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되고 구별된 주의 날에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평가할 때 그 분야의 전문가가 평가해야 가장 정확합니다. 축구선수는 축구 전문가가 평가할 때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편견 없이 평가해야 합니다. 자기나라선수라고 편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장수는 장수가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고의 장군을 꼽으라면 단연 이순신장군입니다. 23전 23승 무패입니다. 전략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품, 나라사랑, 애민, 애족의 으뜸입니다. 나라를 멸망에서 구한 참 훌륭한 장군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장군에 대한 평가 중 일본의 도고제독이 평가한 것이 있습니다.
도고제독은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이순신과 같은 장군입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입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 역사상 최고최대의 큰 사건입니다.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이 도고제독입니다.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말합니다.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입니다." 이때 도고 제독은 그 기자를 즉각 야단을 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이순신장군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이끌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도고 제독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는 한산도 대첩의 학익진을 연구해서 쓰시마 해전에서 T자 전술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퇴시켰습니다.
영화'명량'을 보셨습니까? 광복절도 다가오는데 안 보신 분은 꼭 한 번 보길 바랍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너무도 적은 수의 군사로 대군을 맞서려니 조선수군의 사기가 나락에 떨어집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선조임금에게는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그리고 군사를 향해 한 말이 뭡니까? "필사즉생, 필생즉사"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입니다. 이순신장군의 말대로 정말 죽고자 했던 조선수군이 330척의 왜군을 이깁니다. 세계전쟁사에 남을 대단한 승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죽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말은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뜻이고 주님의 말씀은 주님위해 기꺼이 목숨도 버리면 더 좋은 부활의 영광으로 되찾게 된다는 의미로 약간 다르긴 합니다만 결국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고 지킬 수 있고 아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특히 믿음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이러한 필사즉생의 결단과 각오로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고 믿음을 지킨 경우가 많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랬고 에스더왕비와 이스라엘의 산파도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그를 시기한 신하들이 다리오왕을 움직여서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가 있다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자는 조서를 만들어 어인을 찍어 공포했을 때, 그는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자기 집에 2층 창문을 열어놓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였더라고 합니다.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기도한 것은 그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코 타협할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굶주린 사자의 입을 막아서라도 건져내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을 잡아 사자굴에 던지기까지는 하였으나 그의 죽음을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것입니다. 죽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오히려 살려주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절할 수 없다하여 풀무불에 던져버렸으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불 가운데서도 지켜 그들의 몸만 아니라 옷과 머리털 하나도 타거나 그을리지 않게 지켜주셨습니다. "만일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 던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 절할 수 없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곧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각오할 때 하나님이 건져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산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왕 바로의 명령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다 물에 던져라고 했지만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여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사내아이를 살려둡니다. 죽음을 각오한 행동입니다. 바로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이러한 결단에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셔서 출1:20이하에 "하나님은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에스더왕비는 자신의 민족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어도 그는 왕비로서 왕실에서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하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3일을 금식하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아무리 왕비라도 왕이 부르거나 찾지 않는데 왕에게 나아가면 죽음을 당할 수도 폐위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에스더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내가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이 에스더왕비를 보는 순간 더 어여뻐 보여 무슨 소원이든, 나라의 절반이라도 들어주겠다고 하여 그 민족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이들은 하나같이 죽고자 했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도 기꺼이 허락했기에 도리어 주님이 이들을 지키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조금도 희생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러한 능력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조금도 비울 수 없는 사람은 주님의 채우심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국 중부지방에 코벤트리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성전 앞에는 동상을 하나 세웠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알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의 동상이었습니다. 거룩해야 할 예배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상은 고다이버 부인이었습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마음씨도 너무 착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레오프릭영주는 정반대였습니다. 가혹하고 냉정했고 자기 밖에 모르는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고는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 들여 자기의 배만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혹독한 세금을 견디다 못해 주민들이 하나 둘 굶어 죽어갔지만 레오프릭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몰락해 가는 농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서 남편에게 그들의 세금을 감해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레오프릭 영주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귓전으로 흘려보냈습니다. 그래도 고다이버 부인은 계속해서 농민들의 세금을 줄여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녀의 간청이 너무도 귀찮아진 영주는 고다이버 부인에게 한 가지 불가능해 보이는 제안을 합니다. "당신이 농민들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시오. 그렇게 한다면 내가 세금을 감면해 주겠소"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영주지만 아내에게 할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주의 아내는 그 지역에서는 왕비와도 같았습니다. 그에 반해 농민들은 말이 평민이지 당시에는 노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영주의 아내가 벌거벗은 채 말을 타고 농민들 앞을 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레오프릭 영주는 이 정도 제안이라면, 고다이버가 포기할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갈등했습니다. 그냥 포기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폭정에 죽어가는 농민을 구할 방법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자신이 수모와 치욕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서라도 농민들을 살려내야겠다는 결단으로 남편의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더 화가 난 영주는 말을 타고 다닐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온 마을에 소문을 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고다이버 부인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등에 올라 마을을 천천히 돌았습니다. 그런데 시끌벅적해야 할 마을이 쥐죽은 듯 고요하고 정적에 싸였습니다. 분명히 온 마을에 소문을 내고 광고를 했는데도, 거리에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건물과 집집마다 대문과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고다이버 부인이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벗은 몸으로 마을을 돈다는 소문을 접한 농민들은 그녀의 고귀한 사랑과 희생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마을을 도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내다보지 않기로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집집마다 문과 창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내려서 그녀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고다이버 부인은 침묵으로 가득한 온 마을을 다 돌았습니다. 모두에게 욕보이려고 했지만 아무에게도 욕보이지 못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 톰이라는 사람이 창문을 열다가 즉시 눈이 멀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영주도 아내와 주민들에게 감동을 받아 세금을 감면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마을 전체를 살린 것입니다. 이 같은 고다이버 부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그 마을의 대 성당 앞에 그녀의 동상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와 있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쯤 서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며 어떤 희생을 하며 어떤 각오와 작정을 하며 순종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합니다. 믿음도, 사랑도 말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 정직함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의 시대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믿음을 지켜야 하지만 지금처럼 평안하고 안전할 때에도 주님을 향한 믿음과 열정은 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지구곳곳에는 신앙을 지키려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는 순교의 신앙을 얼마든지 듣게 됩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생각하면서라도 우리는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변함없는 믿음과 열정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만큼은 우리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것이 아니라 결단과 각오로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는 길임을 알고 더 힘써 달려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