝힐 수 있었다. 그 방식은 소위, 拈語, 別語, 代語 등의 형식으로 정형화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연구 보고서를 내는 당시에 비록, 선 어록의 형식적인 면에서 일어난 당-송 간의 변화는 해명을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당대 선사들의 수행방법과 송대 선사들의 수행방법 사이의 공통점 아니면 차이점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이 의문을 해결할 수 있 수 있는 단서를 2007년 봄, 방한암 선사의 문집인 ?修訂增補版 漢巖一鉢錄?(민족사: 1996년)을 읽다가 그 차이를 해명할 단서를 찾았고 그 결과를 학계에 연구 보고한 바 있다.40] 이제 그 보고서의 요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필자는 이미 ‘남종선’의 핵심 철학 사상은 ‘진여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과 ‘돈오무심론’을 근본으로 한다고 연구 보고한 바 있다. 41] 당시의 선승들은 이 두 철학 사상을 근본으로 하면서, 각자 자신들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의 일상사들을 ‘觀照’하면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을 지향해간다. 이것은 ‘남종선’의 역사에서 변함없이 계승된다. 이때 唐代의 선사들은 위에서 말한 두 근본 이념을 바탕으로 하면서, 일상적이고 쉬운 말로 경전이나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소재로 제자와 ‘이야기’하는 방법을 통하여, 제자들의 수행상태를 점검하고 지도한다. 그러다가 당말-오대에는 그런 ‘이야기’의 소재꺼리에 다시 ‘선배 선승들이 남긴 이야기’까지도 보태서 제자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도 역시 ‘관조’라는 방법으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을 지향해가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송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이런 전통에 변화가 생긴다. 송대에도 ‘관조’라는 방법으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을 지향해감에 있어는 변함이 없다. 다만 ‘관조’하는 대상이 ‘선배들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당대에는 관조의 대상이 경전의 말씀이나 수행자들이 생활에서 접하는 ‘일상의 모든 것’이 ‘관조’의 대상이었다. 송대를 지나 더 후대로 내려올수록 관조의 대상이 ‘선배의 이야기’에로 좁게 국한 된다. 이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그러면 ‘반조’와 ‘간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런 질문이 오대산 월정사의 방한암(1876-1951) 선사 회상에서 재기된다. 이에 대하여 한암 선사는 위산과 앙산과의 대화, 고봉원묘와 설암 선사와의 대화, 대혜종고와 영시랑과의 대화를 통해서 답한다. 42] 즉, 알음알이[知解]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점에서 ‘반조’와 ‘간화’는 같다고 말이다. 때문에 같으니 다르니를 논할 것이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알음알이[知解]의 제거라고 한다. 그리고는 이것을 제거하는 데에는 ‘무자화두’를 기능을 설명하고 43]있다.
‘관조’를 근본이념으로 하는 ‘남종선’은 이런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 송대에 이르러서는 ‘화두’를 관찰하는 선 즉 ‘看話禪’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관찰의 대상이 이제는 ‘화두’에로 국한되었고, 그렇다보니 ‘화두’는 단순한 ‘이야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국가의 공문서’라는 말인 ‘公案’으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당대 선승들에게 있어서 관찰의 대상은 특별히 제한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런 관찰에서 나온 ‘이야기’도 무궁무진하였다. 그러나 송대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관찰의 대상이 과거 선배들의 ‘이야기’로 국한되었고, 게다가 스승-제자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에 있어 일상 언어를 통한 ‘이야기’에서 문학형식을 통한 ‘이야기’로 변화되었다. 송대 이후의 선승들의 문집에 偈頌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남종선’의 역사적인 추이가 해명되고 나면, 나옹혜근의 선사상을 평가하는 데서 생겼던 위에서 제시한 모순도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나옹 선사는 ‘화두’를 관조하는 선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경지를 문학형식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했던 것이다. 이런 의사소통을 통해서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은 모두 본질적으로 부처와 같은 존재이므로 이런 자기 자신을 존중하라는 것이고, 그런 자신의 인생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줏대 있게 저마다 가꾸어 가라는 것이고, ‘화두’를 항상 관찰하여 자신을 돌이켜보라는 것이다.
이쯤해서 우리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 대해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나옹 선사는 ‘남종선’의 계보에 속하며, 그리고 송대 때부터 전개된 ‘간화선’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39] 신규탁, ?선학의 실천행- ?雲門廣錄?을 중심으로?, ?원효학연구? 제5집, 원효학연구원, 2000년.
40]신규탁, ?남종선의 지평에서 본 방한암 선사의 선사상?, ?한암사상? 제2집, 한암연구원, 2007년.
41]신규탁, ?나옹화상의 선사상?, ?삼대화상연구논문집? 제1집, 서울: 불천, 1996년, 106-112쪽.
42]신규탁, ?남종선의 지평에서 본 방한암 선사의 선사상?, ?한암사상? 제2집, 한암연구원, 2007년, 23-28쪽.
43]위의 논문, 28-37쪽.
3. 고려 말의 선종 사조에서 본 나옹
선사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즉 ‘話頭’의 종류나 숫자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말해보면,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에서나 경우는 거의 비슷한데, ‘남종선’이 시작되던 당대에는 경전의 말씀을 비롯하여 중국의 역사, 고전, 문학, 고사, 각종 일화, 일상생활 등에 이르기 까지 각양각색의 사안들이 모두 ‘이야기’ 즉 ‘話頭’의 소재였다. 그런데 당말-오대를 거치면서 傳燈史書가 편찬되어 선사들의 일화와 계보가 만들어지고 宗門에 공유화되면서 ‘이야기’는 약 1,800개로 한정-정착된다. 그리고 北宋代의 ‘頌古’와 ‘評唱’을 거치면서는 ‘화두’는 100개로 대폭 줄어든다. 그리고 南宋의 ‘간화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더 줄어든다. 원-명대에 들어서면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현저하여 ‘無’, ‘정전백수자’, ‘간시궐’ 등 몇 개의 화두에로 국한되어 간다.
한반도의 경우는 예컨대 ?조당집?(이 책은 五代 시기인 952년 泉州에서 편집되어, 고려 시기인 1245년에 판각된다)에 등재되어 있던 신라시대의 선승들은 물론, ‘간화선’ 수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시대의 선 수행자들보다 더 다양한 ‘화두’를 가지고 서로 대화한다.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활동하던 청평거사 이자현(李資賢; 1061-1125)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前代 보다는 ‘화두’의 종류가 줄지만, 그래도 다양하다. 고려 말에 활동하던 백운경한이나 태고보우나 나옹혜근이나 이들도 비교적 다양한 ‘화두’를 거론한다. 비록 그들은 원 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無字話頭’를 중시하는 몽산덕이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無’字 이외에도 다양한 화두를 들었다. 물론 ‘무자화두’에 대한 강조의 정도는 깊어간다. 이 점은 조선 시대에 ‘서산-사명 양대 화상’을 거치면서 ‘무자 화두’가 거의 독주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런 면에서 나옹의 선 사상은 다양한 화두에서 ‘무자화두’ 하나에로 집중화 되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상의 계보’라는 視座를 도입할 때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연구가 있다. 그것은 앞에서 검토한 나옹의 선 사상에 대한 유영숙 박사의 평가이다. 즉 나옹이 송광사에 살 때에 이미 사굴산문의 선풍을 훈습하였다가 어느 날 돈오를 체득하고 새로운 禪旨를 얻기 위해 入元했다는 평가이다. 44] 이렇게 입원하기 이전에 이미 고려에서 상당한 수준의 선 수행과 체험을 한 경우는 고려 말 3師로 불리는 나옹, 백운, 태고 모두 동일하다. 이것은 그들이 원 나라에서 가서 그곳의 선승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 말의 선승들이 수행한 선이 어떤 양상의 선이었는가?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필자는 청평거사 이자현(李資賢; 1061-1215)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자현의 선 사상에 대해서는 자료에 비해서 많은 연구들이 있는데, 필자는 2004년에 당시까지의 연구성과들을 수집-분석하고 이자현의 선 사상을 해석하고 정리 한 바 있다. 45] 그 논문에서도 분석했다시피, 이자현은 청평사에 들어가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는데, 그가 이용하던 화두 수행은 ?능엄경?에 나오는 ‘聞性’을 ‘反聞’하는 수행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능엄경?의 ‘反聞聞性’ 사상은 송대에 유행한다. ?설두송고?에서 ?능엄경?의 이 대목에 주목을 받고나서부터, 그 후 ?벽암록?이나 ?종용록? 등에도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영향은 설봉의존(雪峰義存; 882-908)의 어록이 만들어지는 과정 46] 에서 편입되고, 이것이 송나라에서 출판되고 고려에 수입됨으로 해서 이자현의 선 수행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파한집?(권중)에 의하면, 이자현이 머물던 청평사에는 혜조국사 담진(曇眞; 생몰연대 미상. 고려 예종의 칙명으로 송에 가서 遼本大藏經을 가져온다)과 사굴산문의 대감국사 탄연(坦然; 1070-1159)이 그의 문하에서 서로 교류했다고 한다. 47]
특히 탄연은 송나라의 아육왕산의 광리사에 머물던 임제종 황룡파의 개심(介諶; 1080-1148) 선사와는 물론 ?능엄경』주석가인 계환(戒環; 선화 년간; 1119-1125에 이 주석 작업을 한다) 선사와도 서로 교류를 하던 사람이다. 48] ?능엄경 계환해?는 고려 후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세조 때에 언해본으로도 출판된 바가 있는 선종계의 경전으로 현재 조계종의 강원의 교과목에 편제되어 있을 정도로, ‘간화선’ 수행자들과 관계가 밀접하다.
44]유영숙, ?고려후기 선종사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1993년, 133쪽.
45]신규탁, ?이자현의 선사상?, ?동양철학연구? 제39집, 서울: 동양철학연구회, 2004년.
46]설봉의 어록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北宋의 1032년(天聖9 壬申年)이라고 하지만 그 원형은 알 수 없다. 그 후 50년이 지난 元豊 3년(1080) ?雪峰眞覺大師廣錄?이 나오지만 이 판본도 현재 남아있지 않다. 현행 유통본은 원 나라 至治 元年(1321년)에 ‘重刊’된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이자현 거사가 본 책은 북송의 元豊 3년(1080)에 간행된 ?雪峰眞覺大師廣錄?일 것이다. 그러나 여타 선어록이 그렇듯이 세월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야기가 점점 많아지고 변형이 일어난다. 현재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1702년 일본에서 간행된 간본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현행본 어록을 바탕으로 이자현 거사가 운문의 어떤 사상을 접수했는지 짐작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47]신규탁, ?이자현의 선사상?, ?동양철학연구? 제39집, 서울: 동양철학연구회, 2004년, 225쪽.
48] 조명제, ?고려후기 간화선 연구?, 서울: 혜안, 2004년, 92-93쪽.
그런데 바로 이런 배경이 있는 청평사에 나옹혜근 선사가 원 나라에서 37세에 귀국하고 나서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해인 1367년에 머물게 된다. 물론 이자현 거사가 세상을 뜬지 50여년이 지난 뒤였다. 여기서 필자가 이자현과 그가 머물던 청평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청평사와 그곳을 드나들던 선 수행자들에게는 이자현의 선 사상에 나타는 면모들이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자현의 선 사상이란 어떠한가? 필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첫째, 이자현은 ?능엄경?의 한 구절을 화두로 삼아 관하는 간화선 수행을 했다.
둘째, 이자현은 설봉의존의 어록에 영향을 받아, 설봉선의 특징인 자신의 흉금에서 나오는 말이나 생각을 으뜸으로 삼았고, 이것은 그의 문학에 반영되었다.
셋째, 이자현은 선과 문학의 조화를 이룬 설봉, 운문, 그리고 설두 선사 계통과 유사한 선풍의 소유자였다.
끝으로 본 논문에선 거론만하고 논증하지 못한 점이 있다. 즉, 이자현에게 나타나는 간화선이 조명제 박사의 주장대로49] 훗날 보조지눌 이후 수선사의 간화선에 연결되었는지, 아니면 필자가 가설한 백운경한, 태고보우, 나옹혜근 등의 간화선으로 이어지는 지, 이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다룰 예정이다. "50]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초에 이미 이 지역에는 간화선이 소개되었고, 그리고 그 선 사상은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조지눌이 받아들인 선 사상은 주로 ‘간화선’ 중에서는 대혜종고의 선이었으나, 대혜의 선 사상은 이미 ‘무자화두’에 편중되는 선 사상이었다.
그런데 위에서도 해명했다시피, 백운경한, 나옹혜근, 태고보우의 경우는 ‘무’자 화두를 원 나라의 고봉원묘나 몽산덕이를 통하여 이제 막 소개하는 한편 여타의 화두를 동시에 관찰하는 선 사상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자현 式의 선 풍조는 보조지눌 쪽 보다는 백운경한, 나옹혜근, 태고보우 등의 선 풍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나옹 선사는 원 나라에 유학하기 이전에 이미 ‘간화선’ 수행에 관한 정보를 충분하게 얻을 수 있었다. 즉 그것은 청평 거사 이자현에 의하여 수용되고, 그와 교유했던 당시의 선승들과 공유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당시의 선 풍조는 자연스럽게 고려 말의 3師들에게도 전수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법통의 계보’에 국한하는 역사인식의 시각으로는 나옹혜근 선사의 선 사상을 자리 매기는 데에 사료적인 난감한 점이 있지만, ‘사상의 계보’이라는 시각에서 그의 선 사상을 자리 매겨보면 당시 고려에 유입된 ‘간화선’의 전통에서는 가능하고 또 적절하다. 그리고 그의 선 사상은 ‘간화선’을 표방하는 지금 ‘조계종’의 이념에도51]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49]조명제, ?고려중기 거사선의 사상적 경향?, ?한국선학? 제4호, 2002년
50]신규탁, ?이자현의 선사상?, ?동양철학연구? 제39집, 서울: 동양철학연구회, 2004년232쪽.
51]그런데 현재의 ‘조계종’이 과연 그들의 종헌에서 표방하듯이 과연 ‘간화선’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단인가? 필자는 이 점에 대하여 좀 달리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 ?운허의 생애와 불교사상 소고?(신규탁, ?불교학연구? 제19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8년)에서도 논구한 바 있다. 그 논구의 결과만을 여기에 간단하게 소개하면, 현재의 ‘조계종’은 ‘법통의 계보’ 상에서 보면 태고보우의 문손으로 ‘남종선’의 계보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사상의 계보’ 상에서 보면 다양한 불교사상의 ‘종합’적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그 ‘종합’이 단순한 집합이나 나열을 넘어서서 ‘法性’ 사상을 뿌리로 한 ‘整合的인 종합’이다. 현재의 한국불교는 ‘법성’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禪으로는 간화선을 그리고 敎로는 화엄교학을 그리고 念佛로는 정토 신앙이 유행하여 솥의 세 발처럼 鼎立되어 있다.
Ⅴ. 맺음말
고려 말 3師로 불리는 나옹혜근 선사는 간화선을 표방하는 현재의 조계종의 자기 정체성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선승 중의 한 인물이다. ‘법통의 계보’로 보나 ‘사상의 계보’로 보나 작금의 조계종은 前-근대적인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현재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본 논문은 단지 지나간 역사 속에서의 나옹의 선 사상만이 아니라, 조계종 현재적 지평에서 나옹의 선 사상을 염두에 두면서 검토하였다. 이렇게 현재적 지평에 연구자의 시선이 맞닿아 있을 때, 그의 선 사상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 현재로 되살아온다.
나옹의 선 사상은 기본적으로는 ‘남종선’의 흐름에 놓여있는데, 당 나라 시대의 ‘관조선’이 아니라 당시 원 나라에서 유입된 ‘간화선’의 연장선상에 있음 알 수 있었다. 당시 고려의 선 사상계는 이자현의 선 사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학적인 표현과 그리고 다양한 화두를 관찰하는 ‘간화선’이 소개되어 있었다.
나옹은 원 나라에 유학하기 이전에 이미 이런 간화선의 수행을 통해 일정한 체험의 경지를 이루었고, 또 당시 원 나라에서 수입된 ‘무자화두’를 집중적으로 드는 ‘간화선’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었다. 뒷날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무자화두’에 집중되는 현상을 고려하면, 그의 선 사상은 과도기적인 변화의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당시의 태고보우나 백운경한에게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에 나옹의 선 사상은 태고를 근간으로 하는 ‘법통의 계보’ 상으로 보면 현재의 조계종의 법통과는 불분명한 관계가 있지만, ‘사상의 계보’ 상에서는 현 조계종이 추구하는 핵심 사상과 밀접함을 알 수 있다.
‘남종선’에 제시하는 ‘無心’은 대상으로 향하는 우리의 의식을 정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자연 상태에서는 항상 대상으로 향하여, 그 대상의 표상을 자기 안에 만들어놓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자신의 의식과 접촉에 의해서 표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망각하고, 아무런 반성 없이 의식 속에 맺혀있는 표상이 대상에 실재한다고 오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에 맺혀있는 표상은 항상 우리의 선행된 의식과의 관계 속에 맺혀지는 영상이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사는 한 벗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원초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남종선’에서는 이런 의식의 원초적 내지는 자연적 사태를 극복하여 대상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無心’한 사유를 활용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무심’한 사유를 매개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간직되어 있는 본래적인 순수성을 인식하라고 한다. 본래적인 순수성을 때로는 ‘一心’, ‘진여’, ‘靈念’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인간의 이런 본래적 순수성을 무심한 사유를 통하여 반조하되 그 반조하는 것조차도 흔적 없이, 무심하게, 티 없이, 작위 없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자리는 제8 아뢰야식 중에 있는 미세 망념이 모두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야말로 ‘眞如’의 자리이고, ‘부처’의 자리이고, ‘본래면목’의 자리이고, ‘본지풍광’ 자리이다. 이 자리는 ‘性’과 ‘相’이 충만한 자리이다.
그러나 ‘無心한 思惟’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 되고, 결과적으로 인간이 사유를 하는 순간 또 우리는 선행된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생각을 정지한다면, 그 정지 속에서 본래적 순수성마저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개발된 화두 중의 하나가 바로 ‘무자화두’를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식의 초월적 변환이 발생한다.
이 화두를 관찰하여 일체의 사량분별을 끊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 인간들이 의식을 매개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인간에 주어진 원초적 굴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주어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식의 원초적인 굴절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대상에 대한 바른 지식을 형성할 수 있고, 바른 지식만이 우리를 바른 행동과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 심성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에, ‘무자화두’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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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關於對懶翁慧勤旣存的評?再考察 / 辛 奎 卓
在韓國已經有好多關於懶翁慧勤(1320-1376)禪師?究的論文和著書被發表? 對於懶翁禪師的文獻資料也都作了整備? 本人的這篇論文, ?不是通過本人的論文而是借助於其他學者的?究成果, 對現有的有關於懶翁慧勤的資料進行考察? 據考察結果來看, 本人認爲對於?存的?究成果我們應該進行反省式批評?
通過這種反省式的批評, 我將在本論文中對懶翁禪師的思想作出以下評價? 在他所活動的, 當時高麗的禪佛??團中, 流行佛?文學和多樣化的‘看話’方法? 懶翁禪師的禪思想, 雖然基本上對唐代流行的‘南宗禪’的傳統受用, 但是對其禪思想?生直接影響的, 還是元朝的禪佛??團? 在這一過程中, 他?重視元朝流行的‘無字話頭’?對參禪修行進行了受用?
但是在這裏出現了一個非常重要的變化, 需要我們要注意? 這一變化是什???這一變化就是, 朝鮮中期以前, 通過話頭參禪的多樣化的‘看話’方法登場, 但是, 中期以後, 多樣性逐漸減少, 開始向唯獨重視‘無字話頭’的參禪修行轉變了? 懶翁禪師就是在這樣的變化中活動的人物? 太古普愚(1301-1382)禪師和 白雲景閑禪師也一樣經曆了這樣的變化?
那?, 我將作出以下結論? 懶翁禪師的禪思想, 不屬於把太古普愚作爲中興主的現在的大韓民國曹溪宗? 但是, 他的禪思想?和現在大韓民國曹溪宗所追求的禪思想十分相近?
???: 懶翁慧勤, 南宗禪, 無字話頭, 曹溪宗, 看話禪.
첫댓글 한번에 읽기는 힘드네요.
시간을 두고 차차 읽보아야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