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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주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
- 김성국(金成國, 1947-)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아나키즘학회 회장)
[“단주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독자성”, 부산대학교 사회조사연구소, 사회조사연구, 2001]
사고의 틀 또는 규정에서 사유의 과정 또는 생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해석하기보다, 생명과 삶을 토대로 철학하는 길일 것이다. 같은 시점, 같은 터전에서 달리 생각하는 것은 소중하다. 틀과 규정을 미리 가지고 터전과 영역에 적용하는 해석이나 묘사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틀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터전과 영역에서 다양한 가지치기와 계열을 묶어서 한 시대를 수렴하는 것은 어렵고 또한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수렴이란 여러 요소와 단위들을 모으는 작업뿐만이 아니라 서로들 사이에 역동적 연관들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자의 방식을 공시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후자의 과정론을 통시적 관점에서 생성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했었다.
공시적 관점에서 의식주(衣食住)의 해결이 그 사회의 인식과 제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용어의 배치가 이미 제도와 위계를 표상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식주의(食住衣)라고 해보면, 삶의 과정과 생성을 제기하는 듯이 보인다. 후자에서는 자치, 자주라는 의미를 볼 수 있는데 비해, 전자에서는 의례와 위계를 상징하는 옷이 지각작용에서 앞선다. 식주의사(食住衣思)라고 해보자. 그러면 삶에서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고 난 뒤에 사유에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벩송이 말하듯이 “사는 것이 먼저이며, 철학은 다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선후의 문제라기보다, 형이심(深)학, 인간의 인식, 학문의 태도, 사회의 연관, 우주의 생성에 대한 관심의 경향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벩송이 형이상학을 한 것이 아니라, 형이심(深)학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여러 글에서 벩송은 인문주의자(humaniste)라기보다 인도주의자(humanitaire)이며,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 liberaliste)라기보다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라고 본다.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본성(la nature humaine)라는 개념에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해 생성된 것이지, 인간의 완성품 또는 모델이 먼저 있어서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왜 서양 철학사에서 늦게서야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 생물학과 의학이 학문으로 자리잡게 되고 그리고 영혼학(psyche + logos)이 생리학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심리학으로 정립하는 시기에 성립한다는 것이다.
생명학 또는 생물학이, 영혼학 또는 심리학이 발달하는 시기에, 사회와 국가에 대한 개념과 추상화의 길과 체제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체제에 관한 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여기 다 말할 수 없지만, 우선 공시적 관점에서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를 먼저 생각하면, ‘그림자 | 물체 || 추론 | 이데아’ 라는 비유는 공시적이다. 이데아를 중심으로 그림자를 설명, 해석, 지배하려는 방식은 철학사에서 세 부류가 있다. 하나는 국가에서 권력(명령), 종교에서 권위(독단), 학문에서 학설(연역)인데, 이들이 20세기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3자의 결탁에 의해 자본 제국을 만들었다. 그런데 통시적 관점에서, 고대에서는 상식을 기반으로 한 소수 상층이 자유를 누리고, 근세에 와서는 양식을 통하여 성내(城內)의 다수(부르주와)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원론이 제기되고, 급기야는 부르주아에 의한 혁명을 통해 다수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여전히 국외로 배제된 노마드 계층은 제도에 포획 또는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산업의 발달에서 또는 증기기관과 모터(원동기)의 발명으로 인민이 손발이 일에서 벗어날 즈음에 공산사회의 건설을 꿈꾸게 되는데, 터전에서 식주의를 마련하고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것이 품앗이(상부상조)이며, 성 바깥의 터전에서도 삶을 잘 만드는 것이라고 여긴다. 프랑스의 둘째 혁명을 거치는 과정을 재인식하였고, 또한 직장에서 봉급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카페에서 지하 술집에서 국가와 세계를 논하는 것들을 직접 목도하였던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문을 쓰게 되었다. 공산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그 사회가 위계의 사회가 아니라 평등의 사회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 사회의 도래에서 공시태적으로도 전인민에게 감각작용과 지각작용이 필요하고, 통시태적으로도 전인민에게 과거의 역사적 흐름에서 인민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새로운 창안을 지속하기 위해 교육을 필요로 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자연에서 도래한다는 교육이 필요했다. 신으로부터든지 원본으로부터도 아니다. 그러한 자연의 산물인 인간이 명령, 독단, 연역의 체계 또는 위계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1882년 프랑스는 보통, 평등, 탈종교(세속화)라는 이념으로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들었다.
플라톤주의(플라톤이 아니다)에서, 상층의 이데아가 심층의 아페이론에까지 언어, 논리, 과학, 그리고 제도 조자도 지배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비해 생성과 발전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아페이론이 자발적이고 생성적이라 새로운 방식과 경향을 발산할 것이고, 루소의 자연권에서 또는 벩송과 들뢰즈가 말하는 공감 또는 공명을 통한 합의와 인민의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삶의 터전이 기본적으로 가정과 같은 아비와 어미 그리고 자식이라는 틀을 제도와 체제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플라톤주의 교회주의 그리고 정신분석학에서 삼각구도로 이어져 왔다. 그에 비해 사회란 인간들 사이의 관계 또는 인민들의 연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연관이라는 접합의 방식은 다양하고 창발에 의한 자유의 발현이지만,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성(단일성)을 주장하는 쪽에 밀려서 국가주의 또는 제국주의로 변전을 형성해 갔다. 이 국가주의가 통일성 아래서 전쟁을 두 번이나 치렀다는 것을 서구지식인은 한탄했다. 그 전쟁이 속좁은 이성의 광기라고 분석해낸 것이 푸꼬이다.
형이심학적 관점에서 제도를 분해 또는 세분화의 방식도 있다. 간단하게 플라톤주의의 선분 도식에 비추어서, 무권위주의 | 사회주의 || 국가주의 | 제국주의로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사유에서 무권위주의는 공산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와 연대할 수 있고 또한 공산주의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와 연합할 수도 있다. (터전과 정치상황은 전혀 다른 길로 가기도 했지만) 도식 상으로 보아 무권위주의와 사회주의는 같은 방향에서 경향성이 다른 세분화의 길이며, 이들은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와 방향과도 전혀 다른 방향이이며 그리고 이들의 미분화 방식과도 전혀 다른 세분화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국가주의가 성행하던 시절에 인민들 또는 활동가들이 국가주의의 포획되거나 복속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가족주의 다음으로 민족주의가 그들을 스스로 포섭의 길로 가게 한 것이 아닌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무권위주의와 공산주의, 즉 아나키스트와 볼세비즘 사이에서 우리나라 활동가들이 대립과 투쟁관계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서로가 협력과 연대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방향과 경향이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가 반목하는 관계로 설정되는 것, - 역사의 과정에서 가정도 없고, 또한 환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 그 시대의 방향설정에서 중요점에 대해, 현재를 분석하는데도,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즉 단체들 또는 개인들의 성향을 상부에서가 아니라 심층에서 다시 탐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자주, 자치, 자발성이라는 측면에서 ...
1905년이란 시점에서 조선의 물질적 토대가 산업이라기보다 농업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19년에서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과 한양에서 1919년 조선독립선언에서 차이와 차히를 보아야 할 것이다. 만주의 활동가가 공화정을 바랐을 때, 공화정이 프랑스 대혁명의 공화정인지 앵글로색슨의 공화국인지를 구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만주의 활동가와 독립운동가들의 사유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서, 세계사적 시대와 연관을 보아야 할 것이다.
1919년 1차 대전이 끝나고 독립 운동가들이 소비에트 성립에서 레닌의 소수민족에 대한 견해와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국들이 소수민족의 독립에 대한 약속의 차이들이, 해외 독립 운동가와 국내 저항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으며, 1930쯤에서 서로간의 인식의 차이보다 당면한 독립을 어떻게 실행할 것이냐에 관심을 두더라도, 한반도는 세계사의 조류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범위를 국한시켜서 탐색하는 것은 어쩌면 개인적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한 연구자가 글을 쓰는 시기에 국내 운동의 성향에 비추어서 전개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논자가 유림의 전반적 삶의 과정으로 보아 무권위주의에 맞게 진솔한 삶을 살았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논자는 이호룡의 논문이 맑스-레닌주의에 경도되어 아나키스트를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사상투쟁으로 나가나는 것보다, 단주 유림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지하활동의 과정에서 여러 운동가들이, 자신들이 처한 터전이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그리고 그 시대의 카이로스(적절한 때)에 맞는 활동 방식을 창안해 내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자료의 총체를 다루면서, 각각이 처한 위상을 실재성 그대로 보고, 그리고 각각이 다른 위상들과 연관을 파악하는 데, 총체적 사유에서 비롯했는지를, 각자의 신념과 관심을 타영역에도 응용하며 포섭하려고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조소앙이 벩송을 만나는 일화를 보건데, - 조소앙은 벩송에 대해 영어로 우주의 시초와 끝을 물었는데 답변이 시원찮았다고 한다. -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이 일본과 중국에 대해 인식했던 것과 달리, 서구에 대해 학문에서도 서구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에 우리 측에서 레닌과 윌슨의 관점을 잘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로스는 우리 속에서 운동과 저항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해외와 지하운동의 연계에 대해 재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학문적 논의에서 또는 운동의 방향에서,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를 논의하기 위해서, 서로의 대립적 또는 적대적 관계를 부각시키는 것은 우선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의 남쪽에서는 세 가지의 상층이 심층을 거짓 또는 무화하면서 악의 축으로 몰고 있는 한에서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논의의 틀 자체를 바꾸기 위해 세 가지 층위의 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이 벗어나는 길은 소은 박홍규의 플라톤철학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며, 또한 무권위주의 세계와 제도를 바라보는 인식을 가져다주는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루소, 벩송, 들뢰즈로 이르는 형이심(深)학에 대한 논의가 자유로울 때, 식주의사(食住衣思)로 향하는 새로운 질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역을 다루고 있는, 달리 말하기, 달리 글쓰기, 같잖은 이야기 등을 하는 별종(anomalie, 덕후)의 시기를 거쳐야 할 것이다. 대부분은 제자백가의 쟁명을 이야기하기도 하나, 상층에서 표면으로 내려가는 방향과 질서도 있을 수 있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올라가는 경향과 질서도 또한 있을 수 있다. 이 표면의 이중성에서 인간의 현존이 있다. 역사적 일회적 사건들과 사실들이다. 있다. 두 방향 또는 두 계열, 그리고 두 영역의 현존에서 상층의 49%와 심층의 51%라는 범위를 가질 때, 인도주의자(humanitaire)와 인성자유주의(libertaire)가 삶의 터전과 카이로스에서 자기 역능과 권능을 발휘할 것이다. 인민이 자발성으로 이 카이로스에서 발현되도록, 학문의 제 분야에서는 토대를 마련하는 노력을 지금도 하고 있고, 금수강산유고수(錦繡江山有高手)라고 별종들이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논자도 세분화의 여러 선들 중에 한 선을 담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플라톤이래로 레닌 시대에까지 철기 문화의 시대로, 마치 거푸집에 의해, 동일자들을 양산하는 시대였다. 들뢰즈가 1953년 이래로 규소의 시대라고 한다. 과거의 체제를 본떠서, 중첩적으로 트랜지스터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명령하며 포획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어느 듯 쌍방이 소통하기도 하고, 또한 인민이 또는 떠돌이 노마드들의 정보가 중앙매체의 뉴스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마도 자본 제국이 인민들 속속들이 미세하게 지배하는 도구로서 AI를 만들어가고 있다고들 한다. 인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말투로, 서로의 소통과 연대를 이루어가고 있다. 대중가수를 국가가 통제하며 부르고 내치는 것도 이제는 쉽지 않다. 인민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SNS시대에 인민이 최종심급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규소의 시대에 인민의지의 발산과 수렴의 과정이 일방적인 소통의 구조와 달리 쌍방이기도 하지만, 또한 비규정적 발산의 계열을 연합이든 연맹이든 연대하며 수렴하는 과정은 산업구조시대와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분단의 아픔은 학문적 왜곡뿐만이 아니라 삶도 비틀어서 고통을 아편(종교)으로 달랜다. 통일의 방식은 전혀 달리 생각하는 이들, 같잖은 말투, 달리 말하기에서 불쑥 솟아날 수 있다. 터전과 카이로스, 세분화의 연대와 동맹에서, 노마드의 무제한 확장에서 용출선을 만들 것이다.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11자. 이 염불 같은 대안, 대안을, 원효가 시장을 돌아다니며 무애 무애하듯이, 요즘 인민들 사이에 각자 도생이라는 말에서 도생, 도생할 수도 있다. 염불이,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가 - 빛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지구를 돌고 또 돌 수도 있다는 것이다. (55RMG)
*참조: 소번(Nicholas Thoburn, 1970-)은 들뢰즈를 맑스쪽으로 연결하려 노력하는데, 프랑스 혁명 대혁명 후에 지하조직을 만든 바베프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유림의 사유에 접합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오의 중국 혁명에도 삶의 터전은 중요했다. 광주의 항쟁도 생각해 보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볼세비키처럼 주력도 필요하며, 큰수레를 끌고 가는 노력도 더욱 필요하다. (55RMA)
- 맑스에게는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실천적 담지자. 반면 바쿠닌에게는 농민뿐만 아니라 룸펜프롤레타리아도(실업자, 범죄자, 성노동자 등) 봉기를 일으킬 수 있다. 바쿠닌은 “자본에 대한 더욱 파괴적인 혁명의 힘을 위하여 노동자들의 통합을 고려했다. 바쿠닌에게 있어서 혁명의 원형은 농민의 환경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교육받은 실업 청년에게서도,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모든 계급들, 도둑과 강도들, 가난한 대중들 그리고 사회의 여백에서 벗어나거나 이로부터 제외된 자들 혹은 아직 산업 노동의 규율에 포섭되지 않은 자들… 즉 마르크스가 ‘룸펜프롤레타리아’라고 규정한 모든 이들이었다.” - [Nicholas Thoburn. "The lumpenproletariat and the proletarian unnameable" in Deleuze, Marx and Politics]-
# 내용 중에서 ***
Ⅰ. 유림: 아나키즘에서의 일탈이냐? 아니면 아나키즘의 한국화냐?
이 글의 목적은 이같은 논쟁적 주장들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아나키스트 柳林先生의 활동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일탈론을 주장한 이호룡(2000)을 대상으로 비판적 논박을 제기할 것이다. [2쪽: {논1947김성국2001단주류림}파일의 쪽]
柳林先生의 아나키스트 일대기를 세 시기, 즉, 해방전의 아나키즘수용기(제2장)와 임정참여기(제3장) 그리고 해방 후의 독립노농당시기(제4장)로 각각 나누어 논의하겠다. [2]
필자는 柳林先生이 한국적 특수성에 입각하여 아나키즘을 “한국화”, 즉, “고유화” 혹은 “주체화”하였을 뿐아니라, 아나키즘의 실천적 지평을 확장함으로써 세계아나키즘운동을 한 단계 “고양”시킨 선구자적 업적을 이룩한 것으로 판단한다. 필자 자신이 참여지향적 아나키스트로서의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2]
이호룡(2000: 229)은 .. 1921년 무렵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분화되었으며, 1922년 후반 무렵부터는 공산주의가 점차 사회주의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갔다. [6]
당시 왜놈들은 (공산주의자의) 선전과 대중운동보다는 (아나키스트의) 폭탄과 총을 훨씬 더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24년까지 300명에 가까운 가장 우수하고 용감한 의열단원들이 왜놈들에게 살해되었다. ... 어쩌면, 아나키즘의 위축과 공산주의의 확대는 일제의 간교한 분할정책과 (소련으로부터의) 외부적 지원이라는 타율적 변수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닌가 싶다. [7]
3) 제3의 사상으로서 독자성 상실: 민족주의에 흡수 [18] - [제3사상: 아노말리(별종)은 정치투쟁에서도 유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집권은 한 계열이 할 수 있어도, 투쟁은 다양체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는 마르크시스트와는 달리 혁명의 과정에 프로레타리아독재를 삽입하여 민족혁명-정치혁명-사회혁명의 점증하는 단계혁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혁명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추구된다. 조선아나키스트들은 서구나 중국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체험하지 못한 식민지라는 절대절명의 특수상황에서 그리고 좌우익의 협공 속에서 직접행동의 가장 극적이면서도 위험한 형태인 일종의 연합전선과 정치참여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을 “일탈”로 치부하기보다는 “상황변화에 따른 적극적 대응이요, 성숙한 판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19-20]
예컨대,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단순히 어떤 정적(靜的)이고도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적게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동태적-실천적 과정으로서 파악한다면, 아나키즘은 최소국가정치론(혹은 작은 정부론의 극대화)과도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다. 아나키즘이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연방주의적(federalist)이고, 지역공동체적(communitarian)인 자유연합의 네트워크조직은 현실적으로는 탈중앙집권화와 지역자치화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는 직접민주주의에서 그 최적의 근사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해방공간에서 펼쳐진 한국의 현대정치사는 그야말로 아우성과 소용돌이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전무쌍하는 예측불허의 난장판[맴돌이, 제자리걸음]이었다. [26]
이호룡(2000: 228)은 .. 독립노농당도 민족주의 진영, 즉, 우익진영에 편입되어 사상적 독자성을 상실하고, 공산주의세력과 줄곧 대립하므로써 독자적 세력의 구축에 실패하고 제3의 사상으로서 위상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 완전히 고립된 소정당으로 전락하여 아나키스트세력의 몰락을 초래하였다고 혹평한다. 나아가, 이러한 아나키즘의 일탈은 “한국의 근대사상계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좌우대립으로 몰고 간 내적 요인”이라는 무책임론까지 첨가한다. 좌우대립의 희생양을 다시 한 번 속죄양으로 몰아치는 격이다. [27] - [망명지에서 민족역량의 부족, 서양에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
1) 편입. 독립노농당은 민족진영에 편입되지 않았다. [27]
2) 우익. 독립노농당은 우익이 아니다. [28]
3) 반공주의.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은 일제 시대부터 계속되었다. [28]
4) 고립. 독립노농당은 고고하였을 뿐 결코 고립되지 않았다. [28]
5) 몰락. 아나키스트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29]
6) 민중 없는 조직. 아나키스트들은 민중과 함께 행동하였다. [29]
역사상의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대경실색할 이같은 비난은 전통적으로 반(反)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한 “수사학적 죽이기” 수법과 유사한 점에 당혹스럽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을 관념적이라고 하다니! [30]
7) 사상적 파탄. 독립노농당은 아나키스트사상의 선구적 실천이다. [31]
.... 사상적 파탄이 아니라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적 결단”이요, “사상적 성숙”이다. [32]
Ⅴ. 결어: 아나키즘의 선구자로서 유림 [32]
유림의 활동이 아나키스트운동에 기여한 바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자.
첫째, 유림의 임정참여는 아나키스트 정치의 시발점으로서 신채호가 추구하였던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을 아름답게 결합시킨 이념적 성숙의 산물이다.
둘째, 유림은 신채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므로써 우익 민족주의진영에 편입되거나 자본주의적 질서에 현혹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셋째, 유림의 독립노농당 결성과 정당활동은 아나키스트정치의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므로써 세계아나키스트운동사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고, 한국아나키즘의 고유성을 확립하였다.
넷째, 유림도 아나키즘의 반공산주의적 노선을 따라서 시종일관 대립적 자세를 견지하므로써 아나키즘의 사상적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반볼세비즘 또는 반스탈린주의]
다섯째, 유림의 비타협적 원칙주의 노선은 현실적으로는 고난과 좌절로 이어졌지만, 21세기 한국아나키즘의 부활과 발전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아제측정] [32]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단주 유림도 민족절개의 사표로 추앙받을 것이다. [33]
(55R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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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국, 단주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독자성(獨自性), 부산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1, 사회조사연구, 16권 0호, pp.57-88 (총 32 페이지)
- 김성국(金成國, 1947-) 서울대 학석사, 미국에서 박사, <..., 1982, Indiana University at Bloomington> “유자명과 한국 아나키즘의 형성”(2003) “허유 하기락의 아나키즘 소고”(1998)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2004?)
** 조완구, 엄항섭
1867 이회영(李會榮, 1867-1932)[옥사] 자 성원(聖元), 아호는 우당(友堂).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 시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유교(양명학) → 개신교(감리회).
1868 이시영(李始榮, 1868-1953)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이회영의 아우
1875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본관은 전주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 .
1876 김구(金九, 1876-1949)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 백범은 암살범에게 암살 되었다. 대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독립당
1880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사학자.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天鼓)》를 창간, 《조선사론(朝鮮史論)》,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1881 조완구(趙琬九, 1881-1954)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후 한국독립당.
1885 신재모(申宰模, 1885-1958)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파괴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상업중심가와 일본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1946년 4월 20일에서 23일까지 경상남도 안의에서 전국아나키스트대회가 개최되어 (1945년 9월 27일에 이미 결성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회원들과 유림을 비롯한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회원들이 모두 참여한다. (의장으로 류림, 이을규, 신재모)
1887 조소앙(趙素昻, 1887-1958) 경기도 파주(坡州),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 조용은(趙鏞殷),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학사.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겸 교육자. 1920년 2월에는 파리에서 앙리 베르그송(세계지식인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1888 김붕준(金朋濬, 1888-1950) 평남 용강, 호는 당헌(棠軒).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정치인, 1950년 납북.
1889 김좌진/김상현(金佐鎭, 1889-1930) 일제 강점기의 군인.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김종진(金宗鎭, 1901-1931),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野雲) 등도 암살당함 - 김좌진 측근들에게 살해된 걸 공산당에게 살해된 걸로 씀(이호룡, 2008)]
1891 성주식(成周寔, 1891-1959) 한국의 군인·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1948년 4월 제1차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끝내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892 신익희(申翼熙, 1892-1956)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학사(1918년).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호는 해공(海公)·해후(海候), 별칭은 왕방평(王邦平)·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宇), 임방호(壬邦乎).
1893 고순흠(高順欽, 1893-1977)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아나키스트‧서예가.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巖)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 조선노동공제회
1894 이을규(李乙奎, 1894-1972) 아나키스트, 1924년에는 이회영· 이정규(李丁奎)· 유자명 등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였으며, 1929년 7월에는 김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해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
1894 유자명(柳子明, 1894-1985)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남과 북에서 유일하게 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개명 前 이름은 유흥식(柳興湜)이고 본관은 문화이며 호는 우근(友槿)이고 개명한 이름 유자명(柳子明)은 원래 별명이었다. 나의 회억(1984) 유자명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 1999)
1894 오면직(吳冕稙, 1894-1938) 황해도 안악, 조선,동아 기자. 아나키스트 1933년에는 한인무정부주의자 상해연맹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 1935년에 김구의 휘하를 떠나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여 단장
1896 정화암(鄭華岩, 1896-1981) 전라북도 김제,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호는 화암(華岩). 아나키스트, 통일당.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1897 이정규(李丁奎, 1897-1984)는 1924년 9월 이후 4년여간 상해에 거주하였으나 1928년 10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광복직후 귀국하여 1945년 9월 서울에서 무정부주의운동의 총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하였다. 1946년 이후 국학대학과 성균관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8년 청주대학 총장과 1963년 성균관대학 총장을 역임하였고 1966년 퇴임 후 1984년 87세로 서거했다. 김시준(1997), 142쪽.
1898 단주(旦洲) 유림(류림, 柳林, 1898-1961) 본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단주(旦洲)이다. 경상북도 안동군 임북면 계곡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화영(柳華永)
1898 김원봉(金元鳳, 1898-1958) 밀양,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 의열단장이자 난창에서 중국 공산당에 관여한 군인. 경남 밀양에 의열 기념관이 있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6월 인민공화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1898 김성숙(金星淑, 1898-1969)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승려 겸 정치가. 법명은 태허(太虛). 호는 운암(雲巖). 다른 이름은 규광(奎光), 충창(忠昌), 창숙(昌淑), 성숙 창숙 성숙(星淑).
1898 엄항섭(嚴恒燮, 1898-1962)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중화민국의 공무원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 1930년부터 김구 최측근.
1900 윤세주(尹世胄, 1900-1942) 밀양,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아명은 소룡(小龍), 호는 석정(石正)이다
1901 김종진(金宗鎭, 1901-1931)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본관은 안동, 호는 시야(是也)이다.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02 최갑룡(崔甲龍, 1902/4-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이명은 최우진(崔又震). 본적은 평안남도 평양시(平壤市)이다. 1927 관서흑우회. 1929년 11월 1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
1902 박열(朴烈, 1902-1974) 경북 문경, 1919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3.1운동 가담. (本)朴準植 朴爀. 아나키스트, 黑濤會 조직자.
1904 이홍근(李弘根, 1904?-?) 28세 [류림과 여섯 살 차이] 아나키스트, 본적: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용산리 751번지, 주소: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동고동. 당시 사무원. 1929년 11월 1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
1912 나월환(羅月煥, 1912-1942), 전남 나주, 호는 송죽(松竹).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 1942년 3월 1일 변절자 박동운(朴東雲), 이하유(李何有), 김동수(金東洙), 이해평(李海平), 이도순(李道淳), 고여순(高如淳), 김송죽(金松竹), 김용주(金龍珠) 등 8인에 의해 피살되었다. 중국전간사단(中國戰幹四團)은 박동운 사형, 이하유·김동수 무기징역, 이해평·이도순·고여순 징역 15년형, 김송죽·김용주 징역 2년형을 선고하였다.
1912 하기락(河岐洛, 1912-1997) 경상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출생. 유림이 조직한 독립노동당에 가담하여 기관지 『독립 노동 신문』을 편집하였다. 1952년 안의고등학교를 설립.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1981]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신명, 1993).
1912 양일동(梁一東, 1912-1980) 전라북도 옥구, 대한민국 정치인. 본관은 남원이고, 호는 현곡(玄谷)이다. 1973년 민주 통일당을 창당, 대표 최고위원과 총재를 지냈다.
?-? 정인식(鄭仁植) 1956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한국자주인연맹 의장,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정인식(鄭仁植, 1911-1951?)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1951년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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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박영한(朴榮漢, 1947-2006) 경남 합천, 부산고등, 연세대, 부산동의대 문창과 교수, 소설 장강(長江, 1996)(박씨는 6년여 전 알게 된 이두표옹(75)의 수기 「인간화물」등을 토대로 작품을 써, 아나키스트 이두삼을 창조했다.) / 장편 「머나먼 쏭바강1978」]
1947 김성국(金成國, 1947-) 서울대 학 석사, 미국에서 박사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 <1982, Indiana University at Bloomington> “유자명과 한국 아나키즘의 형성”(2003) “허유 하기락의 아나키즘 소고(1998)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2004?)
1954 김희곤(金喜坤, 1954-), 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립운동사 전공.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과 사상.(1992)” 안동문화연구회.『안동문화연구』 6: 111-123. “旦洲 柳林의 독립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 2001), “안동출신 사회주의운동가 李準泰 연구”(한국근현대사연구, 2003).
1954 오장환(吳장煥, 1954-). 건국대 학석사, 프랑스 박사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연구: 그 기원에서 1931년까지, 1987, 파리7대학 Pierre Brocheux.>.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8.
1955 김영범(金榮範, 1955-) 서울대, 대구대교수.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1997 「한국형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 사회이론: 사회학자 김성국의 아나키즘 택용과 재구성의 궤적, 2012」
?-? 김영천(金永千, ?-?) 단주(旦洲) 유림(柳林)의 아나키즘과 독립운동(2008) - 단주류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 안준섭(?-?), 「대한민국임시정부하의 후기 좌우합작」(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1, 1986);
1956 이호룡(李浩龍, 1956-) 서울대 학사, 계명대 석사, 서울대 박사.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2000, 서울대, 한영우.> “柳林의 아나키스트 사상과 활동(2005)”
1957 조광수(趙廣洙, 1957-) 영산대학교 교수, 중국아나키즘, 1998
1958 박환(朴桓, 1958-) 수원대 교수, <서북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연구, 1990, 서강대, 이광린.> “중일전쟁이후 중국지역 한인무정부주의 계열의 향배, 1997”(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65 조세현(曺世鉉, 1965-), 서강대 학석사. 부경대 사학과 교수, <淸末民初無政府派的文化思想, 1999, 북경대, 공서탁.>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 교류와 연대: 적자생존에서 상호부조로, 2010(창비)[아나키스트 도서관에 파일]
1967 박종린(朴鍾隣, 1967-) 한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日帝下 社會主義思想의 受容에 關한 硏究, 2007 연세대, 방기중.> 바쿠닌과 슈티르너의 아나키즘과 식민지 조선,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2008.
***서양***
1469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사상가, 정치철학자.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
1806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본명: Johann Caspar Schmidt, 1806-1856) 독일의 철학자,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유일자와 그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5)
1809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가난하여 독학했다. 프랑스의 상호주의 철학자, 언론인.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한다. 재산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ropriété? ou Recherche sur le principe du Droit et du Gouvernement, 1840), 1858년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1814 바쿠닌(Mikhaïl Bakounine, 1814-1876) 러시아 출신의 아나키스트 혁명가, 철학자. 바쿠닌은 1840년 베를린에서의 유학중에 헤겔좌파를 만나게 되고 급격한 사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당대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나키즘에 도달한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하자'고 주장.]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 역사가, 경제학자, 기자, 혁명이론가. 공산주의자.
1853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1853–1932)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선전가. 사회주의 혁명가. 연대, 즉 상호부조는 아나키즘의 핵심.
1842 크로폿킨(Peter Kropotkin, 1842-1921)은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가, 철학자였다. 보로딘(Бороди́н)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9)
1854 카를 요한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 1854-1938) 체코계 오스트리아인이며 독일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한 철학자, 언론인, 맑스 이론가. 카우츠키는 189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죽은 후부터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가장 권위있는 정통마르크스주의 전파자 중 하나였으며, 제2인터내셔널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 이론가였다. 또한 사회주의 저널인 “새 시대(Neue Zeit)”의 창간자이기도 하다.
1870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yich Lenin/Ulyanov, 1870-1924)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다
1873 살베미니(Gaetano Salvemini, 1873-1957), 이탈리아 역사가, 정치인. 아탈리아 사회당. 반파시스트. 저항운동, 공산주의와 기독교민주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을 모색했다. 1940년 미국국적, 1947년 플로렌스 대학 교수 복귀.
1878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e, 1878-1953)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ㆍ언론인이다.
1888 마크노(Nestor Ivanovitch Makhno, 1888-1934) 코사크족, 우크라이나 인성자주의 공산주의자(아나키스트). 우크라이나 혁명봉기군 창설자. 그는 짜르 백군과 동시에 볼세비키 적군과 싸웠다.
1889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영국의 역사가. ‘도전과 응전(de défis et de réponses)’의 개념으로, 창조적 소수자("minorités créatrices")에 의해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Étude de l'histoire)(1934년-1961년, 27년동안)
1893 리드(Herbert Edward Read, 1893-1968) 영국 예술사가, 문예비평, 아나키스트 시인. Existentialism, Marxism and Anarchism (1949), Anarchy and Order: Essays in Politics, 1959.
1896 부에나벤투라 두루티(José Buenaventura Durruti Dumange, 1896–1936)는 스페인의 노동자국민연맹(CNT)와 리베리아 반도의 아나키스트 연합(FAI)를 비롯한 여러 아나키스트 조직에 참여하여 스페인 내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아나코-생디칼리스트 투사였다. 두루티는 스페인 내전에서의 아나키즘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오늘날 아나키스트 운동의 영웅 중 한명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1902 레비(Carlo Levi, 1902–1975), 이탈리아 저술가, 화가, 반파시슴. 그람시에 대한 저술이 없다. 단지 잡지에 그람시의 글을 쓴 적은 있다.]
1928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 우크라이나 유대계, 미국의 언어학자, 철학자, 인지 과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정치운동가, 아나키스트, 저술가.
1936 하벨(Václav Havel, 1936–2011) 체코 극작가, 77 헌장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 체코 대통령. “Anti-Political Politics”, pp. 381-398, in Civil Society and the State, 1988.
1938 노직(Robert Nozick, 1938-2002) 미국 철학자, 하버드대 교수. Anarchie, État et utopie (1974)
1942 테일러(Michael Taylor, 1942-) 와싱턴 대학 교수. Anarchy and Cooperation(John Wiley and Sons, 1976), Community, Anarchy and Liberty(Cambridge, 1982).
1951 레비(Carl Levy, 1951-) 런던 대학교수, 이탈리아 역사와 아나키즘 연구자. 이탈리아의 종교주의(Italian Regionalism: History, Identity and Politics, 1996), 그람시와 아나키스트(Gramsci and the Anarchists, 1999). “Antonio Gramsci, der Anarchismus, der Syndikalismus und der sovversivismo[파괴활동]”(2017). In: Phillippe Kellermann, ed. Ne Znam - Zeitschrift fur Anarchismusforschung. 4 Berlin: Verlag Edition AV, pp. 98–130.
?-? 크럼프(John Crump, ?-?), 「동아시아에서 아나키즘과 국민주의(Anarchism and nationalism in East Asia, 1995)」(34 pages, 11호/Working paper, 일본에서 아나키스트 운동 1906-1996(The anarchist movement in Japan, 1906-1996, 2006
[소번(Nicholas Thoburn, 1970-),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강의. Deleuze, Marx and Politics, 2003(제3장: "The lumpenproletariat and the proletarian unnameable" - 들뢰즈의 주변부와 바쿠닌의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상응한 지위)]
* 중국
1865 우즈후이/오치휘(吳稚暉, 1865-1953), 중국아나키스트 우징헝(Wu Jingheng) 주음부호(장빙린의 노고에 기반)와 표준화된 국어 발음을 만든 1912~13년 독음통일회의 의장인 중국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였다. 서태후를 "말라빠진 노파", "매춘부"로 비판하였다고 영국으로 망명, 그리고 1903년 프랑스로 1905년 아나키스트로 선언. 그는 파리에서 리스쩡[이시기에 장런지에, 독일 유학자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년)]을 알았다. 2013년 쑨원의 2차혁명 실패로 프랑스로 망명(리스정도 함께)
1881 리스쩡/이석증(李石曾, 1881-1973) 본명 이욱영(李煜瀛) , 호 확무(擴武), 자 석증(石曾), 중국 생물학자, 아나키스트. 학력 소르본 대학교 파스퇴르 연구소(1902-1905: 콩에 관한) 연구. 1922년, 베이징에서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등과 함께 비종교대동맹을 창설하여, 과학주의적 반종교주의를 주장하며 반기독교운동에 앞장섰고 이 때문에 국민당 내부에서 드물게 기독교 신자였던 쉬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장강(蔣剛, ?-?). “천주 무정부주의운동에 대한 초보적 연구: 조선혁명가와 중국무정부주의 운동의 관계를 중심으로, 1997”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한국민족운동사연구』16: 311-338.
* 일본
1886 팔태주삼(八太 舟三(はった しゅうぞう 1886-193)は、日本の思想家、無政府主義者。三重県津市分部町生まれ。순정(純正)아나키즘(Pure Anarchism)
1930 옥천신명(玉川 信明(たまがわ のぶあき/しんめい、1930-2005)は、日本の評論家。玉川しんめいの表記も用いた。옥천신명(玉川信明) 지음, 이은순 옮김, <아나키즘>, 오월, 1991. / 옥천신명은 1919년 대만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인 서래암(西來庵) 사건을 대만 아나키즘 운동의 출발로 삼는다. 사건의 지도자인 위칭팡/여청방(余淸芳, s.d)은 일본 아나키스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위칭팡이 이끈 1915년 타파니 사건이 발발 .
암좌작태랑(岩佐作太郞, ?-?) 일본인 아나키스트 암좌작태랑(岩佐作太郞), 1907년 미국에서 사회혁명당을 조직 / 참조: 조세현,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 교류와 연대: 적자생존에서 상호부조로, 2010(창비),
소송융이(小松隆二, ?-?)「日本労働組合総連合運動をめぐって(1) : アナ・ボル論争の意味するもの」『三田学会雑誌』65巻4号、1972年4月、
**시대사 연표*
1864 제1공산주의인터내셔널: 1864년 창립됐다. 아나키즘과 갈등, 그리고 민족주의와 불화로 1872년 붕괴되었다.
1872년 9월 2일 헤이그에서 제2차 인터내셔날을 성공적으로 치룬 직후 바쿠닌, 마라테스타(Errico Malatesta) 등 서구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 9월 15일부터 산 테이미에 모여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소위 혁명적 임시정부의 권력과 같은 조직은 모두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거론된 임시정부는 마르크스주의가 주창하는 프로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1889 제2공산주의인터내셔널: 1889년 성립 -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 등 거의 모든 유럽 사회주의 운동집단이 느슨히 결합했다.
[1910 스페인의 노동자국민연맹(CNT: La Confédération nationale du travail (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 ou CNT)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1910년에 창설한 아나코-생디칼리즘의 조직.
1919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코뮌테른 : 1919년부터 1943년 활동 – 1943년부터 스탈린에 의해 코뮌 포름으로 변경. 레닌, 트로츠키 등 크렘린 궁에 모인 30개국 좌익 정당 대표 51명.
- 아나키즘과 (마르크스-레닌-스탈린 계통의 독재주의 성향의)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서로 뿌리깊은 원한과 앙숙의 관계를 맺어 왔다. 당시의 조선무정부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 직후 볼세비키들이 아나키스트들을 숙청하고,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시 하에 아나키스트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해 나가던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하거나 기억했을 것이다.
1920년 4월에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인으로서 선언문과 강령 및 헌장의 초안을 [고순흠(高順欽, 1893-1977)은] 양제박(梁濟博)과 함께 담당하였으며, 이후 서무책임자를 역임하였다.
1921년 단주는 재만학생교과서편찬위원회의 위원장.
[1921아나키스트 발생: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1921년 11월 일본의 도쿄에서 흑도회를 결성하였다. .. 우선 민족해방운동의 관점에서 식민지 모순의 해결에 있었다. - ]
1922년 아나-보르: 흑우회와 북성회의 분열, 그 이면에는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공산당 창립(1922, 7, 9)을 전후하여 아나계열[아나키즘]과 보르계열[볼세비키]로 갈라서서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
1923 1923년 1월에 발표한 일명 의열단선언이라고 하는〈조선혁명선언〉은 1922년 12월 조선의열단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으로 부터 요청을 받고 <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默, 1888-1944)>이 완성한 것이다.
1924 정의부(正義府)는 1924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 군정부(軍政府)이다. 양기탁과 김동삼, 지청천 등이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을 거점으로 창설하였다. / 정의부는 이후 점차 그 내부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하는 한편, 3부 통합과정에서 1929년 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의 일부를 합쳐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한 후에 해체되었다.
1925 단주는 김원봉(金元鳳) 등과 광둥에서 한인청년연맹(韓人靑年聯盟), 상해에서 민중사(民衆社)를 결성.
1925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등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 - 1925년 9월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정명준(鄭命俊)·서학이(徐學伊)·마명(馬鳴)·정해룡(鄭海龍)·안달득(安達得)·서동성(徐東星)·하종진(河鐘璡)·김동석(金東碩) 등과 무정부주의사상 연구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였다.
1926 정의부 분열: 정의부를 창설한 원로급 인사들인 양기탁, 고할신(高豁信), 현정경, 오동진 등은 1926년 4월 길림에서 국내의 천도교 혁신파 대표, 형평사(衡平社) 대표,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노령지역의 대표 등과 회합하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였고, / 경상도 출신의 김동삼, 김원식(金元植), 이광민(李光民) 등은 김응섭(金應燮)이 주도하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 참여함으로써 정의부는 분열하였다.
[1927 FAI: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La Fédération Anarchiste Ibérique: FAI, en espagnol,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 est une organisation spécifique espagnole fondée clandestinement à Valence, lors d'une conférence péninsulaire, les 25 et 26 juillet 1927. La FAI se déclare internationaliste et antiétatique. Elle conçoit l’insurrection anticapitaliste comme un moyen dont le but est l’instauration du communisme libertaire.]
1927 평양에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가 조직되었다. 주요 회원은 이홍근(李弘根)·최갑룡(崔甲龍)·이주성(李周聖)·승도경(承道京)·최복선(崔福善)·한명호(韓明鎬)·이효묵(李孝默)·김주붕(金周鵬)·채은국(蔡殷國)·이시헌(李時憲)·곽정모(郭正模)·송선택(宋善澤)·오치섭(吳致燮)·황지엽(黃智燁)·전창섭(全昌燮)·이중화(李重華)·김찬혁(金贊爀)·김병순(金炳淳)·양제로(楊濟櫓)·이성근(李成根) 등
1927년 단천흑우회(端川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조중복(趙重福)·임중학(林仲鶴)·김낙구(金洛九)·강창기(姜昌磯) 등이다.
[1927년 이래 원산청년회 내부의 아나-보르 폭력사태, 동년 동경 조선인들의 흑적(黑赤)충돌. 아나(흑, 아나키즘) 보르(적, 볼세비키)]
1928년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북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한다. 집행위원장에는 김응섭(金應燮).
1929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1929년년 7월 해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여 아나키스트 농촌공동체의 설립을 시도하였다.
1929년에는 안주흑우회(安州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안봉연(安鳳淵)·김한수(金翰洙)·이순창(李順昌)·박동위(朴東葳)·김노태(金魯泰)·한명룡(韓明龍)·김용호(金龍浩) 등이다.
1929 11.01 이홍근(李弘根), 최갑용(崔甲龍) 등과 11월 1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비밀조직) - 李康勳, 李圭昌, 崔甲龍, 李弘根
1929 동년 11월 11일부터 12일 사이 평양에서 개최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 주최의 전국흑색사회주의자대회(全國黑色社會主義者大會)에 참석. - 류림
1930 남화한인청년연맹선언(南華韓人靑年聯盟宣言), 1930년 백정기 의사는 상해에서 유자명·정화암·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창립하였다. 산하 단체로서 남화구락부(南華俱樂部)를 두고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간.
1930 철산흑우회(鐵山黑友會)가 조직되어 정철(鄭哲)·홍형의(洪亨義)·김이원(金利元) 등이 활동하였다.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발간한 『사상월보(思想月報)』(1931-34년)의 후속지인 『사상휘보(思想彙報)』(1934-43년) - 1934 12월 사상휘보 발간(1939년 9월, 제20호 마감)]
1937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유자명과 정화암 등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후신으로서 1937년에 조직한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1941, 중국 공산당과 연계: 1941년 1월 10일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 전방총사령부 소재지인 산시성[山西省] 진동남[晉東南] 태행산 중에서 중국공산당 지원 아래 중국의 항일전에 참가하고 있던 각 전선대표들이 모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를 결성하였다. 발족 1년 6개월 후인 1942년 7월 제2차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대회에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으로 발전적 개편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옌안[延安]에서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최창익(崔昌益), 한빈(韓斌)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집단으로 결속하게 되었는데, 해방 이후 북한으로 환국하였다.]
1942 柳林先生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이전인 1942년 중경에서 “일개민족(一個民族), 일개정부(一個政府), 일개이념(一個理念), 일개집단(一個集團)”과 “당파(黨派)는 합동연이(合同聯異), 정부는 공대균담(共戴均擔)‘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해외각지에 있는 모든 혁명세력들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총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45 자유사회건설자연맹(自由社會建設者聯盟): 1945년 9월 서울에서
1946 4월 21일부터 시작하여 23일에 끝난 경남 안의의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에서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한반도 아나키즘 진영의 역량을 총결집한 동 대회의 만장일치 결의에 의하여, 7월 7일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이 창당. 당수 유림.
1947년 비상국민회의 부의장(非常國民會議 副議長)으로 피선됐고, 전국혁명자총연맹(全國革命者總聯盟)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으로 피선되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좌익 계열을 제외한 백여 개의 정당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統一獨立運動者中央協議會)를 결성하고 대표간사(代表幹事)로 피선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을 확대 계승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국민의회 國民議會) 의장(議長)으로 피선되었다.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김창숙(金昌淑), 장건상(張建相), 조경한(趙擎韓), 정화암(鄭華岩), 김학규(金學奎), 권오돈(權五惇) 등과 조국의 완전한 자주통일독립을 쟁취하고자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혁신동지총연맹(革新同志總聯盟)을 결성하고 유림(柳林), 장건상(張建相), 정재용(鄭在鎔), 박석홍(朴錫洪), 권오돈(權五惇), 최천택(崔天澤) 등 6인 집단지도체제의 지도위원(指導委員)으로 피선되었다. 7·29 총선 이후 분열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위해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사회대중당(社會大衆堂),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혁신동지총연맹(革新同志總聯盟) 등 5당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1964 “국민문화연구소”는 1964년 문교부 사회단체 등록 제1호 단체입니다. 아나키즘에 바탕을 둔 자주 협동적 자유사회 건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947년 서울시 중구 예관동에서 이정규, 유정렬 등 10여 인사가 모여 우리 민족의 본질과 종합적인 문화 역량을 탐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문화연구소’ 설립을 발기. - 1962년 서울 중구 저동에서 21명이 모여 재발족을 위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1964년 문교부 사회단체 제1호로 등록하다.
(11:23, 55RME) (15:17, 55RMG, 16:01, R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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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국의 논문을 재정리 한 파일입니다.
김성국 노문 펌대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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