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수승대는 위천면 황산리에 있다. 이곳에는 약 천년전 고려 문종때 송나라에서 건너와 참지정사(문화부에 소속된 종2품벼슬)를 지낸 신수(愼修)라는 분이 식읍을 받음으로서 이곳이 거창 愼씨의 본고장이 되었다.
원래 愼씨는 경남 진주에 세거 하였으나 조선 중기 에 이곳으로 정착하였다.
중종때 요수(樂水) 신권(愼權)선생이 구연서당을 건립하고 학문울 가르쳤다.
그 후 신권의 5대손 황고 신수이(愼守彛)대에 이르러 그와 친교가 깊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석)
이 요수(樂水) 신권(愼權)를 기리기 위하여 바위에 시(詩)를 새겨 놓았다.
羅濟傳名愁送臺 라제에서 전한이름 수송대요
樂水改名龜巖臺 요수 개명한 이름은 암구대라
退溪錫名搜勝帶 퇴계가 내린 이름은 수승대요
遺風誦名樂水臺 유풍으로 읊은 이름은 요수대이라.
거창 신씨의 비극은 성종때 신승선(愼承善)(1436-1502)이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고 세종임금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사위가 되고 거창부원군에 봉군이 되면서 그의 딸이 연산군의 비가 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영의정까지 오르고 많은 토지를 하사 받았으나 연산군이 즉위하자 벼슬과 토지를 모두 사양하였다.
그 의 아들이 셋이였는데 신수근(愼守勤), 신수겸(愼守謙), 신수영(愼守英)3형제였는데 맞아들 신수근의 딸이 중종의 비 단경왕후(端敬王后)가 된다.
2대에 걸쳐 두명의 왕비가 탄생하였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 될 줄 어찌 짐작이야 했겠는가?
연산군은 재위기간(1494-1506)동안 폐정과 향락으로 조정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벼슬에 있는 관료들의 토지를 몰수할려고 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중종 반정이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박원종,류순정등이 반정을 일으켰다. 특히 박원종은 연산군의 숙모가 되는 월성대군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유모인데 연산군이 이 박씨부인 숙모를 능욕해 궁중에 소문이 자자 하자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박씨부인에게 머리를 깎고 절로 보내 결국 자결하고 말았는데 그 동생이 박원종이다. 그래서 중종반정을 개인적으로 누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으킨 반정이라고도 한다.
이 때 박원종은 신수근을 찾아가 진성대군 (후일 중종임금)을 옹립할려고 하는데" 누님을 택할것인가,딸을 택할 것인가' 즉 사위인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옹립하는데 같은 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이였다.
신수근이 이를 거절하자 박원종은 사람을 시켜 신수근을 수각교에서 격살(擊殺)하고 말았다.
반정이 성공하자 연산군비 거창군부인은 당연히 폐서인이 되었고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도 8일 만에 폐서인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조정에서는 단종비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와 연산군부인 신씨, 단경왕후 신씨 3명이 폐서인으로 동시대를 살게된 비극이 생겼다.
그 후 김정,박상을 비롯하여 많은 선비들이 억울한 단경왕후만은 복위시킬려고 노력을 많이 하였으나이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고 단경왕후는 한 많은 생을 보내며 왕비의 한을 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가창군 위천면 위천이 흐르는 수승대 물위에 이들 아름다운 왕비의 비애의 숨결이 들리는 것 같다.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가?' 라며 목이 아린 독백을 속삭이면서 오늘도 흐르고 있다.
첫댓글 사연 잘 읽고 숫송대 감상 잘 하였네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여기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 당시 힘이 약한 백제의 사신은 다시 온전하게 살아 귀국할지 보장이 안되는 처지..... 그래서 이곳이 '愁送臺'라 불렀는데,
후일 퇴계선생께서 이곳을 둘러보고 아름다운 풍광에 어울리지 않은 이름이라 '搜勝帶 '라 고쳐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