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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장장 4시간이나 훨씬 넘어 버스는 성삼재에 올랐다. 역시 이곳은 많은 피서 인파로 주차장이 꽉 차 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보니 서늘하다. 전국은 폭염 특보가 발효되어 최고의 찜통더위를 맞고 있는데 1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이니 더위는 그야말로 저 아랫동네 일로 돼 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구름까지 해를 가려주니 오늘은 복 받은 날이다. 100m 고도를 높일 때마다 0.6도씩 낮아진다는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오늘의 종주 구간은 지리산의 서북쪽으로서 일명 서부지리산의 만복대를 오르고 백두대간 마을이라 부르는 남원의 노치마을까지의 여정이다. 백두대간의 출발 구간인 지리산을 종주하고 그 다음에 지세를 낮추어 숨을 고르는 구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8월에 지리산 대종주를 앞두고 먼발치에서 그 성스런 모습을 조망하고 마음을 다지며 그 존재를 우러르며 마음을 다지는 산행을 하는 것이다.
성삼재(姓三재·1,070m)라는 지명은 그 옛날 마한의 이야기로 실마리를 풀어본다. 이 지역은 마한(馬韓)의 땅, 그래서 기원전 84년에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각기 세 성을 가진 장군에게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고 해서 이름이 되었다(서산대사 황령암기 기록)고 한다. 마한은 대체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을 가리킨다. 마한은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한강에서 이곳 지리산까지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거의 2천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성삼재와 노고단
주차장을 나와 달궁으로 내려가는 도로 옆에 만복대 탐방로의 진입문이 있다. 저 아래 달궁(達宮)은 마한의 한 부족국가가 들어와 궁을 짓고 본거지를 마련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오늘의 대간길은 달궁의 외곽 경계선을 걷는 것이라 보면 된다. 그리하여 우리 40여명의 대원들은 마한의 한 부족국가의 전사가 되어 순찰병의 임무에 나선 것이다.
11:40, 초입부터 늙은 소나무가 맞아주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에 시달렸는지 뿌리가 다 드러났다. 키가 큰 여로가 그 긴 줄기 끝에 흰 꽃을 다발로 보여주고 있다. 오르막이 잠깐 끝나고 헬기장이 나타났다. 꼬리가 옆으로 늘어진 꽃무리 모양의 까치수염이 지천이다.
해발 1,187m를 알리는 현 위치 표지기가 지났다(12:12). 응급신고처와 119 안내에 대한 정보가 있는 중요한 표지다. 이곳 지형은 양 옆이 급경사지역으로 뾰족한 능선을 걷는 것이다. 달궁의 입장에서 보면 이 능선을 지정학적인 요충지로 이용한 것이다. 왼쪽은 구례군 산동면의 오지, 오른쪽은 달궁의 심원 계곡이다. 작은 공터에 두 사람이 점심 식사중인 것을 보고 지나쳤다. 조릿대가 이곳에도 번성하다.
숲이 벗겨지며 오른쪽과 뒤쪽의 지리산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야봉과 노고단 등 능선에 구름이 더 뭉쳐있다. 번성하고 있는 미역줄나무는 꽃을 열심히 피우고 종족 번식에 준비를 하고 있다. 12:20, 첫째 봉우리인 고리봉에 올랐다.
고리봉의 고리는 한자가 아니라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성의 오수정까지 올라오던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봉은 작은 고리봉이라 부르고 앞으로 진행할 정령치 다음 봉우리를 큰 고리봉이라 부른다. 고리봉에 올라서자 지리산에 왔음이 실감난다. 동쪽을 바라보니 반야봉의 듬직한 엉덩이, 그리고 그 아래 굳건한 다리 모양의 능선이 노고단에서 성삼재로 이어진다. 북쪽을 바라보니 달궁계곡의 깊은 지세와 우리가 가야할 만복대의 푸근한 덩치가 연결되어 있다. 만복대는 마치 소의 등처럼 편편해서 푸근하다. 서쪽을 보니 곡성군과 남원시의 너른 들판과 섬진강의 물줄기가 보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모자 속에 갇혀있던 땀이 일시에 날아가 버려 청량감은 말할 수 없고 기온 또한 선선하여 최고의 피서지에 온 것이다. 봉우리 한 옆에 노란 마타리가 화려하게 피었다. 마타리는 욕심 많은 왕인 아버지 때문에 환생한 딸의 모습이다. 그래서 꽃말은 ‘무한한 사랑’이다.
만복대와 달궁계곡
작은 고리봉에서 하산길에 비비추를 만났다. 이제 비비추꽃은 화려하고 영롱한 빛을 상실한 채 고개를 숙이며 퇴장 준비를 하고 있다. 계절과 시간은 어느 누구나 무대의 화려한 시간을 엄격히 정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 반가운 신인 배우가 나타났다 바로 바위채송화다. 잎은 채송화 같으나 꽃은 노란색이며 별 모양이고 바위틈에서 무리지어 핀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 주더니 이내 헬기장이다.
오래된 헬기장은 주변에 야생화 천국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짚신나물과 큰뱀무 그리고 미나리아재풀이 많다. 그런데 멀리 숲속에 산수국 한 무리가 피어있다. 은둔하여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다. 산골짜기나 습기 많은 곳에 자라나는 습성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자주색 또는 하늘색 꽃이 지지 않고 있다가 갈색으로 변한 채 달려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산수국을 촬영하고 숲길로 들어섰다. 이 지역은 조릿대가 모두 새카맣게 타들어 간 모습이다. 조릿대의 무덤이다.
12:43, 이정표를 보니 성삼재에서 2Km를 왔다. 만복대까지는 3.3Km, 길은 호젓하고 조릿대 군락지 사이로 길이 나있다. 묘봉치까지는 고도상 내리막인데 작은 무명봉이 하나 가로 막는다. 역시 미역줄나무는 무성하고 그 긴 생명력을 놓지 않는다. 이제 진짜 내릭막길로 내려가는데 안개꽃처럼 작은 꽃이 4~5장의 돌려나기 잎의 줄기 끝에 핀 개갈퀴가 무성하다. 이어 조릿대 군락지를 만나고 물푸레나무들 끝에 있는 묘봉치에 도착했다(13:00).
묘봉치는 1,108m의 고지이며 헬기장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숲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야생초가 우거진 헬기장에는 역시 짚신나물이 작은 노란꽃을 피우고 있다. 옛날 약초꾼들의 짚신에 씨가 잘 붙어 다녀 붙은 이름이란다. 그리하여 이들의 번식지는 숲길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묘봉치는 고리봉과 만복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이제 만복대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다.
만복대로 가는 길에는 일부 로프로 만든 매트가 깔려있다. 멍석처럼 보이는데 ‘코이어 매트(coir mat)라고 한다. 야자껍질의 섬유를 실로 만들어 굵게 짜 매트리스 형태로 만든 것이다. 서울 근교 등 전국적인 현상인데 일단 토사가 밀리지 않고 고무로 만든 매트보다는 친환경적이라고 생각한다. 산은 사람의 편리보다 산의 훼손방지에 더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역시 조릿대와 미역줄나무가 도처에서 나타난다.
마타리와 지리산 주능선
빽빽하게 자라난 풀과 물푸레나무 등 활엽수 사이로 소나무 하나가 홀로 서있다. 이 소나무는 한 겨울에야 빛을 발한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하절기에는 은둔 거사의 모습이나 흰 눈이 쌓이거나 휑한 바람이 부는 영하의 날씨에 독야청청의 모습이 늠름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이 거사에게 눈 한번 주지 않는다. 그들은 점점 힘이 부치기 때문이다.
만복대가 1.3Km 남았다. 답답하던 숲은 뒤로하고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나무 사이로 간신히 보이던 만복대는 온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늘 중간에 잠자리 한 마리가 멈추었다가 쏜살같이 내뺀다. 그러다가 다시 조릿대 숲이다. 마타리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졸참나무 숲이 나타났다. 대신 고지대인지 줄기와 가지는 굵지 않고 세월의 흔적만 보인다.
이윽고 전망바위에 올라섰다. 지나온 남쪽을 보니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렸는데 구례읍 산동면의 마을은 평화롭다. 길옆엔 마타리와 함께 우아한 제비붓꽃이 드문드문 피었다. 붓꽃과 식물은 꽃창포와 붓꽃 등이 생김새가 비슷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제비붓꽃은 진한 자주색으로 지리산에 자란다고 하니 분명 맞을 것이다. 억새 구릉지에는 싸리나무와 더불어 비비추 군락지도 보이는데 이제 다 늙은 모습이다. 가까이 보이는 정상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시원한 바람도 얼굴에 스치며 땀을 증발하고 있다. 드디어 만복대에 올라섰다(14:25).
만복대(萬福臺·1,433m)는 이름 그대로 둥근 민둥 지대에 솟구쳐 평평하고 푸근한 모습이다. 만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복을 줄 것 같은 형태다. 이곳의 명칭은 풍수지리설로 볼 때 지리산 10승지 중의 하나로 인정된 명당으로 많은 사람이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하여 만복대로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지리산에서 가장 큰 억새 군락지로 가을철이면 봉우리 전체가 억새로 뒤덮여 장관을 이룬다. 이 곳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반야봉은 지리산의 웅장함을 실감케 해준다. 남서쪽 구례 산동면에 봄철 산수유꽃이 필 때면 위안리의 상위, 하위 등 산수유마을에서 노란 산수유꽃을 감상하고 만복대에 올라도 좋다. 또 겨울 설화도 멋진 곳이 만복대이다.
구례 산동면 산수유마을
날씨는 화창하지 않으나 구름이 태양의 열기를 막아주어 오히려 복 받은 것이다. 여기다 고지대의 저온 현상과 시원한 바람이 최고의 쾌적함을 안겨주었으니 이것이 萬福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최고의 피서는 산행이다. 몸을 움직여 탁기와 땀을 빼주고 정상에 올라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며 체온을 증발시키니 자연 서늘한 감이 오는 것이다.
일행들과 만복대에서 정상에 오른 기쁨을 공유하고 정령치로 향해 하산길을 잡았다. 둥근이질풀이 5장의 화려한 꽃잎으로 환대를 한다. 주황색 말나리가 보이더니 숲속에 한 송이 주홍색 동자꽃이 고개를 내민다. 털중나리를 보며 지금까지 왔는데 앙증맞은 말나리를 보니 새롭다. 동자꽃은 동자승의 전설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슬픈 꽃이다.
산길은 정령치에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오는 곳이라 넓어졌다. 그 틈으로 반가운 꽃을 만났다. 바로 이맘때 노고단 자락을 노랗게 물드는 원추리꽃이다. 이 꽃을 보면 근심을 잊어버린다고 하여 망우초(忘憂草)라고 한다. 6~8월 군락을 지어 피는데 여름에는 꽃을 따서 술을 담거나 김치를 담가 별미로 먹었고, 밥할 때 원추리꽃을 넣으면 독특한 향기가 나는 노란밥이 짓기도 했다. 원추리는 어린 순으로 나물을 해서 먹는데 넘나물이라고 부른다. 맛이 달착지근하고 연하며 매끄러워서 감칠맛이 있는 봄철의 대표적 산나물로 원추리 훤자를 써 훤채(萱菜)라고 한자를 쓴다.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훤당(萱堂)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원추리꽃(망우초, 훤채)
사육신 성삼문은 ‘망우훤초(忘憂萱草)’라는 시조를 지어 원추리꽃을 노래한 바 있다.
爲善最可樂 위선최가락
樂哉何所憂 락재하소우
言樹北堂外 언수북당외
悠悠空度秋 유유공도추
‘착하게 됨은 가히 가장 즐겁고
즐거운데 어찌 근심이 있으리오.
북당(어머님 방) 밖에 잘못 심으니
아득히 멀리 헛된 근심을 깨닫네’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근심을 더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자연과 벗하며 꽃을 관조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벗는 것이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한갓 기우에 불과한 경우가 많으므로 나는 산행을 하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은 나 외에 타인으로부터 발단이 되는 경우도 많다. 나의 평상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마음을 평정함으로서 남의 그것도 변화되기만 한다면 이 또한 도인이 아니겠는가?
이 아름다운 원추리꽃에 여인을 합친다면 더 기가 막힌 사진이 될 것인데 내 옆엔 여인이 없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서 빛을 발하지만 배경이 되거나 되어 주거나 하는 대상이 있음으로 더 가치가 빛나는 법이다. 꽃은 역시 여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안으로 저 반야봉과 지리산 능선을 배경으로 원추리꽃을 찍으려 하였으나 고개를 반대로 숙이고 있거나 홀로 핀 경우가 많아 작품으로서의 사진이 될는지 모르겠다.
정령치까지 전체적으로는 내리막 지형이나 작은 봉우리도 앞을 막아 넘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죽은 조릿대 구간을 지나니 홀로 선 소나무가 있는 암봉이 나타나고 그 뒤로 암벽지대가 성처럼 서있다. 균열을 조사하기 위해 패치를 붙여 놓았다. 정령치가 500m 남았다. 흰 까치수염을 만나고 바위지대에서 바위채송화를 보았다. 그 뒤로 낙엽송과 잣나무 등 침엽수 구간이 나타났다. 국립공원공단에서 ‘반달곰과 마주치게 된다면?’이라는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반달가슴곰은 지리산 국립공원의 대표 브랜드 및 깃대종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달곰은 지리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에 백운산에서 올무에 걸려 죽고 또 고속도로에서 죽기도 했다. 녀석들의 질주 본능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 같다.
정령치
저 아래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나무데크 계단이 나타나더니 주차장이 있고 안부가 넓은 정령치에 도착했다(15:28). 정령치(鄭嶺峙·1,172m)는 마한 시대로 볼 때 정씨 성을 가진 장군에게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고 하며 현대로 볼 때 지리산 능선을 조망하며 겹겹으로 보이는 산마루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며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남원의 주천면과 산내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산내면 계곡은 마한의 궁인 ‘달궁’이 있다. 평야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다가 이곳 산골로 쫓겨 들어와 최후의 보루인 이곳 고개에 성을 구축하고 후일을 도모했던 스토리를 영화처럼 찍어 보았다. 그곳엔 분노가 있었고 복수와 야망이 존재했으며 한편으로 사랑과 우정이 존재했을 것이다. 오늘도 많은 남녀노소들이 차를 끌고 여기까지 올라와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달궁은 구전 속의 전설로 전해 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28년 7월 대홍수가 나면서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심원계곡부터 불어난 계곡물이 덮치면서 흙이 쓸려 나갔는데 달궁터와 유물이 드러나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일본 순사들이 가져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정령치를 벗어나 작은 동산을 올라가는데 야생화 단지에서 술패랭이꽃을 보았다. 옛날 패랭이 모자와 비슷해서 패랭이꽃이 되었는데 거기다가 꽃잎 가장자리가 술처럼 잘게 갈라진다고 하여 술패랭이꽃이다. 꽃은 억새 사이로 피었는데 제발 들키지 말았으면 하는 모습이다. 다음 목적지인 큰고리봉까지 800m.
큰 잣나무 옆으로 마애불상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큰고리봉 정상 부근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있다고 하는데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이다. 그런데 이곳사람들은 ‘마한 장군상’ 또는 ‘정 장군’으로 부르며 성지처럼 여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부처보다 정 장군을 먼저 생각했을 것 같다. 대간길은 직진하여 고도를 높여 나갔다. 나무데크 계단이 나타나고 까치수염 군락지를 만났다. 바위 지대를 지나 큰고리봉에 도착했다(15:50).
(큰)고리봉
큰고리봉(1,304m)에서는 산줄기가 갈라진다. 북쪽 방향의 주능선은 세걸산을 경유하여 철쭉의 명소, 바래봉을 향한다(8.6Km). 그러나 대간길은 왼쪽으로 뚝 떨어져 고기리 마을로 향하니 주 산줄기를 버리는 것 같아 잠시 헷갈린다. 봉우리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은 가깝고 평화로우나 고기삼거리까지 3.2Km를 내려가야 하니 만만치 않다. 지리 능선을 배경으로 노란 좁쌀풀꽃이 우뚝 올라왔다.
내리막길은 흙과 바위가 섞여있는 급경사길이다. 음지 식물인 고비가 발달하고 나무뿌리가 많이 드러나 있다. 이정표가 나타나면서 경사는 줄고 조릿대 군락지를 만나면서 수종은 낙엽송으로 바뀐다. 그 다음에는 송림과 백림(잣나무숲)이 울창하다. 한적한 곳에서 정발산팀과 막걸리 한잔을 나누어 먹고 하산길에 들었다. 숲의 수종은 수시로 바뀐다. 다시 조릿대를 만나고 그 옆에 울창한 생강나무를 보았다. 소나무는 키가 크고 두껍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송담)은 굵어서 약재의 효과가 더 있을 것 같다. 길 오른쪽으로 철망을 설치한 것을 보니 마을의 약초 재배지 같다. 고사리가 지천인 산소 2기가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송림지대에 들어섰다. 송림에 들어서면 바로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번잡한 시장거리에서 나온 듯 마음이 정리된 기분이다. 이윽고 나무데크 계단이 보이고 저 아래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길에 내려오자마자 수로에서 머리를 감았다(17:20).
이곳 고기삼거리는 정령치로 올라가는 길과 남원 육모정으로 가는 길 그리고 남원 운봉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여기서 계속 진행해야 하는 대간길은 운봉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노치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일부 힘이 든 사람들은 배낭을 차에 내려놓았지만 나는 그대로 노치마을로 향했다. 지금은 아스팔트길로 맥없이 변했지만 그 옛날의 원시의 흙길을 생각하며 걸었다. 가는 길을 기준으로 왼쪽 사면으로 흘러내린 물줄기는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곡성과 구례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오른쪽으로 흐른 물은 운봉, 산내, 마천, 산청을 거쳐 진주 남강으로 흐르게 된다. 같은 마을인데도 물은 갈라진다. 그래서 이곳이 보기에는 편평한 지형이지만 해발 500~600m의 지형으로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백두대간의 철학이 숨어 있는 곳이다. 즉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흔히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노치마을 노거수
저 멀리 다음 구간의 주봉인 수정봉을 바라보며 걸었다. 덕치리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산마루모텔 뒤로 노을이 깔린다. 농가에서는 사과가 익어가고 교회 앞 삼거리에서 노치마을 안내석을 만났다. 청포도 농장(백두대간 포도농장)에서 입맛을 다시고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는 농로 끝에 다달으면 오늘의 구간 끝인 노치마을의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날 수 있다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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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들어 있는 영상과 문서내용을 짜내어 컴퓨터에 담아 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렇게 2000년 전까지 날아가서 마한시대 달궁과 정령치와 성삼재 이야기를 전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더운데 잘 지내세요
항상 기다려집니다
더운데 존경스럽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의미있는 산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