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생활은 전투?!
인생은 ‘찾기’와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부모를 제외한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잘 ‘찾아’야만 한다. 나의 경우, 이상형으로 찾아 헤맨 꿈속의 그녀는 백설공주의 양 뺨 때려줄 만한 백옥 같은 피부는 기본, 붉은 입술은 옵션에다가 긴 생머리도 봄바람에 좀 살랑거려 주시는 여인. 그리고 성격은 ‘이러시면 아니 돼요, 돼요, 돼요, 돼요…’ 하는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그런데 스물여덟 살의 내 선택은 어떠했던가.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누님을 반려자로 덜컥 선택하였으니….
나의 그녀는 소심한 나보다 리더십 출중하고 다년간의 사회경험 역시 추종을 불허하여 언뜻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그 ‘여신’이 오버랩되는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총각 시절엔 그 여신님이 젖가슴 풀어헤치고 조명 또한 받아주시기에 ‘오, 멋지다!’라 감탄을 금치 못했었건만, 결혼하고 나서 보니 여신 발치에 진달래꽃마냥 사뿐히 즈려 밟힌 수많은 시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건 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군가가 귓가에 메아리치니, 결혼 생활은 전투다, 전투.
아이와 함께 아빠도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 부부에게 선물처럼 아이가 찾아왔다. 바깥일이 바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누가 그랬던가, 아이는 어른을 치유하는 존재라고. 아이의 출생과 함께 아빠는 탄생하고, 아이의 성장과정은 나의 부족함과 인간적인 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때론 아이 앞에서 인상을 쓰거나 소리를 지를 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내가 위로받고 내 안의 아이가 성장하는 경험을 한다.
찬이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틀어놓고 등을 토닥일 때 어두운 방을 울리는 고즈넉한 자장가는 아들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지치고 상한 내 영혼을 위로해주는 것으로 여겨져 참으로 포근했던 기억이 많다. 한 가족을 이끄는 가장이자 아빠가 되었으니 더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될 어른이지만, 한편으론 위로와 자장가가 필요한 아이가 내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책은 즐거운 그림언어
찬이를 키우며 이렇듯 위로를 받는 와중에,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다. 바로 그림책이다. 아빠 구실을 하고자 찬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주곤 하는데, 아이들만 보는 것으로 여겼던 그림책 속에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모든 이를 포괄하는 폭넓은 그림언어를 발견했다. 그림책은 그림으로 그려진 짧은 시였고 철학이었으며 문학과 인문이었다. 또한 작가가 은밀하게 감춰둔 상징이나 기호도 발견할 수 있는데, 숨은 그림을 찾듯 내밀한 의미를 찾는 것은 그림책을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
찬이 아빠 이상혁씨는…
좌충우돌~ 유쾌발랄한 육아일기가 담긴 블로그(blog.naver. com/gomunhak)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3년차 아빠. 찬이를 키우며 ‘사회성’의 탈 속에 숨겨뒀던 마음속 피터팬이 성장하는 듯한 기쁨을 느낀다는 긍정남이다. 찬이를 위해 읽어주던 그림책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고 있다. 애교 많고 지능적인(?) 장난을 즐기는 꼬마 악동 덕에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라는 그가 여성조선 독자를 위해 그림책 일기를 연재한다.
아빠 눈엔 절대 안 보인다?
숨은 그림 어떻게 찾을까?
그림으로 이해하기
찬이가 좋아하는 그림책 중 하나인 ‘용돈 주세요’를 보면, 재미있는 숨은 그림을 찾을 수 있다. 매 페이지 어딘가에 펭귄이 숨어 있는데, 워낙 작아서 여간해선 찾기가 어렵다. 특히나 어른은 더더욱 찾기가 어렵다. 이유인즉슨, 어른은 그림책의 글을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페이지를 얼른 넘기기 때문에 그림을 유심히 보지 않는 반면, 아직 글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림을 통해 정보와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에 구석구석 유심히 그림을 살피다가 숨겨진 그림과 의미를 어른보다 더 먼저, 쉽게 찾는 것이다.
펭귄과 더불어 또 하나 재미있는 숨은 그림이 있다. 주인공 아이가 입은 흰색 티셔츠에 새겨진 그림이다. ‘FLY FISH’, 즉 날아다니는 물고기 되시겠다. 그런데 숨어 있는 펭귄과 주인공 병관이가 입은 티셔츠 속의 물고기는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조류이되 날지 못하는 펭귄과, 어류이되 날 수 있는 물고기의 조합 아닌가.
남극의 찬바람을 맞으며 새끼를 지키는 부성애의 상징 황제펭귄과 빠르게 바다를 누비며 바다처럼 파란 하늘까지 날아오르는 물고기. 눈을 크게 떠야 찾을 수 있는 펭귄은 어찌 보면 눈곱만큼 내재된 아빠들의 부성애이자 새라는 정체성을 지녔음에도 날 수 없이 그저 아이에게 묶인 아빠의 처지를 나타내고, 티셔츠에 대문짝만 하게 새겨진 ‘FLY FISH’는 물 밖으로까지 날아오르려는 식으로 틈만 나면 일탈을 꾸미는 ‘남정네’의 상징이 아닐까 모르겠다.
열린 시각으로 세상을 품자!
숨겨진 그림은 또 있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그림책이니 국내 창작 그림책에 비해 그 표현과 은유가 더 농밀하다. 일흔다섯 살의 할아버지가 다시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청춘과 설렘을 찾는다는 유쾌하면서도 철학적인 내용의 ‘할아버지는 1학년’은 숨겨진 의미가 무척 의미심장하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 ‘나는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라는 단 하나의 문장 아래 축제의 현장이 펼쳐지고, 모든 이들은 사랑에 빠진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다. 학교 선생님도, 아이도, 어른도, 일흔다섯 살의 할아버지도 말이다. 구석에는 키스하는 연인까지 보인다.
그런데 화면 가장 우측에 딱 붙은 커플을 보자. 젊은 청년과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아저씨 커플이다. 뭐? 커플이 아니라 그냥 삼촌과 조카 또는 직장 상사와 후배가 아니냐고? A4용지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딱 붙은 둘의 사이와 은밀한 눈짓을 보고서도 어찌 커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둘은 동성연애 커플이다. 어머, 망측스러워라. 아이들 보는 그림책에 어찌 동성연애 커플이 등장한단 말인가?
하지만 잠시 진정하자. 그림책에 동성연애 커플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그림책이 몹쓸 그림책이라면, ‘우리 엄마는 그랜다이저 승용차 몰고 다니는데 너희는 아빠도 버스 애용자라며?’라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사랑의 기호에 대해서는 개인적 판단과 가치관이 개입될 수 있으나, 자기와 다르다고 차별하거나 무리에서 소외시킨다면 결국은 빈과 부, 학벌과 태생으로 나와 친구를 나누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나와 다르다면 그저 다름을 인정하고 담담히 지켜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프랑스에서 건너온 책답게, 일흔다섯 살의 노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설정도 파격적이지만 은근한 구석에 인권과 평등을 새겨 넣음이 더욱더 놀랍다.
독일에선 비싼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게 보편화되어 있듯 프랑스에선 남녀노소의 흡연이 하나의 풍경이다. 백주대낮에 맥주 퍼마시는 독일인이나, 여자도 길거리에서 담배 피워대는 프랑스인이나 다 족보 없는 상것이라면, 우리는 마늘 냄새 풍기는 황인종이라 불려도 할 말 없음이다. 자기와 동향이 아니라거나 출신 학교가 다르다고 줄을 긋는 어른에 비하면, 열린 시각으로 세상을 품는 그림책은 오히려 만인 앞에 평등하다 하겠다.
찬이 아빠의 퀴즈~
자, 오늘의 마지막 과제.
당신의 어른아이 감성을 측정해보는 시간이다. 위 그림은 ‘동강의 아이들’이란 그림책의 일부이다. 과연 이 장면에는 어떤 그림이 숨어 있을까? 아무리 봐도 숨은 그림이 안 보인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심히 어른스럽게 살고 있다는 증거. 만약 숨은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면 당신은 여전히 꿈 많은 소년·소녀이자 피터팬 또는 웬디라 할 수 있겠다.
찬이 아빠 퀴즈 정답…오빠 등에 업힌 여동생의 뒷모습.
그림을 시계방향으로 세워서 보면 바위산이 사람 모습임을 알 수 있다.
/ 여성조선
기획 이미종 기자ㅣ글 이상혁ㅣ사진 이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