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무지"란 장편 시를 쓴 미국 태생 영국시인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58년전의 6월처럼 잔인한 달도 없을 것이다.
民族의 悲劇인 6.25 전쟁이 발발한 6월을 맞아 우리는 우선 6.25 전쟁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것입니다.
國家의 礎石을 쌓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까지에는 나라와 民族을
위하여 목숨을 草芥 같이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 英靈들의. 피와 눈물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해마다 6月이 오면 護國英靈들의 愛國魂이 다시 피어나 이땅의 山河에
서리는듯 하다.
이분들은 숭고한 겨례의 등불이며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물질적 풍요는 조국을 지켜낸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의하여 이룩된
것임으로 이분들의 애국혼을우리 국민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게 하여 나라
사랑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여야 할것입니다.
2. 우리는 6월의 현충일을 전후하여 국립묘지인 국립 현충원을 참배하여
애국선열과 순국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분들의 높고 거룩한 뜻을
되새기며 감사하는 마음을 기려야 함은 물론. 현충일 당일 각 가정마다
조기를 게양하고 오전 10시를 기하여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따라 일제히
1분간 묵념을 올리고 명복을 빌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6.25 전쟁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 공산군이 대한민국을
共産化 할 목적으로 1950. 6. 25. 새벽 "T-34" 전차와 자주포, 항공기
등을 앞세우고 기습남침 공격하여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고
두달도 안되어 낙동강 방어선가지 밀려 갔으나 미국을 비롯한 UN군
21개국이 우리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공산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조국을 수호할 수 있었다.
4. 6.25 전쟁 중에 우리는 물론 유엔군은 너무 많은것을 잃었다.
(1) 우리는 전사 149,000 여명
부상 717,000 여명
실종 132,000 여명
포로 9,600 여명 등 총 1,507,500여명
(2) 미군 전사 54,246명
부상 103,284명
실종 8,177명
포로 4,853명 등 총 161,122명
(3) 북한군 전사 294,000명
부상 226,000명
포로 113,000명 등 총 633,000명
(4) 중공군 전사 184,000명전
부상 716,000명
포로 31,000명 등 총 931,000명
(5) 유엔군 전사 57,615명
부상 115,312명
실종 2,232명
포로 6,267명 등 총 181,426명
등으로 쌍방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 위의 통계숫자는 국방부 전사편찬 자료 일부인용)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 부대 |
구 분 |
주 요 부 대 |
주월사 |
주월한국군 사령부 |
◈사령부
◈야전사령부 |
◈본부근무대대
◈군사 정보대 |
◈직할부대 |
맹 호 |
수도사단 |
◈기갑연대
◈제1보병연대
◈제26보병연대
|
◈제10포병대대
◈제60포병대대
◈제61포병대대
◈제628포병대대 |
◈공병대대
◈전차중대
◈수색중대
◈직할부대 |
백 마 |
제9사단 |
◈제28보병연대
◈제29보병연대
◈제30보병연대 |
◈제30포병대대
◈제51포병대대
◈제52포병대대
◈제966포병대대 |
◈공병대대
◈전차중대
◈수색중대
◈직할부대 |
청 룡 |
제2해병여단 |
◈제1보병대대
◈제2보병대대
◈제3보병대대
◈제5보병대대 |
◈제2포병대대
◈육군 제628포병 A포대(파견) |
◈직할중대 |
십자성 |
100군수 사령부 |
◈제1군수지원단
(보급,수송,공병)
◈제2군수지원단
(보급,수송,공병) |
◈제102후송병원
◈제106후송병원
◈제209이동외과병원 |
◈제1치료중대
◈제5통신대대
◈제11항공중대
◈직할중대 |
비둘기 |
건설지원단 |
◈제127공병대대
◈제103공병대대 |
◈제201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
◈제101경비대대
◈본부대대 |
백 구 |
해군수송전단 |
◈3개 LST함
(LST 3척) |
◈2개 LSM함(LSM 3척) |
공지단 |
공군지원단 |
◈전술공군 지원대 |
◈비행대
◈수송지원대 |
♣자료편집: www.vietvet.co.kr | ▣ 한국군 파병과 월남 ▣
|
과거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벌어진 모든 전란이 그러했듯이
월남전은 단순히 월남만을 적화하기 위한 지역전이 아니라 | 동남아 전역은 물론 세계적화를 획책하기 위한 서전적인 침략전인 것이다.
따라서 월남의 적화는 곧 한국의 안전보장과 동남아 전체의 안전보장에 위협을 주는
결과가 되므로 한국정부는 동남아 공존공영의 차원에서 국군파월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반공아시아 국가들의 결속된 반공태세와 협동정신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민족의 전통적인 의협심과 양심을 표명함으로써 국제적 신의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625동란 당시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구원해 준 우방 여러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한, 미, 월간의 경제적 유대를 통하여 조국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군장병에게 실전경험을 체득케하여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고
전국민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인식 시키게하는 지름길을 터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과 사명을 품고 월남전에 참가한 주월 한국군은
월남전의 특수성에 적응한 전략 전술 개념에 입각하여 면밀주도한 작전을 구사하였다.
즉, 월남의 지형적 특수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혼용하는 적을
양민으로부터 고립시켜 섬멸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사령관의 훈령아래
소부대 전술에 중점을 두고 점차적으로 대부대작전에 익숙케 하는 전략을 터득해 나갔다.
그리하여 모든 장병이 민사 심리전요원을 겸하여 두 나라 국민의 생활 관습과 풍속의
공통성을 이해 활용하여 그들과의 이민족적인 거리감을 없애는데 노력함으로서
월남정부의 통제지역을 확장하고 점차적으로 획기적인 평정의 폭을 넓히는데
빛나는 성과를 거두어 대한민국의 국위를 내외에 선양하고
국군의 실력을 만방에 떨치게 되었다.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한다는 문제를 놓고 국회에서는 야당이 월남 파병을 반대했고
국민의 여론도 이에 못지 않게 뒤끓었다. 한국의 귀중한 아들들을 타국의 전쟁터로 보내
목숨을 잃게 한다는 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파병안이 가결되고, 한국의 아들들이 월남으로 장도에 오를 때는
파병을 반대하던 야당인사는 물론 국민들 모두가 장병들의 무운을 빌며 환송의 대열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역사적인 거국적 환송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 월남전 파월경위 ▣
1963년 이후 월남내에서 베트콩들은 공격과 테러활동을 급증시켜 중남부 산악지역은
물론, 1번 도로를 포한한 각 평야지역까지 거의 그들의 손아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위기의 월남전을 회복하고저 월남정부는 우방국으로써
이미 공산주의의 침략을 받아 갖은 고초를 겪은 바 있고 자유세계의 도움을 받아
공산침략 세력을 격퇴시킨 많은 대공 경험을 가진 역사, 문화, 사회적풍습이 흡사한
동남아시아의 반공 보루국인 한국정부에 월남전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의해 한국정부는 1964년 9월 최초로 1개의 의무단과 건설지원단을 파병시켰다.
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월남국민에게 따뜻한 우의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와
의료지원단의 활동성과가 큼을 통감한 월남정부는 다시 1966년 2월 전투병력 증파를
한국에 요청하였다.
월남정부의 요청을 받은 우리 정부에서는 전투병력을 증파하는데 대한 국내외 정세와
특히 우리나라의 안전보장 문제를 중심으로 제반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고
1966년 2월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처 국회에 동의 요청을 하였다.
1966년 3월 10일 정부는 월남 증파 결의안을 제 55회 국회 제14차 본 회의에서
찬성 95, 반대 27, 기권 3으로 통과 전투부대를 파월하게 이르렀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년도별 |
1965년 |
1966년 |
1967년 |
1968년 |
1969년 |
1970년 |
1971년 |
1972년 |
총 계 |
인 원 |
21,031 |
41,809 |
42,743 |
45,729 |
43,408 |
42,349 |
42,602 |
33,177 |
312,853 |
|
주월사 (주월 한국군 사령부) The Head quarters Republic of Korea forces in Vietnam |
주월 한국군사령부(이하 주월사령부)는 1965년 9월 25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16호에 의거, 서울 필동 합동참모본부에서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육군소장(수도사단장 겸임),
부사령관 이훈섭 육군준장이 부임하였으며.
국방부 지령 제12호에 의거, 사령부 선발대 16명이 월남[사이공]으로 출발하였으며,
뒤를 이어 10월 20일 사령부 94명, 수도사단 지휘 본부 40명, 계 134명이
월남 [사이공]으로 이동하여 주월 사령부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당시의 예하부대로는 전투부대인 수도사단(맹호), 해병 제 2 여단(청룡)과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지원단(비둘기) 및 해상수송분대(백구)를
총지휘하게된다.
1966년 4월16일 수도사단의 보충부대로 보병 제 26연대가 증파 되었고,
뒤를 이어 6월1일 100군수사령부(십자성)를 창설하였고,
그리고 8월15일 전투부대의 효과적인 지휘와 연합군과의 밀접한 협조를 위하여
[나트랑]에 야전 사령부를 창설하였다.
66년 9월 5일 전투부대로서 보병 제9사단(백마)이 파월되었고,
1967년 4월10일 한국군 최초로 제11항공중대가 창설되어 7월 10일
사령부 및 직할부대가 증개편되어 공군 지원단(은마), 군악대가 창설되었고,
태권도 교관단 및 해병여단의 증강으로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총병력 4만 8천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는
월남의 수도 사이공 한복판에서 '초롱'쪽으로 가는 길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트란ㆍ콕톤' 12번가에 7천평이 넘는 넓은 땅에 2천평의 5층 건물에는
월남전의 오늘과 내일을 주름잡는 한국군을 비롯하여 호주, 뉴질랜드, 월남
그리고 미국군을 망라한 작전 연락장교단이 함께 있다.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퀴논'사단본부에서 맹호부대가 상륙한 후 작전지휘를
직접 맡고 있음으로 사령부는 참모장 이훈섭준장이 거의 통솔하다시피 하고 있다.
부대창설 : |
1965. 9. 25 .서울 필동 (채명신 소장) |
참전기간 : |
1965. 9. 25 - 1973. 3. 23 |
참전군인 : |
13,133명 ( 4,064명, 사병 9,069명) |
희 생 : |
전사 45명 (장교 18명, 사병 27명) 부상 54명 (장교 9명, 사병 45명) |
사 령 관 : |
초대 중장 채명신 , 2대 중장 이세호 |
부대지휘 : |
주월사를 비롯하여 3개 전투부대(맹호, 백마, 청룡)와 1개 군수 지원부대(십자성), 1개 군사원조단(비둘기), 2개 수송 전대(백마, 은마)등 8개 |
전 과 : |
1964. 7. 18부터 1973. 3. 23까지 대부대 작전 1,174회와 소부대 작전 576,302회등 총 577,476회의 작전을 실시, 한국군 전술책임 지역 7,000평방Km를 평정하고 월남 난민 120만 여명에 대한 거주를 정착시켰다. |
대민사업 : |
진료 3,523,364명, 식량 19,640톤, 의류 461,764,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Km, 태권도 보급 90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자매결연 3,364곳 등 끈끈한 정으로 평정사업과 대민사업을 병행실시, 진정한 우정을 심었던 결과로 월남국민들이 따이한을 믿고 따르며 잊지 못하게 했다. | |
|
십자성부대 (제100군수 사령부) The 100th Logistic Command |
최초 파월 전투부대인 맹호사단과 청룡부대가 파월됨에 따라
이들 전투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군수지원을 위하여 국본 일반명령(육) 제31호에 의거,
1965년 9월1일부로 강원도 흥천에서 수도사단 예하부대로서
군수지원사령부를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에 이범준 준장이 부임하였다.
파월이후 백마사단을 비롯한 추가부대가 증파됨에 따라
국본 일반명령(육)제22호에 의거, 1966년 6월1일부로 군수지원사령부를
100군수사령부로 개편, 수도사단으로부터 예속해제, 육군본부에 예속과 동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배속하게 되었다.
임무 :
기능 :
|
1. 주월 한국군에 대한 군수 및 행정 지원
2. 평정 및 개발사업의 적극적 지원
3. 전술 책임지역에 대한 자체방어
1. 보급품의 획득 및 저장분배
2. 3~4단계 정비 지원
3. 입원 및 후송
4. 인쇄 및 영현 업무
5. 대민 지원 |
※ 십자성의 의료활동
파 월 : |
1965. 10. 12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출범 1965. 10. 16 부산항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퀴논에 상륙, 맹호부대 사령부와 같이 퀴논 인접지역에 주둔. 출국 당시에는 군수지원 사령부였으나 1966. 6. 1 퀴논에서 부대명칭을 100군수 사령부로 개정. 1966. 8. 20 십자성 부대가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
사 령 관 : |
초대 이범준 사령관에 이어 유학성, 이영일, 이창복, 김종달, 신유정 준장이 사령관을 맡아 부대를 지휘했다. |
참전기간 : |
1965. 9. 25 - 1973. 3. 23 |
참전군인 : |
|
희 생 : |
전사 213명(장교 26명, 사병 187명) 부상 439명(장교 27명, 사병 412명) |
전 투 : |
106,665대의 차량수송과 396,019명의 병력수송 및 233,669동의 군수등 수송작전을 치루었다. 군수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사 심리전으로 베트공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환자 진료와 구호품을 전달하여, 전쟁의 적은 있어도 인류의 적은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평소에 십자성 사령부를 위협하던 지역내 혼톰산 일대에 1969. 3.1~ 3.11일간에 걸쳐 십자성 3호 작전(일명 올개미 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116공병대대, 237수송대대, 경비중대로서 적 사살 : 4명, 포로:1명, 용의자:6명, 소화기:5정, 문서:8점, 취사기구등 150여점을 노획했다. |
대민사업 : |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한국의 혼을 심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한국군이 빛나는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적기 적소에 군수 지원을 원활히 수행한 지대한 공로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파월 한국군 부대의 동맥과 젖줄로 그 소임을 다해 온 십자성 부대는 어머니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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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부대 (건설 지원단) The Construction Support Group |
한국군 부대로써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 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전사부대이다.
건설 지원단은 국방부 명령(육)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8명으로
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였으며
(초대단장 조문환 준장) 예하 부대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이동 경비대대,
제8이송중대, 해병 제1독립 공병 중대를 핵심으로 부대편성을 하였다.
1965년 2월5일 보병 제6사단 지역인 경기도 현리에서 국방부 장관 임석하에
주월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게 되었으며,
2월13일 파월 제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에 월남 사이공 도착하고,
3월 16일에는 전부대가 숙영지 도착과 동시에 불명확한 적정과 지형조건하에
자체 능력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면서
도로 및 교량보수에 착수 하였으며, 파월이래 처음으로 베트콩의 기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월 초창기의 여려운 환경속에서 건설 지원단은
도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학교, 진료소 공사와 태권도 지도 및 심리전 활동등
한국군의 개척자로써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공부할 교실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아담한 교실을 지어 주었다.
전쟁의 초연 속에 맥풀린 어린 동심에 꿈을 심어 주었고
이곳 '디안'의 면모는 비둘기들이 월남에 날아온 이후 면목이 일신되었다.
비좁은 시골 길이 대로로 바뀌어 훤히 트이고 먼지 투성이 도로가 다듬어지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졌다.
비둘기부대의 노고에 따뜻한 월남 사람들의 인정어린 보답이 뒤따랐다.
비둘기부대 병영 앞에 '디안'의 마을 사람들이 정장한 수녀들을 앞세우고
정문 가까이 다가오는 시위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둘기부대 장병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선의의 시위였던 것이다.
또한 펀펀한 황무지에서 소를 모는 목녀가 그들 허리에 찬 소중한 물통을
한국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름 아닌
인정의 교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깜은 꼬', 깜은 비둘기 '비둘기 고마워요'라는 이 월남말은
한국의 장병들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월남인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
비둘기의 주변에도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철저한
경비태세로 전투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둘레에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구축하여
5중방위선을 펴고 요새화된 자체경비로 장병들은 안전도를 높혀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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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부대 (해병 제2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
1965년 6월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해병 제2여단을 편성하였으며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65년 9월20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제 2여단 결단식을 거행되고,
65년 10월9일 파월 전투부대로써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65년 12월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66년 8월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67년 12월22일에는 호아안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병 제2여단은 한국군 최초 전투부대로 파월된 다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대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중 주요작전으로는 Tuy Hoa에서 청룡작전을,
Chu Lai지역에서는 Tra Binh Dong 전투를, 그리고 Hoi An 지역에서는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역내에서 암약,출몰하는 적을 섬멸하여
Quang Nam 성 지역들을 평정하였다.
파 월 :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5.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
사 령 관 : |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
참전기간 : |
1965. 10. 9 - 1972. 2. 24 |
참전군인 : |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
희 생 :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
전 투 :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 |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베트남에서 보여 주었다.
1967년 2월14일 밤부터 15일까지 사투를 벌인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
|
맹호부대 (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
수도사단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14일과 6월26일 2차에 걸친 월남공화국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965년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맹호사단은 1965년 11월15일부로 미101공수여단 및 미해병 7연대로부터
1,200평방km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고 거점을 확보하였다.
1965년 10월29일 풍손부락에서 최초로 서전을 장식한 이래
중대수색작전, 대대규모 및 연대규모의 작전을 실시하던중
1966. 3. 23 ~ 3. 26일간에 "고보이" 지역에서 1연대와 기갑 연대를 투입,
최초의 사단규모작전인 맹호5호작전을 실시하였다.
맹호 5호작전이 끝나자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하여 오던 베트콩을 소탕하고
사단전술 책임지역을 1,400평방 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1966년 4월6일부터 16일간에 맹호26연대가 증파됨으로서 사단편제 부대를
유지하게 되었다. 1966년 7월7일부터 8월22일간에 푸레이크지구 미군 합동작전인
파울리비아 작전에 기갑연대 1개대대가 참전하였다.
특히 9중대는 캄보디아 국경부근인 둑코지구에서 8월 9일 야간에 증강된
월맹군 1개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6시간의 격전끝에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격퇴시켜 대승하였으며 전술적인 면에서 중대 전술기지 개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세계전사에 새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 전술기지 운용개념을 확고히 입증한
둑코전투 승리는 월남전의 기적으로써 한국군의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월남전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우방의 각나라 군부대 전숫전략 전문가와 지휘관들이
한국군 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중대단위 전술기지 운용과 대민사업 활동사항 등을
답습해 가서 교훈을 삼아「무서운 한국군」이란 대명사가 되었고
밀림(정글)의 왕자로서 맹호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월남 중동부 해안 Qui Nhon 에 위치한 수도사단은 한국군 전투부대의 핵심부대로서
이곳에 침투하고 있는 월맹군 제 18연대를 중심으로한 지방 VC부대들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간 많은 작전중 둑코(Duc Co) 전투, 맹호 6 호 작전,
오작교 작전, 맹호 12 호 작전, 혜산진 9호 작전, 비호 23호 작전, 창군기념작전,
월계작전, An Khe Pass 작전등은 맹호 부대가 남긴 혁혁한 작전으로
상승 한국군의 기백을 널리 과시한 것이다.
파 월 : |
1965. 10.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월남 퀴논에 상륙 |
참전기간 : |
1965. 10. 22 - 1973. 3. 7 |
참전군인 :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
희 생 : |
전사 2,111명 (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 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
대민사업 : |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 등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벌였으며, 1972. 4. 18부터 5. 15까지 약 한달동안 파월 한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안케패스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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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The 9th Division (White horse) |
보병 제9사단(백마)사단은 1950년 10월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에 의거,
서울에서 창설, 예하부대로서는 제 28연대가 대전, 제29연대가 공주, 제30연대가
청주에서 각각 창설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포병사령부가 광주에서 편성되었다.
백마사단은 편성 1개월도 못된 1950년 11월23일부터
경북지구(영주, 김천, 문경)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고,
1951년 1월25일 연합군의 제2차 총 반격시는 제1군단 예하부대로서
괴뢰군 제10사단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여 적 사살 5,549명, 화기 노획 1,622정의
대전과를 올렸으며, 그후 철원지구 반격작전, 금화지구 방어작전, 사두봉 전투를 거쳐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정예부대인 제38군의 12차에 걸친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피아 공방전 끝에 적병 8,234명을 사살하고
백마고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휴전이 되기까지 8개월동안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 삼각고지, 금화 저격능선
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휴전 이후 금화, 포천, 인제, 화천, 양평, 양주
등지에서 부대정비와 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투력을 배양하여 오던중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 광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는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1966년 9월16일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년 9월22일 월남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에 주둔했다.
백마사단은 월남 중동부 해안지력의 1번 도로와 해안을 따라
길이 270Km, 폭 50Km에 달하는 책임전술(TAOR)지역을 확보하고,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도시와 항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 해 왔으며
또한 전술지역 내외의 침투하고 있는 적을 격멸하여 왔다.
초대 이소동 사단장의 뒤를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를 맡았다. 파월기간중 478회 대부대 전투와 211.236회의 소부대 전투를
실시하여 총211,714회의 전투를 치루었다.
전투중에도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건설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대민사업을 지원했으며 1967년 1월29일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작전을 비롯하여
1967년 3월8일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 개통의 오작교 작전과
1967년 7월9일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 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 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1번도로 개통은 월남군과 연합군까지도 공격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였으나 1967년 3월8일부터 맹호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 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날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파 월 : |
1966. 9.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 9. 22 월남 나트랑에 상륙, 인근지역인 닌호아에 주둔했다. |
사 령 관 : |
초대 이소동소장에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 |
참전기간 : |
1966. 9. 22 - 1973. 3. 11 |
참전군인 : |
100,336명 (장교 6,445명, 사병 98,891명)이 참전 |
희 생 : |
전사 1,328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
전 투 :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1번도로 개통은 이제까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를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었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백마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자유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낼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
대민사업 : |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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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부대 (해군 수송전대)-바다의 제왕 The Naval Transport Group |
주월 한국군 파월초기부터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해군의 활약은
지상군들의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와
의료및 대민지원사업 및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1965년 3월4일 한국함대로부터 LST 1척 812함이 파월되어
비둘기 부대에 편입된 후 해상수송임무를 개시하였다.
1966년 3월15일 LST 2척,LSM 2척을 증파하면서
해군 수송전대 백구부대로 개칭하고, 비둘기부대에서 배속 해제됨과 동시에
주월한국군 사령부 직할대로 승격되어 해상 수송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969년 8월29일 월남 해군본부로부터 쿠롱(CUULONG)기지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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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마부대 (공군 지원단)-하늘의 보라매 The Aerial support Group |
1967년 7월 1일 탄손누트 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은마부대는 4대의 C54기를 주축으로 월남전에서
공중수송의 지원활동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결단식를 가졌다.
창설경위 : 주월한국군사령부 공군지원단은
자유세계 안전과 보호를 위한 자유우방군의 일원으로
월남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주월한국군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6년 6월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를 설치하여 수행하던
전술 항공지원 업무와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수송 지원업무를
1967년 7월1일 C-46 미 항공기 파월을 계기로 보다 효율적인 작전지원과
부대운영을 위하여 분산되어있는 모든 기능을 통합운영코져 공군지원단이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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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외과병원 Medical support |
한국 육군 제1이동외과병원은
'사이공'에서 멀지않은 해안 가까운 '봉타우'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군으로써는 최초로 월남에 온 이 인술부대는
그동안 온갖 정성과 기술을 발휘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전란속에서 시달려 보건 따위를 돌볼 겨를도 없는 월남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온 이들에겐 이제 '따이한 박시'라는 호칭과 더불?br> ?봉타우'에 없어서는 아니될 일급 유지의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
전투에 다친 월남군인을 위시하여 민간인들의 질병을 퇴치해 주는가 하면,
우리 한국군 의무관들은 원수인 '베트콩'의 목숨까지도 구해줄 수 있는
박애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그 동안의 실적을 보면
비전투원인 월남시민들의 수 만도 5천 3백여명을 훨씬 넘게 치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적은 육체적인 질병의 퇴치와 생명의 구조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월남땅에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감명을 씨뿌린 크나 큰 성과라고 하겠다.
한편 '따이한 박시'들은 의술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만
의술을 베풀었던 것이 아니다. '사이공'의 명의들을 두루 찾아가서도 고칠 수 없었던
병을 고쳐 주기도 하여 '따이한 박시'의 인기는 높아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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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타우'의 세관장 '챵 곡 환'씨는
자기 장모의 병을 고쳐준 한국의 '박시'들을 위해
절에서 중까지 데려다 '따이한 박시'의 기적에
감사하는 사은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또 한편 '봉타우'에 있는 한국 장교들에게는 | 또 한편 '봉타우'에 있는 한국 장교들에게는 언제나 문호를 개방하는 친절을 베풀어
밥도 지어주고 김치며 깎두기도 담가 주고 있어,
한국 장교들은 고향이 그립거나 김치 생각이 나면, 김치 집 또는 깍두기 집이라고
불리우는 '챵씨'집을 허물없이 드나들게 되었다.
때로는 '챵씨'네 아이들에게 줄 과자봉지를 들고가서 아이들의 재롱도 보고
고향에 있는 아들 딸을 대하는 마음으로 목마를 태워주기도 하며
향수를 달래기도 한다. 우리 장교들과 자주 같이 노는 이 월남의 아이들은,
월남에서 한국말 잘하기로 유명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총을 맞아 입원 중인 한 해병소위는
한국에서 받아 주기만 한다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할만큼
한국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수십명의 월남해병들이 피를 쏟으며 '봉타우'의 한국군 이동 외과병원에 운반되었을 때
수혈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으나 이러한 광경을 본 월남사람들은
누구 하나 팔을 걷고 자기 피를 뽑아 달라고 자청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서슴치 않고 피를 뽑아
이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모처럼 휴일을 맞아 맥주로 피로를 달래던 군의관들은 응급환자의 입원 기별만
들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자를 돌보려고 달려가는 것이 상례다.
이러한 장면을 목격하는 '봉타우'의 시민들은 국경없는 인술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군인들이 거리로 나오면 '박시''박시'하면서
손짓으로 반기는 모습은 이곳 '봉타우'에서는 낯익은 풍속이 되고 말았다.
어느 월남의 어머니는 딸 여덟에 아들 하나인 독자의 생명을 구해준 한국 군의관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마치 종교적 신앙같이 엄숙하기까지도 했다.
또 언청이를 수술받아 나았다는 소문이 월남 전체에 퍼져
언청이 처녀들의 환성이 울려 퍼지는가 하면
턱이 없는 사람에게 가슴 살을 떼내어 턱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어머니가 요술을 보는 듯 주문을 외이는 등 '따이한 박시'들의 의술의 혜택을 받은
월남인들의 반응은 가지가지로 흐뭇한 정경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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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외과 병원장 이형수대령은
인구 3만을 헤아리는 휴양 도시 '봉타우'의
당당한 A급 유지로 등장되어 크고 작은 모든
행사에는 억지로라도 상좌에앉게 마련이다.
소학교 졸업식에 참석해서는 축사를 해야하고 | 결혼식장에서는 주례를 서야하며
심지어는 카페의 중년 마담이 결혼하는데주빈으로 초대받는 등
분주한 나날에 즐거운 비명을 올릴 형편이다.
그러나 한편 별을 몇개씩이나 단 미군 장성도 한국군 병원장의 권위를 따르지
못한다는 특색은 바로 '봉타우'의 이채라고 하겠다.
더욱 관청에서 마련라는 행사 때에 병원장이 나타나면 군악을 울리면서 환영과 경의를
나타낼 정도이며 병원장이 끼지않는 모든 행사는 싱겁다는 평까지 받고 있다.
'봉타우'의 빠나식당에서는 '따이한 박시'에 한해서만은
외상술도 '오케이'를 내세우는 곳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월남인 상점에서는 '어서 오십시오'라는 한글 간판도 볼 수 있어
한국군인들의 눈을 끌기도 한다.
이 '봉타우'는 월남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관광도시이며
또 '봉타우'에는 교포가 경영하는 '아리랑 하우스'를 비롯하여 '코리아의 집',
'충청도의 집'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김치 깎두기와 된장국도 팔고 있으므로
한국 장병들의 식탁을 푸짐하게 만든다.
'봉타우'에서의 군의관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장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베트콩'에게 세금을 바치고 사는 농민도 적지 않다는 월남의 땅에서
칼대신 인술을 가지고 대민 사업을 성과있게 달성하여
오늘의 대우를 받게 된 이면에는 우리 장병들의 수많은 고생이 거름이 되어
부대 자체방위에도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중의 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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