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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政治理念의 全文과 解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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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3(2012)년 3월 30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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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政治理念”이란 책자의 간행은 1947년(포덕 88년) 4월 5일에 초판이 간행된 이후, 초판의 원본이 희귀(稀貴)해져 필요로 하는 연구자에게 자료로 제공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덕 110(1969)년 3월 20일에 삼일재현운동의 전말(顚末)을 밝히고자 고 유은덕(故 劉.恩德)여사가 환원한 지 20 년이 되며 환갑을 맞게 되는 해를 맞게 되자 자녀들이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간행하게 된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에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부록으로 복간하였다. 약 10 여년이 지난 후 교단의 필요에 따라 포덕 120(1981)년 3월 l일에 재판(再版)간행하여 판매하였다. 그 후 김 철(金 哲) 전 교령이 이끌었던 동학 선양회에서 포덕 129(1990)년 9월 25일에 “東學”이란 천도교 관련 무크(MOOK)誌를 간행하면서, 첫 해인 1990년에 간행된 “東學” 제 1집에 자료로서 게재되었다. 이 두 개의 자료는 원본(原本)이 아니고, 수정내용의 상당한 차이가 있는 수정본(修正本)이다. 이 수정본을 게재하게 된 동기와 이해의 정도와 그리고 수정의 정도와 수정을 하게 된 편집자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두 책에 게재된 해설문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복간 게재에 부친 편집자의 소개의 말.
1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의 附錄(PP. 209 - 246)에 부친 편집자의 말.
이 부록은 천도교 총부 知道觀 편찬으로 “천도교 정치이념”이란 小冊子의 全文을 옮겨 실은 것이다. 1947년 4월 5일자 발행의 이 책자는 국판 半折판 75면의 작은 분량의 글이지만 그 당시의 국내정세와 교회 수뇌부들의 생각을 부각시킨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1946년 11월경에 起稿되어 다음 해 봄 天日紀念을 계기로 活字化한 것으로 1948년 3.1절을 期해 全 北韓을 휩쓴 3.1 再顯 운동의 시대적 배경의 이해에 도움 될 자료임으로 附錄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보는 천도교의 정치이념으로서는 크게 참고할 것도 있을 수 없겠지만 당시의 사정과 그 때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알아보는 데에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起稿된 動機를 遡究해 보면 第 2次 美,소 의 答辯書를 준비하기 위한 당시의 청우당 간부들에게 교회에서 제시한 정책적인 요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밝혀두어야 할 것은 당시에 통용되던 文句들과 맞춤법이었기에 多少 수정이 不可避했음을 附記해 둔다.(편집자)
2. 東學 제 1 집에 게재된 “天道敎 政治理念”(PP. 278 - 319)의 解題.
「天道敎政治理念」은 1947년(포덕 88년) 4월 5일에 당시 天道敎總 本部 知道觀(觀長 金秉濟)에서 편찬한 菊半版 (가로 9.8cm, 세로 14.3cm) 71面(초판에서는 75면으로 되어 있다.)의 小冊子이다.
이 자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발행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모스코바 三相會議 합의에 따라 戰後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 美蘇共同委員會가 구성되어 덕수궁에서 1946년 1월에 예비회담을 거쳐 제 1 차 회의(1946년 3월 20일- 5월)와 제 2 차 회의(1946년 5월 27일 - 10월) 가 열렸으나 신탁통치문제 등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미소공동위원회는 각 政黨, 사회단체에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해서 答申書의 제출을 요구 했다. 이에 天道敎團에서도 간부진이 모여 답신서 준비를 위한 기초작업의 일환으로 天道敎의 政治理念에 대해 熟議한 끝에 이를 체계화시켜 발행한 것이「天道敎政治理念」이다. 당시 이 문제를 숙의하는 자리에는 金秉濟, 金炳淳, 朴宇天, 孔鎭恒, 李應辰, 宋重坤, 李錫保 등 天道敎와 靑友黨 관계자들이 合席했다. 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합의과정을 거쳐 金秉濟를 대표 집필자로 해서 1946년 11월경 起稿했는데 1947년 3월경에는 북한 天道敎靑友黨의 朴允吉 부위원장이 上京하여 함께 草稿를 검토했다고 故 安炳武氏가 증언한 바 있다. 이렇게 해서 다음해 4월 4일 天道敎 天日紀念日을 기해 이 책자를 발행하게 된 것이다.
이 책자가 나오던 1947년 초까지는 비록 삼팔선이 있었다고는 하나 남북간의 비공식 왕래가 가능했던 시기였고, 더욱이 북한의 종교말살정책이 본격화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북쪽의 天道敎와 靑友黨활동이 全盛期를 이우었던 때였다. 따라서 당시 천도교는 나름대로의 독자적 政治路線을 표방, ‘朝鮮的 新民主主義’를 주장하면서 좌익도 우익도 아닌 自主路線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東學의 근본교리를 바탕으로 한 천도교의 정치이념의 근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자료를 轉載함에 있어서 原文의 한문만은 현대문에 맞도록 고쳤음을 밝힌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복간의 필요성이 간행을 한 주체들이 처한 상황이 많이 고려되었다는 점과 “天道敎 政治理念”의 간행 경위에 대한 이해도 달라 조금 다르게 기술하고 있으며, 각각 수정의 이유와 정도가 다름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三一再顯運動誌”의 附錄에 게재된 “天道敎의 政治理念”의 내용이 편집자가 말한 ‘끝으로 밝혀두어야 할 것은 당시에 통용되던 文句들과 맞춤법이었기에 多少 수정이 不可避했음을 附記해 둔다.’ 라는 것과는 달리 단순히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장의 첨삭(添削)정도가 상당량(相當量)에 이르러 원문(原文)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어려울 정도로 훼손(毁損)되었으며 편집자가 간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임의(任意)로 편집자의 잘못된 견해와 주장이 첨가되어 해방공간에서의 청우당의 입장을 바꾸어 놓은 점도 있어 사료적(史料的) 가치의 손상(損傷)이 매우 심했다. 아마도 이런 잘못된 태도는 편집자가 말하고 있는 ‘그러나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보는 천도교의 정치이념으로서는 크게 참고할 것도 있을 수 없겠지만, 당시의 사정과 그 때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알아보는 데에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한 것은 근현대 역사의 흐름과 천도교 교단의 핵심적인 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온 것이라 사료된다. 이와는 달리 “東學” 제 1 집에 게재된 “天道敎 政治理念”은 간행 경위를 소상(昭詳)히 밝히고 있고, 편집자가 말한 ‘끝으로 이 자료를 轉載함에 있어서 原文의 한문만은 현대문에 맞도록 고쳤음을 밝힌다.’ 고 한 그대로 수정하여 원본(原本)에 매우 가깝게 게재하였다.
천도교 교단에서 가끔 간행되는 자료들 중에는, 원문(原文)대로 하지 않고, 현대문으로 수정 간행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로, 그 자료들이 집필되고 간행될 당시의 상황과 표기(表記)를 알아 볼 수 없게 하여 자료적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묵인(黙認)되거나 용인(容認)되는 상황은, 오늘의 천도교 교단을 실재(實在)하게 한, 역사의 도정(道程)을 단절시켜, 교단을 시대적 발전에 역행하게 하거나 현재의 우리의 상황을 퇴행시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는 점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뒷밭임해 주는 위에 소개한 두 개의 책자를 비교해 가며 읽는 다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1946년 11월경에,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는 추강(秋岡) 김병제(金秉濟)에 의하여 집필되기 시작하여 포덕 88(1947)년에 4월 5일자로 간행된 “天道敎 政治理念”이란 국 반절판 75페이지의 소책자가 말해주고 있는 것은, 새 시대의 지향점을 제시한 대표적인 교서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교서를 통해서 해방정국(解放政局)에 있어서의 국내외정세와 교단의 지휘부의 생각을 엿볼 수가 있다. 미군정의 산하 기관인 제 2차 미,쏘 공동위원회가 당시 한국의 ‘제 정파(諸政派)’에게 ‘건국이념’을 제출해 달라고 한 데 대한 답변서로서 제안된 것이다. 이 글의 기초적인 견해는 청우당 간부들에게 교단이 제시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정책적인 대안으로서 제시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을 정리한 추강 김병제(秋岡 金秉濟) 선생도 ‘천도교의 문화는 과거의 특권 계급만의 문화가 아닌 대중생활을 향상시키고 대중정서를 함양시킬 수 있는 민주문화’라고 정의한 바 있다.
註 01; “天道敎의 政治理念”의 원본과 두 개의 수정본의 비교분석 연구는, 필자가 계획하고 있는 10여 편의 연구논문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에, 위의 삼 개 본의 자료를 분석 정리한 연구 자료의 구체적인 내용을 여러 분들에게 알려드리기 위하여 게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덧붙일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어구(語句) 그리고 문장에 대하여, “天道敎 政治理念”의 전 문장을 충분히 이해하기 쉽도록 주(註)와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와 전후 단락을 고려한 해설문장을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교단은, 해방공간(解放空間)에서 사상의 혼란기를 맞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재빨리 이 시대를 이해하고 적응하도록 인도하고 새로운 삶의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천도교가 용시용활(用時用活)을 중시(重視) 여기는 종단으로서 험난(險難)한 구한말과 일제의 식민지 시대와 혼란한 해방공간 속에서도 자생(自生)할 수 있는 저력(底力)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동학이며 대 종단다운 천도교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6.25동란이후 교단이 동력(動力)을 잃고 쇠퇴(衰退)의 길로 접어들게 된 원인은, 시대는 급변(急變)하고 있는데 교단은 수도수련이라는 악수(惡手)를 두어 자멸(自滅)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교단은 저변(底邊)에 깔려 있는, 저력의 원천(源泉)이 되는 교리의 변화를 읽을 줄 알았어야 했고 새로운 지향점(指向點)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리고 동력(動力)의 주체(主體)가 되는 새 시대에 걸 맞는 교역자를 양성했어야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교서의 내용으로 보아,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천도교 교단이 교단내외에 천도교가 어떤 종단이며 어떤 정치적인 목표와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싶었으며 제시된 방향으로 매진(邁進)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감지(感知)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점(頂點)이었고 끝이었다. 오직 남은 것은 찬란했던 지난 과거사에 얽매여 헛된 망상(妄想)에 젖어 있는, 초췌(憔悴)한 군상(群像)들만이 급변하는 세계사조(世界思潮)와 현대 한국사회를 외면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웅크리고 있어서 일어서야 될 다리가 여위고 저려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해도 과언(過言)이라 할 수 없다.
이 “天道敎의 政治理念”은 포덕 110(1969)년 3월 20일에 초판으로 신인간사에서 간행된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의 附錄(PP. 209 - 246)에 원본에서 상당부분이 수정된 수정본(修訂本)이 게재되어 있다. 이 교서의 구성 체재는 다음과 같다.
註 02;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는 포덕 122(1981)년 3月 1日에 再版을 天道敎中央總部 出版部에서 했다. 이 책의 編者를 新人間社로 하고 있는 데 잘못된 기록이다.
초판에서 밝혔듯이 發行處가 新人間社로 되어 있지만, 新人間社는 간여한 바 없고, 三一再顯運動에 직간접을 관여되어 있는 吳 槿 동덕이 전체를 관장하여 내용을 결정하여 편집하여 그가 근무하고 있던 大韓公論社에서 인쇄 간행하면서 新人間社의 명의를 빌렸고, 發刊辭는 당시의 敎領이셨던 崔德新이 썼다. 이 책에는 跋文이 없이 본문만 게재되어 있다. 포덕 122(1981)년에 再版을 天道敎中央總部 出版部에서 발행하면서 본문 269페이지의 전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畵報를 발간사 뒤에 있던 것을 발간사 앞으로 옮겨 실으면서 초판에 게재된 화보 1-3페이지는 그냥 두고, 5페이지에 있던 故 劉恩德女史(吳 槿 同德의 內修道)의 사진(상단 좌)과 삼남매(吳龍珠, 龍海, 龍相)의 이름으로 환갑이 되는 날에 ‘-전략 - 어머님을 그리워한 나머지 그때 그 일을 글로 추려 모아 작은 책 한권을 만들어 -중략- 오늘 이 책을 삼가 제단 위에 올리오니 -이하 생략’하는 출간의 의도를 밝힌 ‘어머님께’라는 글(하단)을 빼고 대신 4-6페이지에는 三一再顯運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개인별 사진과 三一再顯運動의 密使를 파견하는 과정이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념사진을 게재했다. 그리고 發刊辭는 再版 當時의 敎領이셨던 李永福이 쓰고, 종무원장이었던 오익제가 머리말을 써 추가하고, 맨 뒤에 跋文을 新人間社 主幹 金應祚가 써 추가했다. 그리고 초판은 非賣品으로 관련학계와 관련인물들에게 증정되었으나 再版 때에는 당시 가격으로 1800원에 판매했다. 초판과 재판에는 수록되지 않았던 판권 부분과 발간 당시 天道敎總本部 知道觀 觀長인 金秉濟의 ‘發刊에 際하여’라는 서문이 동학 제1집의 資料에는 添加 수록되어 있다. 동학 제1집의 資料에서는 제목이「天道敎政治理念」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三一再顯運動誌”의 초판과 재판에서「天道敎政治理念」을「天道敎의 政治理念」이라고 부록 제목을 고쳐 게재하고 있다,
끝으로 필자가 ‘天道敎政治理念의 全文과 解題’를 정리하게 된 동기와 게재를 결정한 마음은, 지금 천도교 당면하고 있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절박함에도 있지만, 필자가 동학과 천도교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수운의 사상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의 권유로 “수운심법”을 통독하고 나서 울렁거리는 마음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불덩이 같이 울컥거리는 감동이, 수무살 전에 천도교 경전(삼부 경전) 간행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편집과 문장정리와 열 세 번의 교정을 보면서 느낀, 천도교 교리와 사상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다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 읽은 수많은 책들 중에서 “신인철학”과 “인내천 요의”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 그 후 우연히 만난 “天道敎政治理念”은 내 인생을 또 한 번 전환기를 맞게 하여, 지금 천도교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天道敎政治理念”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필자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경이(驚異)로움이었고, 한없는 감동이었다.
해방공간이라는 격동기를 맞고 있던 그 시점에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해결책으로 놀라운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안정됐다는 현실에도 적응을 못하고 허둥대고 있는 지금의 교단을 돌아볼 때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느끼게 한다. 그 당시 교단과 교단을 이끌고 갔던 지도부와 “天道敎政治理念”이란 주장을 밝히는 일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각 분야의 전문적인 지도자들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함과 시대정신(時代精神)을 읽어내는 탁월한 안목과 현실뿐만 아니라, 매우 불확실한 해방공간에서의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 할 수 있는 경탄스러운 예견과 철두철미한 대안은, 필자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로움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천도교 교리와 사상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많은 신조어(新造語)와 그 단어에 대한 해박하교 명료한 설명에 대한 감동은 평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해방 전후에 우리 민족이 처해 있었던 역사의 현실과 백의민족의 문화전통의 계승과 각 분야의 상황에 대하여, 광범위한 관련 자료와 국내외 정세를 바탕으로 하여 천도교의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시대감각과 이런 상황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었던 지도자들의 인식과 식견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天道敎政治理念”과 같은 지금의 현실과 미래를 열 수 있는 천도교의 확고한 이념과 사상을 정리하여 발표하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필자는 매우 부정적이다. 지금의 교단은 절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미 ‘天道敎政治理念을 되새겨 보며’란 필자에 글에서 명확하게 그 이유를 밝혀 놓았다. 단적으로 예를 든다면,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말까지 두 번에 걸쳐 발표된 통칭 ‘교단 발전 계획안’ 과 비교해 본 동덕들이라면 필자의 의견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다.
「수운심법」 또는 심학에서 출발하여 「신인철학」과 「인내천 요의」를 거처 「천도교정치이념」에까지 이르는 근대의 한 세기 속에서 이루어진 탁월한 동학과 천도교의 주의와 이념과 사상과 철학이 있고, 이것으로만 보아야 보이는 민족역사와 민족의 전통문화와 5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문화의 계승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한 이 나라 근대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동학혁명, 갑진개혁, 기미독립이란 3 대 개벽운동이 있다. 우리만이 우리의 힘으로 일으킨 다시개벽의 근대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고, 우리만이 우리의 사상과 철학으로 그 역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확정해 낼 수 있다. 동학과 천도교의 주의와 이념과 사상과 철학이 우리 민족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의미 있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준다. 우주 자연의 무위이화 법칙과 균형과 조화의 순환질서와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수운의 심법이 준 안목이,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인 지상천국이 어떤 세상이며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주었고, 급변하는 현실을 지혜롭게 수용하여, 확신에 찬 다시개벽을 통하여 불확실성의 미래에 대한 명료하고 확실한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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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天道敎 政治理念”은 포덕 131(1990)년 9월 25일에 창간호로 동학 선양회에서 간행된 “東學” 제 1집의 附錄 자료(PP. 278 - 319)에 원본에서 한문부분을 현대어에 맞게 수정된 수정본(修訂本)이 게재되어 있다. 수정본 중에 원본에 가장 가깝다. 이 교서의 構成 體裁와 內容 全文은 다음과 같다.
天道敎總本部 知道觀 編纂
天道敎政治理念
普成社出版部 刊行
發刊에 際하여
이 작은 冊子는 비록 簡單하나마 天道敎의 政治思想의 社會的 起因과 理論的 根據를 밝힌 同時에 天道敎의 政治運動에 對한 史實을 들어 그의 理念路線롸 및 鬪爭對象이 무엇이었던 것을 例證하고 아울러 解放 後 新朝鮮 建設에 對한 大體要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집을 짓는 데에 기둥, 들보, 석가래 等 材木될 만한 것을 골라 놓은데 不過할 뿐이요 아직 먹줄을 치고 대패를 놓고 골을 파고 자구로 깎아서 사개를 맞추게 되지는 못함과 같이 具體的인 理論的 體系와 現實的 政策을 完全히 내세우지는 못하였다.
앞으로 靑友黨의 理念 路線과 現段階의 政綱 政策을 具全한 冊子가 續刊될 것 前提로 하고 于先 이것은 發刊하면서 讀者諸賢의 諒察을 바란다.
布德 八十八年 三月 三十一日
天道敎總本部 知道觀
金 秉 濟
天道敎의 政治思想
目 次
一 天道敎의 政治理念과 社會的 根據
二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理論的 根據
一. 同歸一體說
二. 事人如天說
三. 保國安民說
四. 天職天祿說
五. 萬事知는 食一椀說
六. 奴隸解放
七. 政治的 實踐運動
八. 殉道精神
九. 後天開闢
十. 사람性 自然史觀
十一. 地上天國理想
三 天道敎의 政治運動史와 그 意義
甲(一). 甲午革命運動
乙(二). 甲辰改革運動
丙(三). 己未獨立運動
四 天道敎靑友黨의 出現과 그 意義
一. 天道敎靑友黨이 생겨진 經路
二. 天道敎靑友黨이 出現된 意義
三. 天道敎靑友黨의 運動目標
五 天道敎의 建國理念
甲(一). 民主政治
乙(二). 民主經濟
丙(三). 民主文化
丁(四). 民主倫理
六 天道敎靑友黨의 復活과 그 政治的 進路
1.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社會的 根據.
天道敎의 政治思想은 崔水雲 先生으로부터 當時의 國內政勢와 國際情勢를 批判的으로 觀察하여 그 對策을 講究한데서 起因되었다.
當時의 朝鮮社會는 封建制度의 末期로서 온갖 弊害가 俱生한 때이다. 위로 庸君暗主들은 特權階級에 操縱되어 虛位를 지킬 뿐이었고 政府大官들은 各自의 位權 名利를 圖할 뿐 國家民生의 安危는 念頭에도 없었으며 더욱이 數百年來의 黨爭은 自黨擁護政敵打倒에만 彼此 熱中하기 때문에 國家에 將次 大禍가 생길 것은 全然 沒覺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瓜牙인 貪官汚吏輩는 民衆의 膏血을 搾取하는 一事에 專念하였었고 地方土豪는 亦是 貧賤大衆에게 使役討索, 私刑을 恣行하되 此를 當然視하였었으며 國家風敎에 主導的 地位를 가진 儒林이 또한 그들의 本務인 講學明倫은 名色뿐이요 土豪 地主輩와 三角同盟이 되어 가지고 一般民衆을 抑壓 搾取하였으며, 그 때의 經濟狀態는 原始的인 手工業으로서 特히 土地制度는 封建的이었기 때문에 絶代 多數의 農民은 거의 全部가 小作人으로서 地主의 搾取는 勿論이요 그 身分까지 地主에게 從屬된 奴隸生活을 하였었고 小數의 自作農家가 있다 할지라도 그 門閥이 만일 兩班階級에 屬치 못한 사람이면 土豪의 魚肉됨을 免치 못하였으며, 또는 그 때의 倫理道德은 儒敎國是이니만큼 封建的 典型道德인 五倫三綱의 名目이 있기는 있었으나 그나마 儒敎의 本旨인 王道의 愛國愛民인 紀綱과 敎化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特權階級의 民衆搾取에 대한 利用道具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政治는 腐敗하고 經濟는 貧弱하고 倫理는 頹廢하여 國家는 날로 敗亡의 域으로 기울어지고 民生은 날로 塗炭에 헤매이게 되었다. 이에 貧賤大衆은 행여 살아날 길을 얻을까 하여 直接 執權者에게 反抗하는 民擾가 到處에서 蜂起하였고 或은 外來의 勢力에 依存하고자 하여 天主敎에 歸依하는 者도 있으며, 或은 在來의 秘訣에 의하여 十勝之地와 眞人出現을 期待하는 等 各種의 可憐한 光景 呈하였었다. 이것이 當時의 國內政勢의 一端이었던바 崔水雲은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君不君 臣不臣」이라 하여 政治의 腐敗를 表徵하고
曰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라 하여 倫理의 頹廢를 表徵하고
曰 「一世上 저 人物 塗炭中 아닐런가」하여 民生의 苦難을 表徵하고
曰 「儒道佛道 累千年에 運이 亦是 다했던가」하여 宗敎의 衰微를 表徵하였었다.
다음 國際情勢로는 英國의 産業革命과 佛蘭西의 政治革命을 經過한 西洋의 資本主義 列强의 勢力은 벌써 國外發展을 圖하여 帝國主義的 侵略의 魔手를 印度, 緬甸(버마), 東印度, 安南, 中國, 等地에 펴고 있는 때이다. 卽 一八四O年에 中國에서는 有名한 阿片戰爭이 일어나 英國은 中國의 香港을 奪取한 外에 五港의 開放을 얻었고 又「아론」號(英國商船) 凌辱事件과 佛國 宣敎師 殺害事件으로 因하여 一八五六年에 聯合軍의 北京侵入이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 露西亞는 愛琿條約에 의하여 黑龍江 以北의 地를 割取하였고 나아가 沿海州를 取하는 同時에 「浦鹽斯德/우라지보스독크」를 軍港으로 定하여 西伯利亞(시베리아) 鐵道를 敷設하여 滿洲와 朝鮮으로 進出할 計劃을 세웠었다. 이와 같이 西洋의 資本帝國主義의 勢力이 東洋의 中心인 中國 全土를 유린하고 西로 北으로 浸浸然히 半島 三千里를 掩襲하고 들어오는 이때에 있어서 朝鮮의 上下는 그에 對 하여 오직 異壤의 感다을 가졌을 뿐 아무런 對策이 없었으며, 마침내 純祖 三十一年(一八三一年)에 英船一隻이 洪州 古代島에 出現한 일과 憲宗 十一年에 英船 一隻이 또다시 南海岸을 回遊한 일과, 그 이듬해에 佛船의 洪州 外烟島에 致書함과 같은 일은 當時 民心을 極度로 刺戟시켰다. 이것이 그 때 國際政勢의 대략이었던 바 崔水雲은 亦是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 功取天下 立其堂行其道」
曰 「西洋 戰勝功取 無事不成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嘆 保國安民 計將安出」(布德文)
曰 「西洋之人 功鬪干戈 無人在前 中國消滅 豈可無脣亡之患耶」(論學文)
라고 하였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첫째 西洋 사람들은 말로는 하느님을 爲하기 때문에 富貴는 取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實際 行動은 武力을 가지고 天下를 攻取하며 그리고는 그 땅에다 敎堂을 세우고 自己네의 宗敎를 宣傳한다는 것이오, 둘째는 西洋은 武力이 發達되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와든지 싸우면 반드시 이기어 成功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대로 나간다면 天下가 다 消滅할 터이니 우리 朝鮮도 이에 따라서 脣亡齒寒의 歎息이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保國安民할 計策은 將次 어떻게 하여야 되겠는가 한 것이요, 셋째는 西洋의 武力에 東洋의 中心인 中國이 만일 消滅되게 된다면 우리 朝鮮은 脣亡齒寒의 화단이 없을 줄 아느냐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崔水雲은 다시 「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이란 嚴肅한 判斷을 내리우고 나아가 이 世界는 장차 큰 變이 생기리라, 그리하여 舊時代 舊社會 舊文化는 破壞되고 新時代 新社會 新文化가 創建되리라 하고 이에 奮然蹶起하여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게 되었나니 이것이 天道敎의 政治的 革命思想의 첫 出發이었다.
二.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理論的 根據.
當時의 朝鮮社會를 終幕에 들어선 末世로 보고 時運時變하는 社會法則에 依하여 新時代의 到來를 預斷하고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기 시작한 崔水雲은 十六歲부터 三十七歲까지 약 二十一年間 苦行, 讀書, 思索을 繼續하다가 마침내 庚申四月五日에 이르러 天道를 大覺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崔水雲은 먼저 이 時代를 先天 後天으로 갈라서 庚申以前을 先天時代, 庚申以後를 後天時代라 宣言하고 나아가 宗敎, 政治, 經濟, 倫理, 道德 等 先天時代의 旣成文物은 此를 一切 否認해 버리고 그 낡은 터전에다 새로운 經濟, 倫理 等의 建設을 前提로 하여 後天開闢運動을 일으키게 되었다.
開闢運動의 指導原理는 人乃天主義이다. 人乃天은 첫째 人間과 한울님은 그 本質에서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天人一體의 原理와 둘째 人間과 人間 卽 나와 남은 그 根本에서 亦是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自他一體의 原理를 가졌다. 그러니만큼 人乃天은 一面에서 宗敎意識의 源泉이 되어 온갖 道法과 敎化가 이에서 出發하고 一面에서 政治思想의 根柢가 되어 온갖 理論과 行動이 이에서 規定짓게 되었다. 여기에서 天道敎는 그 性格上 스스로 性身雙全 敎政雙方의 實踐行動을 具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本文은 主로 政治的理念을 究明하는 것이기 때문에 宗敎方面의 諸問題는 論外로 하고 政治方面에 觀한 것만을 추려서 말한다면 人乃天은 그 應用上에 있어서 스스로 平等과 自由를 內包하였다. 人乃天이란 天字를 一字로 解釋할 수 있나니 사람은 하나이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아래 사람이 없는지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떠한 階級이나 어떠한 差別을 認定할 수 없으며 人乃天이란 天字를 本字로 解釋할 수도 있나니 人間社會에는 人間이 根本이다. 人間의 위에 神的偶像을 設하여 人間의 自由를 拘束하거나 同一한 人間에게 名位의 偶像을 設하여 人間의 自由를 束縛할 理由가 根本으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人乃天主義를 政治的으로 實現하는데는 어쩔 수 없이 平等과 自由를 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平等 自由를 內容으로 한 人乃天主義에 立脚하여 이 社會의 現象을 檢討해보면 封建的 貴賤의 差別같은 것은 이미 撤廢되었지마는 아직도 有産無産의 差別, 官民의 差別, 男女의 差別, 民族의 差別, 人種의 差別 等은 儼然히 存在한다는 것이 事實이며. 이러한 差別이 있는 限 萬人의 自由도 거기 따라서 制約될 것이 또한 事實이다. 平等과 自由는 人間이 타고난 天然自在한 권리이니만큼 平等을 잃은 곳에 平和가 있을 수 없고, 自由를 빼앗긴 곳에 鬪爭이 없을 수 없는 것은 그야말로 天理요 天命이다. 이 點에서 天道敎의 政治的 基本理念은 사람사람에게 다같이 政治的, 經濟的, 文化的, 社會的으로 完全한 平等 自由를 實現하자는 데 있다. 이제 人乃天主義의 政治思想에 關한 理論的 根據를 充實히 하기 爲하여 崔水雲, 崔海月, 孫義菴 세 분 先生의 말씀과 行蹟을 列擧한다면,
一. 同歸一體說.
이것은 水雲先生의 말씀으로 여기에는 세 가지 重要한 意義가 있다. 그 하나는 「億兆蒼生 많은 사람 同歸一體하는 줄을 四十平生 알았던가」하여 將來世界는 人類 全體가 다 같이 一體的인 平等 自由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요 그 둘째는 「衰運이 至極하면 盛運이 오지마는 賢淑한 모든 君子 同歸一體 하였던가」하여 新時代의 盛運을 맞이하는 방법으로는 同歸一體的 團結이 있어야 되리라는 것이요 그 셋째는 同歸一體에 대한 哲理이다. 人間 社會는 모든 個人의 集結體요 協同體요 組織體이다. 그러므로 個人은 部分的 存在요 社會는 全體的 存在로써 部分的인 個人을 無視하고는 社會의 發展을 期할 수 없고 全體인 社會를 떠나서는 個人의 生存을 圖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世界에는 個性의 自由를 偏重하는 個人自由的 民主主義가 있고, 個人은 社會的 存在라 하여 社會化에만 偏重하는 全體主義가 있는 바 이는 둘이 다 一理가 있는 反面에 둘이 다 偏重의 缺陷이 있다. 偏重은 不調和를 낳고 不調和는 病痛을 부른다. 同歸一體의 哲理는 能히 이 不調和를 調和할 수 있고 이 偏重을 雙全할 수 있다. 同歸一體의 原理에서는 人間社會를 한 개의 人體와 같이 본다. 卽 社會는 肉體 全體와 같이 個人은 細胞 各個와 같이 본다. 그리하여 肉體 全體는 모든 機關을 꾸준히 調節하여 細胞의 均衡的 發育을 圖하고 細胞 各個는 各自 本能을 完全히 發揮하여 全體의 繼續的 健全을 圖함과 같이 人間社會도 이 原理에 맞도록 組織하여 社會와 個性의 雙全的 發展을 圖하자는 것.
二. 事人如天說.
人乃天은 그 應用에서 事人如天이 되고 事人如天은 그 實踐에서 平等 自由를 主張한다. 이것은 天道敎의 新倫理, 新道德의 最高準的으로서 過去의 封建的 階級 道德이나 資本制的 個人中心의 道德을 否認하고 나서 人間性 自然을 基礎로 한 人格本位의 道德이다. 貴賤 貧富의 差別이 없는 것은 勿論이요 人間相互間 自然스러운 心情에서 우러나는 尊敬과 感謝와 親愛로써 相對하는 道德이다.
三. 保國安民說.
崔水雲은 原來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大思想을 품은 世界的 大 宗敎家이면서도 한편으로는 熱熱한 愛國主義者이다. 그래서 그는 「陷之死地 出生들아 保國安民 어찌할꼬」하여 이 나라가 將次 亡할 것을 애타게 걱정하고 이 民族 이 民衆의 將來할 苦難을 눈물나게 근심하였었다. 그리하여 그 方法으로는 各自爲心하지 말고 同歸一體하라는 것을 至再至三 强調하고 나아가 我國運數를 먼저 한다 하면서 開闢運動의 急先 課題로서 精神開闢, 民族開闢, 社會開闢을 提示한 것.
四. 天職天祿說.
水雲先生은 經濟問題에 對하여 具體的으로 明示한 것은 없으나 그러나 「한울님이 사람을 내고는 반듯이 職業을 주었다.」는 말씀과 「한울님이 사람 낼 때 祿없이는 아니 낸다.」는 天職天祿說에 依據해 본다면 水雲先生의 經濟的 平等觀을 如實히 發見할 수 있다.왜 그러냐 하면 天理로 볼 때에는 日月星辰 山河海陸은 다 같은 公有物이라 人類 全體의 生活을 營爲할 수 있는 것이요, 人間 自體에는 自己生活을 自作自給할 수 있는 耳目口鼻 四肢 百體의 機關이 具全하고 그에 따른 勞動能力이 自在하니만큼 이는 根本天理로서 人間 各自에게 天職과 天祿을 고르게 준 것이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今日 世相은 天職을 잘 지키는 勞動者 農民은 天祿을 받지 못하여 飢餓에서 울고, 天職을 지키지 않는 무리가 도리어 남의 天織까지를 獨占한 셈이니 이것은 天理天命에 違反한 社會的 罪惡인지라 當然히 根本的 改革이 있어야 할 것.
五. 萬事知는 食一椀說.
이는 海月先生의 말씀으로 위에 말한 水雲先生의 天職天祿說을 좀 더 露骨的으로 表示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人間萬事의 根本的인 解決은 무엇보다도 大衆에게 밥 한 그릇을 平均히 分配함에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人間社會에 있어서 個人 個人 間의 分爭이나 階級 階級間의 鬪爭이나 民族 民族間의 軋轢이나 國家 國家間의 戰爭이란 것은 그 根本 原因을 캐고 캐어본다면 기실 밥 한 그릇 싸움에 不過한 것이다. 말하자면 남의 밥그릇까지 빼앗아서 제 所有를 삼겠다는 强者의 貪慾과 제몫에 오는 밥그릇만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弱子의 不平 그것이 人間社會 모든 紛亂의 最大 原因이다. 그러므로 人間萬事의 解決策은 空然히 크고 어려운 問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人人 各自의 食一椀 問題에서 출발하여야 된다는 것.
六. 奴隸解放.
水雲先生은 最初 階級打破의 示範으로 家門傳來의 奴隸를 解放하여 一女는 子婦를 삼고, 一女는 養女로 삼아 出嫁시켰다. 百年前 그 때에 奴隸를 解放하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子婦와 養女를 삼았다는 것은 實로 澈底的이라 할 수 있는 것.
七. 政治的 實踐運動.
水雲先生은 得道後 겨우 四年 만에 殉道하였기 때문에 政治的 實踐運動은 直接 指導하지 못하였거니와 崔海月先生은 甲午革命運動을 直接 指導하였고 孫義菴先生은 甲午運動時에도 第一線에서 싸우고 甲辰改革運動이나 己未獨立運動에는 最高 首領으로서 直接 指導를 하였었다. 三大運動의 意義를 다음 章에서 具體的으로 解說하겠거니와 두 분 先生이 이 三大運動의 直接 指導者이니만큼 天道敎의 政治的 理念은 理論보다는 行動에서 스스로 明示된 것이 事實인 것.
八. 殉道精神.
過去의 모든 先覺者 革命家들이 받은 苦難과 迫害와 犧牲을 崔水雲, 崔海月, 孫義菴 세 분 先生도 꼭 같이 받으셨다. 水雲先生은 異端의 指目으로 當時 政府에 잡히어 「左道亂正」이란 罪目으로 大邱 將臺에서 斬刑을 當하였고, 海月先生은 秘密結社인 東學黨을 指導하기 凡 三十五年間에 刀山劍水의 갖은 苦難과 迫害를 받다가 마침내 政府에 잡히어 또한 「左道亂正」의 罪名으로 京城監獄에서 絞刑을 當하였으며, 義菴先生은 그 初年에 海月先生을 쫓아서 구들돌이 검을 새 없이, 돗자리가 더울 새 없이 各地로 轉轉하면서 온갖 苦難과 迫害를 받은 것은 莫論하고라도 東學黨을 單獨 指導하게 된 後에도 到底히 國內에서는 藏身할 길이 없기 때문에 不得已 姓名까지 變하고 外國으로 亡命하여 或은 上海로, 혹은 日本 東京, 大阪 等地로 逼留하면서 別別 苦難을 다 겪었으며 마침내는 三一運動의 領首로서 刑期中에 還元하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세 분 先生이 이 道法 이 主義를 實現하기 爲하여 旣成社會의 모든 勢力의 迫害와 싸우면서 百折不屈의 初志를 終始一貫해 나아가다가 畢竟은 生命을 버리고 主義를 살린 그 精神 그 氣魄은 眞實로 天道敎의 革命思想을 雄辯으로 立證한 것.
天道敎政治理念의 全文과 解題(上)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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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스크렙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