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磵譜 기록으로 본 石壕 南磵公과 자녀 생몰년 분석 글/ 나천수
구분 |
석호
선조신사10.1생-현종 경자10.11일졸
1581. 10.1- 1660년(향년80세졸) |
남간
선조갑신7.25일생-인조무인5.28일졸
1584.7.25-1638.5.28(향년55세) |
名 |
生卒 |
名 |
生卒 |
장자 |
佖 |
광해 을묘생-신미7.4졸
1615-1691(향년77세) |
俊 |
선조무신8.9생-정사12.23졸
1608-1677(향년70세) |
차자 |
佶 |
인조갑자4.8생-기사12.18졸
1624-1689(향년66세) |
休 |
광해 갑인생-숙종을해졸
1614-1695(향년82세) |
삼자 |
伈 |
정묘생-병오졸
1627-1666(향년40세) |
任 |
광해 무오생-戊辰졸
1618-1688(향년71세) |
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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倬 |
광해임술5.9생-숙종임신8.1졸
1622-1692(향년71세) |
오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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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 |
인조 계해생-갑자7.24졸
1623-1684(향년62세) |
손자 |
夏器 |
인조계해생-8.21졸
1623- |
遠器 |
인조정축9.21생-숙종정묘11.25졸
1637-1687(향년51세) |
손자 |
碩器 |
인조정해2.8생-4.3졸
1647- |
世器 |
인조신사7.21생-숙종기묘9.3졸
1641-1699(향년59세) |
손자 |
雲器 |
경인생-무인10.17졸
1650-1698(향년49세) |
重器 |
인조정해6.26생-숙종정유1.11졸
1647-1717(향년71세) |
손자 |
良器 |
효종병신11.16생-병신4.20졸
1656-1726(향년71세) |
端器 |
인조을축생-경자2.15졸
1625-1660(향년36세) |
손자 |
道器 |
현종임인10.20생-을사1.18졸
1662-1725(향년64세) |
鼎器 |
효종을미4.10생-경종갑진8.6졸
1655-1724(향년70세) |
손자 |
天器 |
숙종무오4.29생-
1678- |
汝器 |
인조임오4.11생-을사12.18졸
1642-1725(향년84세) |
□ 석호 남간의 아버지 都監公 德讓의 湖南節義錄 기록 분석
호남절의록은 곧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호남지역의 절의 인물을 기록한 것으로 저자와 간행 연도가 미상이다.
그런데 羅德讓의 소개란을 보면, 德讓의 손자가 俊과 休만 기록되었고 석호공의 자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석호공의 장자 佖이 1615년에 태어나고, 남간공의 둘째아들 休가 1614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면, 호남 절의록은 1614년경에 만들어진 것 같다.
임진란 때의 의병으로 참가한 본인의 공적은 제3자가 글을 쓸 수 있지만, 자녀의 현황은 작가가 쓸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은 분명 작가가 절의록에 기록되는 본인에게 자녀 현황을 받아서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왜 큰아들 석호공의 자녀들이 동생 남간공의 자녀들보다 늦게 둔 이유는 무엇일까.
□ 자녀를 둔 것으로 본 혼인 분석
석호공은 첫아들은 34살에 두었다.
결혼을 늦게 하였을까?
과거 조선조 시대에서는 남자의 혼례시기를 대체로 16세를 기준으로 하였던 것을 필자가 고문헌 번역을 통해 파악한 바 있다.
그리고 신랑 남자 16세에 신부는 나이가 신랑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性的 성숙이 오늘날보다 늦은 과거에는 잉태도 매우 늦었다.
남간공의 행록을 보면 남간은 19살에 함풍이씨와 결혼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형 석호행록에는 석호공의 혼사 기록이 없다.
남간은 결혼 5년만에 첫아들을 낳았다.
석호공의 결혼기록이 없으니 남간처럼 19살에 결혼하였다고 가정하면 장자를 15년만에 낳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석호행록을 보면 석호공은 딸을 4명 두었다.
그런데 석간보 족보기록을 보면 모두 아들 다음에 기록해 놓아 말년에 딸난 낳은 것으로 보여 지지만, 석간보의 다른 인물의 기록을 보아도 딸들은 아들 다음에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석호공은 딸부터 낳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결혼을 늦게 하였다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오늘날 같으면 만혼이 보통의 일이겠지만 과거에는 수명이 짧은 시절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시켜 후사를 보려는 의도가 많았다.
도감공 나덕양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큰아들 놓아두고 둘째 아들부터 결혼 시켰을 리 만무하다.
석호공의 장자 佖과 차자 佶의 나이 터울이 9살이다.
이것은 부부간의 잉태 능력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간공의 장자 俊과 차자 休의 나이 터울은 6살이고, 차자 休와 삼자 任의 나이 터울은 4살, 任과 사자 倬과의 나이 터울은 4살이니
대체로 4년 터울로 보여 져 남간공 부부의 잉태능력이 훨씬 좋아 보인다.
다만 석호공은 막둥이 삼자 伈을 46살에 낳았으니, 이 분야는 석호공이 동생 남간공보다 능력이 더 있다고(?) 보아진다.
□ 從行간 분석
석호공이 남간의 형님이지만, 석호공의 장자 佖은 남간공의 장자 俊과 차자 休보다 나이가 어리다.
더욱이 俊과 나이 터울이 7살이나 되니, 도감공 덕양의 입장에서 보면 손자의 대표가 俊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석호 남간공이 살아 있을 때는 석호공을 중심으로 집안을 이끌어 갔을 것이지만,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뒤에는 준이 집안을 이끄는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결혼하면 오늘날은 무조건 분가를 하여 독립하는데, 남간의 문집을 보면 대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아, 당시 가기의 터인 錦溪里가 모두 한 가족이 사는 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더욱 松島公의 가기의 터도 금계리였던 점을 보면 德讓, 德謙 형제간도 함께 살고 있었다고 보여 지니 얼마나 큰 대가족이 함께 살았는지 짐작이 간다.
1630년 금계리 가기의 터에 화재가 나자, 석호공은 석현마을로 집을 지어 나갔고, 남간공은 한수동 계곡물 가에 精舍를 지어 나갔다.
그 후 족보기록을 보면 송도공의 후손 天老가 금계리 터에 살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 후 어느 때에 나주나씨 직장공파가 금계리 터를 완전히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필자의 아버지가 필자가 아주 어렸을 때에 초등학교 입학 전에 금계리 터로 이사한 것으로 다시 가기의 터를 계승한 것이다.
□ 석현마을의 개척은 석호공이 하였다.
石峴이란 뜻은 돌고개란 뜻이다.
과거 나주 시내에서 석현마을로 가려면 마을 변두리에 고개마루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이 고개가 참으로 무서움증을 주는 고개이다.
지금은 새로운 국도를 개설하여 이 고갯마루 길은 소위 신작로 길에서 밀려난 것이다.
石壕란 號를 분석해 보면, 석현마을을 휘돌아가는 장성천 샛강이 영산강 본류와 합쳐지는 위치에 있어서 강변 풍경으로는 최고의 경치를 보여주고 있고, 강물이 보통 바위돌 있는데서 휘돌아 가는 법이니, 이러한 모습을 가진 동네의 높지막한 위치에 精舍를 지었기에 호를 石壕로 한 듯하다.
남간공은 나주읍성 서문 밖 경현동 입구로 가는 한수동 계곡물 가에 精舍를 지어 이를 溪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