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숙 대표는 1993년에 알마티로 이주해와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정착에 성공한 초기 이주민 중 한 분이다. 그리고 한인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방찬영 회장(1,2,3대)에 뒤이어 한인회장(4대)을 맡아 오늘날 카자흐스탄 한인사회의 초석을 닦은 분이기도 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체육대회 때 박 대표가 부인 송기화 여사와 함께 운동장 한구석에 가마솥단지를 여러 개 걸어놓고 국을 끓여 교민들에게 나눠주던 모습을 이야기하곤 한다.
이제 막 고희를 넘긴 박화숙 대표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업체인 실로암 온천을 찾았다.
- 카자흐스탄이란 나라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던 시절에 이곳으로 이주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는지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인 1991년, 모스크바를 경유해 이곳 알마티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활동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91년과 92년에 방학 기간을 이용해 이곳으로 와 선교비와 선교 물품을 전달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
그때 알마티가 제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밤낮없이 일에 쫓겨 살았던 저로서는 이곳의 삶이 여유롭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물가가 싸서 좋았습니다. 당시 월 200불 정도면 저희 네 식구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평안하게 살 수 있으리란 기대로 1993년 10월, 살 집도 구해놓지 않은 채 무작정 알마티로 옮겨왔습니다.
물론 전혀 계산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퇴직금으로 받은 게 있는데, 이 돈으로 중고차 두 대를 사서 이곳에다 팔면 이익금으로 몇 년은 수입 없어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면 그 몇 년 안에 현지사회에 적응하여 살길을 찾아보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고차 갖다 파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시작부터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만.”
- 카자흐스탄 최초 한국 상점인 ‘두레’로 성공하셨는데, 그때 잘 될 것이라 예상하셨는지요?
“아니요. 먹고 살길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가게를 연 겁니다. 처음엔 품목도 몇 안 되고 수량도 적어 상점이라고도 할 수 없었어요. 이삿짐 꾸려올 때 좀 여유 있게 가져온 물품들을 조그만 책꽂이 하나에 쌓아두고 판 거예요. 한국 상품이 처음이라 신기하게 여긴 손님들이 찾아오긴 했지만 워낙 규모가 작아 수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집을 팔아 물품을 들여왔어요. 그런데 생각만큼 금방 팔리지가 않아 재고가 쌓이고, 결국 유통기간이 지나 내버렸던 게 부지기수입니다. 오히려 빚만 더 늘어났지요.
그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빚지곤 살 수 없잖아요?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해보려 했어요. 제 집사람은 지금 이곳 ‘실로암’ 근처까지 멀리 나와 배추농사를 혼자 지었습니다. 그때 너무 고생해 손이 다 휘었지요.
저는 저대로 별짓을 다했습니다. 한번은 양파 농사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기에,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라는 지역 밭 60ha를 빌려 씨를 뿌렸습니다. 18만 평이에요. 웬만한 비행장 만했어요. 농사는 잘됐습니다. 3,000톤의 양파를 수확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애초에 양파 농사를 권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던 건지 아니면 제가 운이 없었기 때문인지, 예전엔 농사를 지으면 판매상들이 트럭을 가져와 돈 주고 실어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제가 직접 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3,000톤의 양파를 실어가려면 도대체 트럭이 몇 대나 필요하겠어요? 빚을 내어 겨우 씨앗을 사고 일꾼들 품삯을 줬는데, 도저히 운송료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200톤만 화물열차 4량에 실어 러시아로 보내고, 나머진 밭에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러시아에 보낸 200톤의 양파 대금도 결국엔 한 푼도 받지 못했고요.
또 한 번은 배에다 전대 두르고 우스까메노고르스크에 녹용을 사러 간적도 있는데, 그 얘긴 길게 안할게요. 나중에 얘길 들으니까 그때 전대 뺏기고 목숨 잃지 않은 것만 해도 천행이라네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토록 위험한 일인 줄 알았다고 해도 녹용 사러 갔을 거예요. 그만큼 절박했었습니다.”
- 상점에서 팔 물건들은 어떻게 들여왔습니까? 당시 통관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기준도 엉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번 컨테이너에 실어 통관하셨나요?
“그건 한참 나중의 일이고요. 초창기엔 주로 보따리 짐으로 싸서 직접 손에 들고 비행기를 탔지요. 그땐 이 나라와 정규 항공노선이 없을 때라 모두들 그라프로 전세기를 이용했습니다. 화물로 부쳐도 되었지만, 그 돈 아끼느라 손에 들고 탔던 거죠.
당시는 인천공항이 아니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가 떴는데, 버스를 타고 비행기 앞까지 가서 트랩을 올라가야만 했어요. 두 손으로 들 수 있는 최대한으로 짐을 쌌으니 그걸 들고 트랩을 올라가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두 팔이 빠지지 않는 게 다행이었죠. 게다가 손을 들고 타는 짐도 무게 제한이 있어 들키지 않으려고 전혀 힘이 안 드는 척 표정 관리까지 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그때 그라프로 전세기 운항 책임자가 나중에 이곳 알마티에서 그라프로 사장을 지내셨던 고남수 사장님이셨어요. 그분이 무게 초과인 걸 알면서도 어려운 사정을 알기에 매번 눈감아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트랩 아래로 내려와 ‘뭐가 이렇게 무거워’ 하시면서 짐을 함께 들어 올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매일 하루 빨리 쾌차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초창기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셨는데, 그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매사 힘들었지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몇 주씩 집을 자주 비워야했던 겁니다. 물건 해오려 한국에 들어가든지 녹용 사러 우스까메고르스크에 가든지 집을 비워야 하는데, 그때만 해도 치안이 엉망이었잖아요? 게다가 두레 자리가 아주 외진 곳이었어요. 여기저기서 교민들이 강도를 당했다는 얘길 듣고 있는데, 담벼락도 다 쓰러져가고 창문도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오두막에 집사람과 어린 두 딸을 남겨두자니 도저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아 미칠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오금이 저립니다.”
- 결국 ‘두레’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참으로 말하기 불편하고 미안하기도 한데, 1997년 IMF사태가 저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환율 폭등으로 그 차이만큼 이윤이 늘어났던 거지요. 그때 빚도 다 갚고 지금 하고 있는 온천도 한번 해볼까 엄두라도 낼 수 있었지요.”
- 한인회 창립을 주도하셨고, 4대 한인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한인회 창립과정과 초기 한인회 운영에 있어 특별히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주도했다는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당시 몇 분이 좋은 취지로 한번 해보자 해서 열심히 따랐을 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인회가 성대하게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멤버들이 정말로 헌신적으로 애를 쓰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방찬영 박사라는 특출한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앞에 나서진 않으시지만 그분의 음덕이 우리 한인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고희를 넘기셨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보낼 생각은 없으십니까?
“아니요. 여기서 계속 살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일로 한국에 가끔 가보는데, 이것저것 다 빡빡하고 정신이 없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몰라도, 그래도 여기가 여러모로 여유가 있고 살기 편한 것 같아요. 서울에 나가 사는 제 아이들도 들어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초기에 이주해 오신 분으로서 지금 살고 계시는 교민들이나 이곳으로 이주해 오려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여기 교민 분들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말씀드릴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경험상 얘기하라 하신다면, 집이든 가게든 가급적 임대하지 말고 초라해도 자기소유로 시작하시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보면 남는 것은 집이나 가게거든요. 또 말이 안 되니까 통역을 통해 사업을 주로 하시는데,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저도 겪었고 주변 분들에게서 종종 보게 됩니다. 힘들어도 말부터 배우는 게 우선이고, 그렇지 않다면 매사 단단히 점검하시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부인 송기화 여사가 점심상을 차린다고 들어왔다. 박화숙 대표가 부인의 손을 잡아 끌어 옆에 앉히곤 젖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저는 실패만 거듭했지 해놓은 게 없습니다. 그나마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일구고 사는 것은 전적으로 이 사람의 이 거친 손 때문입니다.”
박 영 식 (한인신문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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