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과 이순신을 같은 호칭으로 여기는 것은 역사 교육이 불충분했던 탓도 있다.
追而; 2017년 丁酉 仲夏 ; 善光
시호(諡號)는 2品이상의 벼슬을 하고 死후에 王으로 부터 받는 號를 말한다.
文官은 제일이 文자 시호이고, 다음은 貞자이고 세번째는 恭자 시호이고.
武官의 제일 영광은 忠 이요, 다음은 武이고, 세번째는 義자의 諡號를 원한다.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시대에 셋, 조선시대에 아홉 명 있었다.
최초가 고려 개국 공신이자 강릉 최씨 시조인 최필달(崔必達)이다.
그다음은 평장사를 지낸 박병묵(朴炳默)과
공민왕 때의 명장 지용수(池龍壽)이다.
조선조에서 가장 먼저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조영무(趙英茂)이다.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한 인물이다.
두 번째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인 이준(李浚)으로,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예종 초에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웠다.
세 번째 충무공은 '소년 장수'로 유명한 남이(南怡) 장군이다.
남이와 이준의 시호가 모두 '충무공'이니 공교롭다.
네 번째가 이순신 장군이다.
다섯 번째는 임란 때 순국한 김시민(金時敏)이다.
진주 목사로서 겨우 민군 3800명을 거느리고 7일 격전 끝에 2만여 왜군을 물리쳤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인 진주대첩이다.
여섯 번째 충무공 이수일(李守一)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고, 이후 여진족을 소탕했다.
일곱 번째 충무공 정충신(鄭忠信)도 임진왜란 때 어린 나이에 참전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웠다.
여덟 번째 충무공 구인후(具仁垕)는 인조의 외사촌 형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아홉 번째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는 광해군 때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장군이다.
참고로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과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이처럼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여러 명이므로
'충무공'을 이순신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단독으로 써서는 곤란하다.
'충무공 이순신'이나 '충무공 김시민'처럼 반드시 본명을 붙여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