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탄의 의미
말씀: 마 1:18-25
오늘은 성탄절이면서 주일입니다. 주일 설교를 성탄절 설교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절, 크리스마스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요. 오늘 성탄절 설교가 교회마다 다양하게 이루어지겠지만 한 가지 사실은 집고 가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탄절은 믿음으로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흥청망청 지내는 것이 아니라 성탄절이 상품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새벽 송 돌고 예배드리고 양노원이나 기관에 과일 좀 나누고 이웃에 떡이나 좀 나누고 이런 것이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믿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말씀 아닙니까? 이 믿음의 역사를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얼마나 전하고 있느냐하는 차원에서 성탄절이 마냥 기쁨보다도 어쩌면 뜨거운 사명이 필요한 날입니다. 사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 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이것이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신화에도 없는 허무한 애기였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최첨단과학에서 살고 있기에 기적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에게 절대 믿음을 요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믿어진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또 이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고 성탄절의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차원에서 말씀이기도하지만 처녀탄생에 대한 믿음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황우석박사가 들으면 우스운 말이겠지요. 그런데 황우석 박사는 예를 들어 씨앗을 어떻게 하면 분리하느냐 이것만 연구했지 씨앗이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동정녀 탄생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동정녀로부터 오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독생자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완전히 사람이면서 완전히 죄 없으신 분으로 오시기위해서는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이가 동정녀탄생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 사실이 믿어지는 날이며 그런 차원에서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날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메시지를 받은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마리아의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 당시 율법으로는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믿었단 말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아들을 잉태한 것을 믿었다는 것은 그 믿음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 지를 마리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었으면 예수님께 이런 부탁도 하지 않았겠지요.
성탄절은 믿음을 요구하는 날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탄생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성탄절인 12월 25일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 탄생의 축하를 하는 날이 아니라 이 탄생을 믿는 자들이 계속해서 내 가정에서 이웃에서 생기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은 사명을 다시 한 번 다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가 성탄절을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되느냐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기뻐해야 됩니다. 이 날은 기쁜 날입니다. 구원을 위해 오신 날이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기쁜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첫 번째 아담이 범죄함으로 사실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은 모든 사람들의 기쁨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이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다시 산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예수를 가리키는 별만 보고도 기뻐했다고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2:9-10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리고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그러니까 침례요한이 태중에 아기오심을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성탄절에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공휴일이라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 번 성탄절은 망친 날입니다. 이런 좋은 날에 남편이 좀 일찍 들어와 외식이나 하고 쇼핑이나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불평하는 날이 된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최고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최고 영광을 받았고 최고 대접을 받은 날입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예수님의 탄생은 구원뿐만 아니라 ‘임마누엘’은혜까지 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이런 차원에서 기쁨이 되는 것이지요. 이 기쁨은 순간적으로나 찰라적으로 기쁜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영원한 기쁨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기쁨이 순간적이거나 찰라적이니까 성탄절에 술이 가장 많이 팔리고 여자들이 임신을 가장 많이 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마2:3 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그렇습니다. 헤롯왕과 예루살렘은 소란만 떨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소란만 떨다가 기쁨과 임마누엘도 구원도 없는 삶이란 말입니다. 지금도 소란만 떠는 성탄절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대목이라고 술집에서 식당에서 할인마트에서 흥청망청 소란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소란에는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또 다른 사명이 있다면 올바른 성탄 문화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삶 속에서 참된 성탄절을 맞이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기예수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기뻐하는 날, 불신자들이 구원을 얻는 날, 외로운 자가 주님을 만나는 날, 병든 자가 치유되는 날, 문제 있는 자가 해결 받고 공허하고 아픔의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는 날, 그래서 아기 예수 때문에 모두가 즐거워하는 날 모두가 기쁜 날이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엎드려 경배하는 삶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제사장이나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까? 엎드려 경배한 동방박사들입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상반절에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누가 말입니까? 동방박사들이지요. 왜 동방박사가 복이냐 하면 아브라함도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모세도 보지 못했는데 이 분들이 본 것입니다. 그 시대 제사장들을 포함해서 이 소식을 믿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성탄절은 온 인류가 복이 있는 날입니다. 이 메시지를 듣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복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듣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무엇인지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방박사들처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경배하는 삶이 된다면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복된 날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11 하반절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그냥 오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황금, 유향, 몰약입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황금은 예수님은 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황은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다 몰약은 예수님은 구주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몰약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말입니다.
역대상 16장 29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예물을 가지고 왔지요. 성탄절이라 좀 특별하게 신경을 쓰서 가지고 왔습니까? 어찌 성탄절뿐이겠습니까? 예물의 자세가 얼마나 많이 넣었느냐 보다 이 예물에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왕시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고백이 묻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주셨는데 물 한 방울이라도 다 주셨는데 우리의 예물은 거기에 비해 너무 인색하지 않느냐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재산 다 바쳐도 모자랍니다. 예물은 신앙고백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내가 함께 동참한다는 마음에서 예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돈은 누구나 있는데 조금 있고 많이 있고 차이지, 성탄절에 무슨 목적으로 씁니까? 선물사고 술 마시고 외식하고 그런데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는 삶이 산다는 차원에서 복입니다. 엎드려 진정으로 예수님을 높이는 날, 그저 흥청망청하는 날이 아니라 진정으로 경배하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함께 찬양합시다. 오늘 오후예배도 기관별 찬양예배로 드려지는데 많이 참석해서 하나님께 경배의 찬양을 드리시길 원합니다. 성탄절이 되면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케롤송이 많이 들립니다. 스님도 그 날은 케롤송을 부른다는 말도 하던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는 케롤송이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재미위주로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어떻게 찬양이 될 수 있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언어로 드리는 것입니다. 노래는 여러 종류가 많습니다. 그런데 찬양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왜요 찬양만이 천국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못하는 사람이 불러도 은혜가 됩니다. 이 땅의 언어가 아니고 신앙고백의 천국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고 잘 불렸다 못 불렀다 점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흥미위주로 만든 케롱송이 성탄 케롤송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성탄절은 사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아기예수를 찬양하는 날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선포되었기에 우리는 모두가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찬양은 자격이 있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이나 노래 잘하는 사람들의 전용물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기쁨으로 찬양하며 주님을 높이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하다못해 진급을 해도 대학에 합격을 해도 모든 식구들이 다 기쁜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이 기쁨의 소식에 누구나 다 찬양으로 보답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좋은 소식이면 천군천사들이 찬양을 했을까요? 눅 2:13-14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찬양은 기도요 고백이요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일뿐만 아니라 찬양을 기뻐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 가니까 예배와 찬양뿐이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높여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될 것 중에 하나가 찬양으로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찬양으로 가정을 지키고 찬양으로 교회가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으로 기쁜 소식을 알리는 귀한 신앙적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는 이상하게 성탄절이 주일이고 12월 마지막 주일인 송년주일입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 또한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기예수 탄생과 12월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귀한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바뀌지 말아야 될 것, 놓치지 말아야 될 것, 소홀히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빼놓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프로그램이 좋아도 예수그리스도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거지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합니다. 성령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을 성령이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중심이 되면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고 성령이 역사하면 많은 은혜가 넘쳐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사람의 생각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소리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소리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말씀중심으로 모이고 말씀중심으로 헌신하고 돕고 위하고 귀하게 여기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희교회가 2006년도는 오직 예수중심의 예배, 예수중심의 사업, 예수중심의 삶을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2005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성전건축에 박차를 가하고 거기에 진을 다 빼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통해서 많은 체험들이 있습니다.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결국 지하주차장을 파지 못했는데 어쩌면 지하주차장을 파지 않은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지하주차장을 물이 세고 관리도 어렵고 또 지하에 잘 주차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주민 몇 분이 저희교회 공사차량 진입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두 곳이나 걸어 놓았을 때 저희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회손 될 뿐만 아니라 전도에도 굉장히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저희교회 공사차량이 그들이 반대하는 길로 한 번도 간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동사무소 직원이 지역을 돌면서 피해 주민을 찾았는데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교회는 불법을 행한 일이 없었는데 한 분이 주동이 되어 걸어놓은 현수막은 불법이었습니다. 참 억울한 상황이여서 더 분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들이 잘 참아 주었고 이 계기가 또 성도들이 기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악한 일을 통해서 선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다는 것 잘 아시지요. 주민들이 불법현수막을 철거하라는 서명을 지역주민 33명이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공사를 찬성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역주민 80%이상이 찬성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계기로 인해 교회가 큰 문제없이 건축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한 분이 계속 구청이다, 경찰서다, 시청이다, 신문기자실로 투서를 넣고 민원을 제기하고 끊임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우리교회의 불법이나 지역주민들의 감정을 유발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인내하고 기도하고 어쩌면 그 반대하시는 분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고 염려하고 이런 어려움이 있었기에 주님이 얼마나 저희교회를 사랑하고 계신지도 동시에 깨닫게 됩니다. 저번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주일에 일정을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굳이 일을 해야 된다는 고집으로 주일 일을 하니까 한 주를 일 못하게 만드시는 것을 볼 때 일을 시작하고 끝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국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따르는 훈련이었고 이 훈련을 잘 감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제 2006년도는 새 성전에서 귀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새해에 새롭게 출발하는 신앙생활이 새 성전에서 시작됩니다. 새 성전에서 신앙생활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어떤 더 큰 물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심과 우리를 위해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믿음의 기초가 되어 오직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번 성탄절이 그냥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과 평화를 위해 오신 날, 년 중 행사로 보지 마시고 이 날만은 양로원이나 불우한 이웃에게 무엇인가 하는 그런 해로 여기지 마시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웃에 심어나가는 그런 헌신과 각오가 새롭게 다져지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성탄 문화를 새롭게 심어나갈 때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상업화나 구제정도의 일로 여기지 마시고 구원의 문제로 받아 들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는 것이라’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구원의 문제란 말이지요.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우리끼리 관계가 아닙니다. 성도와 서로 축하하고 즐기고 하는 우리끼리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와 주님의 관계에서 약속을 이루어야할 사명을 인식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상명령을 하신 것이지요.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루라’ 이것을 되새기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성탄절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사명을 새롭게 고취시키는 성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