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徐熙)의 어릴 때 자는 염윤(廉允)이고, 내의령(內議令)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성품은 엄격하며 조심스러웠다. 광종(光宗) 11년(960)에 18세로 갑과(甲科)에 급제하였고, 차례를 뛰어넘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광종〉 23년(972)에 〈서희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宋)에 갔는데, 당시 송에 조회하지 않은 지가 10여 년이 된 터에 서희(徐熙)가 이르러 몸가짐을 법도에 맞게 하니, 송 태조(太祖)가 그를 가상히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하였다.
성종(成宗) 2년(983)에 〈서희가〉 좌승(佐丞)을 거쳐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었다. 국왕의 행차를 따라 서경(西京)에 갔을 때에 성종이 영명사(永明寺)에 몰래 가서 놀려고 하자, 서희가 상소하여 간언하였다. 이에 〈왕이 계획을〉 중지하고 안마(鞍馬)를 상으로 하사하였고, 후에 내사시랑(內史侍郞)으로 옮기게 했다.
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였다. 성종도 친히 방어하고자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여 안북부(安北府)까지 가서 머물렀다. 〈그 때〉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격파하고, 아군의 선봉군사(先鋒軍使)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顔) 등을 포로로 삼자, 성종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원하려고 하자 소손녕이 소리 질러 말하기를, “우리 요[大朝]가 이미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였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국경지대를 침탈했으므로 내가 와서 토벌한다.”라고 하였다. 또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우리 요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귀부하지 아니한다면, 기어이 소탕할 것이다. 속히 이르러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서희가 글을 보고 돌아와서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아뢰자, 성종은 감찰사헌 차예빈소경(監察司憲 借禮賓少卿) 이몽전(李蒙戩)을 거란 진영으로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도록 하였다. 소손녕이 다시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800,000명의 군사가 당도했으니 만약 강으로 나와 항복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섬멸할 것이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속히 아군 앞에 와서 항복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몽전이 적의 진영으로 가서 침략해 온 이유를 묻자, 소손녕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니,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것이다. 만약 강화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해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이에 대해 의논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車駕]은 개경으로 환궁하고, 중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항복을 간청하자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서경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그들에게 주고, 황주(黃州)에서 절령(岊嶺)까지를 국경[封疆]으로 구획하자고 하였다. 성종은 땅을 분할해 주자는 의견을 따르고자 하여 서경 창고의 쌀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였는데 여전히 남은 곡식이 많으니, 성종은 〈이것이〉 적의 군량미로 사용될까 우려하여 대동강(大同江)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서희가 아뢰어 이르기를,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으며, 전투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패는 강하고 약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틈을 잘 살펴 움직여야 합니다. 어찌 갑자기 식량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하물며 식량은 백성의 생명이니, 차라리 적의 군량이 될지라도 헛되이 강에다 버리겠습니까? 그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종이 옳은 말이라 여기고 중지하였다.
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왔으니, 그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떼어 그들에게 주는 것은 나쁜 계책입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한없는 욕심[谿壑之慾]을 부려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다면 〈우리 국토를〉 다 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오니, 원하옵건대 주상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전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도 아뢰어 이르기를, “태조(太祖)께서 창업하시고 자손에게 전하시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충신 한 사람도 없이 갑자기 국토를 경솔하게 적국에 주고자 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의 시에 이르기를, ‘어린 아이가 천리 산하를 가벼이 여겼으니, 두 왕조의 문무관이 초주(譙周)를 원망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는 촉(蜀)의 대신 초주가 후주(後主)에게 권하여 국토를 위(魏)에 바치게 한 결과, 천고(千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요청하건대 금은과 보물을 소손녕에게 뇌물로 주어 그의 뜻을 살펴보시옵소서. 게다가 경솔히 국토를 분할하여 적국에 버리는 것보다는, 선왕께서 설치하신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괴이한 법을 본받지 말며,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룩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여기신다면 먼저 천지신명께 고하시고 그 후에 싸우거나 강화하는 것은 오직 주상께서 결정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종도 옳은 말이라 여겼다. 당시 성종이 중화(中華)의 풍습을 즐겨 따르는 것을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지백이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뒤에도 오랫동안 회답이 없자, 마침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다.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낭장(郞將) 유방(庾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자, 소손녕은 감히 다시 진군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재촉하였다. 성종이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張瑩)을 시켜 거란 진영에 가게 하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대신(大臣)을 군영 앞으로 보내어 대면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영이 돌아오자, 성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물어 이르기를, “누가 능히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쳐서 만세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하였다. 신하들 가운데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희가 홀로 아뢰어 이르기를, “신이 비록 영민하지는 않지만, 어찌 감히 분부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강어귀까지 나와서 손을 잡고 그를 위로하고 보내었다.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소손녕의 군영에 가서 통역자로 하여금 상견례의 〈절차를〉 묻게 하였다. 소손녕이 말하기를, “내가 큰 조정의 귀인(貴人)이니, 〈네가〉 마땅히 뜰에서 절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에게 아래에서 절을 올리는 것은 예의지만,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두세 번 〈절충하려〉 왔다 갔다 했지만, 소손녕은 허락하지 않았다. 서희가 노하여 돌아와 관사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으니, 소손녕은 마음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마침내 허락하여 마루로 올라와 〈대등하게〉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서희는 군영의 문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소손녕과 뜰에서 서로 절하고 〈마루로〉 올라가 예법에 맞게 행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범해 왔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朝聘)에 힘쓴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요(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해 왔다고 말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 또한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께서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어찌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말투가 강개하여 소손녕도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그대로 보고하였다. 거란의 황제가 이르기를,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해왔으니, 마땅히 군사 행동을 중지하라.”라고 하였다. 소손녕이 잔치를 베풀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본국이 비록 잘못한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요가 수고롭게 군대를 내어 멀리 오게 되었으니, 상하 모두가 당황하여 무기를 들은 채로 여러 날을 들판에서 지새웠으므로 어찌 차마 잔치를 열고 즐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손녕이 말하기를,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났는데, 어찌 환호(歡好)의 예가 없겠는가?”라고 하며 굳이 요청하자, 마침내 〈서희가〉 수락하고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7일을 머물고 돌아가니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며 강가에 나가 맞이하고, 즉시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幣使)로 삼아 입근(入覲)하게 하였다. 서희가 아뢰어 이르기를,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깨끗이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야 조근(朝覲)이 행하여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하였으니, 요청하건대 강 밖의 〈영토까지〉 획득하고 나서 빙례(聘禮)를 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종은 이르기를, “오래 수교하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박양유를 보냈다. 〈서희는〉 평장사(平章事)로 전임되었다.
〈성종〉 13년(994)에 〈서희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냈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에 성을 쌓았고, 또 그 이듬해 선주(宣州)·맹주(孟州)에 성을 쌓았다.
서희(徐熙)가 일찍이 해주(海州)로 왕을 수행하였는데, 성종(成宗)이 서희의 막사로 행차하여 들어오고자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의 막사는 지존(至尊)께서 오실 곳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성종이〉 술을 올리라고 명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의 술을 감히 올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성종은 이에 막사 밖에 앉아서 어주(御酒)를 내어오라 하여 함께 마시고 파하였다.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封事)를 올려서 시정(時政)에 대한 7가지 일을 비판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성종(成宗)이 재상을 모아 놓고 의논하여 이르기를, “정우현이 감히 월권하여 그 일들을 논했으니, 그에게 죄를 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희(徐熙)가 말하기를, “옛날에 간쟁하는 데에는 관직이 따로 없었으니, 직분을 넘은 것이 무슨 죄이겠습니까? 신은 재주가 없음에도 부당하게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지위를 도둑질할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관직이 낮은 관료로 하여금 정치의 옳고 그름을 비판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바로 신의 죄입니다. 하물며 정우현의 비판은 대단히 적절하오니, 마땅히 표창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성종이 잘못을 깨우치고 정우현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발탁하였고, 서희에게는 수놓은 안장·어구(御廐)의 말·술과 과일을 하사함으로써 위로하였으며, 태보 내사령(太保 內史令)에 제배하였다.
〈성종〉 15년(996)에 서희(徐熙)가 병이 들어 개국사(開國寺)에 머무르자 성종(成宗)이 직접 가서 문병하고, 어의(御衣) 1벌·말 3필을 사원에 나누어 시주하였다. 또 곡식 1,000석을 개국사에 시주하였고, 무릇 명운을 기도하기 위한 것으로 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이듬해 녹봉을 줄 때에 서희의 병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으므로, 왕은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이르기를, “서희가 아직 사직할 나이가 되지는 않았으나, 질병으로 조정에 나오지 못하므로 치사록(致仕祿)을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목종(穆宗) 원년(998)에 죽으니 57세였고, 〈왕이〉 부음을 들고 크게 슬퍼하며 부의하기를 베 1,000필, 보리 300석, 쌀 500석, 뇌원다(腦原茶) 200각(角), 대다(大茶) 10근, 전향(栴香) 300냥을 주어서 예로써 장례를 지내주었으며, 시호를 장위(章威)라고 하였다. 현종(顯宗) 18년(1027)에 성종(成宗)의 묘정에 배향하였고, 덕종(德宗) 2년(1033)에 태사(太師)로 올려 추증하였다. 아들은 서눌(徐訥)이고, 측실(側室)의 아들은 서주행(徐周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