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밭
을숙도 갈대밭을 거닐다가 밭을 일구는 파밭 농부를 보고 구석 밭을 좀 달라 했다. 버드나무 아래 길옆을 가리키며 만들어보란다. 시골에서 자라 많이 봤지만 지어보진 않아 될까 하면서 시작했다. 아내와 시간 나면 와서 엎드려 억센 풀 뽑고 돌과 쓰레길 주어내어 반듯한 밭이 됐다. 한 10년 했나 시에서 생태공원으로 만들면서 그만 뒀다.
손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 없다. 또 아파트 뒷산 자락에다 밭을 만들어 그물치고 고라니를 막으면서 지었다. 또한 십여 년 하다 명지 바닷가로 이사 오면서 흐지부지 됐다. 그냥 멀어도 단소불고 앉아 쉬던 정든 곳이어서 하려 했는데 구청에서 나무심고 그물이며 물통과 농기구를 몽땅 걷어치우고 복원시켰다. 시 땅이어서 실컷 하다간 이리 되고 만다.
을숙도 밭은 모래땅이어서 비만 오면 질퍼덕하고 개이면 파삭파삭 모래가 뿌리까지 말라간다. 그래도 농사라고 심고 자라는 게 신기했다. 산기슭은 큰 상수리나무 아래 엉덩짝만한 밭인데 그늘아래 쉬기 참 좋다. 매미와 직박구리, 까치가 단소불면 따라 맞장구쳤다. 얼룩얼룩한 모기떼도 이글거려 많이도 뜯겼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만 야단맞고 쫓겨났다.
명지 바닷가로 옮기고서 어디 할 데가 없나 두리번거려 찾아봤다. 그때 마침 시에서 학교 지을 자리에 임시 6평 밭을 수백 개 만들어 분양했다. 한 개 얻어 심고 가꾸고 하니 성에 차지 않는다. 행복마을 입구 도로변에 자투리땅이 있어 뒤졌다. 꽤 넓어 일하는 것 같다. 갈대와 쑥밭이던 걸 뽑고 굵은 돌을 굴려내 꿈의 밭을 일궜다 50평이나..
그러자 여럿이 모여 여기저기 텃밭을 만들어 시골 이웃처럼 지난다. 좀 더하려고 줄치다가 티격태격 싸움도 하고 버린 현수막을 갖고 와 여기저기 덮어씌워 어수선하다. 농기구도 아무렇게나 둬서 지나는 사람이나 차들에서 보고 뭐라 한다. 다들 얼마나 열심인지 밭에 산다. 심은 것마다 잘 커서 재미가 쏠쏠하다.
양달이어서 겨울에도 따스하고 여름은 바닷바람이 불어와 시원하다. 좌우 도로에 차 다니는 얼씬되는 움직임이 적막한 외딴 밭보다 낫다. 소사나무 두 그루가 자라 갈대와 잡풀 벨 때 없앨까 하다가 나뒀는데 지금은 꽤 커서 그늘지고 있다. 밑에 평상을 놓아 쉬기 좋다. 뉴트리아가 나타나 무와 고구마를 갉아먹어 그물을 둘러쳐 아담한 모습이 됐다.
납작한 앉기 좋은 돌을 몇 개 의자처럼 놓아 땀 흘리고 일하다 앉아 쉰다. 이랑마다 고랑을 만들어 물이 흘러 모이게 하고 퍼 담아 가물 때 쓴다. 골고루 씨 뿌려 한 20가지가 되나보다. 심은 대로 거두니 두 밭의 그걸 다 먹지 못하고 남 주는데 바쁘다. 비싼 씨앗을 사서 물주고 힘겹게 키워서는 교회 전도부와 경로당에 가져가고 이웃에 막 퍼 안긴다.
그게 좀 억울해서 힘들게 가꾼 것을 그러면 되나 해도 막무가내다. 성미가 그러고 보니 그만 내버려둔다. 여기는 겨울에도 서리 눈이 오지 않아선가 상추 파 배추 겨울초 시금치 등이 싱싱하다. 사철 밭에 나가 채소를 뜯어오니 식탁이 언제나 푸성귀로 풍성하다. 무와 당근을 묻어둬서 겨우내 수시로 빼 온다. 되게 부자와 같다.
잘게 썰어 말려 무말랭이 김치를 해 먹으니 뻐덕뻐덕하고 질겨도 맛나다. 고추를 십여 근하고 김장 배추와 무를 많이 해서 딸네도 넉넉하게 해 줬다. 농약을 뿌리잖고 하려니 벌레가 득실거린다. 꼼지락대는 달팽이와 민달팽이가 갉아먹고 파란 배추 무 벌레가 곰실곰실 기면서 속을 파고 메뚜기와 여치도 곳곳에 찔끔찔끔 잘라먹어 속상하다.
아침에 가면 이것들을 잡을 수 있다. 달팽이는 땅콩과 고구마 밭에 수두룩하더구만 어느새 배추 무 밭으로 옮겨온다.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나. 보는 대로 잡아 손으로 비틀고 눌러 깨트린다. 갈 때마다 한 50마리는 잡을까. 배추 무를 살살 뒤집어보면 벌레가 보인다. 바닥에 늘어놓으면 꼬부려 동그랗게 똬리를 튼다. 보호색이다.
작년에 그리 잡아선가 올해는 많찮다. 희고 노란 나방이 폴폴 날며 벌레를 낳는데 금세 발랑발랑 기어다니며 보드라운 잎을 먹고는 통통해져간다. 보는 대로 잡으려 하나 그게 빨라 애먹인다. 쫓아가 텁수룩한 대나무를 흔들어서 겨우 잡곤 한다. 심고 크는 게 너무 좋아 아침저녁으로 달려간다.
삽으로 깊이 넣어 뒤집으면 숨도 차고 쉬 지친다. 몰아쉬면서 돌 의자에 앉으면 찹찹한 게 어찌나 편한지 모른다. 하모니카나 단소를 불며 피로를 식힌다. 옆의 일하는 사람들도 악기 소리를 좋아라하며 또 불기 바란다. 어떤 아주머니는 밭에 와 일해야지 저리 피리만 불고 있다며 핀잔이다.
문제가 생겼다. 입구에 공사를 하니 농작물을 거두라는 입간판이 세워졌다. 진해와 부산을 잇는 도시가스관 매설공사가 시작된단다. 차가 들어와 자재를 쌓아놓거나 돌릴 때 거치적거리니 철수하라는 말이다. 이리 예쁘게 컸는데 치우나. 안쪽은 봐 줄 수 없냐고 했더니 작업 과장이 진주 고향에 부모가 농사짓는다며 그렇게 하라고 한다.
절반은 파헤쳐지고 절반은 농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됐다. 다행히 내 밭은 괜찮다. 흙무더기가 열무와 호박 밭으로 넘치니 모두 실어 날라 어디론가 가져갔다. 아이고 되게 미안하다. 치우라 할 때 걷었으면 저리 수고롭지 아니 했을 텐데...관이 사람 들랑날랑할 정도로 크다. 우측도로는 땅을 파 들어오고 좌측은 굴을 파서 묻으니 신기하다.
이번에는 잘 보이게 둑에다 길고 크게 간판을 두 개나 세웠다. 2월 말까지 철거하고 원상시키라는 말이다. 올 것이 왔구나 배뱅이가 왔어. 일 년 간은 죽도록 파고 고생해서 올해는 거두어 재미있을 만하니 그만 두란다. 몇이 팀장을 찾아 회의실에서 만났다. 대교관리사무소로 40여명 근무하는 시 산하 임시 기관이다.
문화재 땅인데 사무실 주위여서 대신 관리를 맡았다며 농사짓는 게 보기 싫다는 민원이 들어와 정리하려 한단다. 톡 불거진 길가여서 오가며 잘 보이는 곳이라 지저분했나보다. 이제는 꽃을 심어 정리를 잘 할 테니 그냥 한번 봐 줄 수 없냐고 고개를 타래 밀었다. 시청에 들어가 얘기는 해 보겠지만 어려울 것이라 한다.
거름과 유박동구리를 떡칠하도록 넣어 걸게 만들고 밑 비료며 석회를 뿌리고 살충제까지 깔았다. 거두고 뿌릴 때마다 거름 철갑을 했다. 잔돌도 모두 주어내고 보슬보슬 땅이 아기 살갗 같다. 그래선가 배추 무가 강원도 고랭지와 남녘 해남 채소와 같이 큼직하고 고소하다. 분양한 밭을 시전이라 부르고, 도로가 밭이라 해서 도전이라 하다가 도밭으로 불린다.
못하면 그만 두지 뭐 했지만 저리 현수막이 큼직하게 붙고 보니 숱한 고생을 하고 정을 붙였던 곳을 손 털다니 기막힐 일이다. 가며오며 쳐다보게 되는데 그리움으로 가득하게 남게 되었다. 도라지 더덕을 캐내 옆으로 눕혀 심으려 했는데 몽땅 뒤엎게 됐다. 달래와 돌나물은 어찌하나 오뉴월쯤 먹게 되는 마늘과 양대콩도 뽑아내야 하다니...
첫댓글 재미가 솔솔하시던 상념들 잘 읽었습니다
어찌그리 포근하신 글 감명이예요
오늘은 날이 좀 풀리려나 며칠간 되게 주었어요.
감기 조시하세요 박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