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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 農民戰爭
*19세기의 조선은 구체제가 동요. 內憂 外患이 겹침. 內的 矛盾 + 外的 矛盾
내적모순: (1)빈부격차 심화 (2)신분구조 변질 (3)봉건적 수탈 악화
외적 모순: 개항 이후 제국주의 침탈로 농민 경제 파탄. 서학의 도전
*내외의 挑戰에 어떻게 對應하느냐가 시대적 과제. 조선왕조는 매관매직, 三政의 문란, 가렴주구의 악순환. 사태 더욱 악화. 재야 지식인(實學者)들의 개혁안 영향 없음. 大院君의 개혁도 미봉책에 불과. 농민들이 구체제에 항거. 19세기는 民亂의 세기. 민란이 점차 확대. 질적 변화. 대표적 民衆蜂起 셋. 성격이 각각 다름.
·洪景來의 亂(1811-2)은 지역감정에서 출발.평안도 중산층이 주도. 농민층 소극적
·壬戌민란(1862)은 전국적으로 확산. 경상도 15 郡縣,전라도 8개 군현, 충청도 9개 기타 지역 3개. 주로 3남지역. 자연발생적. 비조직적, 산발적. 거의 다 춘궁기에 집중적으로 발생. 짧으면 2-3일, 길면 6-7일 계속. 참가수는 대개 수천명. 晉州 星州 濟州의 경우에는 수 만 명. 수령 쫓아 내고 악질 향리는 죽이고 집을 파괴. 지배체제에 도전하기 위한 이념과 조직이 결여됨.
·갑오농민봉기는 양상이 전혀 다름. 組織과 理念 뚜렷. 變數: 東學理念+경제파탄. 명칭 異見- 갑오농민봉기, 동학란.
<동학의 조직과 이념>
·敎祖 崔濟愚(1824-1864)는 慶州 見谷面 龍潭里 출생. 몰락 양반의 후예 庶子 漢學. 17세 孤兒. 울산지방 白木 장사. 1860.4.5(陰) 上帝 感應 得道했다고 靈符와 呪文. 呪術師 豫言者. 포교 시작. 3년 동안에 경상도 일대에 퍼짐. 각처에 接所와 接主. 1863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봄 대구에서 사형. 신도들 흩어짐.
·2세교주 崔時亨이 비밀히 포교. 10여년 동안에 교세가 크게 확장됨. 3남지방 및 경기와 강원도 까지. 특히 전라도에 신도 많았음. 큰 고을에 大接主를 두고 대접주가 包主를 겸. 包制. 충주에 法所(총본부). 1890년경 포접제 확대. 광범한 교단조직. 교리는 東學經典에 나타남. 東經大典 龍潭遺詞 등. 최시형의 口誦을 기록한 것.
·開闢사상. 末法사상. chiliasm millenialism 반체제적 성격. 呪術 降靈祭 劍舞. 반외세적 성격. 西道 洋學을 배척. 古來의 敬天 사상. 천주교와 일본도 배척. 사회혁명적 성격 + 민족주의적 성격
<개항 이후 농촌경제의 파탄>
·1876 丙子修好조약=불평등조약으로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강제로 편입됨. 일본에 이어 미국 영국 독일 등과도 통상조약. 무관세 치외법권(영사재판권). 개항 이후 일본과의 무역 약 10배 증가. 1875 수출 약 6만 엔, 수입 약 7만 엔-> 1879 수출 약 57만엔, 수입 약 68만 엔. 무역의 내용은 더욱 심각한 문제.
·수출: 쌀 콩 牛皮 등 농산물과 귀금속. 수입: 면직물 설탕 석유 우산 등 사치품. 일본 상인들 침투. 高利貸 해운업. 1885 이후에는 내륙지방에도 진출. 1890이후 특히 청일전쟁 이후 일본상인 진출 더욱 활발. 외래 상품 자본 농촌 침투. 買辦상인. 米穀 매입. 수입상품 판매. 면방직 등 수공업자 몰락. 쌀 콩 등 식량을 대량으로 반출. 국내 물가 앙등. 식량 부족. 농지매입 농사자금 융자(고리대). 농민 궁핍화 악화. 관료 지주 상인의 토지 집적. 중세사회 해체 가속. 민란 등 산발적. 조직과 이데올로기 없음. 동학의 조직과 교리가 민중 동원을 가능케 함. 현재의 대중운동과 비교
<동학운동의 시작>
·동학은 농민들의 불만을 하나의 운동으로 집결하는데 큰 역할. 包接制는 농민군을 조직하고 동원하는데 효과적. 개벽사상은 체제부정 논리. 除暴安民 등 구호는 농민충 의식의 성장을 반영. 혁명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 마련. 전라도에서는 全琫準 金開南 孫和中 등 혁신적인 지식인들이 가담. 활력소
·처음에는 敎祖伸寃 侵虐禁止(邪敎라고 禁壓) 운동으로 시작. 양민 침탈 자행. 1892년말 參禮驛에서 대규모 군중집회. 수천명. 충청 전라감사가 침학금지 약속. 교조신원은 감사의 권한 밖이라고. 집회군중 일단 해산.
·1893년 3월 대표 40여명을 서울에 파견. 과거 응시 유생에 섞여 감. 광화문 앞 伏閤上疏. 교조신원을 청원. 3일 3야 哀號. 정부는 이들을 강제해산. 대중운동으로 전환
·4월(양력) 최시형의 지시로 동학교도 약 2만명이 報恩 속리산에 집결. 지역별. ‘斥倭洋 倡義’ 깃발 세우고 기세 올림. 정부관리의 해산명령에 불응. 20여일 후 해산. 억울한 자, 소외된자, 도망친 자 등 반체제적인 사람들 다수 집결.
·北接(충청도)와 南接(전라도) 지도자들 사이의 견해차가 뚜렷이 나타남. 온건/과격. 다음 단계는 수탈이 가장 심했던 전라도에서 민란의 폭발.
* 古阜에서 全州까지: 1894.2.10(陽)-12.30
·전형적인 민란으로 시작. 고부 군수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항의로 시작. 萬石洑 不孝不睦 등 죄목으로 2만량 수탈. 전봉준 앞장 진정서. 쫓겨남. 농민 1천여명이 장터에 모여 官衙 습격. 군수 도망. 아전들 징벌. 곡식 분배. 십여일 만에 해산. 안핵사 李容泰가 驛卒 8백명 거느리고 가서 갖은 악행. 농민 체포 재산 약탈.
·4월 하순. 전봉준 通文으로 고부 泰仁 농민군 다시 궐기. 白山 점거. 5월 초순 출동 부안 군청 점거(8일) 황토현 전투(11일)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
·서울에서 파견한 정부군과 전투하여 승리(5.25 長城). 5.31 전주 입성. 6.1 정부군 完山에 진을 치고 성내의 농민군과 대치. 농민군 몇차례 출격. 많은 사상자. 후퇴. 정부 선무공작 계속. 농번기. 淸日軍 출동. 전봉준과 초토사 홍계훈이 ‘全州和約’체결(6.11) 농민군의 弊政개혁안을 정부가 수용. 농민군 철수. 정부군 전주 입성.
·한편 충청도의 북접은 5월 중순에 궐기했으나 정부군 출동하자 곧 해산.
* 개혁운동과 2차봉기
·전라도 지역 행정 마비. 전라감사가 전봉준에게 타개책을 협의. 53읍 집강소 설치. 불응하면 무력으로 진압. 수령은 허수아비. 집강소가 치안담당. 폐정 개혁. 12개조
·道人과 정부의 협조. 貪官汚吏 횡포부호 불량양반 징계. 노비문서 소각. 賤人 대우 개선.청춘과부 改嫁허용.無名雜稅 혁파. 인재등용. 일본 내통자 엄징. 공사채 탕감. 토지의 평균분작. 농민들은 집강소 개혁을 환영. 경상도 등 지역 농민도 동요 시작.
·그러나 淸國 日本 양국의 개입으로 사태 변화. 전주 함락 후 정부가 청군 파견 요청. 전주화약 성립 때 청군 2800명 牙山 상륙. 일본군 4천 여명도 인천 상륙. 공동철수 협의. 6월말 일본군 약 2천명 증파. 조선의 內政개혁을 요구.
·7.23 경복궁 점령. 조선군대 무장해제. 친일파 정권 수립. 7.23 청국 군대도 증원. 양군 각 5천명 병력. 7.25 일본군이 청군 공격. 전쟁시작. 훈련 무기 보급 작전 모두 일본이 우세. 육군 해군 모두 청군을 격파. 10월말 滿洲 遼東에서 전투. 11월 중순 요동반도 장악(이듬해 1-2월 山東반도 장악. 淸은 굴욕적인 講和조약 체결).
·10월 하순 전라도 농민군 10만명이 삼례에 집결. 충청도 농민군 10만도 靑山 집결. 북접과 남접의 농민군이 論山에세 합세. 北上하여 公州를 점령키로. 막상 북상하니 농민군 대부분 이탈. 약 1만명 동원. 일본군 1개 대대와 그 지휘하 정부군이 남하.
·11.27 공주 일대에서 전투 시작됨. 12월 중순 牛金峙에서 치열한 전투. 6,7일간 4,50회 공방전. 농민군 붕괴. 그후 북접 남접 농민군은 충청 전라 각처에서 패배. 12.30 전봉준 등 지도부 체포됨.
·일본의 간섭으로 反封建 反帝國 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내적 외적 모순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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