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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물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松風
한오백년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고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강원도민요의 하나. 후렴의 가락으로 볼 때 본조 〈정선아라리〉가 변형되어서 생긴 강원도 아리랑의 일종이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고/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후렴)/백사장 세모래밭에 칠성단을 모으고/임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후렴을 먼저 부르고 본 사설을 부르는데 "나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당신의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 등 주로 자탄적이고 연정을 호소하는 구슬픈 사설을 부른다. '한오백년'이라는 이름은 후렴 사설을 딴 것이다. 느린 중모리장단에 맞고 미·라·도가 주요음이며, 미로 시작하고 라로 마쳐서 메나리조에 속한다. 경과음으로 솔과 레가 쓰이는데, 특히 하행 선율에서 솔의 짧은 사용이 특징적이다. 낮은 음으로 시작하는 후렴과는 대조적으로 본 사설의 시작을 높게 질러내서 원망하는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김옥심, 金玉心 1925 6 16 ~1987, 11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 ‘10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다는 고 김옥심 명창은 1925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김옥심 명창은 8세에 조선 권번(券番 : 일제시대 기생을 관할하던 기관)에 들어간 뒤 45년 광복 직후부터 70년대까지 소리꾼으로 활동했다. 87년 11월경 작고한 경기 소리의 명창이다. 김옥심 명창은 1958년 광복 후 제1회 전국민요 경창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1950~80년에 걸쳐 최고의 경기 명창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발매 된 유성기 음반,LP레코드에는 그의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약 100여종),인간문화재 이은주,묵계월 명창과 함께 트리오로 전성기를 누렸고,특히 정선아리랑 ,한오백년은 그의 특기로 그가 불러야만 제맛이 난다고 일컫는다. 경기민요 명창인 김옥심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민요인 정선아리랑을 편곡해 서울에 널리 퍼지게 했으며, 한오백년 같은 민요를 비롯해, 가사·시조 등 정가, 수심가·배따라기 등 서도소리, 잡가와 신민요, 양금 등에 두루 능통해 1950~60년대 최고의 인기 소리꾼으로 군림했다. 김옥심의 목소리는 경기 소리를 위해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듯 윤기가 넘치며 가사를 음미하듯 호소력 또한 일품이여서 듣는 이마다 그의 소리에 탄복 않는 이 없었다. 김옥심 명창은 경기 소리의 특징을 가장 완벽하게 갖추어 소화해내므로 혹자는 100년에 하나 나오기 어려운 명창으로 이야기 하기도 한다. 김옥심은 판소리의 절창 박초월 명창조차도 북채를 놓고 소리를 감상하고는 “타고난 목소리”라며 탄복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또한 1958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서편제 심청가로는 독보적 존재였던 한애순 명창과 당대의 가객 김월하를 각각 2, 3위로 밀어내고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늘이 내린 목소리 목소리가 아름다운 사람을 두고 우리는"은쟁반 위의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같다"라고 표현한다. 1925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한 명창 김옥심이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녀의 본명은 애희(愛姬). 20~30년 당시 여자아이 이름치고는 꾀 세련되고 예쁜 이름이다. 이름 못지 않게 고운 목소리를 지닌 애희 즉, 김옥심은 여덟 살 때부터 조선 권번의 주수봉에게 시조와 가사, 잡가 등을 배웠다. 해방 후에는"경서도 소리의 명인"으로 알려진 이창배 선생님으로부터 경서도 창과 산타령 등을 배웠다, 김옥심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8년 전국국악경연대회 성악부문에서 1등을 하면서부터다. 그 이후 김옥심은 각종 공연과 방송, 음반취업 등의 활동을 통해 당대 대중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경기 명창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김옥심은"한오백년","정선아리랑"등을 최초로 불러 대중화시킨 국악사의 중요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녀가 부르는"한오백년"과"정선아리랑"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하늘이 내린 목소리","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찬사와 함께 "방울목 김옥심"이라고 불려졌다. 비운의 소리꾼 그 후 그녀는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한동안 방송활동과 공식무대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44세, 어쩌면 인생의 황금기가 될 수 있었던 나이다. 이것이 빌미가되어 김옥심은 1975년 무형문화재 지정에서 탈락되는 비운을 맞는다. 이유인즉 심사 당시 예능계를 떠나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1988년 김옥심은 말년을 가난과 지병에 시달리다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고, 차츰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명창 김옥심이 다시 세상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어느"국악 매니아"의 숨은 노력과 희생 때문이다. 96년 종로 거리의 한 레코드점에서 낡은 LP를 통해 홀러 나오는 김옥심 명창의"정선아리랑"을 우연히 듣고, 그 구슬프면서도 고운 소리에 빠져들었다는 김문성(오마이뉴스 문화부 기자겸,국악방송 "김문성의 신민요 80년"패널 담당)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또한 김씨는 재야 명창을 기리는"김옥심 추모사업회"회장을 맡고 있으며, 2000년도에는 사비를 털어 국립국악원에서"김옥심 명창 추모 공연"도 가졌다. 타고난 목청과 빼어난 음악성으로 50년부터 8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유성기 음반을 비롯 약 1백여 종의 레코드 음반을 취입할 정도로 세간의 인기는 물론 국악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김옥심. 어쩌면 그녀는"인간문화재"제도의 헛점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1백년에 한번 나올만한 목소리를 가진 국악인이요, 경기 민요의 대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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