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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예술, 부동예술, 상을 사용하는 예술 |
시간예술, 동작예술, 동작과 소리를 사용하는 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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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안적 예술, 추상적 예술, 분명한 연상이 없는 예술 |
예술을 만족스럽게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한 정리- 예술의 영역은 고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기준이 적용되고, 어떤 규준에 의해 예술이라고 규정된 것이 다른 규준으로는 예술이 아니라고 규정되기도 한다.
3장 예술: 예술과 시의 관계사
1. 예술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희랍의 개념
시, 음악, 건축, 조형예술, 그래픽 예술, 이 모든 표현들은 다 희랍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예술을 지칭하기 위해 현대인들이 희랍어로부터 그 표현들을 가져다 썼던 것이다.
우리의 예술이 희랍인들의 예술로부터 전해내려 온 것이긴 하지만, 그들의 예술, 예술적 제관계 및 미적 견해 등이 우리와 일치 하지는 않는다. 예술에 대한 희랍인들의 개념체계는 예술의 개념과 매우 특별하고 협소한 수많은 개념들만을 가지고 있다.
2. 예술의 개념
희랍인들이 시와 시각예술을 다르게 분류했던 것은 시인과 시각예술가에 대한 그들의 사회적 평가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예술을 실천하기 위해 정교한 손재주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지적 능력 즉, 해당기술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테크네라는 희랍적 개념의 전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순수예술이 하나의 분파로 나타나서, 근대에 와서는 여러 예술들 중 가장 두드러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예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예술은 신체적 노력에 대한 의존도에 따라 다소 다르게 교양예술과 부수적 또는 구속적 예술로 구분되었다. 예술에 대한 다른 분류들도 때때로 고대 희랍에서 채택되곤 한다. 스스로 직무를 수행해내는 예술과 다른 인자들에게 의지하는 예술고 구분하는 것이었다.
3. 시의 개념
시의 제작인 희랍인들이 공식화한 예술 개념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시가 예술이 가진 두 가지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시는 물질적 의미에서 제작이 아니면서, 완전히 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시는 일반적 법칙들의 소산이 아니라 개인적 이념의 소산이며, 틀에 박힌 것이 아니라 개인의 조력의 소산이며, 기술이 아닌 영감의 소산이라고 생각했다.
희랍인들은 시와 예언력 간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조각가가 일종의 기술고이라면 시인은 일종의 음유자였다. 조각이 순전히 인간적인 반면, 시인의 작업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보다 단순한 범주들을 사용했던 고대인들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단지 두 가지로만 이해했다. 인간은 대상을 생산하거나 감지하는 것으로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시와 음악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시와 시각예술은 다른 범주의 현상으로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치해 있는 단계도 달랐다. 시는 시각예술보다 무한히 더 높은 단계에 있었다.
4. 미의 개념
현대의 개념이 고대의 개념에서 유래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랍의 미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 크게 다르다. 그들의 개념은 윤리학이나 수학까지도 포함할 정도로 넓었다. 대부분의 경우 ‘아름답다’라는 말은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또는 칭찬할 만 하다 등을 의미했다. 선하다는 것과 극히 미묘하게 사소한 차이가 날 뿐이었다.
미란 한 부분과 다른 부분들 및 전체와의 비례 속에 존재한다는 퍽 널리 알려진 정의가 있다.
5. 창조성 creativity의 개념
희랍인들은 예술에 대한 창의적인 이해력까지 결여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 우리시대의 예술적 의식인 시를 시각예술 및 음악과 연결시킨다. 이들은 예술을 틀에 박힌 과정의 하나로 이해했다. 예술적 제작속에 오직 물질, 노동, 형식만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6. 아파테apate, 카타르시스katharsis, 미메시스mimesis
희랍인들은 창조적 태보뿐만 아니라 심미적 태도도 식별하지 못했다. 예술로 인해 생겨나는 경험 안에는 지각과는 별도로 어떤 특별한 종류의 다른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1)연극은 어떤 현상을 창출하고 이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라고 믿게끔 한다. 이것을 아파테 또는 화영이론은 연극이 환영을 산출함으로써 작용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2)카타르시스 이론: 음악과 시-최소한 시중 어떤 부분들-가 충격과 감정 및 상상력이 이성을 압도하는 어떤 상태를 낳으면서 마음속에 격렬하고 이질적인 감정들을 일으킨다는 생각. 3)미메시스 이론: 이 이론의 기반은 인간의 제작들 중에 어떤 부류들은 실재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에이돌라, 즉 비실재적 상, 허구적인 것, 허상, 환영들을 창출한다는 견해
7. 플라톤: 두 종류의 시
플라톤은 시 및 시와 예술간의 관계에 대해서 단호하고 강력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영감을 부여 받은 시와 기능적 시를 구별하지 않은 채 받은 인상이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디오티마로 하여금 신들과 인간 사이의 중간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에게 신들의 명령과 은총을 전해주며 그들을 통해 음유 예술이 하늘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국가’에서 시인과 시각예술가를 비교하고 대비시킬 때 그는 단지 잘 알려져 있고 인정받은 어떤 관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매우 다른 문제들을 접근시키기도 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모든 유형의 시는 인식이었고, 이 문제에 관한한 일반적인 희랍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8. 아리스토텔레스: 시와 예술의 첫 번째 접근
비이성적인 것을 반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마음속에는 시에 대한 음유적으로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미메시스가 모든 시와 예술에 고용된 것이 됨으로써 미메시스는 이들 모두를 모방예술이라는 하나의 부류에 속하게끔 하는 근거를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합리적인 개념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에 대한 예전의 개념이 바로 그런 류였다. 그의 사상에 가장 적합하고 그 자신이 선호했던 현상기술방식은 현상들을 행위와 제작물로서 기술적인 범주 안에 넣어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술의 실체를 미메시스인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9. 헬레니즘: 시와 예술의 두 번째 접근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몇몇 예술은 시와 더 가깝고 또 어떤 예술은 덜 가까웠지만, 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회화였다. 화화와 시 사이의 유대는 그들이 모방적이며, 실재를 모방한다는 점이다 결국, 시와 회화를 구별시켜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고대 이론가들에게 제기 되었던 것이다.
10. 중세: 시와 예술의 재분리
고대가 끝나가면서 희랍의 미학은 우리시대의 관념과 다른 관념에서 우리 시대의 관념에 가까운 관념에로 옮아오는 변화를 겪는다. 각 예술들은 고대의 공식을 좇아서 교양예술과 종속예술 또는 기능술로 구분되었다. 교양 예술은 중세의 학교에서 가르치던 문법, 수사법, 산술, 기하, 논리학, 천문학 등이었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칭하는 것은 중세의 예술 범주 속에서 든든한 기반을 잡은 동질적인 부분이 되지 못했다.
시는 기능술에도 교양예술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시는 예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는 기도나 고백문의 일종이었다.
11. 근대: 시와 예술의 최종적 접근
회화가 시의 모든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이제 통용되었다. 당시 회화는 위대한 재능과 뛰어난 작품들을 산출하였고 고유의 보편적 이론을 전개 시켰던 것이다.
매너리즘과 바로크 시대에는 회화가 더욱 시와 가까워졌다. 시는 회화에게 주제를 제공했고 회화는 시를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시는 회화처럼“은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것은 회화가 시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되어버린 것이다.
4장 미: 개념의 역사
1. 미 개념의 전개
미라는 말의 의미의 역사는 희랍의 미 개념이 우리의 미 개념보다 광범위해서 아름다운 사물, 형태, 색채, 소리 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고, 관습까지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찍이 소피스트들은 이 원래의 미 개념을 좁혀서 미를 시각이나 청각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한정했다. 이 정의는 미의 개념을 선의 개념과 구별 지움으로써 미 개념을 보다 잘 정의하게 하였다. 스토아학파는 미의 정의가 보다 진전되는데 적당한 비례와 색채를 가진 것이라는 정의는 소피스트들의 정의보다 범위가 좁았다. 희랍인들은 보다 좁은 의미로 미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균제와 조화는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후세에도 균제와 조화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중세 및 근대의 사상가들은 고대인들의 개념적, 용어 장치들을 이어받고, 동시에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서 보충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는 시각예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 개념을 좁게 보려는 경향을 가졌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미는 희랍원래의 미 개념으로 미학 뿐 아니라 윤리학까지 포괄한다. 순전히 심미적 의미에서의 미는 색채, 소리뿐 아니라 정신적 산물 등이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무엇이든지 다 포괄하는 것이다.
2. 대이론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시작된 대이론은 미를 보다 좁게 해석하는 의미였다. 그 토대는 음들의 조화를 주목한 데 있었는데, 이 생각은 비슷한 형태로 시각예술로 퍼져갔다. 비트루비우스는 한 건축물에서 모든 부분들 사이에 높이와 폭간의 적절한 비례가 이루어져 있어야 하고 대체적으로 균제의 모든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야만 미를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개시킨다. 이 같은 이론은 플로티누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재음미되었는데 그는 미가 부분들의 비례와 배열에 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것이 미가 존재하는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했고, 비례의 미는 비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례를 통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즉 비례를 조명해주는 영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라고 했다. 위디오니시우스는 미는 비례와 광휘 속에 존재한다고 했으며 울리크는 미가 조화와 명료성이라고 했다. 고대에서 근대로 대이론을 전달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보에티우스는 미를 부분들의 비례라고 언명했다. 르네상스 때에는 미는 여러 가지 요소들의 결합 수단에 의해서 성취된 조화라고 주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일반적 미 이론은 중세시대의 이론 그대로였고 고전적 개념에 근거하고 있었던 까닭에 중세의 사상가들과는 다르지 않았다. 대이론은 18세기에 와서 경험론과 예술의 낭만적 경향에 밀려 쇠퇴한다.
3. 보충된 명제들
대이론이 미의 이성적, 양적 성질과 객관성, 높은 가치 등에 관한 다른 많은 명제들과 이야기되어 진는 것은 갈릴레이의 ‘감각은 노예처럼 말을 듣지만 이성은 길을 안내하고 지배한다’는 말과함께 감각이 아닌 정신을 통해 진정한 미를 파악한다는 명제는 대이론과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미가 성질상 수적이라고 하는 명제는 여러 번 되풀이하여 대이론과 결합되었고 대이론의 형성과정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비례가 어떤 사물이 아름다운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정지었으므로 그 사물이 어떤 측면에서는 아름다운데 다른 면으로는 아름답지 않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대이론과 연결되어 있는 생각은 미가 하나의 커다란 혜택이라는 것에 일치를 보고 있는데 교회의 전통은 이와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18세기에는 예술들을 한데 결합시키고 규정짓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4. 제한조건들
미의 객관성에 대한 의심이 나타나면서 유사한 종류의 주관주의적 사고가 후세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비례의 미와 적합성의 미를 구분 지었는데 그 자체로 아름다운 비례와 다른 것을 위해 아름다운 비례의 구분이다. 이렇게 고전기에 미에 관한 비례의 이론과 적합성의 이론 모두가 나타났는데 미는 이상적이거나 감각적일 수 있고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일 수 있다. 근대의 저술가들이 대이론을 받아들였을 때 그 범위는 무의식중에 제한되어 있었다. 정를 예찬하였는데 정묘는 매너리스트들의 이상이었고 우아를 찬양하는 문필가 및 예술가들은 우아를 정묘와 같이 비례 및 수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았다. 미에 대해서 보다 비이성적으로 평가하려는 경향도 있었는데 미의 개념적 본질 즉 미를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회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 개념은 많은 변화를 거려 상대주의화, 주관주의화 되는 결과를 낳았다.
5. 기타 이론들
이천년 동안 어떤 이론도 대이론을 대치하지 못했으며 단지 보충하는데 그쳤다. 다음과 같은 이론들이 그것이다. 미는 다양의 통일로 되어 있다, 미는 완전성에 있다, 미는 사물의 목적과 그 사물간의 적합성에 있다, 미는 원형의 개념, 영원한 모범, 최고의 완전성, 절대 등의 현현이다, 미는 영혼, 내적 형식의 한 표현이다, 미는 중용에 있다, 미는 은유에 있다.
6. 대이론의 위기
위기의 뿌리는 철학과 예술 양쪽 모두 즉, 경험론 철학과 낭만주의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역전된 미에 대한 태도로 말미암아 대이론은 예술과도 경험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18세기 비평가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미를 이론화하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미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측과 이보다 더 영향력이 컸던 영국에서 수 세기 동안 미에 관해 토대를 쌓아왔던 객관주의적 개념을 공격하며 미가 단순히 어떤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측이다. 고전이론이 미를 식별하는 능력을 이성으로 돌렸던 반면 18세기의 저술가들은 상상력, 취미 등으로 돌렸거나 이성 대신 어떤 특별하고 독특한 ‘미감’을 요구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들은 대이론의 이성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7. 18세기의 기타 이론들
18세기에 제안되었던 미의 구분들에는 두 가지가 기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기본적인 미와 상대적인 미를 나눈 허치슨의 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나온 것이지만 고전적 공식은 칸트로부터 받은 자유미와 부용미 간의 구분이었다. 부용미는 대상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데 대한 어떤 개념을 상정하는 반면 자유미는 그렇지 않다. 또한 18세기에는 두 가지의 다른 가치들이 미와 경쟁하기 시작했는데 ‘그림같이 생생한 것’과 ‘숭고한 것’이 그것이다. 미를 완전성과 연결짓는 것은 18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는데 멘델스존은 미를 ‘완전성의 명료한 상’이라 하였으며 멩스는 ‘완전성의 가적 관념’이라 했다. 미의 표현이론은 낭만주의와 더불어 득세했는데 꽁디악은 가장 지배적인 관념은 표현의 관념이라고 했다. 영국의 엘리슨은 시어뿐만 아니라 소리와 색채의 미까지도 감저의 표현으로 돌렸다. 그리고 미에 대한 이상주의적 개념을 대변한 빙켈만은 미개념을 ‘물질로부터 증류해낸 정신’으로 서술했다.
8. 위기 이후
계몽주의시대의 위기 이후 미에 대한 보편적인 이론들이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19세기 전반에 특별히 헤겔에 힘입어 옛 이론은 미가 관념의 현시하고 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미란 감각적 사물에서의 절대정신의 현현이라고 했다. 대이론도 재등장하여 특별히 독일에서 통용되었고 19세기 초엽 헤르바르트는 형식의 개념에 근거를 둔 미학체계를 전개시켰다. 이 체계는 헤겔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중엽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때쯤 미 개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던 반면 미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미적 경험에 치중하는 이 이론들은 감정이입, 허위의 감정, 표현 등 다양하기 근거를 두었으며 미에 대한 쾌락적인 이론 여기 급진적으로 다시 등장했다.
9. 두 번째 위기
18세기 미학의 커다란 사건은 미에 대한 모든 판단은 개별적 판단이라고 한 칸트의 언명이었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의 여부는 각각의 대상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보편적 전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세기에는 미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계속 추구했기 때문에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어떤 예술작품이 사람들을 미로써 즐겁게 해주어야한다는 것보다는 동요시켜야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결론짓게 되었다. 20세기는 미 개념을 비판하는 한편 미 개념을 개선시키고 그 가변성을 감소시키며 보다 실용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미학에 관한 20세기의 저술 속에 미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 일은 거의 드물다.
10. 결론
세상의 미로부터 예술 미로의 변화: 고대희랍인들에게는 미가 자연세계의 한 속성이었으며 자연세계의 완전함과 미에 대한 경탄으로 충만했다. 세상의 미에 대한 확신은 초기 희랍인들뿐만 아니라 후기 희랍인들과 로마인들까지도 토로하고 있다. 중세에도 이 견해가 계속 되어서 세계의 미는 바질과 카롤링 왕조의 학자들, 성 빅토르파와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찬양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미학적 연구들에서도 아름다운 예술보다는 자연에 관해서 더 많이 연급하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고대에서부터 그러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다. 근대에 와서는 예술미의 지위가 점차 강해져 미는 예술 속에만 존재하고 미는 의미 있는 형식이며 의미는 예술가가 형식에 부여하는 것이고 자연의 형식들 속에는 그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견해까지 보인다.
미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으로부터 주관적인 파악으로의 변화: 소피스트에서 시작해서 심미적 주관주의가 여러 번 발언할 기회가 있긴 했으나 객관적인 파악이 우세했었다. 주관주의는 근대에 와서야 유력해졌다. 이후 대부분의 미학자들은 원초적으로는 미에 대해 주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미의 객관적, 보편적 요소들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의 위대성으로부터 퇴조로의 변화: 미의 위대성은 18세기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그 이상은 지속되지 못했다. 미 이론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하나의 전화점은 대이론에 대한 플로티누스의 비판 및, 비례 이외에도 미에는 두 번째의 인자가 있다고 하는 논제의 제안이었다. 18세기에 고전적 취향으로부터 낭만적 취향으로의 선회, 규칙에 근거한 미로부터 자유에 근거한 미에로의 선회, 만족을 주는 미로부터 강한 감정을 야기시키는 미에로의 선회가 그것이다. 미를 대하는 관점에 있어 또 하나의 전환점은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5장 미: 범주의 역사
1. 미의 다양성
미는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다. 아름다운 대상들 속에는 자연의 경치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 아름다운 목소리, 아름다운 사고, 아름다운 신체 등이 모두 포함 된다.
미학사를 보면 정묘, 우미, 고상미 등으로 분류된다. 감각적 미와 정신적 미 등과 같은 미의 구분들을 이용하지만, 우미나 정묘 등과 같이 개별적인 것을 뽑아내기도 한다. 미적 범주들을 모두 열거하고 그것들과 더불어 미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것이 19세기와 20세기일부 미학자들의 야망이었다.
1)희랍시대에는 형식들의 기하학적인 미, 음악적인 미 주관적으로 조건 지워진 미 2)로마시대 특별히 변론가들 및 보다 고급한 웅변의 개념 덕택에 숭고의 범주가 형성 3)중세 때는 보다 높은 종류의 미에 decor라는 명칭을 붙였다. 4)근대에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우미였으며 정묘와 어울림도 자주 쓰였다.
2. 적합성
적합성은 특히 어떤 사물을 충족시키는 임무에 대한 적합성 그 사물이 쓰이는 목적에 대한 적합성은 고대로부터 미의 변종 중 하나로 간주 되었다. 희랍인들은 이 특질을 프레폰이라 불렀고 로마인들은 이 표현을 데코룸으로 번역했다.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에는 미 개념이 적합성의 개념과 한층 더 강력하게 연결되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영국의 철학자들, 저술가들, 미학자들 사이에서 적합성을 옹호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회적 적합성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희랍시대와 마찬가지로 다시 유용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은 기능술로 간주 되었으나 사실 건축이론은 실리적이 아니라 기념비적인 구조물과 관계가 있었으며 그 분야의 논문들은 오로지 거대한 구조 및 완벽한 비례에만 관심을 두었다.
1920~1930년경에는 기능주의가 절정을 이루어 그 위세가 계속 되었다.
3. 장식
고대 및 중세에 있어서 건축이 평형을 유지 했고 장식의 증가로 나아갔다.
근대에 와서는 장식에 치우치는 시기와 장식을 제거하는 시기를 모두 거쳤다. 장식을 선호하는 경향은 1800년 경 돌연히 중단되었는데, 장식으로부터 구조로 획기적 전환이 이루어 진 것은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전환된 것과는 부분적으로만 관련된 것이었다.
19세기 말미에는 신르네상스 및 신로코코의 장식에 반대하는 급격한 변동이 일어났으나, 이는 장식에 대한 반동은 아니었다. 화려한 양식은 장식이 아니라 건축물과 가구의 구조를 중시하는 기능적 양식과 동시에 형성되었다.
4. 매력미
로마에는 위엄 있는 미와 매력적인 미의 구별이 있었다. 위엄을 나타내는 디그니타스도 미였고 매력을 가리키는 베누스타스도 미였으나 그 각각은 서로 다른 미였다.
위엄이 여성적인 매력미에 고유한 고상미와 대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력미 혹은 외적인 미가 내적인 또는 정신적인 미와 대립되었던것이다.
5. 우미
희랍어로는 카리스이고 라틴어로는 그라티아인 우미는 고대의 세계관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세 라틴어에는 그라티아라는 표현을 유사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종교 및 철학언어에서 널리 사용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신적 우미였다.
르네상스 때에는 우미가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행동과 외모로 간주 되어 우미의 반대는 경직과 인위성이었다. 우미는 남녀노소 누구나 동등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로코코 시대에는 우미가 여자와 젊은 사람들만의 특권이 되었고 우미가 특별히 잘 구현된 것은 와또의 그림들 이었다.
6. 정묘
고대 시대의 정묘는 예민한, 날씬한, 작은 등과 다소 같은 의미였다. 중세시대에는 정묘에 관해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정묘라는 용어는 매너리즘기에만 진정한 인기를 얻었다. 16세기 말로 향하면서 더 이상 작은 혹은 수고 등의 의미로 쓰이지 않고 오늘날 쓰이고 있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묘는 예술의 극치로 간주 되었다. 정묘가 미 다음에 오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어떤 면에서 미보다 상위에 있다는 말이었다.
7. 숭고
숭고의 개념은 고대의 수사학에서 구체화 되었다. 숭고 혹은 고고한양식은 웅변의 세 가지 양식 중에 가장 상위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웅대하고, 근엄한 양식이라고도 칭해졌다. 또한 매력 있고 즐거움을 주며 황홀하게 만드는 것, 찬양할 만한 것, 놀랄만한 것을 숭고한 것으로 보았다.
18세기에는 미와 숭고가 예술의 가장 중요한 범주가 되었다. 아름다운 것과 숭고한 것이 계몽주의 시대의 영국미학에 있어서 하나의 보편적인 공식이 되었다.
8. 이원적인 미
미는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광의로는 우리가 즐겁게 동의하면서 보거나 듣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이므로 우아하거나 정묘하거나 기능적인 것도 포함 된다.
광의의 미는 매우 일반적인 개념이어서 정의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는 차라리 그 후의 논쟁이 가져다주었다. 낭만적 사상은 심적, 시적 형식 속에서 미를 찾았고 고전적 사상은 규칙적 형식에서 찾았다. 엄격히 말해서 미는 형식미라는 것이 가장 단순한 공식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보다 풍부한 용어를 보유함으로써 미의 애매모호성을 피할 수 있었다. 매력미는 미와 적합성에 공통적으로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
9. 질서와 양식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연마했던 거의 대부분의 예술에 있어서 일정한 종류, 범주, 양식, 배열방식 등을 대립시켰다. 음악에서는 사람들에게 주는 효과에 따라서 엄격한 양식을 도리아식, 부드러운 것을 이오니아식, 흥분시키는 것을 프리기아식으로 구별했다.
예술에서의 이런 다양성, 양태, 양식 등은 세대를 거치면서 이어져왔으나 시대와는 관계가 없다. 양식이라는 표현에 대한 해석상의 돌파구는 미술사가들이 시대 및 동향들의 사실기록으로부터 일반적인 특성화로 옮아갔던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다.
10. 고전적인 미
고전적이란 표현의 다양한 의미- 1)고전적이라는 표현은 시나 예술의 경우 탁월하고 겨룰만한 가치가 있으며 널리 인식되어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2)고전적이라는 표현은 고대의와 같은 의미이다. 3)고전적은 고대의 모델을 모당해서 그것과 닮는다는 것을 뜻한다. 4)고전적은 예술과 문학이 의무적인 규칙에 순응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5)고전적은 이미 확립된, 표준의, 인정된, 규범적인 등과 같은 의미이다. 특별히 배후에 전통을 간직한 것, 과거에 사용되었던 것 등에 해당된다. 6)고전적은 조화, 자제, 균형, 근엄 등과 같은 성질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고전적인 것의 범주- 1) 미, 특히 예술작품 속에서의 미는 올바른 비례, 부분들의 조화, 수치척도의 준수에 다려있다. 2)미는 사물의 본성에 있으며, 사물의 객관적인 속성이며, 인간의 고안이나 습관과 별개의 것이다. 3)미는 지식의 문제다. 4)인간의 예술에 적합한 미는 인간적 척도에 의거한 미이지, 낭만주의자들의 마음을 끄는 초인간적인 척도에 의거한 미가 아니다. 5)고전적인 예술은 보편적인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11. 낭만적인 미
1)낭만주의, 낭만적인, 낭만주의자 등의 표현들 중 가장 먼저 형태를 잡은 것은 형용사 낭만적인 이었다. 처음에는 예술이나 예술이론과 관련이 사용되었고 19세기로 전환 도리 때 비로소 한의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던 것이다. 2)낭만적이라는 표현은 쉴레겔 현제의 덕택으로 1798년 독일의 문학예술 어휘에 들어가게 되었다. 3)낭만주의 개념의 범위가 급속하게 확장된 탓에 그 의미는 변화된다.
강력한 감정과 열정의 미, 상상력의 미, 시적인 것 정서적인 것의 미, 형식이나 규칙에 종속되니 않는 정신적이고 무정형인 미, 이상야릇함 ․ 무한함 ․ 심오함 ․ 신비 ․ 상징 ․ 고통의 의미일 뿐 아니라 환상 ․ 소원함 그림같이 생생함의 미, 강력한 효과의 미 등등
6장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논쟁
1. 고대
미적 객관성이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주장되고 소피스트들에 의해 반박된 후 철학자들이 내딛은 다음 단계는 사상의 구별을 토해 논쟁상 중도를 택한 것이었다. 목적에 적합한 사물을 소크라테스는 아름답다 또는 적절하다라고 불렀다. 적절한 것이 상대적인 것임을 알며, 아름다운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부분적이 미적 주관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미에 대한새로운 정의에 이르렀다.
음악에 있어서 희랍객관주의의 중심점을 이루었던 유명한 프로블레마타는 비례는 자연스럽게 쾌가 f주는 것이며 본래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2. 중세
중세 시대에는 미가 사물의 객관적 속성들 중의 하나라고 믿었지만, 미가 주관거인 방식으로 인간에 의해 지각된다는 것도 시인 했다. 중세 때는 객관주의 이론이 고대 시대보다 한층 더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긴 했으나 양보는 더 많이 했다.
고대의 두 가지 용어들을 분명하게 대립시킨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운 것과 적절한 것이 그것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양자의 대립은 미적 주관성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화해를 시사한다. 미란 하나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3. 르네상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그대의 주관주의 및 상대주의 미학이 옛 객관주의를 밀어내지 못했다. 피치노는 미를 마음이나 감각을 부르고 홀리게 하는 힘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는 그가 미에 대해 객관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미의 개념은 우리가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술에서의 척도와 심메트리아는 관조되고, 찬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 객관적인 미적 신념들은 철학과 학문의 한계를 초월했다. 르네상스 미학에서 진정 주관주의의 의견을 찾고자 한다면 르네상스의 종단 16세기 말에 미와 예술에 관심을 가졌던 그의 미와 예술에 관한 견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4. 바로크시대
17세기의 철학자들은 미학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견해가 달랐기 때문에 브루노의 사상을 쫓지 않았다. 건축이론에서 보편적 비례가 보다 강력한 전통을 구축하고 있었고, 다른 예술들에서보다 더 적절한 것 같긴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퇴각은 건축이론에서 시작되었다.
디자이너이자 재능 있는 작가였던 뻬로의 견해는 기존의 견해를 지지했던 블롱델에 의해 비판받았는데 블롱델의 신조는 1)건축은 그 나름의 객관적인 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물들의 본성 속에 있다. 2)이 미는 시간 및 환경조건과 상관이 없다. 3)이 미는 자연미와 동일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4)이 미는 부분들의 비례, 무엇보다도 어떤 구조 내에서의 적절한 비례에 달려있다. 5)이 미는 감각뿐 아니라 정신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므로 쾌감을 준다. 6)어떤 비례는 모든 사람들에게 쾌감을 준다. 이러한 그의 견해와 비교하여 뻬로는 전통 및 기존의 견해에 대항하여 그 반대의 극단에 서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명제를 가지고 시작해야했다.
5. 계몽주의
객관적 미가 지배가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마침내 18세기가 되서야 주관주의 미학이 승리하게 된다. 주관주의는 프랑스에서도 지지자, 해석자들이 많았으나, 영국에 더 많았다. 18세기 초엽에 이미 허치슨은 미란 사물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정신 속에 지각”이며, 이것은 변치 않는 배례에 달려 있는게 아니어서 이성적 원리로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객관주의의 밴대자들은―소피스트에서부터 비텔로에 이르기까지―주로 미의 상대성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제 곙주의의 사람들은 미에 관한 판단에 대해 보편성이 부족하다는 점 뿐만아니라 미의 주관성에 직접 주목했다. 학문적으로 이성론자들인 이들은 예술이 다른 기원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예술에 있어서는 이성론자들이 아니었다. 18세기 예술의 두 번째 전환은 낭만주의에로의 전환이었다. 낭만주의는 미적 경험들의 정서적 성분들과 창작성의 개별적 성분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주관주의를 도모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낭만주의자들은 예술, 특히나 시는 진리에 도달하며, 학문과 연계되며, 내적 실재를 탐구한다고 선언했다. 워즈워드는 “시란 모든 지식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언명했다.
7장 형식: 한 가지 용어와 다섯가지 개념의 역사
1. 형식A의 역사
시각적인 미의 심메트리아, 청각적인 미, 음악작품을 위해서는 하르모니아, 그리고 탁시스 이 모두가 부분들의 배열인 형식A에 대한 고대의 동의어들이다. 이 미학은 BC5세기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시작되었다. 이 이론은 미가 부분들의 명확하고 단순한 비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을 매우 일반적인 공식으로 표현했다. 이 관점은 플라톤에 의해 고수되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에는 미학이 한 가지 종류가 아닌 두 가지 종류로 나타나는데, 그 중 고대희랍의 전통에 충실했던 이론에 의해서 ‘미와 예술은 형식 속에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성아우구스티누스가 지지하였다. "아름답지 않으면서 질서잡힌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물들이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수 때문에 쾌감을 준다." "사물에 있어 척도, 형체, 질서가 크면 클수록, 그 가치가 더해진다." 는 이 세 가지는 중세미학의 공식이 되어 천년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13세기에 와서 스콜라 철학의 개괄서 속에서 말 그대로 반복되어진다. 이것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형식A라고 부르는 것의 세 가지 동의어이다. 중세 시대에 형식A를 위한 제 1의 용어는 피구라였다. 아벨라르는 그것을 신체의 배열로 정의했다.
2. 형식 B의 역사
형식 A라는 첫 번째 의미가 배열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의미인 B는 사물의 외관을 가리킨다. 형식 A의 상대어는 구성요소, 성분, 부분, 회화에서의 색, 음악에서의 소리 등이 된다. 한편, 형식 B의 상대어는 내용, 의미, 취지 등이다. 인상파화가들은 외관으로서의 형식을 강조하며, 추상화가들은 배열로서의 형식을 강조한다. 형식주의자들은 형식 A와 형식 B 양자 모두를 지지했으며 때로는 그 두 개념들은 혼합하기도 했다.
고대의 소피스트들은 형식 B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형식 B를 최초로 구별해 내었다. 고대 후기의 몇몇 학파들은 형식을 언어적 표현으로서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시의 본질 자체라는 특별한 중요성을 첨가시켰다.
중세에는 형식과 내용이 시의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로서 서로 훨씬 더 날카롭게 대립해 있었다. 형식 B에는 언어적 장식과 표현방식 모두가 포함된다.
중세 시론에는 두 가지 방식 이외에 두 가지의 내용도 있었다. 하나는 작품의 주제와 서술된 사건들이 포함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관념적인 내용 즉,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이루어진 것이다.
르네상스의 시론에서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는 선이 매우 뚜렷했다. 사용된 용어들은 말과 사상이었다. 발견과 의견은 내용에 속하며, 문체는 형식에 속한다. 형식은 문학적 매너리즘의 미학에서 한층 높은 지위를 획득 했다.
18세기에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주목을 끌지 못하고, 다른 문제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언어예술에 있어서는 형식과 내용이 구분되었다. 왜냐하면 언어예술에서만의 형식과 내용은 분명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상이한 층 즉 말과 사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형식 B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물음이 제기되었을 때 일어난다. 즉 예술에서 형식과 내용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하는 물음이었다. 예전에는 형식과 내용이 꼭같이 상호 필요충분적이라 여겼으나,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와서 서로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3. 형식C의 역사
많은 사전들이 형식을 정의할 때 세 번째 의미로 시작 한다. 형식은 윤곽, 형태, 형체등과 동의어이다. 그 의미는 표면 및 고체들의 미와 근사하다.
형식 C는 공간적 현식과 연관이 있는 시각예술에서 자연스러운 개념이다. 형식 C는 불과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예술이론사에서 하나의 기본개념으로서 주욯나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것은 주로 형태와 개요라는 명칭으로 나왔다. 형식은 이 당시에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형식D로 이야기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4. 형식D의 역사
형식의 네 번째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다. 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형식이란 용어를 썼는데, 일차적으로 그 용어를 그의 독특한 개념인 엔이도스나 엔텔레케이아에 대한 동의어로 썼다. 그는 형식과 작용, 에너지, 목적, 존재의 작용적 요소 등을 같다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이 개념의 형식이 은유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고대시대의 그의 추종자들도 이 개념을 미학에서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기본개념이었다.
미학에서 형식ㅇ의 치세는 13세기에 정정을 달한 동시에 종말을 맞이했다. 형식ㅇ는 중세성기에는 독특한 개념이었으나, 그 이후까지 지속되지는 못했다. 실제적 형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계와 더불어 16세기까지 지속되었으나, 다르 분야에 비해 미학에서는 가장 근소하게 남아 있었다.
5. 형식E의 역사
이 개념은 칸트가 창안했다. 그는 형식을,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접하게 하는 정신의 한 속성으로 서술했다. 이 형식은 하나의 선천적 형식으로 우리는 그것을 대상 속에서 발견하는데, 그 이유는 이 형식이 주관에 의해 대상에게 부과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주관적인 이유 때문에 형식E에게는 보편성과 필연성이라는 드문 속성이 있다. 플라톤의 선천적 접근방식이 칸트의 접근방식과 유사하다. 칸트는 스스로 놀랄만한 일을 마련했는데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식의 선천적 형식을 발견했다. 공간, 시간, 실체, 인과율 등과 같은 그런 형식들은 일정하고 보편적이며 필연적이다. 지식은 이런 형식들 속에서만 가능하다. 19세기에 칸트의 이론을 전개시킨 자들 역시 미학 내에서 어떤 선천적 형식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형식은 19세기 마지막의 사반기에 발견되었다. 칸트에게서 지식이 선천적 형식을 가졌던 것처럼, 그에게는 시각이 보편적인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올바른 시각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예술적 시각과 시각예술이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그것들은 시각의 법칙과 형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의 두 형식을 구별했다. 근상과 원상이 그것이다. 19세기에 어떤 하나의 예술적 시각형식에 대해 회의론이 일었다.
6. 기다 다른 형식들의 역사
형식이란 명칭은 때로 조각가, 도예가, 총기제작자 등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형식들을 제작하는 데 쓰이는 연장들에 붙여지기도 했다. 이런 형식을 형식F라 한다. 이것은 형식을 제작하는 데 적용되며 동시에 형식C가 된다. 이 중 몇몇은 A의 의미에서 형식을 제작한다. 예술에서 형식F의 중요성이 증대하고 있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음악사 및 문학사에서처럼 시각예술의 역사에서도 형식이 또 다른 의미로 자주 논의된다. 관습적이거나 이미 인정된 형식들과 같은 형식이다. 우리가 형식G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런 형식들은 문학에서 소네트의 형식이나 비극의 3일치법 등에 의해 예증된다. 음악에서는 푸가 및 소나타 형식으로 건축에서는 기둥들의 배진, 이오니아식 질서로 나타난다.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방식을 갖고 싶어하는 것으로 예술이 형식G를 떠나가고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는데 이러한 예로 전위예술을 들 수 있다. 예술에서의 형식은 어떤 예술의 종류를 가르키기도 한다. 새로운 형식의 회화 같은 표현에서 형식은 정부의 형식 또는 질병의 형식에서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7. 형식의 새로운 개념들
1)프로나스츠코는 1918년 표제를 단 한 선언에서 “형식이란 말로써 나는 어떤 주어진 형체를 표현하는 관례를 의미한다. 형체란 공간 속에 있는 어떤 물체의 외관이다. 예를 들면, 구름 사이로 드러나 있는 하늘, 이마 위로 얼룩을 만드는 광선, 나무 한그루, 나무의 그림자 등이다. 자연의 한 표현으로서 형체는 상황 및 환경에 달려 있으므로, 사정에 따라 변화하다. 반면 형식은, 창조성의 한 표현으로서 일정불변하다. 인간의 틀은 변화하기 쉬운 그때그때의 형체이나 인간의 상은 고딕양식처럼 형식, 즉 어떤 관례, 어떤 체계에 의해 형체의 표현인 것이다.
2)곰브로비츠는 자신의 일기 속에 “실재는 형식안에 완전히 갇혀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격렬하며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논쟁은, 형식, 형체, 한정을 바라는 한 경향과 형식을 거부하고 형체를 반대하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8장 창조성: 개념의 역사
1. 창조성을 제외하고 이해한 예술
창조자 및 창조성의 개념에는 행위의 자유가 함축되어 있는 반면, 예술가 및 예술에 대한 희랍의 개념에는 법칙과 규칙에 종속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술가는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는 것이며, 자유 아닌 규칙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예술은 창조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하나의 기술, 어떤 사물을 만드는 기술이고 이 기술은 규칙에 대한 지식과 그 규칙을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런 규칙을 알고 이용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이런 것에는 자연은 완전하며 인간은 행위함에 있어서 스스로 자연과 비슷하게 되어야 하는 전제가 있다. 즉 고대의 예술가는 발견자이다. 하지만 시는 예외이었다. 이 시는 예술에도 연관짓지 않았고 시인을 예술가와 연관짓지 않았다. 반면 음악은 자유가 없었다. 멜로디가 미리 정해 있었다. 그리고 시각예술에는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카논이라고 하여 카논은 척도의 의미이다. 키케로는 예술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물들을 채택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실재의 모방인지 아닌지에 의문을 가졌다. 시는 참도 거짓도 아닌 영역인 것이다.
규칙과 자유내지는 숙련과 상상력을 통해서 창조성 개념의 역사는 아주 오랫동안 전자의 역할이 최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창조성: 용어의 역사
창조성의 개념은 저항에 대항하며 늦게서야 힘겹게 유럽 문화 속으로 들어왔다. 어의 일천년 동안이나 창조성이라는 용어는 철학, 신학, 또는 유럽의 예술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희랍이들은 이런 용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갖고는 있었으나 그것을 세 영역의 어디에도 적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 뿌리가 같은 여러 단어들 즉 창조자, 창조적인, 창조성 등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있다. 이들 중에 마지막의 창조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창조성: 개념의 역사
개념이 없기에 어떤 이론이나 견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인들은 우주론과 시의 이론이라는 서로 상관된 개념을 가졌으나 이런 것이 예술과 연관이 없었다. 초기 희랍의 신통기와 우주개벽설은 창조의 개념과 구별되는 탄생의 개념을 근거로 하고 있고, 고전기의 희랍인들의 창조자의 개념은 없었다. 그들에게 창조자에 관계된 두 개념을 갖고 있었으나, 특히 무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였다. 고대 말의 유물론자들은 창조성을 부정한 것이다. 중세인들은 고대의 유물론자들처럼 무의 창조란 존재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으나 그것이 신의 절대적 속성이라고 확신한다. 즉 창조성은 존재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대후기에 창조성의 개념은 변형되었다. 표현의 의미가 변한 것이다. 변화는 매우 근본적인 것으로 무로부터라는 것이 사라지고, 변경된 구조 내에서의 창조성은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결국 창조성을 규정하는 것은 색다른 것으로, 새로운 개념과 이론이 나타났다. 즉, 창조성은 예술가만의 전적인 속성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만이 창조자라는 견해는 19세기의 일반적인 견해로 예술은 신의 창조적인 권능 안에 있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쉽게 변화를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창조와 예술가는 예전에 창조자와 신이 동의어였던 것처럼 서로 동의어가 되었다. 예술이 고전기 때는 모방이고 낭만시대에는 표현이었으나, 우리시대에 해당되는 것은 창조로서 인식된 예술이다. 20세기에는 19세기에 예술가만이 창조적이라는 믿음을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문화의 다른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4. 무로부터의 창조
창조의 개념은 예술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유럽 문화 속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특별히 신에 의해 세계의 창조가 그 교의로 되어 있는 기독교르 통해서 였다. 철학과 종교에는 세계의 기원에 관한 세 가지 위대한 견해가 있다. 하나님은 이원적인 것인데, 신이 있고 영원한 물질이 있어서 이 물질로부터 신이 세계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서나 바빌로니아의 신화ㅔ서 이런 것이 나타난다.
신만이 존재할 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는데, 그것을 유출의 과정이 아니라, 신적인 지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세계창조에 대한 기독교 이론의 토대는 구약성서에 정립되어있다.
세계의 창조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이며 신앙의 신비이다. 기독교철학자들 특히 아퀴나스의 역할은 결국 이 교의를 철학으로 명료하게 하는 사건 그 자체는 증명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 명제이지만, 창조가 때에 맞게 수행되었다는 명제는 신앙의 문제이다. 세계가 늘 존재해온 것인지 혹은 때가 지남에 따라 동시에 생겨난 것인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 철학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5. 창조의 현대적 개념
현대적으로 이해하자면, 창조성은 매우 넓은 영역을 가진 개념이다. 이 개념에는 예술가들 뿐만아니라 과학자 및 기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모든 류의 인간적 행위와 제작들이 포함된다. 예술은 이 개념에 적합하긴 하나 완전히 부합되지 못한다. 이 개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 창조성이란 무엇일까?
모든 분야에서, 즉 문학이든, 회화든, 기술분야이건 과학에서건, 창조성이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색다름이다. 어떤 행위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색다름이 것이다. 이 대답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색다름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창조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모든 창조성에는 색다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색다르다고 해서 다 창조성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색다름은 크든 적든 점진적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기온을 재는 온도계처럼 색다름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나 저울이나 자치는 없다. 창조성은 고도의 색다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색다름이 창조성으로 옮아갔음을 가리키는 비등점과 유사한 현상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성에는 질적으로 매우 다양한 류의 색다름들이 있다. 즉, 새로운 형체, 새로운 모델, 새로운 방법의 제작 등이 그것이다. 색다름은 보통이전에 없었던 어떤 성질이 있는데서 존재한다. 물론 어떤 때에는 단지 양적으로 증가했다든지 혹은 낯선 조합으로 이루어진 제작품일 경우도 있다.
6. 범창조주의
20세기에는 창조성의 개념이 보다 넓게 쓰이고 있다. 이용어는 단순한 이해력을 넘어서는 인간의 모든 작업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그 자신 스스로를 진술, 반복, 모방하는 것에만 한정시키지 않는 경우, 그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낼 경우 창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우리시대의 확신이며, 하이텍거, 카시러 및 쾨스틀러에 의해 표명된 바있다. 창조성에 의해 우리는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자료들을 보충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 속에서 일어나며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7. 예술가의 창조성
허구적 존재들, 허구적 개인성, 허구적 운명 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 구성에서 창조성이 실로 예술에서만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또 그 때문에 예술의 어떤 특정 부분에서만 드러난다. 이런 창조성 개념은 언어예술에 매우 분명하게 적용되었다. 고대인들은 시가 어떤 허구적 존재를 창조해낸다는 이유로 시를 다른 모든 예술들과 분리시켰다. 그들은 그것을 만드는 행위 즉 포이에시스라 했다. 최초에는 시에서 주목이 되었던 이 특별한 능력이 17세기와 19세기 사이에 모든 예술분야에 보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더구나 창조성은 모든 예술에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창조성이 예술을 규정하는 특징이 된 것이다.
창조성은 과학과 기술에는 장식물이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본질이다. 이 의미가 오늘날의 창조성 및 예술의 개념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 연관성은 예술을 규정하는 미와 예술의 관계만큼은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미가 없이는 예술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창조성이 없이는 예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19세기와 더불어 창조성의 개념은 문학과 예술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통용되었거나 지금 통용되고 있는 창조성 및 예술개념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예술과 창조성의 관계는 달라진다. 예술을 A라고 하고, 창조성을 C라 하자. 그리고 C1을 신적 창조, C2를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적 창조, C3을 전적으로 예술적 창조라고 하면, 그 관계는 어떤 C1도 A가 아니며, 어떤 A도 C1이 아니다.
9장 미메시스: 예술과 실재의 관계사
1. 미메시스의 개념의 역사
모방은 희랍어로는 미메시스, 라틴어로는 이미타티오라 일컬어졌다.
미메시스라는 단어는 호메로스 이후에 나온 것으로 호메로스나 시오도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모방이 사제가 행하는 수애행위 즉, 무용, 음악, 노래 등을 나타냈다. BC5세기에 모방이란 용어는 숭배의 차원에서 철학적 용어로 병용되어 외면세계의 재생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데모크리토스에게는 미메시스가 자연이 작용하
는 방식의 모방이었다. 그는 우리가 예술 속에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쓴 바 있다 베를 짤 때는 거미를 모방하는 것이고, 집을 지을 때는 제비를, 노래 할 때는 백조와 나이팅게일을 모방하는 것이다.
모방에 대한 고대의 이론은 희랍의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었다. 둘째,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창안해낼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기존의 세계가 완전하다면 더 이상 완전한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모방은 예술이론에서 다시금 하나의 기본개념이 되었고, 사실은 이때 그 정점에 달하였다. 망각 속에서 구제된 이 개념은 놀라운 사실로 여겨졌으며 새 개념들이 향유하는 특권들 중 최상의 것을 누렸다.
예술이 자연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되며, 자연의 결점들이 교정되고 취사선택이 이루어 진 후에 모방해야 하다는 많은 사상가들의 견해는 특히나 중요하다. 모방이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말하자면, 모방은 자연의 암호를 판독해야하며 그 내용을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2. 과거의 다른 이론들
예술이 실재를 모방한다고 보는 견해가 20세기 동안 유럽문화를 지배했다. 하지만 여러 다양한 변종들과 용어들이 난무하였는데, 그 옛 이론의 주된 용어는 '모방'이었다.
복제'는 18세기에 시작되어 그 후 사용된 개념이다. 모방이론은 그 용어만이 아니라 논제도 변화되었다. 범위와 양상에서 일어난 두 가지가 가장 널리 파급되었는데, 우선 범위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독창적인 것과 모방적인 것으로 구분 짓고, 모방이론은 전적으로 모방적 예술에만 적용시켰다. 하지만 건축가들은 고대에, 보다 느슨한 의미에서 모방이론을 자신들의 이론에 적용시켰다. 비트루비우스가 정신적 의미가 아닌 실재에 근거한다고 쓰고 있고, 그의 목적은 어떤 구체적인 공식의 정립이 아닌 하나의 지침을 일러두는 것이다. 건축이 자연을 모델로 한다는 논제는 근대의 건축이론가들이 주장했다. 18세기의 바뙤는 건축을 모방예술 속에 포함시키고, 모든 예술들은 꼭 같은 정도로 모방이라는 논제를 표명했다. 이것은 모방개념에서 일어난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3. 리얼리즘 개념의 일부역사
19세기 중엽 미학자들은 실재에 대한 예술의 의존성을 강조했으나 다른 용어와 개념장치, 다른 논쟁의 노선을 사용했다. 예술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측과 반박하는 측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예술에 의한 실재의 모방을 반박하는 논박은 헤겔학파의 사상가인 피셔로부터 이루어졌다.
실재는 상상력보다 더 완전한 것이고 예술작품들은 실재와 동등하지 않고 실재에 미치지 못하므로 완전한 실재에 대한 필요성에서 예술이 비롯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술의 목적이 미만은 아니고, 형식의 완성도 아닌 인간의 관심을 끄는 모든 것을 제작하며, 더 나아가서는 기억력을 돕고 실재를 주의 깊게 주목하는 등 다른 임무도 수행하고, 또 그 이상으로 실재를 설명하고 평가하는 일도 한다고 하였다. 즉 피셔와 반대였다. 피셔가 비난을 한 게 즉 덜 아름답고 덜 완전한 것이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 예술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새 해석을 가한 선구자는 시각 예술가들이었다.
사실주의란 용어는 하나의 예술운동을 일컫는 명칭이었으나 하나의 일반적인 개념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실재에 대한 완벽한 충실성의 의미로 또 보다 자유로운 의미로도 쓰인다. 이론적인 의미로만 쓰이기도 마르크시즘에서와 같이 실천적의미로도 사용한다. 마르크시즘에서는 사실주의를 실재의 반영으로 이해한다. 사실주의는 일정치 않은 개념인데 실재와 조화를 이루는 개념이든 실재 그 자체라는 개념이든 간에 모호하기 때문이다.
10장 미메시스: 예술과 자연, 예술과 진실의 관계사
1. 예술과 자연
실재는 인간의 작업도 포괄하기 때뭉에 자연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짧게 공식화해서 말해보면, 실재는 자연뿐만 아니라 문화로도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예술의 관계에서 참된 것은 자연에 대한 예술의 관계에서도 참되지만, 그 반대는 그렇지 않다.
예술은 어느 정도까지 실재에 의존하고 있는가? 이 문제의 주제는 역사적으로 의존성에 대한 견해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하는 것이다. 이제는 예술과 자연이라 제목 하에 또 다른 문제 즉, 예술과 자연 간의 구별하는 문제이다. 이 주제는 역사적으로 예술이 자연과 어떤 방식으로 구별이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변화해온 견대들을 다루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유럽적 개념의 운명에 끼친 주요한 영향 중의 하나는 고대 희랍인들의 주장이었다. 그것이 어떤 종류였었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으 자연학 2권에서 알 수가 있다.
몇몇 중세의 사상가득ㄹ은 한층 더 나아가서 자연이라는 용어를 신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하여 심지어는 신을 능산적 자연과 동일시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네상스와 더불어 시작하는 근대에는 자연을 창조에 한정시켰다. 신은 자연의 창조주이나 자연의 한 부분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개념의 이원적 의미는 계속 되었다. 자연은 가시적 사물 전체이면서 또 한편 가시적 사물 전체를 생산해내었고 생산해내고 있는 힘인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자연이란 완전성이었다. 그들은 자연이 질서정연하고 합목적적으로 발전되어 간다고 보았으며, 그러한 속성이야말로 자연을 최고로 인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자연이 질서정연하고 합목저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자연은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하나의 모범이 되기도 한다.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 전체라는 의미, 특별히 인간세계라는 의미, 인간의 소산이 아닌 초인간적 세계의 의미, 세계의 일반적 형식들이라는 의미, 세계의 평균적, 통계적 형식들이라는 의미, 이상화된 실재라는 의미, 자연을 지배하는 필연적 법칙들의 체계라는 의미, 우주적 질서의 의미. 단순성, 통일성, 규칙성 등을 특징 지워지는 자연의 의미, 관례 및 예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인위성이나 꾸밈이 없고, 똑바르고 단순하며 범상한 것, 구조, 신화, 이상적 형태 없이 존재하는 것 등의 의미로 다양하며, 개념이 폭넓고 유동적인 덕택에, 자연이라는 용어는 변화해도 계속될 수 있었다. 예술과 자연간의 관계에 대한 견해들이 다양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2. 예술의 진실성
시에서의 진실을 단지 실재와의 일치로 이해했다. 시는 존재하지 않는 사건들을 꾸민다는 비난을 받았던 한편, 회화는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묘사하되 실재와는 다르게 묘사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희랍고전기에는, 시인들에 의해 시작된 그 문제 및 비판을 철학자들이 이어받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예술과 진실간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이 정립하게 되었다. 예술이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예술이 환영을 낳는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환영이론은 고르기아스의 사상으로 시의 목적은 분명히 비진실을 말하는 것, 환영을 낳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시의 존재이유라고 했다. 그는 시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이라 했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게끔 설득하는 것으로 일종의 홀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가 인간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위안을 주며 이로움을 끼치는 방식이다. 다른 순수예술들도 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예술의 목적은 진실이 아니라 잘못, 기만, 허위라고 에포로스는 언급한다.
일찍이 BC4세기부터 철학에는 예술과 진실의 관계에 대해서 우세한 이론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하는 진술 중에는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참도 거짓도 아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했던 헬레니즘 시대에는 다시 예술 특히 시에서의 진실에 대하 요구가 일어났다. 그것은 특별히 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시가 철학보다 훨씬 진실을 잘 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에 있어서 진실에 관한 의심들은 중세 때도 계속 되었다. 이것이 심지어 명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들은 예술의 진시에 대해 좀더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그들은 예술이 진실을 표현할 수 잇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11장 미적 경험: 개녀의 역사
1. 초기사
개념과 그 개념에 해당되는 명칭이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닌 것이다. 형용사 미적인 유래는 희랍에 있다. 희랍인들은 사고를 뜻하는 노에시스와 짝을 지워 감각적 인상을 뜻하는 아이스테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감성적인과 지성적인의 의미를 갖는 형용사로 쓰였다. 18세기 라이프니츠는 감성적 인식을 미의 인식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미학과 형용사 미적인이라는 단어가 라틴어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미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미에다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미의 지각은 한 감각, 아니 여러 감각들의 집중을 요한다는 개념은 희랍인들의 목적에 부응한다. 즉 우리의 눈은 균제를 보며 우리의 귀는 조화를 듣는다는 식이다.
우리가 관람자의 태도를 취할 때 경험하는 감각의 여섯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보거나 들음으로써 생기는 강렬한 쾌감의 경험인데, 그 쾌감은 너무 강렬해서 인간이 그것과 분리되기가 매우 어렵고, 이 경험은 자신의 의지를 빼앗기게 되는 정도까지 의지가 중단되게끔 한다. 그 경험은 때로는 지나치기도 하는 등, 그 강렬함이 여러 정도로 나타난다. 그 경험은 인간의 특징으로 오직 인간만이 누리는 것이다. 그 경험은 감각에서 유래하지만 감각의 예민함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 이런 종류의 쾌감은 감각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즉 감각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 혹은 감각과 연관되거나 감각이 불러일으키거나 기대하는 것들 때문에 향유된다는 것이 요점이다.
2. 계몽주의 시대
영국의 철학자들은 미의 파악과 인지를 위한 특정한 기능을 상징하고 그것을 미감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감각이 누구에게나 다 주어져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미를 인지하는 기능을 결부시켜서 그 둘을 함께 도덕적 감각이라 칭했던 샤프츠베리의 계승자인 허치슨은 미감을 미의 지각을 위한 소극적 기능으로 규정지으면서 이를 도덕적 감감과 구별했다.
미의 경험 혹은 미적 감각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은 영국에서 시작 되었고 애디슨과 허치슨에 의해 진행되었다. 심리학적 주제와 방법은 18세기 말까지 지속되었고, 어떤 사상가들은 19세기까지도 글어갔다.
독일의 경우 미적 경험에 대한 숙고가 영국만큼이나 18세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으나, 방식이 달랐고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미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바움가르텐에게 있어서 미적 경험이란 하나의 인지였지만, 그것은 완전히 감각적인 것이어서 혼돈스러울만큼 열등한 종류의 인지였다. 미의 비이성적 인지에 대한 개념은 일찍이 미란 정의할 수 없는 것, 즉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성찰의 형태로 독ㅇ리이외에서도 성행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19세기로 넘어갈 무렵 독일에서 영국의 개념과 독일의 개념을 종합시켰다. 이는 칸트의 업적으로 판단과 미적 경험 전체는 비록 인식 작용은 아니지만 단순한 쾌의 경험이상의 것이다. 즉, 보편성을 요하는 것이다. 요구가 충분한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나 반박할 수 없는 것으로 미적 경험의 특수성이다. 그 외 미적 경험은 그것의 대상이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쾌를 주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대상의 실제 존재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무관심적이고, 비개념적이다. 그리고 오로지 대상의 형식에만 관계된다. 그것은 감각뿐 아니라 상상력과 판단력에도 근거를 두고있는 쾌이다. 어떤 대상이 쾌감을 주는지를 결정하는 보편적 법칙이란 없다.
3. 그 후 일백년
가장 단순한 이론은 미적 경험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고 분석하기 쉽지 않은 독특한 경험이다. 이 의견은 미라는 별도의 감각에 대한 18세기의 사상을 좀더 주의 깊고 현대적으로 정립시킨 것이다.
쾌의 이론은 미감적 경험이 다름 아닌 쾌의 감정이라 주장한다. 미적 경험이란, 그것이 쾌를 포함하는 정도만큼 가치가 있다고 뮐러-프라이엔펠스는 주장한다. 그 가치는 오직 그 쾌의 강도와 지속성에 의해 측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미학의 경험심리학적 개념이 존재하기 이전에 나왔는데 쾌락주의 또한 플라톤 및 아르스토텔레스의 전통으로 대치되긴 했으나, 최소한 미와 쾌를 동일시한 데카르트로 인해 다시 되돌아 왔다. 18세기 영국의 미학에서 물론 미감적 경험에 대한 쾌락적 취급이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어떤 이론은 미적 경험이 인지라고 주장했고 또 어떤 이론은 환영이라 주장했다. 그것을 적극적 경험이라고도 수동적이라고 본 이론도 있었다. 정서적인 경험 또는 이성적인 경험으로 본 이론도 있었다.
환영주의는 인지이론과 완전히 반대된다. 환영주의에 따르면, 미감적 경험들은 실재의 세계를 버리고 환영, 허상, 상상력 등의 세계에서 작용한다. 미적 경험은 의식적인 환영이다. 미적 태도에서 마음은 환영과 환영의 상태를 지각하는 상태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생각했다.
미감적 경험은 적극적 본질에 관한 이론 혹은 감정 이입의 이론은 독일에서 최초로 공식화되었던 터라 그 첫 명칭이 Einfulung이었다. 이 이론의 논제는 미적 감정은 주관이 자신의 활동을 대상에게 이전시킬 때에만 생겨난다는 것이다. 대상 속에서 자기자신과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4. 남겨진 유산
어떤 것들은 미적 경험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것들이었는가 하면, 도 어떤 것들은 미적 경험의 이론을 창출하려했던 것들이다. 나중의 미학자들은 이론을 추구했고 초기의 미학자들은 정의를 굳혔던 그런 경우로 보기는 어렵다.
점진적으로 전개되어가고 있는 미적 경험의 이론들에는 여러 주제들이 담겨있다. 피타고라스적 관람자의 개념은 미적 태도의 이론이었다. 판단력의 기능에 관한 칸트의 이론도 그러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미적 경험의 개념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