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채권추심 통지서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맥이 탁 풀렸다.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가슴에서는 분개심이 끓어올랐다. 이런 날강도 같은 짓이라니.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야 해명이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닌가. 완전히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나 다름이 없었다.
걸려온 전화는 생판 알지도 못하는 녹용구입대금이라 했다. 그것도 적잖이 307,700원이나 되었다. 전화상으로 일방적인 고지내용이 그러하였다.
. 내가 언제 이것을 구입을 했다고 대금을 청구한단 말인가. 어이가 없다. 터무니없는 전화는 경기도 한 사슴농장이라는 곳에서 걸려왔다. 아니, 그것은 명확하지는 않다. 그곳이라고 했기에 그리 엄급한 것일 뿐이다.
걸려온 전화는 처음부터 수상쩍었다. 대번에 나더러 언제 단체 관광을 다녀가지 않았느냐고 했다. 자기들은 관련 회사로부터 채권수임요청을 받았을 뿐이라고 토를 달았다. 뜸금 없는 일이었다. 설명은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첫 통지서는 어제 받았다. 그렇지만 일과 후여서 그때는 따질 수가 없었다. 나중에 전화를 거니 돌아온 대답이 맹랑했다. 당연히 통화시간이 길어지며 내가 그것을 구입한 사실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자 그쪽에서는 자세한 내막까지야 자기들은 알바 아니라고 것이다. 돈을 받아내는 것만이 자기들 업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둑이 매를 든 격으로 오히려 기세등등했다. 갚아야 할 돈을 갚지 않으니 당연히 독촉한 것이 아니냐고 윽박을 질렀다. 그래서 나는 마냥 말씨름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구차하지만 전직신분을 고지했다. 형사생활을 십 수 년 간 해왔던 사람으로 그런 일을 수 없이 봐왔는데, 내가 그런 물건을 사겠으며 그런 시비에 휘둘릴 어리석은 사람일 것 같냐며 말했다.
그러니 태도가 확 달라졌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알겠다’며 잘못된 것이 드러나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 경우와는 다르지만 내 주변에서는 근자에 전화사기(보이스피싱)로 곤욕을 치른 사람이 몇 명이 있다. 한사람은 금감원직원을 사칭한 사람으로부터 예금한 통장에 문제가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며 비밀번호를 요구하자 알려준 바람에 적잖은 돈을 날렸다. 또 한사람은 다행히 조치를 빨리 하는 바람에 통장에서 돈이 인출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을 보면서 나는 나하고는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고 보니 나만 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상대방이 악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범행의 대상을 삼으면 어쩔 수 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는 어찌 보면 나의 불찰도 없지 않다. 써놓은 글을 홍보한답시고 인터넷에 올려놓아 신상정보를 노출시킨 게 결과적으로 범행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못된 짓을 했을까. 그 사람은 혹시 서울 당산동에 친인척이 살고 있지 않느냐고 했는데 명의 도용자를 아는 것일까.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곳에 거주하는 친인척은 없다. 혹시 산다고 하더라도 사유만은 밝혔을 것이다. 그는 또 사슴농장을 들먹이며 그곳을 가지 않았냐고 했다. 그 점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넘겨짚어서 하는 말로 이해해 버렸다. 그런 이유가 있다. 통지서 내용을 읽어보니 ‘이미 상환하신 경우에는 본 우편물을 폐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니면 말고’식의 무작위 통지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구지 그런 문구까지 써놓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무고한 사람이 강력 항의할 것에 대비하여 은근슬쩍 한발 물러서려는 꼼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받아들고 속앓이를 하였다. 우편물이 도착한날 바로 전화를 했지만 토요일이라는 이유로 다음에 전화해 줄 것을 미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음 전화를 할 때까지 이틀을 보낸 것이다.
그나저나 요즘 왠 사기사건이 판을 치는 것일까. 최근 들어 개인이 국가기관인 선관위를 무력화 시키는 디도스 공격을 자행하고, 국회의원 비서관이 호가호위하며 금품을 받아 챙기는 파렴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인사는 친인척에게 고급정보를 흘려서 주가조작을 돕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그런 틈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사기사건은 대부분 상대방이 미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혼을 빼놓은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쪽으로 신경을 집중시켜 놓고 다음 쪽에서 범행을 자행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바람잡이 구실을 따로 할 필요도 없이, 떠들썩하게 뉴스를 장식하는 비리사건들이 어수선하게 사회분위기를 어지럽히고 장식을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그러니 사기범죄가 활개를 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그래저래 협박통지서와 다름없는 황당한 채권독촉을 받아 든 기분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다행히 내가 법을 좀 아는 사람이니 알아서 대처를 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얼마나 전전긍긍 했을까. 생각할수록 참 무섭고 피곤한 세상이다. (2012)
첫댓글 이 사람들은 정녕 선생님의 전직을 모르고 까불다가 앗 뜨거! 하며 주저 앉았을 겁니다.
다분히 사람을 봐가며 상대하는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당한 분은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을 찾아 조언을 구해야 할것 같습니다.
경찰출신한테도 이정도니 일반인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선량한 사람들 상대로 사기를 많이 쳤을 겁니다. 이런 놈들은 끝까지 추적해서 일망타진해야 하는데 수법이 날로 교묘해지니 골치덩어리입니다.
막상 말로만 듣던 협박을 당하니 어이도 없고 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신분을 밝히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더니 그후로 조용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