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술에 취하면 소란을 일으키는 인디언들
앞에서도 얘기한 대로 나는 생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고 또 많지는 않다 해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재산도 모았으므로 학문 연구나 하면서 여생을 여유롭고 즐겁게 보내기로 했다. 우선 영국에서 필라델피아로 강의를 하러 온 스펜스 박사의 실험 기구들을 모두 사들여서 전기에 관한 실험을 아주 의욕적으로 해나갔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를 한가하게 보았던지 서로 자기들 일에 끌어들이려 했고 시정(市政)의 온갖 부서에서는 거의 동시에 내게 여러 가지 임무를 떠맡겼다.
지사는 나를 치안판사로 임명했고, 시의 행정기관은 처음에는 시의회 의원 일을 맡기더니 다음에는 참의원 자리를 주었고, 시민들은 나를 그들을 대표하는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했다. 나는 주의회 의원 자리가 가장 반가웠다. 의원들은 논쟁할 때 그저 앉아서 듣기만 하는 것에 진력이 나서였다. 서기인지라 끼어들지는 못하고 정 따분해질 때면 사각형이나 원을 허공에 그리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뿐만 아니라 의원이 되면 좋을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더 커지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여러 자리를 맡게 되니 속으로 우쭐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말 그랬다. 내 초라한 출발을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난 변화였다. 내가 부탁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가해서 그런 자리를 주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치안판사 일은 오래 하지 못했다. 몇 번 법정 판사석에 앉아 사건을 심리하긴 했지만 그 일을 하기에는 내 법률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의회 입범부 의원 일이 더 중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치안판사 일은 그만두었다. 나는 그 뒤로 10년 동안 해마다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누구에게든 표를 부탁한 적도 없었고 나를 뽑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내비친 적도 없었다. 내가 주의회 의원이 되고 나서 내 아들이 서기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는 칼라일 인디언들과 협상을 해야 했다. 지사는 의원 몇 명을 뽑아 협상을 맡은 자문의원회에 합류시키라는 공식 문서를 주의회에 보내왔다. 주의회는 의장인 노리스씨와 나를 지명했다. 우리는 위임받은 대로 칼라일에 가서 인디언들을 만났다.
인디언들은 술을 마셨다 하면 취할 때까지 마셨고 일단 취하면 싸움질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우리는 인디언에게 술 파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다. 그들이 이 조치에 항의하자 우리는 협상을 하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면 협상이 끝난 뒤에 럼주를 많이 주겠다고 했다. 인디언들은 그러기로 약속했고 잘 지켰다. 그들이 술을 마시지 않은 덕에 협상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어 양쪽 모두 만족할만한 성과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약속대로 럼주를 받아갔다. 이때가 오후였다. 인디언들은 마을 외곽에 정방형의 임시 움막을 짓고 남녀 아이들까지 100여 명가량 모여 살았다. 그런데 저녁 무렵 그쪽에서 아주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에 무슨 일인가 보러 갔더니 그 인디언들이 광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놓고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취해서 싸움판을 벌이고 있었다. 반은 벌거벗은 그들의 거무스름한 몸이 어둑한 모닥불 빛에 어렴풋이 보였다. 불붙은 나무 토막을 휘두르면 서로를 쫓아다니고 때리고 괴성을 질러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 소동이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우리는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자정쯤 한 무리가 몰려와 문을 두드리며 술을 더 달라고 소란을 피웠지만 못들은 척했다.
다음 날, 인디언들은 소란을 피운 게 미안했던지 장로 세 사람을 보내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걸 술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럼주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세상 만물을 만드신 ‘위대한 영’은 그 모든 것을 어떤 쓸모가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정해놓으신 용도대로 사용해야지요. 그분이 럼주를 만드셨을 때 ‘이것을 인디언들이 마시고 취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만일 개척자들이 정착할 땅을 마련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멸종시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럼주가 바로 그 수단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아닌게 아니라 예전에 해안에 살던 인디언들이 술 때문에 전멸된 일도 있기는 했다.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자선병원 설립을 돕다
1751년에 절친한 친구 토머스 본드 박사는 필라델피아에 병원을 설립하고 지역 주민이든 아니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있으면 받아들여 치료해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일종의 자선병원 성격을 띠었는데, 내가 처음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토머스 본드 박사의 생각이었다). 그는 열정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기금 모금에 나섰지만 자선병원 설립은 아메리카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해 성과가 별로 좋지 못했다.
결국 본드 박사는 나를 찾아왔고 내가 관여하지 않으면 공공사업을 진행할 수가 없겠더라며 나를 추켜세웠다.
“내가 기부를 부탁하러 만나는 사람들마다 ‘프랭클린 씨와 이 일을 의논해 보았습니까? 그분은 뭐라고 하던가요?’라고 묻는 겁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당신하고는 맞지 않는 일 같아서) 사람들이 생각해보겠다면서 기부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본드 박사에게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과 효율성에 대해 상세하게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을 듣고 보니 충분히 좋은 계획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나부터 기부금을 냈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받아낼 방법도 열심히 궁리해보았다. 무조건 사람들을 만나 조르기보다는 먼저 이 사업 계획에 관한 글을 신문에 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이런 일을 시작할 때면 늘 그렇게 해왔는데, 본드 박사는 그런 방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뒤로 기부금이 많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주의회의 지원 없이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의회에 안건을 청원해서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시골 출신 의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병원이 생기면 도시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것이니 비용도 도시 사람들끼리 부담해야 한다면서 반대했다. 시민들 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라고도 했다. 나는 이 계획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자발적인 기부만으로 2천 파운드는 확실히 걷힐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내 말을 일축해버렸다.
나는 구체적인 계획안을 작성했다. 우선 기부자들을 모아 법인 조직을 만든 다음 조건이 충족되면 주의회에서 일정액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법안 제출 허가 신청을 했다. 주의회가 허가를 해주긴 했지만 나중에 법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가서 부결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법안을 작성하고 다음과 같이 중요한 조항을 조건부로 첨가했다.
“진술한 권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기부자들은 모임을 갖고 이사와 회계를 선출한다. 기부금이 2천 파운드에 달하고(이 기금의 이자는 병원에서 가난한 환자들에게 식사, 치료, 처방, 약 등을 제공하는 데 사용한다) 주의회 의장이 만족스럽다고 인정하면 의장은 병원의 설립, 건조, 마무리 비용으로 2천 파운드를 1년에 천 파운드씩 2년에 걸쳐 병원 회계과에 지급한다는 지시서에 서명할 수 있고 또 서명해야 한다.”
이 조건 덕분에 법안은 통과되었다. 보조금 지급을 반대했던 의원들은 돈을 쓰지 않고도 자선사업을 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찬성했다. 법안이 통과된 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부를 부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이 조건부 조항을 설명해주면서 한 사람이 기부를 하면 주의회에서도 기금을 보조해주기 때문에 두 배의 액수가 되는 거라고 강조했다. 기부금은 금세 목표액을 넘어섰다. 우리는 여기에 주의회로부터 받은 보조금까지 더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얼마 안 가 편리하고 근사한 병원이 세워졌다. 그 뒤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병원을 이용하고 있다.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많은 일을 이루었지만 이때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같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방법이 좀 교활하긴 했지만 별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