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그림과 함께 보는 담화談畵
대학의 커리큘럼이란 것이 서구적인 세계관의 반영이고, 서구적인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사주.풍수.한의학은 이해할 수 없는 매직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배제되다 보니 이들 3대 과목의 맥은 재야의 기인이나 달사들에 의하여 그 전승이 이루어졌다. 쉽게 말하면 변두리 인생들에 의하여 그 맥이 이어져 왔다고나 할까. (12)
조직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해 보니까 ‘인생사는 게 별것 아니다’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생계 수단도 되면서 자유롭게 공부도 병행할 수 있는 분야가 한의학이라고 여긴 것이다. (13)
그렇다면 근래 세 나라의 명리학 고수는 누구인가. 먼저 중국을 보자. 80년대 후반에 작고한 웨이첸리를 꼽을 수 있다. 대만의 장제스가 그를 아주 좋아했다. (15)
웨이첸리의 대표작은 『팔자촬요八字撮要』이다. 골방에 처박혀 있던 명.청대의 명리학 고전들을 꺼내서 20세기의 현실에 맞게 응용한 책이다. (17)
5년 전쯤 한국의 계룡산과 같은 분위기를 지닌 일본의 이코마 산을 간 적이 있다. 위치는 오사카과 나라의 중간쯤이다. (19)
아베 다이장은 현대 일본의 사주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중흥조이다. (20)
왜정 때 개성 일대에서 자자한 명성을 얻었던 구월산인九月山人 신승만. 그는 평양에 살았던 김씨의 사주를 보고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였다. “임진강 이북은 당시 오랑캐의 땅이 되니, 흙을 남쪽으로 옮겨라.” 예술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 문구는 45년에서 48년 사이에 해당하는 운세였다. 이북이 공산화되니까 땅을 팔아서 이남으로 옮기라는 뜻이었다. (25)
5.60년대 부산에서 유명했던 사주쟁이는 이남원이라는 사람이다. (25)
4.19 이후 서울에서 명성을 날렸던 술사가 전백인이다. 그 또한 함경도 출신이다. (26)
임진왜란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투가 진주성 싸움이었다. 그 슬프고도 처절했던 싸움의 대미를 장식한 죽음이 바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죽음이었다. (37)
논개보다 정확히 120년 후에 태어난 영조도 갑술.갑술.갑술.갑술이었다. 밑바닥 인생이었던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꼭 대기인 임금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드라마틱한 인물이 영조이다. (37)
논개가 태어난 고향은 전북 장수군 계내면 월강리 주촌 마을이다. 육십령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경상도 땅 함양이 나온다. (41)
13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생활이 어려워진 논개 모녀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당시 장수 현감으로 와 있던 최경회의 보호를 받게 된다. 처음에 논개는 최경회의 심부름꾼으로 있다가, 18세가 될 무렵에는 마침 자식이 없던 최경회의 소실로 들어가게 된다. 최경회는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로 있다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로 유명하다. 끝까지 싸우다가 같이 전사한 호남 출신의 최경회.김천일.고종후를 가리켜 흔히 ‘호남의 삼장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논개가 진주로 간 이유는 낭군인 최경회를 따라간 것이다. 논개는 원래 기생 신분이 아니었다. 낭군인 최경회가 왜병과의 싸움에서 죽자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결심한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한 다음에 진주성 공격의 선봉에 섰던 왜장 게아무라를 껴안고 강물에 뛰어든 것이다.(42)
식욕, 색욕, 수면욕이 인간의 3대 욕구라고 한다면, 미래욕은 그다음의 4대 욕구에 포함될 정도로 강력한 욕망이다. (45)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갑자기 동남풍을 일으킨 사건도 마찬가지다. 제갈공명이 제야에서 공부하면서 1년 365일의 일기 벼화를 관찰한 데이터를 수십 년 동안 축적하고 있었고, 이 데이터에 의해서 매년 그때쯤이면 바람이 방향을 바꿔 동남쪽에서 불어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제갈공명의 신묘한 기도발에 의해서 동남풍이 불어온 것이지만, 축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문제는 반복 된다는 사실이다. (48)
한자를 분해하거나 조립해서 거기에다 음양오행, 십간 십이지, 천문.지리와 같은 여러 가지 상징을 대입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풍수 도참이라고 한다. (51)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이 536권을 저술한 다산 정약용이다. 그런 다산이 인생 말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몰두했던 분야가 『주역』이었다. 다산과 같은 천재도 끝없는 지적 자극을 받았던 분야가 『주역』이었던 것이다. (57)
나의 수준에서 이해한 『주역』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음중양 양중음陰中陽 陽中陰’의 이치이다. 다른 하나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다. 전자는 ‘불행 가운데 행복이 있고, 행복 가운데 불행이 있다’는 말이고, 후자는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는 뜻이다. (57)
충남 논산에 가면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종택이 있다. 사계 집안은 충청도의 3대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충청도 3대 집안을 꼽을 때 흔히 사계 김장생 집안. 우암 송시열 집안, 명재 윤증 집안을 꼽는다. (58)
사계 집안의 적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집안의 제삿날이었다. 제삿날 사용하기 위해서 백정 집에 가서 돼지고기를 샀다고 한다. 그 돼지고기를 사서 부엌에 걸어 놓았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던 개가 부엌에 들어가 그 돼지고기를 덥석 뜯어 먹는 게 아닌가. 그리고나서 얼마 있다가 그 개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다가 죽는 장면을 집안 식구들이 목격하였다. 돼지고기가 상한 고기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계의 아버지는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백정 집에 다시 찾아가서 나머지 돼지고기를 모두 사 오도록 했다. 두세 마리 분량의 돼지고기를 다시 구입해서 어떻게 하였을까. 모조리 땅에 묻어 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묻었다고 한다. 만약 고기 집의 그 상한 고기를 동네 사람들이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키니까 땅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처사가 사계 집안 어른들의 처신이었다. 보통의 인품 같았으면 상한 돼지를 팔았던 백정을 잡아다가 사정없이 볼기를 때렸을 것이다. 백정 자신은 상한 고기인 줄 몰랐겠지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사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계의 아버지는 그 나머지 고기마저 돈을 지불하고 사 오도록 조치하였다. 물론 상한 돼지고기였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종용하게 처리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고기 장수 입장에서는 수지맞는 일이었을 것이다. 백정도 볼기를 맞지 않고 동네 사람들도 모두 사는 일 처리를 한 셈이다. 이러한 가풍에서 사계가 태어나 성장하였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58)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양진당과 충효당이 유명하다. 양진당은 겸암 류운용이 살았던 집이고, 충효당은 겸암의 동생인 서애 류성룡이 살았던 집이다. 겸암은 도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생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편에 서서 묵묵히 동생인 서애를 도왔다. (59)
1859년 여름에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배를 타고 하회마을로 건너오다가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갓집에 다녀오던 사람들 수십 명이 탄 배가 홍수로 인해서 불어난 물살 때문에 전복된 것이다. 사건 발생 시간은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가로등이나 플래시가 없던 시절이었다.
컴컴한 밤에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구해 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때 마침 강변에는 집을 짓기 위해서 쌓아 놓은 춘양목들이 있었다. 춘양목은 아주 고급 소나무 목재였는데, 집을 지으려면 몇 년 동안의 건조가 필요하다. 이 목재들을 서애의 10대 후손으로서, 당시 경상도사를 지냈던 석호 류도성이 마음먹고 집을 짓기 위해서 3년 전부터 애지중지 건조해 오던 것 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구명보트 대신으로 강물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물에 떠내려가던 사람들은 그 목재들을 붙잡았다. 나머지 목재들은 불을 붙여 화목으로 사용하였다. 캄캄한 주변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 대가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62)
술사의 이상적인 모델은 『초한지』의 장량이다. 장량은 『삼국지』의 제갈공명보다 한 단계 윗 급 인물이다. 무디스(?)의 술사들 평가서에 의하면 공명은 특급의 술사이고, 장량은 초특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명은 삼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장량은 유방을 도와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65)
싸움을 하지 않고 순리를 따라서 돈을 버는 팔자도 있다. ‘식신생재食神生財’사주이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식신’이란 베풀기 좋아하는 기질을 말한다. 식신생재란 내가 먼저 베풀어 놓으면 그것이 스리쿠션으로 작용하여 다시 재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되돌아올 때는 몇 배의 이자가 보태져서 돌아오기 마련이다. (66)
참고로 사주에 식신이 없는 사람은 밥값을 먼저 내지 않는다는 통계를 유념해야 한다. 우스갯소리로 식신이 없는 사주를 ‘염전 사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짜다는 말이다. 염전 사주하고 오래 놀다 보면 피곤하다. (67)
『논어』에서는 이념이 같은 동지를 ‘붕朋’이라고 표현했다. 달 월月자가 나란히 서 있다. 달 월 자는 추구하는 이데아를 상징한다. 서머셋 모옴의 유명한 소설 『달과 6펜스』를 보면 달은 추구하는 이데아르 상징하고, 6펜스는 과감하게 버려야 할 하찮은 것들이다. 6펜스는 버리고 달을 쫓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75)
조선 중기 이후 한국의 도사들 가운데서 유행하였던 『단학지남』이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정만불사색, 기만불사식, 신만불사수.”번역하면 ‘정(하단전)이 꽉 차면 섹스에 대한 생각이 나질 않고, 기(중단전)가 꽉 차면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고, 신(상단전)이 꽉 차면 잠자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뜻이다.
월남전 파병을 결정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잘못하면 젊은 청년들을 명분 없는 전쟁터로 내모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 국내의 여러 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의 그 딜레마를 상담해 주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태종의 창시자인 상월조사였다. (81)
필자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번갯불 급 혹은 해머급(?) 인물을 중국 공산당 서열 5위인 ‘쩡칭홍’으로 알고 있다. 그는 외관상으로는 장쩌민의 최측근이자 고위 관료로 알려져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주역』을 비롯한 역술에 달통한 인물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장쩌민의 장자방이다. (83)
필자가 만나 본 번갯불은 제산 박재현이다. 속칭 ‘박 도사’로 불리었던 인물이다. 1970~80년대 걸쳐 한국의 정계나 재계의 고위층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인물이다. (83)
영적인 전통이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는 나라가 한국이므로 그 파워에 있어서도 다른 나라에 밀리지 않는다. 이걸 수출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천태종의 상월조사, 한마음 선원의 대행 스님, 통일교의 문선명 목사는 숙명통을 얻은 일물들이다. (85)
함양은 영남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볼 때 경상좌도 쪽에서는 안동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고, 경상우도에서는 함양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 함양에서 배출된 팔선생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지금도 그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일두 정여창을 비롯하여, 구졸암 양희, 옥계 노진, 개암 강익, 남계 표연말, 뇌계 유호인, 청연 이후백, 춘당 박맹지 등이 그 팔선생이다. (91)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인류학의 거장 모리스 고들리에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장은 도올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93)
홍명희만 하더라도 충청도 괴산의 명문 사대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잘나가는 인생을 살았지만, 한일합방이 되면서 군수였던 아버지가 자결하자, 충격을 받고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중국을 거쳐 싱가포르, 미얀마, 말레이시아 일대에서 7년 동안이나 방랑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 주유천하의 경험이 불후의 병장인 『임꺽정』을 낳았다. 자고로 소설가와 예술가는 낭인 생활이 필수적이다. (99)
『성명규지』는 도가의 일급 비서이다. 중국 명대의 도사들이 단학을 수련할 때 참고하던 내단서로서, 유. 불. 선 3교 합일의 입장에서 성명쌍수性命雙修를 강조하고 있는 책이다. (107)
논리는 단련하는 방법은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감을 개발하는 방법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영감이란 다차원의 복잡성을 1차원의 단순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119)
악어는 밖을 잘 관찰할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상대방은 물속에 숨어 있는 악어를 관찰할 수 없다. (123)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 경계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고, 그 남강의 중간에는 흡사 솥단지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솥 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물속에 반쯤 가라 앉아 있는 형국인데,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는 물속에 솥단지의 다리처럼 세 발이 달려 있다고 한다. 솥도 구분이 있다. 다리가 없는 솥은 부釜라고 하고 다리가 있는 솥은‘정’이라 하는데, 솥 바위는 다리가 있기 때문에 ‘정’에 해당한다. (125)
한국 미륵 신앙의 발원지는 김제의 금산사이다. 금산사에는 10미터 크기의 미륵불을 모셔 놓은 미륵전이 있다. 그런데 이 미륵불의 발바닥 밑에는 쇠로 만든 솥이 놓여 있다. (128)
사흘 밤낮을 운공선사와 토론하면서 운명은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운곡선사 가르침의 핵심은 ‘지금 당장 생각과 습관을 바꿀 것’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할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가르침에 감명 받은 원료범은 이전까지 자신의 호가 학해學海였는데, 이 날 이후로 ‘평범을 끝 마친다’는 뜻에서 호를 ‘요범了凡’이라고 바꾸었다. 요범은 이후로 혼자 있을 때에도 항상 생각을 맑게 가지려고 노력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덕을 쌓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다. (134)
마음을 닦으면 꿈의 내용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기 시작하면 운명이 바뀌기 시작하는 조짐으로 해석된다. (134)
진짜 ‘선善’과 가짜 ‘선善’이 있다고 설명한다. 가선은 공덕이 아니다. 진선과 가선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남에게 이로운 것은 선이고,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악이다. (136)
팔자를 안다고 하더라도 고치지 못하는 이유가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팔자에 끌려 다니기 마련이다. (137)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불과 29세의 나이에 국립묘지 터를 잡았던 고 지창룍 선생. 포항제철 터도 그의 작품이다. (147)
문필봉은 붓끝의 모양처럼 생긴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흔히 삼각형처럼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문필봉이 바라보이는 동네에서 학자와 문필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동네 세 군데를 꼽는다면 경남 산청의 필봉산 주면과, 전북 임실의 삼계면, 경북 영양의 주실마을이다. (153)
Big 3가 있었다. 다른 분야는 다 Big 3가 있는데, 역술계라고 해서 어찌 Big 3가 없겠는가. 자강 이석영, 도계 박재완, 제산 박재현이 바로 그 세사람이다.(157)
자강은 『사주첩경』이라는 명저를 남기고 감으로써 인생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사주첩경』은 명리학계의 『동의보감』에 비유할 수 있다. (157)
필자는 호승지벽 好勝之癖이 있다.잘 고쳐지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져 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전에 부딪치면 지는 것을 싫어한다. 수모를 당하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한 때 때려야 속이 시원하다. 복수심이 강하다. (161)
전북 삼례에 가면 ‘비비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높은 산에 자리 잡은 정자가 아니라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자지만 그 전망 하나는 일품이다. 정자 앞으로는 전주천에서 삼천천으로, 다시 고산천으로 합수 된 물이 느긋하게 곡선을 그리면서 감아 돌고 있고, 그 너머로는 한국에서 가장 넓은 호남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167)
이들 형제의 사명감을 불러일으킨 인물은 할아버지인데, 그가 바로 유명한 야산 이달이다. 야산을 일제 암흑기와 해방과 6.25전쟁의 격변기를 살면서 『주역』이 무엇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 주고 간 인물이다. (185)
인민군 책임자는 야산이란 인물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를 광천 경찰서로 소환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에 “선생이 우리들보다 낫습니다. 제자들에 대해서는 손 하나 까딱 안하겠습니다. 선생께서도 기왕이면 공산주의를 공부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그러자 야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는 공식주의자 共食主義者입니다.”공산이라는 말은 부자의 재산을 강제로 뺏어서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강제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공식이라는 표현에는 한 솥단지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산보다는 공식이 훨씬 평화적이고 좋다는 말이었다. (189)
1950년대 중반 『주역』의 대가인 야산과 『금강경』의 대가인 신소천 선사가 만났다. 『금강경』은 한국 선불교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경전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번뇌가 상相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금강경』에서는 이 상을 떼어 내기만 하면 그 즉시 해탈한다고 설파한다. 50년대의 신소천을 바로 이 『금강경』의 본질을 확실하게 깨친 선승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가 남긴 『금강경 강의』는 오늘날에도 식자층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 (195)
야산의 제자였던 대산 김석진의 『스승의 길 주역의 길』을 보면 보다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198)
중국 당나라 때는 사람 보는 기준을 신身, 언言, 서書, 판判에서 찾았다. 얼굴 생김새, 스피치 능력, 문장력, 판단력이 그것이다. (205)
한 번 읽으면 외워 버리는 강인한 기억력과,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자존심, 이판과 사판을 자유자애로 넘나드는 신산神算의 소유자였던 야산 이달, 이처럼 신출귀몰한 인간의 태몽은 무엇이었을까. 야산의 넷째 아들인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봉황이 오동나무에 앉아 있는 태몽이었다고 한다. (208)
영남 사람들이 꼽는 4대 명당이 있다. 경주의 안동, 안동의 하회와 내앞, 봉화의 닭실이 그곳이다. (217)
이문열의 단편소설 『홍길동을 찾아서』를 보면 영남 사대부 집안의 산실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제로 되어있다. 이 단편소설을 보면 정기가 뭉쳐 있는 친정집 산실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를 낳으려는 딸과, 이를 막으려는 친정집 식구들 간의 긴장이 묘사되어 있다. (219)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도 터는 모두 지기가 뭉쳐 있는 곳들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기도발이 잘 받았던 곳으로 알려진 델포이 신전, 인도의 아잔타 석굴, 중국 화산파의 본거지인 화산, 한국의 예언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계룡산, 모세가 십계를 받았던 시내산, 미국 애리조나 주의 세도나는 공통적으로 땅의 지기가 강하게 뭉친 곳이다. (225)
피는 미세한 혈관을 통해서 뇌세포에까지 공급된다. 바위에서 분출되는 지자기가 뇌세포까지 공급되는 것이고, 지자기가 뇌세포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면 신비적 감응 현상이 발생한다.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