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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국악성가 원문보기 글쓴이: 김달
▶가타리나(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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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카타리나 마리아 드레셀(Catharina Maria Drexel, 또는 가타리나)은 1858년 11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유복한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자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흑인과 토착 미국인인 인디언들의 물질적, 영성적 삶의 질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이내 정말 필요하고 부족한 것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카타리나는 인디언과 유색인종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한 복된 성사의 수녀회(Sisters of the Blessed Sacrament)를 설립하였다. 자신의 삶을 헌신하며 기금을 마련한 성녀 카타리나 원장은 1894년 뉴멕시코(New Mexico) 산타페(Santa Fe)에 인디언들을 위한 최초의 선교학교 개교식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시시피(Mississippi) 강 서편의 인디언들을 위한 학교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위한 학교들도 개교하였다. 1915년에는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 미국 최초의 흑인들을 위한 대학인 사비에르(Xavier)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녀가 선종할 무렵에는 이미 미국 전역에서 500명이 넘는 수녀들이 63개의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988년 11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0년 10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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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나(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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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논나는 귀족 출신으로 웨일스(Wales)의 디버드(Dyfed)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녀는 웨일스의 세인트 데이비드(오늘날의 지명) 교외 티 그윈(Ty Gwyn)의 어느 수도원에서 살다가 산트(Sant)라는 어느 족장에게 붙잡혀 가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성 다윗(David, 3월 1일)이다. 그 후 그녀는 콘월(Cornwall)과 브르타뉴(Bretagne) 등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논(Non) 또는 논니타(Nonnita)로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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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 에우스토키움 베르제리(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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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7월 31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의 베르가모(Bergamo)에서 태어난 성녀 테레사 에우스토키움 베르제리(Teresia Eustochium Verzeri, 또는 데레사)는 페드로카-구르멜리(Pedrocca-Grumelli) 백작 가문의 일곱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베르제리 가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브레시아(Brescia)의 주교가 된 성녀 테레사의 동생은 히에로니무스로 불렀고, 테레사는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딸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으로 불렀다. 성녀 테레사는 10세 때에 첫영성체를 하면서부터 수녀가 될 마음을 품었다. 그 후 견진성사를 받고나서부터는 베르가모 대성당의 총대리인 요셉 신부로부터 영성지도와 격려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세 번씩이나 산 그라타(San Grata)의 베네딕토회에 들어갔지만 세 번 다 교육을 받는 도중에 나왔다. 그 후에 그녀는 그로모라고 부르는 작은 집에서 소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는데 전념하였다. 이것은 후에 그녀가 세운 수녀회의 씨앗이었다. 성녀 테레사는 안토니아를 비롯한 비르지니아 시모니 그리고 카타리나 만제노니 등의 도움을 받고 교육하는 한편, 단식과 침묵 등을 통하여 힘든 완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테레사는 요셉 신부의 지도하에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으며, 가난한 어린이 교육, 병자방문 그리고 윤리적 위기에 처한 소녀들의 휴식처 겸 신앙교육, 여성 피정지도 등을 실시하였다. 1841년 성녀 테레사 원장과 그의 동료들이 종신서원을 발했고, 1847년에는 '예수의 성심 수녀회'(Daugh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라는 이름으로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성녀 테레사는 북부 이탈리아를 강타한 콜레라에 걸려 1852년 3월 3일 브레시아(Brescia)에서 운명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베르가모의 예수 성심 수녀회 성당에 모셔졌다. 예수의 성심 수녀회는 그 후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카메룬, 인디아, 알바니아 등으로 진출해서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성녀 테레사는 1946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1년 6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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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올로(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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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펠릭스(Felix),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성 루키올루스(또는 루치올로), 성녀 마르키아(Marcia)와 36명의 동료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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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치아(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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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펠릭스(Felix),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성 루키올루스(Luciolus), 성녀 마르키아(또는 마르치아)와 36명의 동료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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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노(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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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리누스(또는 마리노)는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 카이사레아(Caesare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군인으로서 용맹을 떨쳤기에 여러 가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던 중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에서 신전에 희생제물을 드리는 순서에서 그가 그리스도인임이 드러났다. 집정관 아케우스가 그에게 추궁하자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그 결과 재판에 넘겨졌다. 그 후 그는 성당에 끌려가서 칼을 잡든가 아니면 복음서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자, 용감하게도 복음서를 잡으면서 “빨리 하느님께 가고 싶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성 아스테리우스(Asterius)는 황제 측근의 로마 원로원 의원인데 성 마리누스의 순교 현장에 임석했다가, 순교자들의 용감한 믿음을 보고 감탄하여 개종하였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성 아스테리우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로마(Rome)와 그리스의 순교록에는 그 역시 순교자로서 기록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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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스코(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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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클레오니쿠스(Cleonicus), 성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 성 바실리스쿠스(또는 바실리스코)와 동료들은 흑해 연안의 폰투스(Pontus)에서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하였다. 이들 순교자들은 성 테오도루스(Theodurus, 2월 7일)와 관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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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발로에(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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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발로에(Winwaloe)는 여러 형태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프랑스에서는 구에놀레(Guenole) 그리고 라틴어로는 빈발루스(Winwallus)라고 한다. 그는 색슨족의 침입을 피해 프랑스의 브르타뉴(Bretagne)로 이주해 온 웨일스(Wales)의 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로렌(Lauren) 섬의 수도원에 들어갔고, 몇 년 후에 11명의 동료 수도승들과 함께 왕자에게 선사받은 브르타뉴의 브레스트(Brest) 근교에 랑데브네(Landevennec)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그 수도원에서 매우 엄격한 삶을 살다가 선종하였다. 후에 영국 콘월(Cornwall)과 잉글랜드(England)에 몇 개의 성당이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는데, 아마도 그 지방과 어떤 연관이 있거나 후에 그의 유해 중 일부가 그곳으로 이장되어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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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텔라(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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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르텔라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집정관 루키우스(Lucius)와 그의 아내 안투사(Anthusa)의 딸로서 매력적인 처녀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녀의 미모에 빠져 청혼하였는데,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부친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녀를 입궁시키라고 명하였다. 부모와 그녀는 반대하였지만 도망가는 길 외에 황제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베네벤토에 있는 나르세스(Narses) 삼촌에게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달마티아(Dalmatia)의 부다까지 부친의 배웅을 받은 그녀는 수행원들과 여행을 계속하던 중에 강도들을 만났는데, 하인들은 모두 도망치고 성녀 아르텔라만 붙잡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3일 만에 풀려나서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베네벤토에 도착하자 그녀는 맨발로 걸어서 성모 성당에 당도하여 이제까지 무사히 인도해주신 주님께 감사의 표시로 종을 선물로 드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주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단식을 하고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16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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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오(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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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리누스(Marinus)는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 카이사레아(Caesare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군인으로서 용맹을 떨쳤기에 여러 가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던 중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에서 신전에 희생제물을 드리는 순서에서 그가 그리스도인임이 드러났다. 집정관 아케우스가 그에게 추궁하자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그 결과 재판에 넘겨졌다. 그 후 그는 성당에 끌려가서 칼을 잡든가 아니면 복음서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자, 용감하게도 복음서를 잡으면서 “빨리 하느님께 가고 싶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성 아스테리우스(또는 아스테리오)는 황제 측근의 로마 원로원 의원인데 성 마리누스의 순교 현장에 임석했다가, 순교자들의 용감한 믿음을 보고 감탄하여 개종하였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성 아스테리우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로마(Rome)와 그리스의 순교록에는 그 역시 순교자로서 기록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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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모(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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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왕 아이스툴프(Aistulf)가 이탈리아를 통치할 때 그의 매제인 프리울리(Friuli)의 공작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의 도움이 컸었다. 성 안셀무스 공작은 유능한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모데나(Modena)의 파나노(Fanano)에 병원이 딸린 수도원을 최초로 세웠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를 바라던 그는 마침내 로마(Rome)로 가서 성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고, 두 번째로 설립한 모데나 인근 노난톨라 수도원의 원장이 된 이후에는 천여 명의 수도자를 지도하는 큰 인물로서 봉사했다. 그는 50년 동안이나 수도자로 살다가 연만한 나이에 선종하는 은혜를 입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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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트로피오(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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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클레오니쿠스(Cleonicus), 성 에우트로피우스(또는 에우트로피오), 성 바실리스쿠스(Basiliscus)와 동료들은 흑해 연안의 폰투스(Pontus)에서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하였다. 이들 순교자들은 성 테오도루스(Theodurus, 2월 7일)와 관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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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비노(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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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랭스(Reims) 출신인 성 게르비누스(또는 제르비노)는 그곳의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공부한 뒤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베르됭(Verdun)의 생반(Saint-Vannes)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학덕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1045년에는 앙리 1세(Henri I) 왕에 의하여 생리퀴에(Saint-Riquier)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넓은 지역으로 설교 여행을 다니면서 그리스와 라틴 고전들을 모아 자기 도서실에 보관하여 고전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고 또 뛰어난 고해신부로서도 활약하였다. 수도원 일 때문에 영국을 수차례 방문하면서부터 성 에두아르두스(Eduardus, 10월 13일) 왕과 친하게 지냈으며, 랭스의 성 레미기우스(Remigius) 성당을 축성한 후 로마(Rome)로 돌아가는 교황 레오 9세(Leo IX)를 수행하였다. 그는 4년 동안 나병을 앓다가 운명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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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레도니오(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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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헤미테리우스(Hemiterius)와 성 켈레도니우스(또는 첼레도니오)의 생애와 순교 사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이들을 위하여 장시를 지은 프루덴티우스(Prudentius)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박해자들은 그들의 순교 사실을 불태웠고, 미래의 영광을 두려워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이 두 성인은 성 마르첼루스(Marcellus)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군인이 되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에스파냐의 칼라호라(Calahorra) 성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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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라(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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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카밀라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를 만나 개종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태생인 그녀는 성 게르마누스의 선교여행에 동반하여 프랑스의 오세르로 가서 은수자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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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네군다(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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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룩셈부르크의 백작인 부친 지크프리트와 모친 헤드비그로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신심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와 결혼하였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뮌헨에 보존되어 있다. 어느 전기작가는 그들 부부는 결혼식 날에 동정서원을 발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의 황제인 오토 3세가 서거하자 성 헨리쿠스는 바이에른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마인츠(Mainz)에서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에 의하여 성대히 거행되었고, 이어 1013년에 그는 로마(Rome)로 가서 교황 베네딕투스 8세(Benedictus VIII)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런데 결혼 첫날밤부터 서로 동정을 지키며 남매처럼 지내던 성녀 쿠네군다는 얼마 뒤에 중상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마저 일시적이나마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입장에 선 그녀는 불에 의한 시죄법(試罪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자신의 의혹을 풀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았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국내의 신앙 전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성녀 쿠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드려서 밤베르크(Bamberg) 대성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고, 교황 성하가 직접 오시어 축성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던 중에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이 나으면 카셀(Kassel) 근교 카우푼겐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그 후 이 일이 거의 완공될 무렵 남편 성 헨리쿠스가 운명하였다. 1024년 남편의 기일을 맞이하여 성녀는 카우푼겐 성당을 수차례나 방문하고 미사 때 복음을 봉독한 뒤에, 그녀는 원래의 십자가 일부를 제대에 봉헌하였다. 그 후 그녀는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황녀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환경과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으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위 사람들이 높이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1200년 3월 29일 시성되었다. |
참고자료 |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녀 쿠네군다 황후 동정',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61-364쪽. |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 '구네군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5년, 810-81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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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니코(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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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클레오니쿠스(또는 클레오니코), 성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 성 바실리스쿠스(Basiliscus)와 동료들은 흑해 연안의 폰투스(Pontus)에서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하였다. 이들 순교자들은 성 테오도루스(Theodurus, 2월 7일)와 관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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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시아노(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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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티티아누스(Titianus, 또는 티시아노)는 독일 출생으로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주교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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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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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펠릭스,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성 루키올루스(Luciolus), 성녀 마르키아(Marcia)와 36명의 동료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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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일라(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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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포일라는 성 콜간(Colgan)의 여자형제로 아일랜드 골웨이 지방에서 몇 개 본당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외에 그녀에 대한 정보는 남아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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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미테리오(3.3)◀ |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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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헤미테리우스(또는 헤미테리오)와 성 켈레도니우스(Cheledonius)의 생애와 순교 사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이들을 위하여 장시를 지은 프루덴티우스(Prudentius)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박해자들은 그들의 순교 사실을 불태웠고, 미래의 영광을 두려워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이 두 성인은 성 마르첼루스(Marcellus)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군인이 되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에스파냐의 칼라호라(Calahorra) 성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
첫댓글 성인,성녀 분들의 사진이나 그림이 있는 분들은 관심있게 보게 되네요. 모든 분들의 것이 남아 있다면 좋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