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상제(皇天上帝)12-통권149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대상(大喪)을 당한 중경 청인성의 호천궁은 거친 삼베 겉옷을 입은 궁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빈소가 마련된 곳에선 단 한시도 그칠 일 없이 곡(哭)을 했다. 설화는 부친과 함께 빈소에 들어섰지만 예법에 조문은 남자만 할 수 있었으므로 설화는 조문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조문하는 대신 곡을 했다. 그러나 임금의 상이었다. 일가붙이가 모두 존귀한 신분이니 여염집의 그것과는 같을 수 없었다. 대부분 호황가의 존귀한 귀부인들이 검박한 하얀 소복을 입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차분하게 늘어뜨린 머리와 하얀 소복, 투명하도록 하얀 피부와 깊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천하제일미라는 명성에 걸맞은 여인이 빈소 앞마당에 모습을 보이자 일순간 곡소리가 엷어졌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은연중 드러내며 들어선 설화는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겨 여인들이 곡을 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호사천은 한때 유일한 가족이라 착각하고 충성을 다 바쳤던, 자신을 배신한 배다른 형의 영전에 말없이 향을 피우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천림왕을 한번 쏘아보고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지금 이곳에서 약관의 젊은이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호황가의 비사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고 그 자리엔 그 알 만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형님, 그가 바로 그 호사천입니까?”
“으음.”
신주 견제가의 견호상(犬呼相), 견호치(犬呼淄) 형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근래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백왕과 천하제일미라는 천상천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연 천상천화는 천하제일 미녀로군요. 그저 하얀 상복을 입었을 뿐인데도 그 미태를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잔함을 느끼게 하니 말입니다.”
“그렇구나. 그리고 친모는 다르다고 하지만 피가 통하는 친 혈육이면서 또한 서로 원수 관계니 얼굴 보기가 불편하겠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고금을 통틀어 권력자들 집안에서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진골십가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최근엔 임주에서 할머니가 자식과 손자를 내치는 일까지 있었으니…. 그러나 신주의 견제가에서 골육이 상쟁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여느 십제들과는 달리 견제가는 따로 종가에 해당하는 가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호씨를 쓴다고 해서, 같은 서씨를 쓴다고 해서 친척은 아니었다. 호황의 가문은 호제가 내에서 천호 가문이었고, 서제 서포틈은 흑서 가문이었다. 돈제 돈화린은 금돈 가문… 이런 식으로 제가 내에 가문이 존재했다. 십이진가 가운데 용황 홀로 있는 가문을 제외하고 뚜렷한 종가(宗家)에 해당하는 가문을 갖지 않은 가문은 견제가가 유일했다. 견제가의 견제는 그런 이유로 그 출신 가문이 모두 달랐다. 개인적인 역량과 세력으로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견제(犬帝)였다. 그러다 보니 가족 친지는 가장 중심이 되는 세력이었으므로 골육상쟁보다 견제가 내의 세력과 세력 다툼에 피해가 많았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항상 출중한 능력이 있는 자가 견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호시탐탐(虎視耽耽), 견제의 자리를 노리는 세력을 다스리느라 외부의 일은 별로 신경쓰지 못했다.
“천상천화가 모습을 보인다면 백호나한도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듯 부녀만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견호상은 동생이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았다. 아마 세간의 떠도는 호사천과 백호나한에 관한 괴소문을 묻는 것이리라.
“백왕이 백호나한을 도모했을 것이란 소문 말이냐?”
“그렇지 않고서야. 비록 호황의 덕이 없음을 성토해 호황가와의 관계가 껄끄럽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백호나한은 호씨 성을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뎅~!
견호상, 견호치 형제의 소곤거림은 웅혼한 종소리가 들리자 이내 끝났다. 역시 호황은 호랑이였다. 그리고 그는 만승지존(萬乘之尊)이자 만수지존(萬獸至尊)이었다. 그러므로 예(禮)도 그에 맞게 이루어져야 했다. 신시(申時)가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모든 존재가 자신의 진신(眞身)을 드러냈다.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상주인 천림왕 호천린을 비롯한 호황가의 식솔들이 반인반호(半人半虎) 모습의 진신으로 둔갑했고, 그 자리에 있던 진골십가는 물론 그 외 수인들도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본모습을 보였다.
“음?”
“허.”
세간에 천상천화는 백호라고 했다. 그래서 은연중 그녀에게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타는 듯한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 순백(純白)과 순흑(純黑)이 어우러진 도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얀 호랑이의 모습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천상천화의 본모습을 본 자들의 뇌리엔 한 가지 공통적인 생각이 스쳤다.
‘신수(神獸) 백호(白虎)는 제왕지수(帝王之獸)다.’
***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가을 뒤엔 겨울, 겨울이 끝나면 다시 봄이 오듯이 왕조의 운세도 그와 같다. 우주가 천기운화(天氣運化)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듯 왕의 운세도 그러한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덕(水德)에 바탕을 두었던 선(鮮)이 토덕(土德)에 바탕을 둔 황룡이 이끄는 십이표기(十二標旗)에 무너지면서 천자의 자리를 내어주었고, 목덕(木德)에 바탕을 둔 청룡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덕(德) 없는 임금을 보내는 자리에 목덕을 이은 금덕(金德)의 상징인 백호가 모습을 보였다. 이는 진명천자(眞命天子)가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일었이다.
―쾅!
“이럴 수가….”
천림왕 호천린은 천상천화가 진신을 드러내는 순간, 다시금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호황이 붕어한 이상 천자는 다시 용황가에서 나와야 했다. 그러나 사실상 호제가가 황가의 지위를 누리며 명실 공히 천자가 되었으므로 천하의 그 누구도 다음 대의 천자 또한 호황가에서 나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자가 붕어하고 후계자인 태자가 급서(急逝)하는 일이 벌어지고 보니 서열상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천림왕이었다. 그러나 천림왕 자신이 벌인, 백호나한을 도모하려 했다는 꼬리표는 웅비하려는 그에게 엄청난 족쇄였다. 하지만 태자의 죽음은 3년으로 예정된 호황의 상을 100일로 줄이는 명분이 되었고 이미 서제가와는 밀약이 되어 있어 천림왕이 백호나한의 용호왕부를 역적으로 주장하면 그에 호응하여 서제 서포틈이 준비한 42만 서병이 남원주를 칠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남원주의 태수들 또한 천림왕과 연락이 되어 있다. 정적이었던 서제 서포틈이었으나 지금은 천림왕 호천린의 유일한 아군이었다. 그런데….
“백호나한이 역적이 되면, 천자의 자리가 내 것이거늘….”
“전하, 이미 화살은 시위에서 떠났습니다. 천상천화가 백호인 것이 확인되었으니, 이는 호사천이 역천을 꿈꾸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천상천화가 진명천자라고 하지만 천상천화는 여인의 몸입니다.”
“그럼…?”
“더 이상 여러 말 나오기 전에….”
“하지만 그나마 짧게 줄인 상을 치르기도 전에 다시 일을 벌이는 것은 어렵지 않나?”
“전하, 이는 전하께서 죽고 사는 문제이십니다. 다소간의 허물은 감수하십시오.”
천림왕은 책사(策士) 토현귀(兎賢貴)의 이어지는 말에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저의 본가인 정주에서도 7만 대군을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
“허,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건만 네가 진정 백호라니….”
“….”
호사천은 설화가 백호라는 소문을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백호나한이 상경의 백호문을 지키던 금군이었고, 자신의 원수기를 대해백호기라 하니 아내 또한 백호다’라는 말이 있어도 그냥 하는 소리려니 했다. 호사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날 두 눈으로 보고서야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고학이나 설화가 말하는, 당당하게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을 갖추기 위해 용호왕부을 꾸렸다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자신이 생각해도 백호를 보호하려면 용호왕부만한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네가 진신을 드러냄으로써 앞으로 벌어질 일이 걱정되는구나.”
“아버님, 그 일이라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진신을 드러내든 그렇지 않든, 갑주의 서제가가 발호할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만천하에 진신을 드러낸 것은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조력자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
“서제와 저희 용호왕부를 저울질하는 세력에게 저의 존재는 커다란 무게를 행사할 겁니다.”
호사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현모양처 같던 아이가 적지나 다름없는 중경에 오자고 고집한 것도 그렇고, 의외로 용호군 장군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그렇고, 호사천은 자신이 딸을 잘못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
새순이 돋아나는 계절. 드디어 예상되었고 또한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던 일이 벌어졌다. 천림왕은 대상(大喪) 기간 중임에도 불구하고 용호왕부를 역천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사흘 후 남원주에 30만 서병이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다시 이레 후에는 병주 토제가의 7만 대군이 남원주 동쪽 경계를 넘으니 천하는 예상하지 못한 일에 크게 놀라 더욱 귀추를 주목했다. 서제와 용호왕 백호나한의 충돌은 이미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병주 토제가의 참전은 전혀 뜻밖의 변수였다. 그리고 그 변수는 용호왕부에겐 매우 이롭지 못한 변수이기도 했다. 더불어 원주로 들어선 서병은 아군 지대를 통과하듯 무혈로 천림왕의 입김이 닿아 있는 주요 거점들을 손쉽게 확보해가며 북진을 계속했고, 상경의 용호군은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남원주의 전장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상경 황진성을 중심으로 한 상경부 지역에서의 방어전을 준비했다.
“이런 시러베 잡놈 쥐새끼들이 감히 용호왕에게 칼을 들이댔단 말이야?”
“그래.”
잔폭광마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흥분하며 지심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물었다.
“그리고 또 어디라고?”
“병주의 토제가.”
“이 씹어먹을 토끼 새끼들이 간땡이를 동해 용왕에게 저당잡혔나, 감히 대용호왕부를 넘보다니.”
“….”
그렇게 길길이 날뛰는 잔폭광마였지만 바위섬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앙앙대던 잔폭광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고깃집 셋째 아들.”
“이썅! 땅꼬마들이 어른보고 말하는 뽄새가….”
“시끄럽다, 인간.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자랑하는 거냐?”
“지랄! 네가 나이를 얼마나 처먹었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해. 꼬마처럼 생겼으면 꼬마처럼 행동해야지.”
참으로 오랫동안(?) 라혼과 떨어져 지낸 잔폭광마는 어느새 본래의 걸쭉한 입담이 되살아나 있었다. 게다가 옆에서 작심하고 성질 긁어대는 귀엽지 않은 토지신들이 넷이나 있었으니….
“아아! 그래서 너는 귀림의 귀매같이 생겨 야생 귀매처럼 행동하는구나!”
“귀매?”
“귀림에 사는 산도깨비다.”
“이런 빌어먹을 종자들이….”
잔폭광마는 지심의 친절한 부연 설명에 와락 성질을 내며 토지신들에게 대부를 휘둘렀다. 그러자 잔폭광마를 충동질한 밸드는 뒤로 몸을 뺐고, 다른 드워프들은 잔폭광마에게 손도끼를 던지며 그를 견제했다.
―챙~! 챙~!
잔폭광마는 이미 초절정에 달하는 무공 고수였지만 귀림 드워프들의 솜씨 또한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짧은 대신 작은 덩치를 이용한 빠르고 민첩한 동작과 굵은 통뼈에서 나오는 힘은 상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함께 싸우는 연수 합격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지심은 잔폭광마와 토지신들의 다툼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잔폭광마는 바보였군.’
토지신들이 잔폭광마를 갈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자객교의 기관을 발견해 손보았는데 잔폭광마가 시험해보겠다며 가장 처음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토지신이 손을 본 기관은 잔폭광마의 무식한 도끼질에 8할이 부서져버렸다. 그 후 그러한 일이 서너 번 반복되자 잔뜩 골이 난 토지신들은 잔폭광마를 골려주는 함정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완성되자 이렇게 잔폭광마의 성질을 긁어 함정이 마련된 곳까지 유인했다. 그리고 이번이 네 번째였다. 사람이 두 번 또는 세 번 정도면 알 만도 할 텐데잔폭광마는 토지신들의 이른바 격장지계(激將之計)에 또다시 걸려들었다. 그리고….
“우악! 이 똥물에 튀겨 먹을 놈들이….”
―쾅! 퍽!
“이 지저분한 놈아! 넌 똥물에 튀긴 것도 먹냐?”
잔폭광마로선 오늘은 이래저래 열 뻗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