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경사 불사 회향법회 및 무주고혼 수륙대재
2003년 가을, 관정 큰스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당시 큰스님은 세수 80살이셨다. 당시 망경산사는 벌써 지역사회 유명 인사들의 사찰방문이 잦았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는 인연교류가 있게 되어 대중스님들은 사찰이 뭔가 지역사회에 공헌도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월군은 ‘박물관 고을’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가질 정도로 박물관이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문화에 부응하여 박물관 설립 등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망경산사에는 법당 앞에 초원처럼 펼쳐진 넓은 밭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곳을 정비하여 큰스님을 모시고 도량주변 무주고혼 합동천도재를 몇 차례 지내게 되었다. 큰스님이 주재하시는 무주고혼 천도재가 시작되어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큰스님이 통역을 통해 병풍을 치라고 소리치셨다.
“빨리 법당안에 병풍을 둘러쳐라.”
“큰 대야에 물을 많이 퍼 와라.”
우리는 깜짝 놀라 서둘러 병풍을 둘러치고 물을 준비하는 큰스님의 지시에 따라 별도의 특별 관욕대를 설치하였다. 병풍에 물을 뿌리시며 의식을 계속 진행하시는 동안 큰스님께서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갑작스레 큰스님께서 눈가가 빨갛게 물들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시자 우리는 매우 긴장하였고, 무슨 영문인지 몹시 궁금하고 초조하였다. 통역을 하시는 강거사님도 매우 놀라워하였다. 드디어 천도재법식이 끝나면서 큰스님의 울음도 그쳤다. 우리는 큰스님 방에 모여 천도재 중에 갑작스레 특별 관욕대를 만드는 등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우신 까닭을 여쭸다. 통역으로부터 말이 전달되자마자 큰스님은 또다시 눈가를 붉히시며 눈물을 쏟으셨다. 큰스님은 우시면서 말씀하셨다.
“너무나 불쌍한 영가가 왔다. 여태까지 이렇게 헐벗고 불쌍한 무주고혼 영가는 처음이다.”
그 때 큰스님은 격앙되시어 우리들이 올리는 재비와 불전금마저 뿌리치셨고, 한동안 슬픔으로 서러워하셨다.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를 두루 맞닥뜨린 우리는 큰스님에 대해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관정 큰스님은 불보살님의 자비를 진정으로 구현하시는 분이시구나.
만경사는 망경대산 해발 900m에 위치한 사찰로 퇴락이 심하여 이미 사찰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2002년 봄부터 만경사 중창불사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3년 여름에 만경사까지 가는 오솔길이 확장되어 지프차의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해 가을 큰스님께서는 처음으로 만경사에 올라가셔서 도량을 둘러보셨다. 산신각에서는 삼배의 예도 올리셨다. 큰스님은 우리나라 전국 사찰을 다니시면서 산신각에 예를 올리시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큰스님께서 만경사 산신각에서 깍듯이 예를 표하시는 것이다. 이를 보고 특이한 일이라며 통역인 강거사가 놀라워하였다. 도량을 다 둘러보신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10년만 젊었다면 여기서 수행하며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드물게 보는 수행터다.”
이듬해 2004년 모든 만경사 불사를 마치고 ‘만경사 중창불사 회향식 및 불상, 탱화 점안식’ 때도 큰스님께서 오셔서 법문을 해주시며 자리를 빛내 주셨다.
6) 큰스님과 함께 했던 나날과 몇 가지 숨은 이야기
서울의 여래선원과 영월의 망경산사에 머무시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큰스님을 모시면서 몇 가지 일화가 있다.
<1> 폭설이 그치다.
2003년 2월 한국 방문 때는 서울 인사동 여래선원을 들려 망경산사에서 며칠 지내셨다가 아침부터 영월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대구 광덕사로 가시기 위해 출발을 서두르셨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어 시야가 막힐 지경이었다. 오전 중에 출발하려는 짚차는 출발이 지체되어 낮이 되었고 일행은 초조한 마음이 되었다. 이 때 통역 강거사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관정법사님, 도사이시니까 하늘의 눈이 그치도록 하실 수도 있죠. 눈이 그쳐서 우리가 출발할 수 있게 좀 해주세요.”
큰스님은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다가 나오시면서 잔뜩 미소를 머금고 눈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뻗으셨다. 그리고 하늘에 대고 마치 글을 쓰듯 오른 손을 휘저으시고 나서 이내 차에 오르셨다. 차는 더 지체할 수 없어서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하며 서서히 눈길을 빠져 내려갔다. 참시 후 거짓말처럼 눈이 차츰 적어지더니 한 두 송이 날리는 수준으로 오후가 지나갔다. 후에 들은 소식은 기상대의 폭설예보와 함께 영월읍내 등 인근지역에 종일 폭설이었다고 한다.
<2> 죽게 되면 화장하여 중국에 보내다오
한 번은 지방에서 법회 후 망경산사에 오셨는데 통역 강거사님과 큰스님 시봉 한다면서 어느 보살님이 같이 수행한 것이다. 통역 강거사님 말씀이 큰스님께서 무릎이 불편하신데 저 보살님이 마사지를 잘하여 큰스님 곁에 따라다니며 마사지를 해주신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도 매우 좋아하신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하룻밤 지나고 나서 강거사님이 그 보살이랑 잠시 산보나간 틈에 큰스님께서는 우리에게 급히 메모를 써주셨다. 나이 여든이 넘으신 상태로 한국에서 힘든 법회 일정을 소화하고 계시는 큰스님께서는 못난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내린 것이다. 메모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에서 죽게 되면 시신을 화장해서 중국으로 돌려보내주면 고맙겠다. 스승 석관정”
한국에서 포교하다가 언제든지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매일 하루 몇 시간씩 법회와 마정수기를 하시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강행군이었지만 하루라도 그냥 쉬려 하지 않으셨던 큰스님은 이처럼 늘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큰스님의 뜻이 어디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통역 강거사님과 상의 끝에 그 시봉하는 보살님을 그냥 가시게 하였다. 사태를 훤히 보고 계시는 큰스님께서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콧노래도 부르시며 매우 태연하셨다.
<3> 머리 강제 수술의 후유증
한번은 한국에서의 초청 일정을 잘못아시고 한국에 오신 적이 있었다. 그러자 통역 강거사님은 인천공항에서 먕경산사로 오는 차안에서 큰스님께 빈정거리는 투로 질문했다.
“아니 도인이 그것도 모르고 비행기 타고 한국 왔어요?”
그러자 큰스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전에 신통하다고 소문나서 정부 관리에게 불려가 과학적조사를 한답시고 내 머리를 수술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차례나 강제 수술 받은 것이다. 그 후유증이 매우 심했다. 전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어찌 그것도 모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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