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世祖 감찰공파 민담(閔憺) 감찰(監察-정6품) 감찰공파(監察公派)파조
민칭도(閔稱道)시조(始祖) → 민세형(閔世衡) → 민의(閔懿) → 민영모(閔令謀) → 민식(閔湜) → 민명화(閔命莘) → 민휘(閔輝) → 민지(閔漬) → 민상정(閔祥正) → 민선(閔璿) → 민유의(閔由誼) → 민호례(閔好禮)→ 본인
○ 생몰년 미상
○ 공은 감찰(監察-정6품)을 지냈다. 감찰공파(監察公派)파조이다.
○ 증조부는 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 판도사(版圖司)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에 증직된 민선(閔璿)이고, 조부는 지익주사(知益州事-지방장관)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되자, 벼슬을 버리고 평산(平山)에 은거한 두문동 72현중 한분 민유의(閔由誼) 중현조이며.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정5품) 예안(禮安)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찬성사(贊成事-정2품)에 증직된 민호례(閔好禮)이다.
○ 어머니는 기록이 없다, 부인은 공인(恭人) 이씨(李氏)이고, 두번째 부인은 공인(恭人)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 부인 작호
→ 족보 기록은 기록이 안되어 있다, 정6품 부인 작호는 의인(宜人)이나, 나이가 많아, 성종 5년 임금의 명으로 한자급을 더하였으니, 정확한 품계는 알수 없으나 5품이 되었다, 따라서 5품 부인 작호 공인(恭人)을 추가하였다,
○ 형제는 아들만 셋이다, 공이 장남으로, 차남은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민오(閔悟), 셋째 막내는 대호군(大護軍-종3품 무관)을 지낸 민전(閔悛)이다.
○ 자녀는 3남 2녀, 5남매를 두었다,
첫째 장남은 효행(孝行)으로 알려진, 감찰(監察-정6품)을 지낸 민백화(閔伯和)이고, 둘째는 차남 민중화(閔仲和)이며, 셋째 장녀는 이광석(李廣石)에게 출가하였고, 넷째 차녀는 임계창(林繼昌)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섯째 막내는 삼남 민계화(閔季和)이다,
○ 묘는 기록이 없다,
○ 참고문헌 - 여흥민씨 족보 2002년 판, 성종실록(成宗實錄), 씨족원류(氏族源流),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 조선실록 일지 ○
성종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9월 29일(신사) 2번째기사,
이조(吏曹)에 전지하여, 개성부 유수 이예(李芮)·경기 관찰사 김양경(金良璥)·개성부 도사(都事) 권은영(權恩榮)·교수(敎授) 백훈(白勛)·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 장석산(張石山)과 최칭(崔偁), 그리고 노인(老人)으로 전 감찰(監察) 민담(閔憺) 등 4인에게 모두 1자급(資級)을 더하고, 경력(經歷) 박숭문(朴崇文)은 자궁(資窮)이므로 체임(遞任)할 때에 준직(准職)을 주게 하였다.
○ 원문 ○
傳旨吏曹, 開城府留守李芮、京畿觀察使金良璥、開城莩事權恩榮ㆍ敎授(白勳)〔白勛〕、穆淸殿參奉張石山ㆍ崔偁及老人前監察閔憺等四人, 竝加一資, 經歷朴崇文資窮, 遞任時授準職。
※ 감찰공파(監察公派)는 현재 두개로 민담(閔憺)을 파조로 하고 개풍(開豊)이 세거지인 기존 감찰공파이고, 또 하나는 16世 민제영(閔齊英))을 파조로 하고 청주(淸州), 공주(公州), 고령(高靈)이 세거지인 기존 당진공파(唐津公派)를 근래에 개명한 감찰공파이다
감찰(監察) :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에 두었던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13원이다.
전중어사(殿中御史)라 하여, 1392년(태조 1)에 20원을 두었다가, 1401년(태종 1)에 25원으로 늘렸으나, 세조 이후에는 그 수를 줄여 문관 3인, 무관 5인, 음관(蔭官) 5인, 총 13원으로 하였다.
문관‧무관‧음관이 모두 조하(朝賀: 조정에 나가 왕께 賀禮하는 일) 때나 동가(動駕: 왕이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거둥하는 일) 때에는 압반(押班)이 되고 제향(祭享: 나라의 제사) 때에는 제감(祭監)이 되었으며, 시소(試所: 과거를 치르는 곳)에서 문관(文官)은 대감(臺監)이 되었으나 무관‧음관은 대감은 될 수 없었다. 모든 면을 감찰하여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보았다.
대사헌 이하 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까지의 사헌부 소속의 관원을 통칭 대관(臺官)이라고 하였으며, 또 장령과 지평을 별칭 대장(臺長)이라고 하였으며,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이조(吏曹)에서 대관으로 추천(推薦)된 사람을 남대(南臺)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