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기나긴 하루』 중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 박완서, 문학동네, 2012.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형님에게 전화가 와서 동서는 한참을 전화기에 대고 자기 하소연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자의 아들 창환이는 83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만 운동권 학생으로 데모하다 쇠파이프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백만 학도가 창환이를 열사로 떠받들었고 집단적인 열정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아들의 장례를 치른다. 화자가 홀로 삶을 버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번뇌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80년대 젊은이들이 보는 세상은 깜깜했다고 하는데 그런 세상을 밝히려다 희생된 젊은이들의 넋을 어디서 달래야 하는 걸까. 아들을 보내고 화자는 6.10데모에도 나서고 민가협에서 몸담으며 자신과의 타협을 통해 꿋꿋하게 살아간다.
형님은 시집살이 면한 지 겨우 삼 년 만에 과부 되시고 며느리 보셨으니 두 내외만의 오붓한 재미도, 혼자 사는 자유 맛도 모르시잖아요. 했더니 형님은 부러운 듯이, 자네네 사는 거서에 비하면 나 사는 건 반세상이라네. 라고도 하셨죠.(p183)
창석이는 몸으로 괴로웠을 뿐이지만 창환이는 마음으로 더 많이 괴로워했다구요.(p190)
창환이 잃고 나서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뭔 줄 아세요.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온 것이 중요해진 거예요. (p192)
화자인 동서는 형님에게 전화를 자주 건다. 형님은 묵묵히 들어주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형님에게 자신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던 것을 이젠 놓았노라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중요했던 시선들.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 제사,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시선, 예쁜 컵, 찻 잔, 이불, 자개장롱 등 사서 모으는 것이 부질없음. 물욕에 치를 떨게 되는 화자의 넋두리가 이어진다.
갖고 싶은 걸 애써 장만하면 그렇게 기쁘더니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짐스러워요. 생떼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 물건들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물건이 미운 건 아마 그 질김 때문일 거예요. (p194)
하루하루를 살기가 무거운 수레를 끄는 것처럼 힘들었다는 걸 형님이 아실 리가 없죠. 창환이를 잃기 전까지 저절로 살아졌어요. 세월이 유수 같았죠. 한참 자라나는 아이나 달력을 보지 않고서는 세월이 빠르다는 걸 느낄 겨를이나 어디 있었나요.(p197)
아들을 잃고 어미가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을까. 만약 이렇다면 한 번 생각해봐야는 거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라는 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시죠. (p201)
너무 힘들면 은하계에서 부터 자신이 먼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운명이나 수명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위로하고 버텼다. 어느 날 친구 명애가 창환이 장례식 때 와준 동창 아들이 아프니 한 번 가보자고 오지랖을 부린다. 강북 서쪽 끝에 있는 집을 겨우 찾아 갔더니 친구는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아들은 뺑소니 차 사고로 하반신마비에다 치매까지 있는 상태였다. 동창은 아들에게 파인애플 깡통을 따서 먹이면서 “아이구, 이 웬수, 어서 처먹고 뒈져라.” 라고는 모습을 보며 모욕감을 느낀다. 친구가 자신을 데려 온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경우를 보고 너가 위로 받아라는 뜻인데 인간성 중 가장 천박한 급소를 찌른 것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누워 있는 아들을 뒤집으려고 손을 대니 성난 짐승처럼 난폭해졌다. 어머니 외엔 아무도 못 만지게 한다. 이를 본 순간 별안간 친구가 부러워져 어쩔 줄 몰라하는 화자는 남의 아들이 아무리 잘나고 출세했어도 부럽지 않았는데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러웠던 것이다. 이 땐 은하계의 주문도 소용없고 울음이 북받치는 데 대성통곡, 방성대곡보다 더 크게 화자는 운다.
“제 막혔던 울음이 터지자 그까짓 은하계쯤 검부락지처럼 떠내려가더라구요. 은하계가 무한대건 검부락지건 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일이지. 제까짓 게 인간 없이는 있으나 마나 한 거 아니겠어요. 전 그 울음을 통해 기를 쓰고 꾸민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놓여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러고 나서 요 며칠 동안은 울고 싶을 때 우는 낙으로 살고 있죠. 어느 날 생때같은 아들이 소멸했고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 형님?” (209)
형님은 화자에겐 통곡의 벽이었다. 통곡은 언제나 찾아와서 울고 가는 장소. 응석부리고 싶은 마음을 터는 벽이었다. 친구 아들을 보고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는 화자의 심정에 견디기 어려운 세월을 꾹꾹 참은 세월이 보인다. 화자는 하루하루 버텨내고 살아 온 자신을 이젠 무너뜨린다. 훌훌 벗기로 한다. 이제야 아들을 보내고 화자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기를 쓰고 자신을 꾸민 모든 것을 벗은 해방감을 가지게 된다.
박완서 작품 중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한 말씀만 하소서>를 나중에 쓰게 된 계기의 작품이기도 하다. 박완서 작가도 생전 졸지에 참척의 아픔을 경험했고 그 고통을 기록한 글이다.
내가 가장 나중까지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종= 가장 나중에/ 지니인 것= 지닌것, 즉 가지고 있는 것)
<서평-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