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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일의 고적 탐방 해설 2014.11.20 진사 19 전국동기회 현장견학 *토함산, *석굴암, *반월성, *첨성대 --------------------------------------------------------------------------
토함산(吐含山) 경주 불국사 주차장에서 토함산 정상까지는 7.5Km이다. 도로가 나있으므로 버스를 타고 석굴암 주차장까지 99구비의 산길을 돌아 올라간다. 석굴암 주차장에 하차하면, 석굴암 일주문 앞에서 해돋이를 관람할 수 있지만, 보다 장관의 일출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매표소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토함산(吐含山)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 등산은 20분 남짓, 새벽 어둠속에 윤곽을 드러내는 일망무제의 산자락과 동해바다에서 치솟는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토함산(745m)은 <경주국립공원> 구역 8개소 가운데 한 부분인 <토함지구>에 해당한다. 토함산에는 주로 소나무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토함산에는 <성화채화지>가 있다. 토함산을 신성시 하는 것은 <신라 5악(新羅五岳)>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산악숭배사상(山岳崇拜思想)을 갖고 있었기에 매년 10월 상순이 되면 각 고을 수령 책임하에 제천(祭天)행사를 올렸는데, ①내림(奈林), 골화(骨火), 혈례(穴禮)의 3산에는 대사(大祀)를 올렸고, ②다음 열거하는 오악(五岳)에서는 중사(中祀)를 올렸으며, ③나머지 전국 25개 명산을 뽑아 소사(小祀)를 올렸다. 토함산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신라의 오악(五岳)>이기에 예부터 신성시 하는 것이다.
<신라의 5악(新羅五岳)>
◯중앙 ☞ 父岳(대구 팔공산) ◯동악 ☞ 경주 토함산 ◯서악 ☞ 공주 계룡산 ◯남악 ☞ 지리산(노고단) ◯북악 ☞ 태백산
토함산(745m)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경주의 진산(鎭山)이다. 산 이름을 <토함산(吐含山)>이라 부르는 것은, 토함산에서 나타난 석탈해(昔脫解)를 한문으로 <토해(吐解)>라 부르기 때문에 그 발음을 따서 <토함산(吐含山)>이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또다른 설로는, 동해의 구름과 안개를 들여 마셨다가 토(吐)해내는 산이라 하여 <토함산(吐含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토함산은 신라 당시부터 국방상(國防上) 중요한 산으로 인식되었다. 토함산 넘어 동해에 대왕암(大王岩)이 있는데, 이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내가 죽어서 동해의 용왕(龍王)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을 터이니 수중릉을 만들어 달라.>고 유언함에 따라 대왕암 바위 한가운데 석곽을 안장하고 큰 거북돌로 눌러 놓았다는 설이 있다. 이는 황수영박사의 스승 고유섭선생의 설이다. 한 때 사실이다, 아니다,로 논란이 벌어져 거북돌을 들어내고 석함이 있는지 조사코자 하였으나 선현의 묘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는 여론에 따라 그만두었다.
대왕암에서 조금 들어온 뭍에 감은사지(感恩寺址)가 있는데, 법당 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장치되어 있다. 이는 용이 된 문무대왕이 바닷물을 따라 감은사 법당에 드나들며 설법을 듣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그렇게 만들었다 한다. 감은사 법당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거탑(巨塔) 2기를 세워 왜구들이 상륙하면 엄청난 탑 크기에 압도 당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2기의 탑중 동탑에서 보련형(寶蓮形)의 사리기(舍利器)가 나왔고, 서탑에서는 수레형 사리기가 나왔다.
토함산이 보다 유명한 것은, 국민관광지로 이름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 이 산에 있기 때문이다. 토함산은 거의 대부분 소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고, 북서쪽으로 추령(楸嶺)을 넘으면 기림사, 감은사지, 대왕암이 전개되고, 남쪽으로는 동산령(東山嶺)이 있어 울산방면으로 연결된다.
석굴암(石窟庵) 석굴암에서 일출이 잘 보이는 곳은 석굴암 일주문 근방이다. 석굴암(石窟庵)은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UnescoWorld Heritage)> 으로 등재되어 있다. 석굴 속에 좌정하여 천년 삼매에 잠기신 <석가모니 본존불(釋迦牟尼 本尊佛)>을 비롯하여 긴 옷자락을 늘어뜨린 섬세한 의상의 <10대 보살상>은 그 어떤 미학적인 안목, 미묘한 화술을 지닌 학자라 할지라도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걸작이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혜공왕11년(775)에 이르는 25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이룩된 것으로 전해오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건립하였고,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 이세부모>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모량리(浮雲村)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이 궁색하여 살길이 막막하여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주기에 그 밭을 경작하여 연명하였다. 어느 때 고승 점개(漸開)스님이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번뇌를 끊기 위해 철륜, 석륜 등 6륜을 세우는 법회)를 베풀고자 시주를 받으러 동냥을 다녔는데 복안의 집에 이르러 보시할 것을 권하니, 복안은 베 50필을 시주했다. 점개스님이 주문을 외워 축원하기를, <단월(檀越,신도)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지켜주실 것이며, 한가지를 보시하면 일만 배를 얻게될 터이니 안락하고 수명장수하게 될지어다.> 하고 빌어주었다.
이 때 대성이 이 축원을 엿듣고 그날 밤 본가에 가서 어머니께 여쭙기를, <소자가 오늘 문간에 오신 스님의 축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0,000배를 얻는다 합니다. 생각컨대 저는 숙선(宿善,지난세상에 착한일 한 것)이 없어 지금 와서 곤궁한 것입니다.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구 차할 것입니다. 제가 머슴살이로 얻은 밭 90평을 법회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 (應報)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 어머니도 <좋은 일이다. 그리하자.>함으로 이에 밭을 점개스님에게 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성이 아파서 세상을 떠났다. 이날 밤 나라의 정승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과연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시간이 일치했다. 김문량의 아내가 이로부터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더니 7일 만에 폈는데 <大城> 두 글자를 새긴 금간자(金簡子,윷짝 같은 점치는 막대)가 있으므로 이름을 <大城>이라 하고 그 홀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와서 함께 봉양했다.
대성이 점차 자라자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는 산 밑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귀신 모습으로 나타나 <네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 먹겠노라.>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달라고 빌었더니, 곰귀신은,<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주면 과보를 면할 수도 있다.> 함으로 대성은 그리 하겠다 약속했다. 꿈을 깨자 대성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그 후로는 들판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 지금 불국사 뒤편 마동 장수골에 절터가 있음)를 세워주었다. 대성은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마음이 더욱 더해 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김문량내외)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세워 신림(神琳),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하여 각각 주석케 하였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하여 부모의 양육한 수고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또한 드문 일었다. 착한 보시의 영험을 가히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석불사(石佛寺, 지금의 석굴암)를 조성할 때 장차 석불을 조성하고자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龕盖, 천장)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이 고개 이름을 향령(香嶺)이라 한다. 불국사의 운제(雲稊,돌쌓기)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기공(技工)이 동도(東都,경주)의 여러 절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옛 향전(鄕傳)에 기록된 것은 이상이다. 그러나 절 안(불국사)의 기록은 이와 같지 않다. <경덕왕 때 대상(大相) 대성(大城)이 천보 10년 신묘(辛卯)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왕 때를 거쳐 대력(大曆) 9년 甲寅12월 2일에 대성이 죽으니 나라에서 절을 완성시켰다. 처음에 유가교(瑜伽宗의 고승 항마(降魔)스님을 청해다가 이 절에 거주케 했고 이를 계승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고전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찬해 말한다.
牟梁春後施三畝 모량에 봄이 지나 세때기 밭을 보시하고 香嶺秋來獲萬金 향령에 가을이 오니 萬金의 황금 거두었네 萱室百年貪富貴 어머니는 백년 생에 빈과 부귀를 겪었는데 槐庭一夢去來今 재상은 한 꿈 사이에 두 세상을 오갔구나
석굴암보다 먼저 조성된 인도의 아잔타 석굴, 엘로라 석굴 등이 있어 그 영향을 받아 석굴암이 조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석굴암의 정교한 조각솜씨는 그들 인도의 석굴을 능가한다. 신라에 석굴암 같은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신라에 축적돼온 장인(匠人)스님들의 기술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조각을 맡은 장인스님들이 수행하는 자세로 불상을 조각하였기에 이 같은 명물 조각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광복 후 한국의 고유섭, 박종홍, 이태녕, 남천우, 강우방 박사 등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석굴암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졌다. 석굴암 본존불의 설계도형은 머리와 가슴, 좌대에 3개의 원을 그렸을 때 각각 그 접합점이 만나는 곳에서 마감을 하여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조각되어 있고, 석굴암 자체도 본존불을 옹위하며 하나의 이상 세계를 상징하도록 설계돼 있어 신라의 승려장인들이 원주율 <파이>와 <루트>의 값을 알고 설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석굴암 본존불이 한 때 대왕암(大王岩)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석되다가 남천우 박사에 의하여 東南東 30도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방향은 冬至 때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한다. 冬至는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로서 보통 1년의 마지막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1년의 마지막이 아니라 1년의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冬至날 해 뜨는 방향을 응시함으로서 과거와 미래가 아닌 영원한 현재에 상주(常住)하는 여여(如如)한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다 할 것이다. 토함산에서 바라보는 冬至날 해 뜨는 방향은 일본의 중심부인 東京(토오쿄), 大阪(오사까), 奈良(나라), 京都(교토) 등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왜 토함산 북쪽에 앉혀 한국의 내륙을 바라보게 하지 않고 일본을 바라보도록 했겠는가? 일본을 바라보게 하여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일본을 제압코저 하는 조상들의 예지(叡智)가 숨어 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석굴암이 <삼국유사> 아닌 다른 문헌에 나타나기로는, 지금부터 320년 전인 조선 숙종 때의 선비,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의 <산중일기>에서다. 정시한(丁時翰)은 조선 숙종 14년(1688) 5월 15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절 요사에서 대접을 잘 받고 스님을 따라 굴에 올라가 보았다. 석문 밖 양쪽에는 큰 돌에 각각 4 - 5구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교묘함이 마치 하늘이 이룬 것 같다. 石門은 돌을 다듬어 무지개 모양으로 한 후 그 안에 큰 石佛像이 좌정하고 계시는데 엄연히 살아 계시는 듯하다. 좌대(座臺)는 반듯하고 정교하기 그지없다. 굴 위의 덮개돌(穹窿)과 여러 돌들은 둥글고 반듯하게 엇물려 있어 하나도 기울어지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줄지어 시립(侍立)한 불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어 그 신기하고 괴이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라 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일제강점기시 일본의 예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1919년 6월, 일본잡지 <예술(藝術)>지에 발표한 <석불사의 조각에 관하여>라는 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석굴암 내부의 조각상은 자연미를 최대한 살림과 동시에 주도면밀한 균형과 조화로움으로 인간세상에서 풀 수 없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어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 하고 있다. 굴 입구 좌우에는 한 쌍의 용맹스러운 금강역사상(仁王像)을 조각 하였고, 좁은 통로에는 좌우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고 있다. 굴 안에 들어오면 벽면 좌우 둘레에 오른쪽에는 불자(拂子)와 금강저를 든 4보살상이, 왼쪽에는 불자(拂子)와 감로병(甘露甁)을 든 4보살상(문수,보현,지장,유마)이 눈 높이에 맞추어 석면(石面)으로 새겨져 있다. 이들 10대 제자상 조각은 깨달음의 내면의 깊이와 신비를 잘 나타낸 최고의 불교미술품으로, 일찍이 나는 이같은 불교작품을 본적이 없다, 조각품 하나하나는 고요함의 깊이이자 힘의 표현이다. 굴 깊숙이 본존불(本尊佛)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 앞에 다가서면 마음이 정숙(靜肅)해짐을 느끼며 우리로 하여금 부처님의 자비의 세계를 소생하게 한다. 그 얼굴에서 자비로움을 읽지 못하는 자 누가 있으랴! 그러므로 심일면관음상은 인류의 영원한 마음의 증좌(證佐)라고 보아진다.
연화문(蓮花문)이 새겨진 섬세한 좌대위에 결과부좌하고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계신 본존불(本尊佛)은 가슴을 편 부드러운 자태나, 인자하면서도 당당한 얼굴, 가늘게 치켜 뜬 가느다란 눈, 온화한 눈썹, 이마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도톰한 입술, 우뚝 선 콧날, 길게 늘어뜨린 귀를 갖고 있으며, 한손은 구부려 가슴 밑 무릎에 올려놓고 있고, 왼손은 발위에 그냥 드리워 놓고 있다. 이러한 수인(手印)을 항마촉지상(降魔觸地相)이라 하는데,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켜 마군(魔軍)을 제압하고 한 손은 평평하게 가져 마음의 적멸을 취한 상이기 때문이다.“ 라 하고 있다.
반월성(半月城) 반월성(半月城)은 신라의 초대 임금 박혁거세 임금 21년(BC 37)에 흙과 돌로 혼축(混築)했다고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있다. 성 둘레는 2,400m로서 반달같이 생겼다하여 반월성(半月城)이라 한다. 사적 제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말발굽처럼 돌아간 성지에는 현재 아무런 건물이 남아 있지 않고 바깥 경계선에는 숲이 빙 둘러 쳐진 가운데 내부는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그저 경주시민공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성지에는 그 옛날 화려한 궁궐이 있어서 신라 56代의 역대 왕이 992년 동안 이 성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족들의 정원인 <안압지>가 연결되어 있어 안압지까지 궁궐터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반월성의 석성(石城)은 5대 파사왕이 쌓았다고 한다. 최근에 반월성 앞 <모래내川>에서 ‘해자(垓字)’가 발견된 바 있다. ‘해자’란 적이 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판 인공 연못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성 근방에 신라의 재상 호공의 집이 있었는데 석탈해(昔脫解)가 욕심을 내어 이 집을 빼앗기 위하여 술책을 썼다. 머리 영리한 석탈해는 미리 녹슨 쇠붙이와 숯 찌꺼기를 재상집 근처에 파묻어 놓고, “이 집은 나의 선조들이 대장간을 하며 살던 집”이라고 우기며 관청에 송사(訟事)를 걸었다. 관에서 증거가 있으면 대라고 하자, 탈해는 땅을 파면 흔적이 나올 것이라 답했다. 땅을 팠더니 과연 쇠붙이와 숯이 나오므로 석탈해가 승소했다. 신라 2대 남해왕(AD 4 ∼23)이 석탈해가 영리한 사람인줄 알고 사위로 삼았고, 나중에 4대 탈해왕이 되었다 한다.(재위 57∼79)
첨성대(瞻星臺)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재위 중(632∼647)에 축조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서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의 위치는 경주시 인왕동이다.
첨성대는 그 용도가 무엇인지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①천문대로서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다. ②자오선(子午線)의 표준으로 세워놓은 곳이다(상부의 <井字石>이 지남철의 동서남북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③천문대의 상징물로 세워놓은 것이다, 등의 3설이 대두되고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 1개는 높이가 30Cm이다. 이런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첨성대를 완성했다. 이것은 음력 1년의 361일과 日數가 일치한다. 그리고 석단의 높이를 따지면, 모두 27단으로 되어 있고 최상부의 <井字石>까지 합치면, 28단이 된다. 이는 밤하늘의 기본 별자리 28首와 일치한다. 12단 위에 창문(3단높이)이 나 있는데 창문 위층도 12단이다. 이는 1년 12개월을 상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래 12와 위 12를 합치면 24로서 1년의 24절기와 일치한다.
돌창문은 正南을 향해 나 있어 춘분, 추분 때는 광선이 내부 밑바닥까지 비친다. 그러나 하지, 동지 때는 밑바닥에 광선이 비치지 않고 사라진다. 이로써 春夏秋冬이 뚜렷이 구분되도록 장치해 놓았다.
내부는, 창문 아래서부터 흙으로 채워져 있고, 창문가에 사다리를 기댄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천문대에 오르내렸음을 알 수 있다.
첨성대는 구조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사각형의 기단석 위에 넓적한 원형으로 쌓아 올라가다가 중간부분에서 폭을 줄여 잘록아지를 만들었으며 그 상부에 좁은 돌쌓기를 한 후, 최상단에는 우물井자 <井字石>을 걸쳐 놓았다. 이 정자석의 4변은 각각 지남철의 동서남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는 전체적으로 원형을 적절히 조정하고 사각형을 상단에 놓아 조형적으로 균형미와 안정감을 취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맨 위의 정자석(井字石) 1변의 길이는 기단부 사각형의 1/2 의 길이에 해당되어 더욱 안정감을 주고 있다.
첨성대가 도형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실례를 들어보자. 경남 합천 가야면 해인사 근방 모 동네에 <찜질방>이 하나 있다. 이 찜질방은 나무 때는 화덕을 <첨성대>형으로 만들어 놓고 있어 이채롭다. 이 첨성대형 화덕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지피면 숯불이 오래도록 남아 그 열기가 찜질방 밑 고래로 통하게 되어 있다.
불 때는 화부(火夫) 주인 말에 의하면, 화덕과 굴뚝을 <첨성대>형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800도가 넘는 열기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남녀 찜질방 2개에 열 전도(傳導)가 잘 될 뿐 아니라, 불이 잘 피어 연소가 잘 되며 숯을 만들어 그 숯을 뒤집어 주면 불이 오래도록 간다고 한다. 이로보아 <첨성대>형 화덕은 외모의 조형미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구조상 가장 과학적인 연소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첨성대는 무엇인가 천문에 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는 조상들의 지헤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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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 글은 동기 여러분께서 경주 오시기 전에 한번 읽어보고 오시라면서' jinsa19카페'에 올려 달라며 장경일 친구가 보내 온 글입니다.
장경일 친구 경주탐방자료 잘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