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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제사장, 왕, 선지자적 사명과 적용
본문 : 벧전 2:9-10절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강론
질문을 드림으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신분(身分)이 뭡니까”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9절에는 “거룩한 나라”가 있고 10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요”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빌 3:20)는 정체성을 명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또 묻기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당신의 지위(地位)가 뭡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라는 대답이 정답인 것입니다. 이제는 제가 묻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분과 지위를 명심하면서 이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각성하자는 뜻에서 오늘 설교를 작성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중요한 3가지 직분이 등장하는데 “제사장, 왕, 선지자”입니다. “제사장과 왕”은 물론이거니와 선지자도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하신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왕, 선지자”는 모두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들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왕, 선지자”의 직분을 “메시아적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시고 왕이시고, 선지자이셨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사장, 왕, 선지자” 중에서 어느 직분이 우선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추방을 당한 처지에 있는 죄인들에게는 “제사장”의 직분이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속제물”과 이를 드려줄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그 중에서도 “대제사장”직분이 우선하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8:1절에서는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 즉 중요한 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보내주시지 않으셨다면 구원도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경의 배열도 무심한 것이 아닙니다. 맨 앞에 “모세 5경”이 놓여 있는데 모세 5경의 중심 직분은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역사서”가 나오는데 역사서의 중심 직분은 “왕”입니다. 그 뒤에 “선지서”가 놓여 있습니다. 선지서의 중심 직분은 선지자입니다.
성경 맨 앞에 모세 5경을 주시고 이를 통해서 제사장과 제사의식을 계시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고 말씀하십니다. 모세 5경하면 율법인줄로 알았는데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시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모세 5경의 중심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려주실 것을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서 계시하신 의문에 가려 있는 복음인 것입니다.
① 그러면 먼저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대제사장”의 대표자를 꼽는다면 누구를 들겠습니까? “아론”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대표적인 임무가 대 속죄일의 규례인 레위기 16장에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맞이하게 되는 대 속죄일에는 백성을 위하여 제물 둘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그 중 한 마리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로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속죄제로 드려진 제물의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리라”(16:15)고 명하십니다. 지성소에 있는 법궤의 뚜껑부분이 “속죄소”입니다. 그리고 법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돌비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구조가 되는가? 법궤 안에 있는 율법을 속죄소가 덮고 있는 구조인 것입니다.
그 속죄소 “위와 앞에” 속죄 피를 뿌리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우리를 보실 때에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속죄소에 뿌려진 대속의 “피”를 통해서 보아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도 문에 뿌려진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하셨는데 같은 진리를 다른 방도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한 마리는 어떻게 하라 하시는가? 레위기 16:21-22절을 보겠습니다.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16:21-22)하십니다.
이점을 시편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 103:12)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사명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이런 대제사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그러면 실체(實體)로 오신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0:28절을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代贖)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휘장이 비로소 열려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다 청산이 되었다는 점을 명백하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2: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대신 해결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증언했습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이렇게 증언했는지 아시겠지요. 백성들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아사셀 염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 그러면 이런 “제사장” 직분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2:9절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이라면 드릴 제물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12: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우리 “몸”이 제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6:19절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우리 몸이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정리를 하면 우리 몸이 성전(聖殿)이요, 우리가 제사장(祭司長)이요, 우리 자신이 제물(祭物)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고린도전서 10: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산 제사”라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 사명입니까? 그러면 나는 제사장 직분을 바르게 감당하고 있느냐고 자문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사장” 직분의 “그림자, 실체, 적용”입니다.
② 둘째로 구약시대 “왕”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왕의 대표자를 꼽는다면 누구이겠습니까? “다윗 왕”입니다. “왕”에게는 권세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 골리앗을 정복하고 나라와 백성을 구원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는 다윗의 능력이 아닙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사무엘상 17장인데 16:13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니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왕적인 권세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7:49절입니다. 다윗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합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고”, 두려워서 떨고 있던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승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은 다스리는 자인데 역사서에 등장하는 모든 왕은 “두 길”에 의해서 평가(評價)를 합니다. 그것은 “다윗의 길”로 행했느냐?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느냐? 한마디로 “다윗의 길”은 메시아언약을 보수한 길이요, “여로보암의 길”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배교의 길입니다.
㉠ 그러면 “왕”의 실체(實體)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써의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셨는가? 누가복음 4:18절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점을 히브리서 2:14-15절에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구원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을 정복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그러면 “왕적인 권세”가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겨놓으신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추격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왕”이란 지배를 당하는 자가 아니라 “지배”(支配)하는 자입니다. 로마서 8:35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고 8:37절에서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환경이나 박해나 옥이나 칼, 즉 죽음까지도 지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서도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고 호통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는 “제사장”으로 섬기고 세상을 향해서는 “왕적인 권세”로 승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왕”직분의 “그림자, 실체, 적용”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선지자”의 대표로 “엘리야”를 꼽게 됩니다. 그리고 “갈멜산”의 대결을 연상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18:21절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18:36절에서는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37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합니다. 무엇을 응답해달라는 것인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이요, 둘째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즉 우상을 섬기는 여로보암의 길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렇다”하고 “여호와의 불”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렘 7:25)하십니다. 선지자란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 그러면 선지자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의 사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 누가복음 13:34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이 선지자적 사명입니다.
㉡ 그러면 “선지자적 사명”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자를 꼽으라 한다면 “바울”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2:17절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합니다. 이것이 바른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2:1-2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40절에서는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41)고 경고합니다. 한 마디로 복음과 심판을 함께 전하는 것이 선지자적 사명입니다. 이것이 “선지자” 직분의 “그림자, 실체, 적용”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제사장, 왕, 선지자”들은 사명을 바르게 감당한 자들보다는 역기능으로 행한 자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쳐야만 하겠습니다. 요약을 하면 복음의 뿌리는 “모세 5경”에 넓고 깊게 뻗쳐 있습니다. “역사서”는 왕들이 복음을 보수한 “다윗의 길”로 행했느냐 아니면 우상을 숭배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느냐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다윗의 길로 행하지 않고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왕들을 책망하며 돌아오라고 촉구하면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구약교회에 먼저 모세 5경을 주셨습니다. 신약교회에도 이를 성취한 “복음서”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러면 첫째로, 한국교회는 복음에 확고한가?
둘째로 한국교회 목회자, 성도들은 “복음”을 보수한 “다윗의 길”로 행하고 있는가?
셋째는 가난하고 비천한 소수의 무리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승리의 삶을 산 사도행전적인 삶, 다시 말하면 지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왕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넷째는 오늘 본문에서는 “아름다운 덕을 선포(宣布)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름다운 덕”인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교회가 백성들을 “모세 5경”에 확고하게 세워주지 못했기 때문임과 같이, 현대교회도 성도들을 “복음서”에 확고하게 세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제사장, 왕, 선지자”적인 사명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왕, 선지자적 사명”입니다.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 받음이라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찬송 455장)
첫댓글 오늘도 저를 일깨우시는 은혜의 말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사명을 마치시고 주님 품에 안기시는 그 날까지 강건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