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18. 주일예배 설교(사도행전 강해 43)
사도행전 27장 1-2절
우리, 동행(同行)
■ 지난 주 설교 본문은 25장과 26장, 자그만치 두 장이었습니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절로 본문을 정했습니다. 아주 적게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적은 본문을 택했을까요? 혹시 지난번처럼 이렇게 읽어놓고는 ‘오늘 본문은 27장 전체입니다’라든가, ‘오늘 본문은 27장과 28장입니다’라고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27장을 본문으로 정하고 28장까지 묵상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27장 1절과 2절에서 발견한 한 단어 때문에 설교 본문은 여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그 한 단어 때문에 오늘의 설교는 강해/본문설교가 아니라 ‘제목설교’의 형식을 취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 단어는 ‘우리’(We)입니다. 이 ‘우리’라는 단어가 오늘 설교의 중심이자 전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우리’를 생각함으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 ‘우리’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서 27장 1절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이미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발견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무려 139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라는 단어가 우리가 읽은 27장 1절과 같은 용도로 쓰는 것은 한정되어 있고, 모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여하튼 설교자는 이 ‘우리’라는 단어를 마치 이곳에 처음 나타난 단어인 듯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이 바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몇 개의 오해가 있는 데 그 중 하나를 풀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27장과 28장의 여정에 동행한 ‘우리’라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너무 좋아서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를 본격적으로 풀어 설명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정리해야합니다. 자, ‘우리’는 누구일까요? 사도행전의 저자입니다. 사도행전을 쓰도록 성령께서 임무를 맡긴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사 ‘누가’입니다. 의사 누가가 27장 1절의 우리입니다. 바울과 함께 로마(이달리야)로 가는 배를 탄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누가가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두 가지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16:8-10인데 아시아에 목표를 두고 전도하려는 바울에게 밤에 환상이 나타납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선교 방향을 아시아에서 유럽을 돌리게 됩니다. 이때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이 누가였습니다.(16:10)
16장 10절 이전에 표기되는 ‘우리’라는 단어는 누가와 연결된 단어가 아니었거나, 누가와 연결되었어도 바울과 누가가 연결된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16:10절에는 누가와 바울이 연결된 ‘우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우리’에 누가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행전 전체에서 누가라는 이름이 명시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16:10절의 ‘우리’는 ‘바울과 누가, 그리고 디모데’ 등을 일컫는 것입니다.(16:1-5) 이 16장 즈음에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선교여행에 동해하는 동지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의 질병과 연관 된 해석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보다시피,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능 도중 그리스도를 만나 실명 위기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주님의 은혜로 실명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끝내 안질(眼疾)로 고생했습니다. 이 안질로 인해 고생하다 의사인 누가를 만나 도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계기로 누가에게 복음을 전했고, 누가는 기꺼이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또한 바울의 제자로써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선교동역자로서 바울의 이 로마행에도 동행한 것입니다.
설명 드린 이 두 가지는 다른 설명들에 비해 신빙성이 더 있지만, 바울의 질병인 안질 치료와 연관한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어쩌면 이 두 개의 설명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누가가 바울의 고난의 길에 동역자/동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오늘의 설교가 ‘우리’라는 단어에 집중해서 전개되는 이유 두 가지를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것을 풀어볼까요?
1. 우리에게는 바울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는데, 그 중 그가 선교를 주도했다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그리고 그의 서신을 살펴볼 때, 그가 선교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교를 그가 주도했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그가 주도했던 것은 율법의 열심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생과 일에 주도적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사역에 중심에는 있었지만 주도권은 언제나 성령님이 갖고 계셨습니다.
다메섹에서 실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구출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고 지도를 받는 아나니아 덕이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선교현장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만나고, 수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성령님의 이끌림은 받아서 수행된 일들이었습니다. 만사에 그의 인생과 일을 주도하시는 것은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성령님의 파트너로, 동지들과의 파트너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라고 하는 표현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도행전 20장,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헤어지며 했던 고별설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20장 22-24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파트너로서 일을 했지, 주도자로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은 ‘우리’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주도하시고, 성령님과 바울과 누가와 디모데와 바나바와 마가 등등과 함께 하는 ‘우리’로서의 동역이었고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로마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그를 로마로 몰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어땠을까요? 바울처럼 로마로 가야하는 사명이 있는 것일까요? 성령께서 누가도 로마로 몰고 가신 것일까요?
물론 큰 그림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님의 이끄심이 있었겠지만, 누가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바울과는 달리 필연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안 가도 사명/순종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갔습니다. 바울과 끝까지 갔습니다. 누가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의리(義理)였습니다.
바울이 죽을 때까지 23년 어간을 동행한 누가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열정이 크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에너지에는 고저(高低)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운도, 열심도 때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의리입니다. 믿음이 바탕이 된 의리가 ‘우리’를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아름다운 동행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누가 사이가 그랬습니다.
■ ‘우리’.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참으로 여러 차례 글쓰기를 멈춰야 했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감사의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전교회 안에서 참으로 많은 분들을 만났고, 헤어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셨다 가셨습니다. 여러분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입니다. 헤어짐과 떠남의 사연은 숫자만큼 다양했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해 아래서 살자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아팠습니다. 헤어질 때마다 아팠습니다. 금번 이사 과정에서도 또 몇 분과 헤어졌기에 저는 지금 많이 아픕니다. 물론 저의 못남과 무능함 때문인 줄 알고는 있지만 마음은 늘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쯤, 집사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저의 아픔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 아니냐는 말씀에 위로와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끊었던 약을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마음의 동굴에서 나오고 있는 저에 대해 용감하게 고백하는 이유는 여러분과 저의 ‘우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의 부르심 앞에 함께하게 된 ‘우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로마’로 가는 배에 ‘우리’는 승선하려고 합니다. 더욱이 바울의 이 고백,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로마)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이 고백에 동의해야 할 시점에 ‘우리’가 함께 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함께 결박과 환난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이 ‘로마’행 배에 오르시겠습니까? 끝까지 함께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 살아주시겠습니까?
훗날 이 거룩한 비전에 함께 했다는 사실이 거룩한 자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영원히 ‘우리’ 목사님이 되고, 여러분이 제게 영원히 ‘우리’ 성도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