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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山市 / Wonsan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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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오늘'을 통해 공개된 원산 야경. LED 전등을 붙여 만든 모습.
↑원산항에 있는 크레인들.
원산시 | |
국가 | |
면적 | 314.4㎢ |
광역시도 | |
행정구역 | 45동 14리 |
시간대 | UTC+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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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강원도에 위치한 항구도시. 면적은 314.4㎢. 강원도(북한)의 도청 소재지이다.
원래 함경남도에 속했으나 1946년 소련군정에 의해 강원도에 편입된 이후 현재도 강원도(북한) 소속이다.
평양직할시와 비슷한 위도에 있지만 산맥과 바다의 영향으로 기후는 비교적으로 온화한 편이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으로 원산만에서는 이류(移流)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 그러나 안개일수 자체는 적어서 안개가 끼는 날은 1년 평균 9일에 불과하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항구도시치고는 바람이 약하다.
해안선이 단순한 동해안의 다른 항구도시들과는 달리 원산만은 주변이 갈마반도(사진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반도), 호도반도 그리고 여도(麗島), 신도(新島), 웅도(熊島), 황토도(黃土島) 등의 여러 섬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조선 때에도 천혜의 항구가 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원산과 평양을 잇는 평원선은 한반도에서 동서 거리가 가장 짧은 철도다.[2]
1437년(세종 19년)에 덕원군이 설치되었으며, 8년 후 덕원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후기 상업활동이 이전보다 발전하면서 장이 들어섰고, 덕원의 원산장은 조선의 상업중심지로 떠올랐다. 1880년에 개항했는데 러시아식 명칭은 포트 라자레프(Port Lazarev)로 불리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원산부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개항장 지역만을 원산부로 남기고, 잔여지역(면 지역)을 덕원군으로 분리시켰다. 이 때 안변군 영풍면이 편입되어 풍상면, 풍하면으로 분리 설치되었다. 이후 1942년 덕원군 적전면, 현면을 원산부에 편입하고, 덕원군의 남은 지역인 덕원면, 북성면, 풍상면, 풍하면을 문천군에 편입시킴으로서 덕원군은 폐지되었다.
사실 원산은 천혜의 항구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하기 전까지는 덕원부 원산'촌'이라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876년 일본이 강화도 조약으로 원산항을 강제로 개항한 3대 항구 중 하나가 되었으며, 경원선을 부설하고 공업지대를 조성해서 흥남과 함께 일제강점기시절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자 항구로 성장했다. 구한말에는 방곡령 사건의 무대이기도 했고 1929년에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학교인 원산 학사가 설립된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가 광복을 맞자 원산은 38선 이북지역이어서 북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한국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1950년 10~12월 사이 잠시나마 UN군의 세력에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이 원산을 다시 점령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현재까지 북한의 지배하에 남아있다. 원산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한국전쟁이 개전하기 전까지는 정유시설을 비롯한 각종 중화학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므로 한국전쟁이 개전된 다음부터 종전될 때까지 지속적인 폭격과 함포사격을 맞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때문에 원산의 구시가지와 대부분의 시설은 사라졌으며, 원산의 철도시설도 완파되었다. 그래서 원산의 철도시설은 전후에 복구 및 이설된 곳이며, 원산역도 외곽으로 이전한 상태다. 자세한 내용은 원산폭격을 참조하기 바란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다음에는 사실상 완전한 공터에 다시 시가지를 조성하였으나 현재까지도 과거의 영화를 완전히 되찾지는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현재 인구 36만으로 남한 강원도 도시들보다 인구가 훨씬 많다.[3] 통일 이후 강원도와 함경남도와의 분쟁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만일 남한의 주도 아래 통일이 될 경우,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규정한 이북 5도 체계 하에서 원산시는 엄연히 함경남도 소속 도시이므로 통일 이후 행정구역 개편을 하지 않는 한 원래대로 함경남도로 귀속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저건 환원론의 예시이고, 존치론이 선택되는 순간 원산은 강원도의 도시가 된다. 둘 중 무엇이 선택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환원론과 존치론에 대해서는 이북 5도 항목과 남북통일/행정문제/북강원권을 참고하자. 하지만, 원산의 경제적, 지리적 이점을 생각하면 함경남도에 넘겨주는 것 보다는 가져가는 것이 강원도 입장에서는 더 이득이다. 현재 강원도가 전략적으로 육성할 도시가 이미 개발되거나 개발되고 있는 도시를 제외하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1924년 당시 조사에 따르면 원산 토박이는 40%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외지 출신으로는 함경남도 외에 평안남도, 강원도, 경기도 출신자들이 많았다. 광복 당시 종교 상황으로는 개신교 신자들이 많은 편이었다.
최초의 근대 사립 교육기관 중 하나인 원산학사가 세워지기도 했고, 1903년에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루시(Lucy) 여학교가 세워져 공산화 전까지 여성교육에 큰 역할을 했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 박정희의 애인 이현란 등이 루시여학교 출신이다. 교명은 학교에 건축 기금을 기부한 미국인 선교사 Lucy Armfield Cuninggim의 이름에서 딴 것.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학교가 있었는데, 화강암으로 지어진 건물이나 교정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다른 강원도(북한) 도시들과 다르게 원산은 제일 먼저 철도가 뚫리는 등 다른 강원도(북한) 도시들보다 교통의 혜택을 먼저 얻었다. 왜냐하면 강릉같은 도시는 해안선이 단조로워서 항구가 발달하기 어려웠고 험준한 태백산맥 동쪽에 위치해서 서울로 이동하는 교통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원산은 항구가 발달하기에 알맞은 지형이었고 서울 방면으로 가려면 추가령구조곡을 통과하면 됐기 때문에 강원도 다른 지역들과 다르게 교통이 발달할 수 있었다.
철도는 경원선, 강원선이 통한다. 그리고 강원선은 평라선과 연결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평양과의 사이에 평양원산간 고속도로가 뚫렸다. 평양-원산 구간은 북한에서도 나름 고속버스가 흥했던 구간이기도 하다. 평라선 철도는 화물 물동량 처리하기에도 벅찬데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평양-원산 사이를 2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으니까.... 한편 광복 당시의 원산역은 건물만 남긴 채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갈마반도에 원산공항이 있으며 이를 3,500m의 활주로를 갖춘 국제공항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이 공항을 안변군으로 이전하려는 모양이다.##
서울 기준 직선상 180km[4], 철도로는 약 225km 거리에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이나 평양에서 동해로 놀러 간다고 하면 으레 원산으로 가는 것을 생각했었다. 경원선을 타고 가면 되니까. 원산의 송도원(松濤園) 해수욕장은 분단 전에는 한국 제일의 해수욕장으로 유명했다. 갈마역의 명사십리 해수욕장도 유명하다.
지도를 보면 원산의 송도해수욕장이 중심지인 원산항 일대와 매우 근접하여 있는데, 당시에는 송도라는 이름을 가진 해수욕장들이 흥했으며, 각 지역의 송도해수욕장이 지금도 모두 항구도시 중심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원산뿐만이 아니라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포항시에도 송도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것이 그 이유다. 물론 셋 모두 도심과 너무 가까워서 심각한 난개발로 인한 수질악화, 매년 쓸려나가는 모래로 인해 현재는 부산을 제외하고 모두 폐장 상태이며, 포항 송도는 모래사장이 아예 사라졌고 인천은 매립 끝에 유원지로 재개발 중인 상황이다. 부산 또한 한동안 폐쇄 상태였다가 최근 들어 재개장 한 것이므로, 분단이 안 되었을 경우 원산의 송도원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부산광역시의 주 해수욕장이 송도→광안리(또는 수영)→해운대로 바뀐 만큼 여기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기능이 옮겨갔을 것이며, 원산의 갈마는 부산의 해운대에 비견되는 관광도시로 명성을 떨쳤을 것이다.
1990년대 북한이 경제난을 겪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원산은 다른 도시와 달리 한국전쟁 이후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항구이기 때문에 일본산 중고 가전제품, 자전거, 자동차 등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 시기 원산의 영화는 고작 중국산 식료품과 잡화류, 잘 해봐야 중국산 자전거나 자동차를 수입하는 정도인 신의주나 다른 국경 연선 도시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6년에 일본이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한 보복으로 만경봉호의 니가타항 입항을 불허하면서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개인 사업차 원산을 자주 방문했던 한 탈북자는 유령도시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러나 김정은 집권 이래 원산은 '김정은 (계획)도시'로 반전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김정은이 원산을 제2의 평양으로 개발하라고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송도원에는 2013년 현재 김정은의 7성급 별장이 있으며, 송도원 청년야외극장과 1960년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송도원 국제소년단 야영소"가 있어 체제선전에 사용되고 있다. # 물론, 특권계급을 위한 곳이다. 데니스 로드먼이 놀러간 그 휘황찬란한 별장이 여기로 추정되었다. # 외국인 호스텔 구역을 지었다.
이처럼 김정은이 원산을 적극 밀어주는 이유는 대체로 김정은 혹은 생모인 고용희가 원산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어 일종의 우상화 작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기사 좀 삐딱하게 바라보자면 일본 물을 먹을대로 먹은 동네를 이런 유령도시 꼴로 냅뒀다간 앞으로 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인근 문천군 덕원면(구 덕원군 덕원면)에는 베네딕토회 수도원과 수도원 소속 가톨릭 신학교(덕원 신학교)가 있었다. 베네딕토회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남자 수도회로[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1909년 독일에서 진출해 왔다. 처음에는 서울 백동[6]에 정착했다가,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북녘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종교들을 탄압했고,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많은 베네딕토회 독일인&한국인 남녀 수도자(수사, 수녀)들이 순교했다.[7]
원래 덕원과 원산 일대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관리하는 원산교구에서 분리된 덕원수도원자치교구였다. 베네딕토회는 북한 공산당 정권의 종교 박해를 피해 월남하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수도원을 재건했다. 원산에 남아 있는 당시의 수도원 건물은 원산농업학교로 쓰이고 있다. 성당은 헐렸지만, 신학교 건물들은 개조된 채 남아 있다.
조선 최초의 스키장(신풍리 스키장)이 생긴 곳도 여기였다. 1903년 개항 후 핀란드인 2명이 신풍리에서 스키를 탄 것을 시초로 1926년에 조선총독부의 철도국 국우회에 의해 원산 신풍리 스키장이 개발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대회 역시 1930년 2월 16일원산 신풍리 스키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 조선스키선수권대회였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마식령[8]에 대규모 스키장인 마식령 스키장을 세우고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10만 군중 대회#까지 벌이면서 김정은의 치적으로 삼을 모양이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는 스키장 자재 수출을 금지했다. #
조선에 골프가 처음 들어온 것도 여기. 1900년, 고종 37년 황실의 고문으로 온 영국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원산 바닷가의 세관 구내에서 6홀의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겼다. 현재도 송도원엔 골프장이 있다.
명승지 일람
명사십리해수욕장 - (외국인용) 호텔 2개를 지었다고 한다.
동방식(東方式)공원
한편 광복 당시까지는 한반도 유일의 정유시설인 스탠다드 정유공장, 철도차량공장 등이 들어선 공업도시이기도 했다.
아래 행정동과 법정동은 《이북5도 명예읍·면·동장 위촉에 관한 규정》 제8조 별표2에 규정되어 있다.
명사동은 옛 덕원군 현면(縣面)에 해당된다.
1939년에 덕원군 적전면(赤田面) 송하리·송흥리·와우리가 원산부에 편입됐으나, 1942년에 덕원군이 폐지돼 문천군에 병합되면서 송흥리와 와우리가 적전면에 환원됐다. 그러다 광복 직후 적전면 전체가 원산시에 편입돼 사라졌다. 행정동 적전동 중에서 장덕동을 제외한 나머지, 행정동 송도동 중에서 송흥동이 옛 적전면에 해당한다.
행정동 | 법정동·리 |
광산동 | 광석동(廣石洞)·산제동(山祭洞)[9] |
남장동 | 남산동(南山洞)·장촌동(場村洞) |
명사동 | 갈마동(葛麻洞)·견산동(見山洞)·내원산동(內元山洞)·두남동(斗南洞)·두방동(斗方洞)·두산동(斗山洞)·방하산동(訪霞山洞)·성라동(星羅洞)·성북동(城北洞)·세동(細洞)·용평동(龍坪洞)·장흥동(長興洞)·지경동(地境洞)·춘산동(春山洞)·춘악동(春岳洞)·포평동(浦坪洞)·현동(峴洞)·능도리(能島里)·려도리(麗島里)·신도리(薪島里) |
명석동 | 명석동(銘石洞)·상동(上洞)·석우동(石隅洞) |
상중동 | 남촌동(南村洞)·북촌동(北村洞)·상리1동(上里一洞)·상리2동(上里二洞)·중리동(中里洞) |
송도동 | 송흥동(松興洞)·양지동(陽地洞)·철산동(鐵山洞)·평화동(平和洞)·해안동(海岸洞) |
용산동 | 신흥동(新興洞)·용동(龍洞)·중청동(中淸洞) |
적전동 | 관풍동(館豊洞)·낙수동(洛水洞)·당상동(堂上洞)·당중동(堂中洞)·당하동(堂下洞)·무라동(武羅洞)·삼태동(三台洞)·송상동(松上洞)·송중동(松中洞)·송하동(松下洞)·신동(新洞)·신풍동(新豊洞)·와우동(臥牛洞)·용계동(龍溪洞)·용주동(湧珠洞)·장덕동(長德洞)·중평동(仲坪洞) |
아래는 광복 당시까지의 지명으로, 88개 동과 리로 구성되었다.
춘일동(春日洞) - 시청 소재지
해안로1가~6가동(海岸路一街~六街洞)
욱1~3가동(旭一~三街洞)
수1~2가동(壽一~二街洞)
행동(幸洞)
중1~3가동(仲一~三街洞)
본1~5가동(本一~五街洞)
천1~4가동(泉一~四街洞)
영동(榮洞)
경동(京洞)
명치동(明治洞)
녹동(綠洞)
대화동(大和洞)
명석동(銘石洞)
상동(上洞)
광석동(廣石洞)
산제동(山祭洞)
남촌동(南村洞)
신흥동(新興洞)
북촌동(北村洞)
상리1~2동(上里一~二洞)
남산동(南山洞)
용동(龍洞)
교하동(橋下洞)
중리1~4동(中里一~四洞)
하촌동(下村洞)
장촌동(場村洞)
신촌동(新村洞)
포하동(浦下洞)
와우동(臥牛洞)
송흥동(松興洞)
송하동(松下洞)
신풍동(新豊洞)
두방동(斗方洞)
두산동(斗山洞)
중청동(中淸洞)
당상동(堂上洞)
당중동(堂中洞)
당하동(堂下洞)
무라동(武羅洞)
삼태동(三台洞)
낙수동(洛水洞)
중평동(仲坪洞)
신동(新洞)
송상동(松上洞)
송중동(松中洞)
용계동(龍溪洞)
용주동(湧珠洞)
관풍동(館豊洞)
내원산동(內元山洞)
세동(細洞)
장흥동(長興洞)
견산동(見山洞)
지경동(地境洞)
포평동(浦坪洞)
사둔동(沙屯洞)
춘악동(春岳洞)
춘산동(春山洞)
현동(峴洞)
방하산동(訪霞山洞)
용평동(龍坪洞)
성라동(星羅洞)
성북동(城北洞)
두남동(斗南洞)
여도동(麗島洞)
웅도동(熊島洞)
신도동(薪島洞)
소설가 복거일이 대단히 좋아하는 북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가 1987년까지 지속된다는 설정의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의 처가가 원산에 있었고, 송도원이나 근처의 금강산, 설봉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역사 속의 나그네>에서는 주인공이 2050년대 원산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사관학교는 평양에 있던 것으로 설정) "원산 괭이갈매기"라는 실업야구단의 팬이 되었다는 설정이 있다. 주인공이 조선으로 타임슬립후 위엄을 보일 때마다 쓰는 게 괭이갈매기의 빨간 모자.
대한민국 해군의 기뢰부설함인 원산함(MLS-560)은 이 도시에서 이름을 땄다. 함경남도 원산시민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원래 원산은 함경남도 소속이었는데 소련군정 치하에서 강원도(북한)로 편입되었다. 원산을 강원도에 둘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색채와 원산이 함경도로써의 역사가 매우 길기 때문에 함경남도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환원론에 따른 것이다. 혹시 존치론을 택하면 강원도로 그대로 남을 수도 있다. 다만 알 길은 없다. 애초에 남이나 북이나 강원도 자체가 상대적으로 무시당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강원도로 유지시키면서 강원도를 띄워주는 것도 좋긴 하다. 물론 강원남도와 강원북도가 신설될 가능성도 피할 수 없고, 원산시의 위치나 위상이 발전하면 광역시로 격상될 가능성도 다소 있다.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확정된 것도 없고 따라서 아무것도 모른다.
남북 통일 이후 원산은 인천에게 수도권의 항구도시로써 역할을 빼앗아 올 확율이 매우 높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서해안인 인천보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수심이 깊다는 점에서, 부산보다는 수도권과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는 점에서 우위을 지니고 있으므로 큰 항구도시이자 해군 기지로 성장할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다. 인천항은 인천신항의 건설로 이미 조수간만의 차와 낮은 수심이라는 단점을 극복한데다 수도권은 업무지구의 형성과 발전으로 오히려 항만보다 공항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이는 첨단 산업, 서비스업의 발전과 과거 노동집약형 산업의 쇠퇴로 인한 것이지 통일과는 무관하고 수도권의 개발 가용지도 생각보다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수도권에서 공업이 발달한 지역은 경원축선에 위치한 서울 동북부-의정부시, 양주시 지역이 아닌 인천항과 평택항이 가까운 수도권 서부, 남부 지역이다.[10][11]
게다가 부산항이 갖는 미주, 일본, 유럽으로의 관문 역할은 가져오지도 못한다[12][13]. 오히려 동해선 건설로 북한 지역의 부산항 접근성이 개선되고 있고 산간지대로 개발 가용지가 적은 강원도, 함경도임을 감안할 때 일정 이상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북한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차라리 기존 남포항이나 인천항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대중국 수출은 인천항, 평택항 등의 서해안 항만에 비해 월등히 열세이고[14] 같은 북한 내 남포항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며 기껏해야 일본에서 산업기반이 그저그런 호쿠리쿠 지역이나 러시아 방면으로의 물동량밖에 기대할 수 없는데 지금도 강릉에서 그 정도 수요는 처리가 가능하며, 통일 이후엔 이미 러시아와 육로가 이어질 것이므로 이마저 의미가 없고 기존 남한에서 북한 지역으로의 급격한 산업기반 이전도 가능성이 매우 낮다[15].
또한 북한 지역에 중국, 러시아에 생산기반이 이전되는 것 역시 크게 기대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이미 인프라가 잘 조성되어 있고 지리적으로 세계와 통하는 서울, 인천을 포함한 수도권에 업무지구가 조성될 것이고 북한 지역에는 대한민국에서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저임금 3D 직종 정도가 이전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이 통일 이후 대한민국이 될 북한에 생산기반을 마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재와 달리 통일 이후에는 구 북한 주민들에게 적용되는 최저시급은 당연히 대한민국 기준으로 인건비 측면에서 불리하고 노동 숙련도 차원에서는 중국은커녕 동남아시아보다도 분명히 열세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남북통일시 서울, 평양, 원산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통일 한국의 대수도권으로 설정하여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 공교로운 것은 이들 대 수도권 삼각권역 안으로 황해도 사리원시와 개성특급시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결론은 이 대 수도권 삼각권역 개발에는 이 두 도시도 동시에 개발될 운명이라 엄청난 변혁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16]. 하지만 서울에서 원산까지의 직선거리는 서울에서 논산까지의 직선거리와 같다. 현실적으로 수도권의 최대 마지노선은 천안, 춘천, 철원까지이며 별도 경제권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관광도시로서 급격하게 발전할 것으로도 예상되는데 평안남도와 수도권의 주민들이 피서지로 이용할 수 있는 해수욕장이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쪽 방면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크다. 이는 부산과 강릉/속초뿐인 피서지 선택권이 넓어질 전망과 아울러 평양과의 접근성 때문에 발전성이 상당히 높은 지역이라는 의미로도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