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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도리
신행 길
걸어서 들어갔으니 나올 때는 등으로 나와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 했다. 자신을 버리고 시댁 가풍에 따르며 살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중매로 결혼을 했다. 시댁 형편도 몰랐다. 중매쟁이는 그쪽 친척이라는 것을 숨겼다. 형편도 넉넉하고 어른들 심성도 좋고 아들 1명, 시누이 2명, 3남매 신랑감 직장도 든든하고 식구가 단촐 하다고 했다. 부모님은 일 못하는 막내 딸에게는 안성 맞춤 아라고 흥쾌히 승낙하셨다. 내 의지도 없이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62,5때 빨치산에게 맞아 평생을 잔병과 같이 사셨다. 늦게 낳은 막내딸 당신 생전에 출가시킬 목적이였다. 그 후로 어른들은 결혼 날을 받고, 사주단자가 오고 예물이 오고 드디어 우리 집 마당에 치알(햇빛 가리게)치고 전통 혼례가 거행되었다. 수탉과 암탉을 청색 홍색 보자기에 싸서 놓고 대나무 잎도 병에 꽂아 놓고, 밤과 대추 팥, 명씨도(목화씨) 청실홍실 걸어놓고 초례상이 차려젔다. 신부는 원삼 족두리에 연지 곤지 찍고 단장을 했다. 신랑은 사모관대 쓰고 기러기 한 쌍을 품에 안고 들어온다. 초래상은 차려지고 신랑신부는 맞절하고, 합환주, 표주박에 나누어 마시고 결혼식은 끝났다. 친척 오빠들은 신랑발바닥을 방망이로 두드리며 신랑을 닦달했다. 삼일 만에 어머님과 눈물로 이별하고 신행 길에 올랐다. 시부모님 잘 모시고 남편 공경하고 귀 막고, 눈 감고, 입 막고 잘 살아야 한다는 어머님 말씀을 가슴에 닮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시댁에 도착했다. 요객으로 따라오신 아버지는 차라리 죽어서 산에 묻고 간들 이보다 낫겠다며 많이 우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아버지는 시댁 형편을 들여다 본 것이다.
새 각시상
새 각시상이 들어왔다. 병풍 밑에서 아장거리는 귀여운 아기가 있었다. 나는 아기에게 밤 한 톨을 손에 들려주었다. 헛웃음을 치며 좋아했다. 상을 물리고 방이 너무 뜨거웠다. 들러리 아주머니는 나를 뒤뜰로 안내했다. 믿기지 않은 현장이었다. 분명 선보러 오셨던 시어머님이 금방 방에서 밤알을 주었던 아기를 안고 남포등 밑에서 젖을 먹이고 계셨다. 어린 아기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시어머님은 44세였다. 이렇게 어린 시누이가 있단 말인가 머리가 멍했다. 마당에서는 동네사람들이 새 각시 왔다고 한바탕 어우러졌다. 장구를 제법 잘 치는 소녀가 장구를 덩 덩덩덩 쾅 하고 치더니 내가 6공주요 했다. 딸이 6명이라고 또 한번 놀랐다.
딸 부잣집
아침이 되었다. 뒤뜰 펌프에 마중 물 부어 퍼 올려 세수하고 부엌 방에 조용히 자기네들끼리 밥 먹고 학교를 간다. 학교 가는 수가 사립문으로 가득하다. 아침밥상을 물리고 큰 고모님은 넌지시 미안하다고 하신다. 딸 많으면 아들 결혼 못 시킬까 봐 숨겼다고 하신다. 딸 1명은 사고로 죽고, 아들 1명, 딸 8명 9남매라고 하신다. 이제는 놀라지도 않았다. 까도 까도 끝이 없었다. 먼저 친정 부모님 생각이 났다. 고르고 고른 막내딸이 첩첩 산중이라니,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걱정 하실까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빚 잔치
사채 빚이 많았다. 큰집 큰아버님 두분 다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시삼촌 고모님 다섯 분 사촌들 4남매, 큰집 식구 11명, 아버님 식구 12명 합하면 23명을 건사하느라 빛이 많이 졌다고 한다. 내 처지보다 그 분들 삶이 더 안쓰러웠다. 고모님, 작은아버지, 시집 장가 보내고 큰집식구, 성장해 결혼해서 따로 나가고 다행히도 내가 시집 갈을 때는 12식구 밖에 안되었다. 아버님은 말씀 하셨다. 이제 아들도 장가 보내고 했으니 이모님 댁 사채 빚을 갚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하신다. 그때는 고리채 신고 법이 있을 때였다. 작은 아버님은 신고해서 나라에 조금씩 갚아가자고 하셨다. 아버님은 지칠데로 지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으셨던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같다 썼는데 남의 마음 아프게 하면 안된다고 하신다. 아버님은 너무 힘들게 살다 보니 인생을 포기 한 듯 했다. 논, 밭, 당신이 손수 지으신 집까지 팔아 청산하고 전세 집으로 나 앉았다.
대물림
순금 목걸이, 쌍 가락지, 반지, 합해서 9돈을 남편이 별도로 빚을 얻어 폐물을 해준 것이다. 막내 이모님은 매월, 이자를 받아가셨다. 나는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사랑 땜도 못한 폐물을 내다 팔았다. 부모님이 지참금으로 주신 돈과 합해서 남편 모래 빚을 갚았다. 그리고 이자만큼의 돈을 광주은행에 적금을 들었다. 5년 만기가 되었다. 목돈이 되어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 누이들 다 출가시켰다. 또 농협 빚만 쌓이고 그 빚은 대물림으로 아들이 책임져야 했다. 숨 돌릴새 없이 내 아이들은 곧바로 따라 오고 있었다. 아버님은 혈압, 당뇨병, 천식, 밤이면 기침 하시느라 주무시지도 못하신다. 혈압 약, 당뇨병 약, 용각산, 약을 달고 사셨다. 남편의 박봉으로는 한달 생활이 빠듯했다. 친정에서 쌀, 보리쌀, 고추장, 된장, 김치까지 철 따라 보내주었다. 보기가 딱했는지 전세금에 보태 집사라고 그때 돈 60만원을 보내주셨다. 돈을 안고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당신들은 쓰지도 못하고 모은 돈 막내딸이 뭐라고 이 많은 돈을, 불 효녀는 가슴이 아팠다. 곧바로 부동산에 부탁해 계림동에 남편 앞으로 집을 계약을 했다. 이사 날이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새 집으로 이사 할 때는 세상이 부럽지 않았다.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그러나 집안의 우환 때문에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버님은 오랜 세월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다. 이제 더는 우환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머님의 치매
인간이 살아 가는 과정이란 말인가! 주어진 운명은 끝이 없었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생각지도 않은 치매 병이란 놈이 어머니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법 없이도 사실 분이 난폭 한 행동을 하신다. 당신 돈, 훔쳐갔다 밥, 안 준다고, 하루에도 보따리를 수없이 싸고 막내딸, 업어 준다며 베개를 업고 사신다. 깜짝 할 사이에 냉장고에서 김치를 함지박 가득 내 놓으신다. 딸들 먹인다고 하신다. 기저귀를 채워드리면 빼내어 물에 넣고 빨아 건조대에 널고 날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생각지도 않는 매실 항아리 열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온몸이 끈적거려 목욕 시켜드리고 뒷정리하고 나면 당신은 큰 것 싸서 주무르신다. 잠도 잘 주무시지 않는다. 잠자리가 따로 없다. 신발장 앞인지 분간을 못하신다. 힘들 때면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만 살고도 싶었다. 그럴 때면 친정 어머니 훈육이 떠올랐다. 가족이란 등에 지면 짐이 되지만 가슴으로 품으면 사랑이 된다는 것이였다. 주어진 운명이니 받아 들이기로 했다. 밤이면 끈으로 다리를 함께 묶고 자야 했다. 밤에 혼자 나가버리시기 때문이다. 어머니 이제 그만 자게 하면 응 하고는 그새 잊어버리고 내 얼굴을 더듬는다.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어서 장판이 성한 곳이 없다. 긁는 소리에도 순간순간 무심한 잠이 온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반문하고 싶다. 잎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살아야 했다. 시누이들이 다녀간 날은 밤에 큰 행사를 치려야 했다. 너무 많이 먹이셨기 때문이다. 기저기 위에까지 차오른 오물은 옷과 온몸을 적셔버렸다. 움직이지 못한 몸을 얇은 이불에 싸서 목욕탕으로 끄집어 모셔간다. 씻기고 옷 갈아 입혀 잠재우고 뒷정리 하고 나면 새벽 2~3시가 될 때가 다반사다. 아들 이름은 오빠, 며느리는 성님, 이란 호칭으로 통한다. 어디를 가나 성님만 찾는다. 어쩌다 아들이 어머니 젓 먹고 컸다고 하면 오빠는 누가 들을까 싶소 부끄럽게 하신다. 아들이 아니라 오빠로 착각 하신 것 같다. 그럴 때면 아들은 그 인자하신 어머니가 외이리 되셨을까? 잘 못 모신 탓이라고 자책하며 눈물을 훔칠 때가 많다. 16년이란 세월 미운 정 고운정 남기시고 미음 한 수저도 삼키지 못하게 되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며느리 못잊어 어찌 눈을 감으셨습니까? 딸들은 빈정댄다. 살갑지 못한 시누이들은 한마디씩 한다. 16년이란 긴 세월 고생했다고 자기네들은 감히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한마디에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힘들었던 것은 온데 간데 없고 못 해드렸던 것만 생각나 후회만 남는다. 물 마를새 없던 손은 갑자기 허전해 졌다. 수저질도 못하셨다. 어머님 먼저 드리고 나면 내 밥은 식은 밥이 되었다. 세수시켜드리고 목욕 시켜드렸던 어머니 몸 어느 한곳 손길을 다했다. 손바닥에서 만졌던 느낌, 전율이 흐른 것이 더 참기 힘들었다.
49 젯날
49제가 끝나고 형제들은 모였다. 지금까지 형제 우애가 좋았던 것은 너의 올케언니 덕이라고 한다. 그렇게 무심했던 남편의 말 한마디가 쌓였던 서운함은 사라졌다. 친척들은 모두 떠나고 둘만 남았다. 어머님 계실 때는 부엌에 눈길도 안 두었다. 뜬금없이 설겆이 하는 부엌에 들어와 도와 준다고 한다. 앞으로 남은 생은 당신 위해서 살겠다고, 어머님 때문에 힘들었던 것 보상하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세월이 갈수록 허전함은 살아지고 편안함이 느껴진다. 참 간사 한 것이 인간인 것 갔다. 어머님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서로 위하며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했다.
남편도 떠나고
남편 건강검진 받기 위해 병원에 같이 갔다. 이런 청천벽력 이란 말인가 생각지도 않은 폐암 이라고 한다.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편도 말문이 막혀 아무 말을 못한다. 용기를 냈다. 살려야겠다는 생각뿐 이였다. 행복은 잠시였다. 정신을 차리고 서울 병원으로 갔다. 병명은 같았다. 수술할 수가 없어 다시 내려왔다.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를 반복 하는 동안 남편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입원은 15일 밖에 허용이 안되어 집으로 퇴원했다. 잘 먹어야 일주일 후에 항암과 방사선이 가능했다.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 했지만 호전될 기미는 없고 날이 갈수록 피가 부족해 수혈까지 해야 했다. 2년6개월 동안 입원했다 퇴원 했다 반복했지만 결국은 회복하지 못했다. 의사선생님도 더는 손을 쓸 수가 없다며 6개월 판정을 받고 말았다.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며 퇴원하라고 했다. 애들은 이러다가 어머니 마저 쓰러지겠다고 요양병원으로 함께 갔으면 했다. 그러나 그이는 싫어했다. 너희 엄마 없이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집으로 퇴원을 했다. 거실은 병실이 되었다. 환자는 집안생활이 더 편한 모양이다. 잠깐도 곁을 비울 수가 없었다. 시장에만 가도 찾는다. 어디쯤 오고 있냐고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곁에 있어야 잠도 잘 주무신다. 병상침대 밑에서 자는 데도 늘 손으로 더듬어 확인을 한다. 목마르다, 소변 본다, 주물러 달라 그럴 때는 오는 잠을 참아가며 주물러야 했다. 낮에는 휠체어 타고 밖에 나가 햇볕도 쐬곤 했다. 맑은 하늘을 보며 살고 싶어 탄식하는 남편을 볼 때는 가슴이 아파 몰래 눈물 흘릴 때가 한 두 번이 아이였다. 3년 동안 그이가 고통을 받을 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 더 화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아파 주고 싶었다.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라만 볼 막지 못하고 끝내는 보내야 했다. 당신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갔지만 살아있는 사람도 그리움 잊고 살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삶에 의욕도 없었다. 몸은 만신창이 되었다. 햇볕만 보면 어지럽고 비틀거린 몸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몇 년을 집에만 있었다. 어느 날 빛 고을 건강타운을 찾았다. 문학반 이명란 교수님 강의를 들으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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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자의 일생을 잘 표현하신 우리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